책사러 가는 날은 나의 휴일
5남매 수재로 키운 포항 구룡포 농민 황보태조님
황보태조 글(꿩 새끼를 몰려 크는 아이들/올림)
나의 아이들이 행복하게 글자를 익힌 것은 아이들이나 나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전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독서하는 습관만은 꼭 붙여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살아 온 경험에 비추어 독서하는 습관이 붙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취학 전 교육에 조금 자신을 얻은 후부터 나는 독서 습관을 붙여 주기 위한 계획을 하나 둘 진행했다. 물론 독서하는 습관을 붙여 주기만 하면 우리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쑥쑥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서 습관이 몸에 배면 어느 분야를 공부하든 그것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공부를 잘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 아닌가. 어느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데 성적이 모자라서 할 수 없이 다른 분야를 선택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나는 아이들이 언젠가는 다들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이 계획을 추진했다.
처음 그저 ‘놀이’로 시작한 ‘그림 공부 놀이’도 나중 ‘심화 학습’에 필요한 끈기와 인내를 몸에 배게 하기 위한 ‘예비 훈련’으로 생각했다. 나 스스로 일을 늦게 배워 일생을 농사꾼으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며 내 아이들은 ‘반풍수’소리를 듣지 않게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심어 주려 애썼다. 그래서 ‘그림 공부 놀이’부터 계속 격려하며 도와 주었다. 그러다 차츰 책과 친하게 되도록 취학 전부터 예쁘고 튼튼한 책을 사다 주었다. 그림과 글자 모양도 예쁜 책이어야 했다. 문장도 잘 읽어 보고 아이들이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책을 고르려고 노력했다.
이곳 구룡포읍에서 포항까지는 약 24㎞ 거리로 옛날부터 60리가 좀 넘는 거리라고 했다.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포항 시내로 나갔다. 그날은 농사일을 하지 않고 종일 노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 책방 저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골라 주는 즐거움을 맛보는 날이었다<중략>
엄마 아빠의 대화와 텔레비전 연속극을 활용하다
나는 텔레비전 어린이 연속극에 나오는 책이면 꼭 사다 주었다. 이 방법은 아이들에게 독서 습관을 붙여 주는 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면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만화 연속극이 나오면 그 책을 재빨리 사다 주는 것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꼭 재미있을 만하면 끝나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했다. 아이들은 이 때문에 계속 그 프로그램을 보게 되는데 책을 사다 주면 그걸 안 보고는 못 배긴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물론 텔레비전 연속극의 내용이 책과 똑같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궁금증 때문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책을 좋아하지 않던 아이도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고, 몇 번 그런 식으로 책을 읽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홀렸다(?).
우리 부부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 읽어 둔 동화책이 우리 아이들의 독서 습관을 붙여 주는 데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저녁에 아이들과 같이 지낼 때 우리는 어릴 적 읽은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명작 동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홈즈’이야기도 했고 ‘삼국지’이야기도 했다.‘알프스 소녀’, ‘엄마 찾아 삼만리’, ‘집없는 천사’, ‘철가면’등 우리가 다 하는 귀에 익은 세계 명작들이지만 이 책 이야기는 아이들을 책으로 빠져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와 아내가 아이들에게 책 이야기를 해주면 얼마 안 가서 책장에 꽂힌 낡은 책이 셋째, 넷째, 다섯째 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첫째, 둘째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다 사 모아 두었기 때문에 우리 집 안방은 작은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 합해 봐야 200∼300권이나 될까?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만화책 한 권도 책꽂이에 없었다.
책을 방바닥에 깔아 두고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은 평생을 가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는 법을 강조한다. 그래서 장난감이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꼭 제자리에 놓아두라고 가르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 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나치게 깔끔한 것도 때로는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그러니 집 안을 약간 어지럽혀 놓는다고 벼락이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자녀의 독서 의욕까지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비교하여 늘 조금 지저분했다. 어쩌다 할머니가 아이들이 방을 너무 어지럽힌다고 나무라면 아이들 엄마는 곧 변명을 하고 나섰다. 아이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그러면 할머니도 더 이상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보다는 오히려 좌판에 놓여 있는 물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부감을 갖고 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아는 영리한 상인들은 옷을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놓지 않고 가판대에 마구 흩어 놓고 "골라 골라" 하면서 물건을 아주 싸게 파는 것처럼 호객을 한다.
우리는 그때그때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방바닥에 깔아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이 읽다가 그냥 방바닥에 둔 책을 치우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왜 책을 책꽂이에 바로 꽂아 두지 않고 방바닥에 버려 두었니?" 하는 꾸지람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버릇이 나빠져 온 방 안에 책이 깔려 있어 방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이리저리 책을 밀치고서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게 좋았다. 아무래도 책이 가까이 있으면 한 페이지라도 더 읽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책을 가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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