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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너(Alfred George Gardiner(1865-1946)
영국 에섹스(Essex)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언론에 투신하여 평생을 언론계에서 보낸 사람이다. <Essex County Chronicle> 등에서 편집을 맡았고, 1902년부터 17년동안 <Daily News>의 편집장으로 신문제작에 종사하였다. 나중에 신문인협회(The Institute of Journalists)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수필가로서 그의 필명은 ‘Alpha of the Plough’이며, 인물평으로 시작하여 본격적 수필을 신문잡지에 발표하여 많은 독자를 얻었다. 전기 작가로도 유명하다. 인물평을 모은 <예언자, 사제 그리고 왕 (Prophets, Priests and Kings, 1908)> 등을 비롯하여 <해변가의 조약돌(Pebbles on the Shore, 1927)>, <바람속의 잎사귀들, Leaves in the Wind, 1918)> 등 여러 권의 수필집이 있다.
그의 수필은 ‘깊은 교양과 건전한 사상에서 우러나온 유머와 기지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사상이나 교훈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에도 일화를 들어가며 재미있게 표현함으로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어서 함께 읽어 볼 두 편의 수필 <우산 도덕에 관하여(On Umbrella Morals)>와 <호주머니와 잡다한 것들(On Pockets and Things)>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요약과 감상>
무슨 글이건 무엇보다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란 가벼운 일상적 재미는 물론 깊은 지적 재미도 포함된다. 글을 읽어 보면 필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피천득 선생님의 시와 수필에서는 깔끔하고 쉽게 읽히면서도 즐겁게 교훈을 주는 도인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적지 않은 정치 및 사회평론을 읽어 보면 비록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분노가 행간에 가득하여 그 주장이 일면 타당하면서도 피곤한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어떤 수필은 그저 신변잡기를 천박하게 미사여구로 포장한 글도 많다. 가디너의 수필에서는 신변잡기이면서도 그 안에 청량제가 들어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잔잔한 미소와 강요하지 않는 깨달음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영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문화적 거리감도 거의 느끼지 못하겠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아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모두 같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산 도덕>에 관한 글은 우산, 책, 기차표 그리고 모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양심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심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곧잘 우산을 바꿔치기 하거나, 빌린 책을 돌려주는 것을 잘 잊는다. 자기가 산 기차표 보다 좋은 칸으로 슬쩍 옮겨가서 기차회사를 골탕 먹이곤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정직한 사람이고, 남들이 그의 정직성을 여간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마 그는 이발소 우산꽂이에서 손닿는대로 자기 것보다 좋은 남의 우산을 집어 들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채 한참동안 걸어간다. 그리고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아 이 일을 어쩌지. 남의 우산을 가져온 걸!’하고 제법 놀란 듯이 말한다. 정말 착오를 일으켰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아, 뭐 어때, 이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우산 주인은 벌써 가버렸겠지. 그리고 내 우산을 그를 위해 남겨 놓았잖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기 양심과 숨박꼭질을 한다. 남들한테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자신한테 들키는 것마저 거부한다. 전연 흠이 없는 사람들, 보통 속세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우산 도덕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어떤 유명한 목사는 철도 일등여객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의 호주머니에는 삼등차표가 들어 있었다.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몇 해 전에 어떤 유명한 성직자요 문학비평가가 죽은 후에 그의 장서가 팔리게 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주로 17세기 작가들에 관한 희귀본이 매우 많은 장서였다. 그 성직자는 바로 그 시대 작가에 대한 뛰어난 권위자였다. 그런데 그의 장서 중의 수많은 책들에 전국 여러 도서관의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물론 내 실크 우산을 집어 간 사람이 정말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다. 주인을 안다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돌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산 양심을 가진 사람의 허를 찌르는 방법은 우산에 이름을 표시하는 것이다. 남의 우산을 바꿔 가지고 온 사람은 우선 그 우산을 보고 은밀한 기쁨을 느낀다. 그러다가 우산 주인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나면 자기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신념이 고개를 들어서 올바르게 뒤처리를 하게 마련이다.“
<호주머니와 잡다한 것들>에서는 호주머니를 싫어하고, 하이힐을 신고 뒤뚱거리며, 등 뒤에 단추를 달아 남들의 도움없이 옷을 입거나 벗을 수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부인이 가게에 들어가 돈과 귀중품이 들어있는 손가방을 계산대위에 놓아두었는데, 잠시 후 돌아보니 누군가가 들고 가버려, 상점 주인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배심원들이 부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불리한 평결을 내렸다.
물론 남자 배심원만이 여자들만이 잘 아는 문제에 대해 평결을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남녀간의 문제를 전적으로 남자들의 손에만 결정을 맡긴다는 것은 매우 불공평하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관해서는 솔직히 나는 그 배심원들과 한편이다. 내가 배심원이었더라도 나는 물건을 잃어버린 책임을 그 여자에게 지우는 쪽에 단연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만일 여성들이 그들의 가방을 계산대에나 버스 좌석이나 혹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곳에나 두었다가 도둑맞았다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운다면 이 세상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호주머니 문제에 대해 왜 그렇게 고집불통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주 분별력이 있는 여자들도 호주머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뿐만 아니다. 웃옷과 조끼의 단추를 등 뒤에 달고서는 아침에 옷 입을 때나 저녁에 옷을 벗을 때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남자를 생각해 보라. 그런 남자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이 같은 유행의 엄청난 횡포에 굴복한다. 나는 여성들이 자기 몸에 다는 단추에서의 해방될 때까지는 투표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내 친구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한다.
또한 하이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이힐을 신고 뒤뚱뒤뚱 걸어가다가,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자 균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모습, 넘어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금살금 발을 떼어야 하고, 보기 흉한 줄타기 재주를 부리다가 동작의 우아함과 자유를 잃어버리는 여자의 모습보다 더 우스운 꼴이 있을까.
나는 전신이 호주머니 투성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마치 걸어다니는 우편함 같아서 우체부가 와서 갖가지 물건을 걷어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물론 열여섯개의 호주머니 모두가 장식용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려도 호주머니 속에서 잃는 것이다. 호주머니가 많고 보니 그 속에서 물건을 잃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물건들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자기 물건을 호주머니 속에서 잃는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잃은 물건은 결국 다시 나타난다. 우연히 엉뚱한 호주머니에 넣었던 잔돈을 찾았을 때의 그 놀라움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가방을 가게에서 잃어버린 그 여자는 가방속의 물건을 다시 찾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 호주머니 보급 운동이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여론을 수집하고 소책자를 발간하고 집회를 열고 시장이 의장이 되어, 호주머니를 많이 가지고 있고 호주머니 문제에 대해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을 참석시켜 전국에 개혁의 횃불을 올려야한다.“
가디너의 수필은 읽고 나서 미소를 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상생활의 지혜도 번득인다. 깊은 지적 쾌락을 주는 수필 못지않게 값진 수필이 아닐까. 특히 세상살이가 복잡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스티븐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가벼운 산보 길에 나서면서 손에 들고 가는 가디너의 수필집은, 노인들 지팡이 못지않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전문>
우산 도덕(On Umbrella Morals)
스트랜드(City of London의 거리이름)를 걸어가고 있을 때 소나기가 억세게 퍼부어댔지만, 나는 우산을 펴들지 않았다. 사실은 우산을 펼 수가 없었다. 우산대가 말을 듣지 않았고, 설사 그것이 제대로 작동을 했더라도, 펴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내 꼴이 폴스타프(셰익스피어 헨리4세에 나오는 유들유들하고 거짓말 잘하는 뚱뚱보 기사)가 누더기 옷을 입은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코벤트리(영국 Warwickshire 지방의 도시) 시가를 행진하던 모습보다 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면 그 우산은 내 우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제발 이 글을 읽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다른 사람의 우산이다. 그 사람은 내 비단 우산을 가지고 가고, 나는 그가 대신 남겨둔 무명 우산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가 내 우산을 쓰고 스트랜드를 활보하며, 자기의 꼴사나운 우산을 펴들고 흠뻑 비에 젖은 사람을 경멸의 눈으로 흘겨보는 것을 상상해 본다. 아마 자기의 형편없는 우산을 보았을 때 그 나쁜 친구는 회심의 미소를 띠고, 기분좋게 혼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 내가 자네를 감쪽같이 속였지. 나는 그 우산이 누구 것인지 알지. 전혀 펴지질 않을 거야. 접어놓으면 꼭 푸대같은 꼴이 되지. 그런데 이 우산은...”
그러나 나는 그 자에게 제멋대로 부당한 소리를 지껄이게 내 버려 두겠다. 그는 이를테면 우산 양심을 가진 사람들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당신은 잘 알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남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수표를 위조하는 일, 돈 서랍에서 남의 돈을 훔치는 따위의 일 - 그런 일은 꿈에도 하지 않을 위인이다. 설사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그러나 그는 곧잘 우산을 바꿔치기 하거나, 빌린 책을 돌려 주는 것을 잊거나, 3등 차표를 사서 1등 차간에 슬쩍 들어간다든가 해서 기차회사를 골탕먹이곤 한다. 사실, 그는 철저하게 정직한 사람이고 남들이 그의 정직성을 여간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 그는 이발소 우산꽂이에서 손닿는대로 남의 우산을 집어 들것이다. 그는 자기 것보다 나쁜 것을 집어 들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더 나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여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채 한참동안 걸어간다. 그리고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아 이 일을 어쩌지. 남의 우산을 가져온 걸 !”하고 제법 놀란 듯이 말한다. 정말 착오를 일으켰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아, 뭐 어때, 이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우산 주인은 벌써 가버렸겠지. 그리고 내 우산을 그를 위해 남겨 놓았잖아 !”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기 양심과 숨박꼭질을 한다. 남들한테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자신한테 들키는 것마저 거부한다. 전연 흠이 없는 사람들, 보통 속세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우산 도덕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어떤 유명한 목사는 철도 일등여객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의 호주머니에는 삼등차표가 들어 있었다.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몇 해 전에 어떤 유명한 성직자요 문학비평가가 죽은 후에 그의 장서가 팔리게 되었던 일을 기억한다. 주로 17세기 작가들에 관한 희귀본이 매우 많은 장서였다. 그 성직자는 바로 그 시대 작가에 대한 뛰어난 권위자였다. 그런데 그의 장서 중의 수많은 책들에 전국 여러 도서관의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책을 빌렸다가 반납할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 책들은, 법률조문에 판례들이 붙어 다니듯, 징표가 들어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독실한 종교인이었고 훌륭한 설교를 수없이 했다는 것을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이 점에 대해서 따지고 든다면, 누구나 정든 책과 결별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드는 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친구한테서 책을 빌려 달라는 청을 받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완벽한 규칙을 세운 바 있다. “미안하지만,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하자 그 친구가 물었다. “그 책을 안 가지고 계신가요?”라고. “아니오, 있어요. 그렇지만 남에게 절대로 책을 빌려주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아시잖아요, 책을 돌려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렇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자, 이리와 보세요. 저기 있는 게 모두 4천 권인데, 전부 다 빌려 온 책이지요.” 정말 책만은 절대로 빌려 줘서는 안된다. 책에 관해서는 절친한 친구라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잘 안다. ‘그 <질 블라스>(불란서의 Le Sage가 쓴 1715년 작품)는 어디갔지? <실비오 펠리코>(이탈리아 시인의 작품집)는? 그리고... 없어진 책 이름을 주워섬길 필요가 없지..... 그 친구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다음은 모자. 모자를 바꿔치기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직과 부정직의 구별이 알쏭달쏭해지는 양심의 경계선을 벗어난 짓이다. 남의 모자인지 모르고 낯선 모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언젠가 하원 흡연실에 내 실크 모자를 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모자를 찾았더니 감쪽같이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다른 모자가 남겨 있지도 않았다. 나는 맨머리로 국회의사당 뜰과 정원지역을 지나 모자를 사러가야만 했다. 자기 모자를 손에 들고 내 모자를 머리에 쓰고 간 신사가 누구일까하고 여러번 생각해 보았다. 그는 보수당원이었을까? 급진파였을까? 노동당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당원이 깜박 잊고서 실크 모자를 쓰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그의 이마에 불이 났을 것이다. 윌 크룩스(William Crooks: 영국노동당 지도자의 한사람)가 실크 모자를 쓴 꼴을 상상해 보라. 마치 캔터베리 대주교가 중절모를 쓰고 나선 꼴을 상상하는게 더 쉽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물론 내 실크 우산을 집어 간 사람이 정말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다. 주인을 안다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돌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지로 그런 일이 있었다. 예를 들겠다. 나도 우산을 바꿔 집은 일이 있다. 그것도 여러번. 고의적이 아니었기를 바라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실크 우산도 내 것은 아이었다. 여러 번 바꿔치기 하고 또 바꿔치기 당하고 해서, 때로는 손해를 보고 때로는 이득을 얻고 한 여러 개의 우산 중의 하나였다. 나는 어떤 부잣집에 초대를 받아 정치인들과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기념할 만한 우산 바꿔치기를 했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때는 여름이었고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서, 우산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집 우산 꽂이에서 금테에다, 금술이 달린, 어떤 정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우산이 한 개 발견된 것이다. 우리 집에는 그런 초호화판 우산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우산의 금빛 찬란한 위용앞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위압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위압을 느낀 것은 그 우산이 하도 휘황찬란해서였고, 공포를 느낀 것은 그것이 그 자리에 꽂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마치 대영제국을 훔치는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 우산 주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그의 정치노선을 존경한다는 것과, 그의 우산을 훔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 타고, 그 우산과 편지를 제일 가까운 속달우체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이일에 대해 매우 신사적이었고, 내 우산을 돌려주면서 모두가 자기 잘못이라고 사과까지 했다. 그의 편지 내용은 이랬다. “한 점잖은 신사가 내 머리에 모자를 얹어 주고, 두 번째 점잖은 신사가 코트를 입혀 주고, 세 번째 점잖은 신사가 내 손에 우산을 쥐여 주고, 네 번째 점잖은 신사가 나를 차에 태워주는 바람에 내가 무엇을 집어 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런 훌륭한 고용인들 앞에서 넋을 잃어서 그들이 내주는 것을 따지고 거절하고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런 경우 난국을 수습해 준 것은 우산에 새겨 놓은 주인의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우산 양심을 가진 사람의 허를 찌르는 방법은 바로 그것이다. 남의 우산을 바꿔 가지고 온 사람은 우선 그 우산을 보고 은밀한 기쁨을 느낀다. 그러다가 우산 주인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나면 자기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신념이 고개를 들어서 올바르게 뒤처리를 하게 마련이다. 오늘 경험을 거울삼아서, 나는 내 우산에다 내 이름을 새겨 놓아야 겠다. 그러나 집구석 한쪽에 놓여 있는 그 헐렁한 우산에다 이름을 새겨 놓겠다는 것은 아니다. 누가 저 우산을 가져가서 나를 해방시켜 준들 괘념치 않겠다. 누구든 그 우산은 가져가도 좋다.
호주머니와 잡다한 것들(On Pockets and Things)
여자들은 호주머니 대신에 가방을 좋아한다고 부레이 판사가 말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동의했을 것이다. 부레이 판사가 담당한 소송사건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부인이 가게에 들어가 돈과 귀중품이 들어있는 손가방을 놓아 두었는데, 잠시 후 집어 들려고 돌아보니 누군가가 훔쳐 갔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점 주인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배심원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부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불리한 평결을 내렸다.
물론 배심원은 모두 남자들이었고 그들 모두가 호주머니를 선호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추측컨대 그 배심원석에는 호주머니가 150개 이상 있었을 것이고 손가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사모님, 당신은 이것도 또한 남자가 판치는 세상의 치욕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그 배심원석에는 어째서 여성이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왜 고등법원에서 검시재판소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모든 법원의 결정이 남자들의 판단에 맡겨져야 합니까? 사모님,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도 분개하는 바입니다. 저는 배심원석을 빗질해서 싹 쓸어버렸으면 싶네요. 배심원의 반수는, 전쟁터의 참호가 너무 가혹하다면, 적어도 무밭에 보내서 잡초라도 뽑게하고, 그 자리를 여성으로 메우고 싶습니다. 여성들도 남자 못지 않게 사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적어도 그만한 시간은 낼 수 있으며, 그들의 견해가 정의를 구현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남자 배심원만이 온종일 앉아서 여자의 의상 재단에 관한 문제를 결정짓는데, 전문적인 의견을 제공해 줄 단 한사람의 여자도 배석하지 않았다면, 그 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는 남녀간의 문제를 전적으로 남자들의 손에만 맡기다니 이보다 더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사모님, 확실히 저는 일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당신 편을 드는 바입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관해서는 솔직히 나는 그 배심원들과 한편이다. 내가 배심원이었더라도 나는 물건을 잃어버린 책임을 그 여자에게 지우는 쪽에 단연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만일 여성들이 그들의 가방을 계산대에나 버스 좌석이나 혹은 생각나는대로 아무 곳에나 두었다가 도둑 맞았다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운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억지춘향으로 꾸미는 것이 될 것이고, 부주의와 심지어는 사기에다 장려금을 얹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더구나 호주머니를 달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게 된다. 재난을 자초하는 셈이기 때문에 일을 당했을 때 불평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성들이 이 호주머니 문제에 대해 왜 그렇게 고집불통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성들의 옷차림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상식을 의심케 하는 것이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니다. 옷차림의 관습을 두고서 남녀간의 지능을 판단하기로 한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단연코 남성의 우위를 선언할 것이다. 웃옷과 조끼의 단추를 등 뒤에 달고서는 아침에 옷 입을 때나 저녁에 옷을 벗을 때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남자나, 옷을 제자리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사방팔방에 후크같은 귀찮은 물건을 달아 놓는 남자를 생각해 보라. 그런 남자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이 같은 유행의 엄청난 횡포에 굴복하면서 그것이 마치 운명의 손길인 양 이야기 한다. 나는 여성들이 자기 몸에 다는 단추에서의 해방될 때까지는 투표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내 친구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한다.
또한 하이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이힐을 신고 뒤뚱뒤뚱 걸어가다가,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자 균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모습, 넘어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금살금 발을 떼어야 하고, 보기 흉한 줄타기 재주를 부리다가 동작의 우아함과 자유를 잃어버리는 여자의 모습보다 더 우스운 꼴이 있을까. 그러다가 두발이 안으로 접히자 그만 하이힐 구두가 뒤집어지는 날에는 - 맙소사, 나는 하이힐을 볼 때마다, 바보스러운 얼굴을 예상하게 되는데, 대개는 내 기대가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아주 분별력이 있는 여자들도 호주머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나는 조금 전에 알파 부인(필자의 필명이 Alpha of the Plough이므로 자기 부인을 가리킨다)을 돌아보고 - 나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 그녀가 완전한 정장을 했을 때 호주머니가 몇 개나 있는가 물었다. ‘하나도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호주머니가 없어진 지는 벌써 여러 해 전인데 요즘에 다시 유행하는 모양이예요. - 일종의 장식으로 말이예요.’ ‘장식용이라니 그럼 그 호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말인가?’ 내가 되물었다. ‘글쎄요, 손수건이나 넣고 다니면 모를까.’ ‘지갑은?’ ‘천만에 말씀이지요. 그랬다가는 훔쳐가라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5분후에 도둑맞지 않는다면 10분후에는 땅에 떨어뜨리고 말 거예요.’ 현실은 내 생각보다 더 망칙했다. 호주머니를 달지 않는 것만 해도 좋지 않은 것인데 무용지물로 달고 다닌다니. 생각해보라. 우리는 참전한지 3년반이나 된다(일차대전을 말함: 역자 주). 그런데 여자들은 장식용으로 호주머니를 달기 시작했다. 실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식용으로, 그것은 마치 무용지물의 단추를 또 한 줄 더 옷에다 달아 두는 격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떤가? 한편 알파부인은 (현실감을 주기 위해 그 녀의 이름을 대도 좋다는 완전한 허가를 받았다.) 안경, 열쇠, 오늘 아침에 온 편지, 그녀의 지갑, 가방, 사실상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찾느라 여러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그녀의 충실한 가족인 우리도 그 물건들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어두운 구석을 찾아보고, 소파나 의자의 틈새를 뒤져보고, 흐트러진 서랍을 다시 헤쳐보면, 전 주인가 전 달인가 감쪽같이 없어진 물건이지만 지금은 별로 필요없는 물건은 찾아내지만, 당장 필요한 바로 그 물건은 여간해서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 전신이 호주머니 투성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마치 걸어다니는 우편함 같아서 우체부가 와서 갖가지 물건을 걷어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모두 열여섯개의 호주머니가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장식용은 없고 모두가 시간표처럼 실용적이다. 편지를 넣는 호주머니가 있고, 시계, 열쇠, 손수건, 차표, 안경(원시용과 근시용 두벌), 잔돈과 지폐를 넣는 호주머니가 따로 있고, 일기장과 수첩 등을 넣는 호주머니가 따로 있다. 당신이 무슨 물건을 대든지 내게는 그것을 넣을 호주머니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볼일을 볼 수 없다. 사모님, 어느 하나라도 말입니다. ‘저는 물건을 잃어버린 일이 없느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려도 호주머니 속에서 잃는 것입니다. 호주머니가 많고 보니 그 속에서 물건을 잃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건들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 물건을 호주머니 속에서 잃는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잃은 물건을 결국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가게 계산대에 올려놓았던 그 부인의 가방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찾아내는 뜻밖의 물건들을 상상해보라. 미처 답장을 보내지 않은 편지, 지불하지 않은 청구서, 우연히 엉뚱한 호주머니에 넣었던 잔돈 - 이런 것들을 찾았을 때의 그 놀라움을 생각해 보라.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을 때 가끔씩 호주머니를 뒤진다. 밤색 양복, 회색 양복, 사지 양복(serge suit), 그리고 일요일에 입는 제일 좋은 양복의 호주머니 전부를 뒤지면, 모두 50개는 될 것인데, 호주머니마다 갖가지 물건으로 가득차 있다. 내가 지키지 않았던 약속의 유령들, 이행하지 않았던 의무, 소홀히 하였던 친구들,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던 파이프, 기적적으로 피우지 않은 담배 반 갑, 그리고 닥치는대로 무질서하게 꾸려온 생활 때문에 야기된 갖가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다. 나는 옥스퍼드가에 있는 모든 손가방을 전부 준대도 이런 비장품들을 내놓지 않겠다. 나는 신비로 가득차 있는 책인 셈이다. 나의 온몸은 비밀로 잔뜩 부풀어있다. 나는 언제든지 생각날 때 단지 호주머니만 뒤지면 내 자신을 놀라게 할 수 있다. 내가 호주머니 뒤지기를 피하는 날이면 나는 내 몸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주머니에서 발견할지도 모를 물건들과 대면할 만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럴 때면 내가 원기를 회복할 때까지 그대로 둔다. 사모님, 당신처럼 손가방 속에 넣었다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잠시 잊어버리는 것, 편안하게 잊는 것입니다. 내 호주머니라는 개집에서 잠든 개를 항상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저 곤히 잠자게 놓아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살이에 골칫거리가 모자라서 제 호주머니 속까지 찾아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선례가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자기에게 온 편지를 2주일동안 내버려두면 저절로 답장이 가서 따로 답장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이점에 대해서 헨리 홀리데이씨(Henry Holiday: 영국의 화가)가 회고록에 기록해 놓은 것처럼, 글래드소톤씨의 주치의 앤드루 클라크 경의 습관을 되새겨 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어느날 만찬 때에 앤드루 경이 샴페인을 마시는 것을 본 사람이, 환자에게는 그렇게 엄격히 금하면서, 어째서 자신은 마음껏 마시고 있느냐고 물었다. 앤드루 경은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러나 당신은 제 사정을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돌아가면 답장해야 할 편지가 50통내지 60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페인을 마시면 선생님이 답장을 쓰시는데 도움이 되나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러나 이걸 마시면 회답을 하고 안하고 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심리상태가 되는 거지요.” 이렇게 앤트루 경이 대답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모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이다. 나같은 사람은 분별을 배우지 못한 채 벌써 오래 전에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할 나이에 이르렀고, 아주 저명한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다같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한다면, 호주머니를 붙이는 습관이 현명한지는 그것을 남용하는 것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분명히 편리하고 안전한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나는 어느 정력적인 여성이 나서서, 호주머니 없는 상태로부터 전 여성을 구출하기 위한 개혁운동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 호주머니 보급회 운동(S.P.P.A.W.: A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Pockets Among Women)이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전후 큰 재건사업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론을 수집하고 소책자를 발간하고 집회를 열고 시장이 의장이 되어, 호주머니를 많이 가지고 있고 호주머니 문제에 대해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을 참석시켜 전국에 개혁의 횃불을 올려야한다. 여성은 이미 폭군인 남성들로부터 투표권을 쟁취하였다. 이제 폭군적인 의상 제작자로부터 호주머니를 쟁취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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