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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랴
호숫가의 부활절 메시지
(요21:19-22)
시작하는 말씀
옛 소비에트 대 백과사전에 “부활”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부활교리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전설이나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지금도 지구상에는 예수의 부활, 인간의 부활을 믿는 야만인들이 있다”고 말한 기록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이 야만인인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야만인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지만 무신론자들의 야만적인 주장임이 분명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 부활교리는 교리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활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의 현재적 의미는 ➀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이십다(행26:2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11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➁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행4:12). ➂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과 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➃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미래적 의미는 ? ➀부활은 죽은 자들의 소망입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 ➁육체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4). ➂최후 승리(victory)를 고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7-58). 부활은 최후 승리를 약속합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 11번이나 (➀막달라 마리아에게 막16:9,요20:18 ➁여자들에게 마28:9, 눅24:10, ➂베드로에게 눅24:34, 고전15:5, ➃두 제자에게 막16:12, 눅24:13-35, ➄10사도들에게 눅24:39, 요20:20, ➅11사도들에게 요20:26 ➆7사도들에게 요21:1 11사도들에게(두 번째) 마28:16, 막16:14 ➇500형제들에게 고전15:6 ⑩야고보에게 고전15:7 ⑪11사도들에게 막16:19, 눅24:50, 행1:3) 나타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6번이나 ➀스데반에게 행7:55, ➁바울에게 행9:5, 22:8, 26:15, 고전15:8, ➂바울에게 두 번째 행18:9 ➃바울에게 세 번째 행22:17-18 ➄바울에게 네 번째 행23:11 ➅사도요한에게 계1:13)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 11번이나, 승천하신 후 6번이나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 우리의 현재 생활에 가장 요긴 한 것 몇 가지 말씀만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부활을 확신하라.
우리 주님은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으면 ➀뽕나무뿌리같이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곧 뽑혀 해결될(순종) 것이요(눅17:6) ➁태산같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라도 옮겨 질 것이며(마마17:20) ➂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현대어성경에는 “‘믿음’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예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도 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라고 쉽게 번역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11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 중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의 열쇠(key)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 교양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룟유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정치가들이 선거철만 되면 교회를 찾는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마는 취미, 교양의 목적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고, 못자욱과 창자욱을 만져보고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부활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자로 출발하여 믿는 자로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너는 네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믿는 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복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부활 신앙고백은 복중의 복(The Blessing of blessings)입니다. 최고의 복(The Best Blessing)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19-22)고 말했습니다. 금년 부활절엔 꼭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는 부활신앙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라.
부활의 주님은 부활주일 저녁에 10제자에게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애급으로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을 죄악된 세상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가거라! 그러나 조심하여라.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너희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어린 양들 같다.”고 번역했습니다.
어린 양이 홀로 이리 떼를 찾아가면 노리갯감이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맹수가 되어 찾아가면 이리떼들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눌한 제자들을 그냥 보낸다면 벗은 몸으로 도망가거나 모닥불 앞에서 여종들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음을 부활의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어린 양같은 제자들을 이리(죄인) 떼들에게 보내는데 기도온의 용사들 같이 중무장 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고 권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이 되니라”(창2:7)는 말씀대로 흙덩이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으실 때 흙덩이가 생령(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생령이 범죄하고 타락하여 노아시대엔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들 가운데서도 경건한 소수(부분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수종들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을(10제자)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숨(호흡)은 성령이 그로부터 오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 모인 제자들은 다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을 받는 “예비적 단계”입니다. 그것이 오순절의 최종적인 성령강림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오순절의 성령의 권능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행1:8).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보편적 단계, 결정적 단계, 절정의 단계”에 이르러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의 복음이 온 세계에, 온 민족의 언어 속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고 명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라.
베드로는 3년 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면서 신앙을 얻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마16:16)을 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을 반대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급기야는 만찬석상에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다시 주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다짐했습니다.
주님은 다가올 환난과 시험에 대한 경고를 하시고 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3번이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거기서 우리주님은 제자들에게 ➀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 ➁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 ➂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26:45)고 3번이나 책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대제사장의 종이 앞장선 체포조가 도착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칼춤을 추었습니다. 즉시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당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도 있지만 칼싸움의 역사가 훨씬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실교회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이윽고 가야바의 공관에서 베드로는 여종들과 사람들에게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쌓아 올린 신앙의 탑을 약 3시간 만에 바벨탑같이 허망하게 헐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곤두박질치면서 대성통곡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깨달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결과의 원인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3번이나 질문하신 것은 완벽한 사랑의 고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3번이나 똑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앙고백만으론 부족합니다. 디베랴 호숫가의 사랑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랑고백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➀내 어린 양(the lambs of me)을 먹이라(요21:15). 젖 먹는 어린양을 어미가 돌보듯이 주님의 어린 양들을 잘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양들을 기르는 것은 제자들과 교회의 첫 사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중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➁내 어린 양(the little sheep of me)을 치라(요21:16). 젖 떨어진 어린양은 아직도 동서남북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적과 동료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독초와 신선초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양치기가 신경을 써야할 어린 양들입니다. 제자들과 교회는 이런 주님의 어린 양들을 잘 돌보고, 가르치고, 인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Shepherd”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➂내 양을(the young sheep of me) 먹이라(요21:17). 주님은 사명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시고 계십니다. 어리고 젊은 주님의 양들의 신앙을 다져 나가 그들이 완벽한 구원, 부활신앙에 이르게 지도하고, 가르치고, 지배하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는 젖(milk)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solid food)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고 말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만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과 구원은 받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고백이 있어야 생명을 바치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보거나, 다른 사람 상관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21:21)라고 여쭸습니다. 즉시 주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든 너는 나를 따르라”
끝맺는 말씀
나폴레옹이 샌트헤르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어떤 기자를 만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했던 자신은 실패자가 되었고, 십자가에 매달린 나사렛 예수는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자가 되었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계속됩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도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증인들의 부활과 구원의 메시지는 세계 곳곳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행13:49).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경꾼이 아니셨듯이 제자들(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구경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들 안에 성령으로 살아계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 안에서도 그렇게 하심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