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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충만인 교회
4. 교회의 책임과 생활
(1) 하나를 지키고 실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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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절~16절>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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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부터 6장까지는 ‘교회의 책임과 생활’에 관한 말씀이다. 첫 번째로 하나를 지키고 실행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 드린다.
‘하나’라는 말은 숫자적으로는 ‘한 개’라는 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유일하다’는 뜻이다. 이 유일한 것이 무엇인가? 이 유일한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유일한 것은 한 인격이다.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영이신 한 인격이다. 이 인격이 유일한 인격이다.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를 지키고 실행하는 일이다. 이 인격이 곧 사회가 되니까 한 인격, 한 사회, 유일한 인격, 유일한 사회가 알고 보면 인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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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모두 통일을 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을 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영웅호걸들이 나오면 어떻게 세계를 통일시킬까 하여 많은 전쟁들을 해왔다. 그런데 왜 안 되었는가? 유일한 인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일한 사회가 될 수 없다. 다 생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방언이 다르고 다 다르니까 어떻게 한 사회가 되겠는가? 흩어졌다 모여졌다 흩어졌다 모여졌다를 반복해왔다. 지금 이제 각 나라의 지형이 결정된 상태이지만 또 앞으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또 어떻게 지도가 바꾸어질지 모른다. 왜냐하면 항상 하나의 사회를 바라고 있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가 되려면 한 인격만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의 사회가 된다. 민족으로도 안 되고 이념으로도 안 되고 정치력으로도 안 되고 해볼 것을 다 해보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았는데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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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소망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유일한 인격으로 인한 유일한 사회인데 이것만이 인류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남겨져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못한다. 이것으로 되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 인격은 한 사회를 이룬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다 생각이 다르고 모양이 다른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교회가 하나가 되겠는가? 유일한 인격 때문에 하나가 된다. 만일 여기에 유일한 인격이 없다면 도저히 하나 될 수가 없다. 세상처럼 정치적으로 하나 되거나 이념으로 교리로 하나를 만들거나 실행으로 하나를 만드는 식이다. 종교마다 각기 독특한 특색을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같은 교리, 같은 전통, 같은 의식,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로 결속시켜준다. 모슬렘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다섯 번씩 엎드려 기도를 한다. 우리가 보면 유치한 일 같지만 그것은 모슬렘 전체를 결속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한 인격이 아닌 한 한 사회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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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소망은 한 인격의 한 사회이다. 이것을 힘써 지키라 그리고 실행하라고 했다. 오늘 우리도 교회를 통해 이 한 인격과 한 사회를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다. 교회는 한 인격과 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다. 좋은 일도 많이 있고 교회들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은 다른 사회에도 다른 종교에도 많이 있다. 옛날에는 기독교와 불교가 형태면에서 많이 달랐다. 지금은 불교에서도 기독교와 똑같이 한다. 주일학교도 하고 찬불가도 있다. 다 할 수 있다. 지금 수능시험이 다음 주인데 고3학생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교회는 교회대로 붙여놓았고 절은 절대로 붙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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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모두 하나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하지만 유일한 인격이 아닌 이상은 하나가 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래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아담이 끝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이 한 인격, 그 영은 분열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서 다 청산한 것이다. 바벨탑에 와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완전하게 분열되었다. 아담은 무슨 방법으로도 건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바벨탑이다. 그것을 계속 반복한 것이다. 바벨론이 되었다가 페르시아가 되었다가 희랍이 되었다가 로마가 되었다가 계속 통일 제국을 성취하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또 계속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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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유일한 이 인격만 남았다. 죽고 다시 산 이 인격만 남았다. 아담 안에서는 영 불가능하다. 이미 창세기 11장에서 선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반복해왔다. 그것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통일을 이루려고 생각하니까. 근래에 와서 우리 시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세계 공산화, 국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까지 국제 공산주의는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 분열이 되었다. 왜냐하면 모택동이 나오게 되니까. 지금은 다 해산되고 없어져버렸지만 최근까지도 그런 일이 계속 있었다. 틀림없이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까 창세기 11장의 사실을 믿지 않으니까 또 하고 또 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종교는 종교대로 통일을 이루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왔다. 모슬렘이 세계를 지배하냐 캐톨릭이 지배하냐를 갖고 싸운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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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하나를 위해 싸우겠지만 유일한 인격이 없이는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담의 요소 자체가 분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담으로서는 안 되고 죽고 다시 산 그 한 인격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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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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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키라. “그 영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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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과정을 거친 그 영(그리스도)의 하나됨은 교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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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은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다. 과정을 거쳤다는 말은 이미 창세기 3장으로부터 11장까지를 다 청산했다는 말이다. 아담을 청산했다는 말은 창세기 3장에 아담이 범죄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벨탑에서 완전히 분산된 흩어져버린 거기까지 있는 모든 인간을 다 청산했다는 말이다. 그 인간성 자체를 청산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새로 나온 것이 그 영이다. 이것에 대한 예표로서 바벨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다. 거기서 제사장을 선택한 것이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거기서 사도들이 선택된 것이고, 거기서 교회가 선택된 것이다. 이 맥락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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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영의 하나됨을 위해서 지금까지 아브라함도 부름 받았고 이스라엘도 선택받은 것이다. 과정을 거친 그 영은 최종적인 인격이다. 인격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전등은 여러 개다. 하지만 전등 안에 흐르는 것은 전기라는 유일한 것이 흐르고 있다. 색깔이 달라도 상관없고 모양이 달라도 상관없다. 전기만 흐르면 언제든지 전등은 발광체 역할을 한다. 만약 전기가 끊어지면 아무리 등이 똑같아도 안 된다. 똑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전구를 만들어내었다고 하더라도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양이 다 달라도 전기만 흐른다면 다 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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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도 모양은 달라도 만일 과정을 거친 그 영이 흐르기만 한다면 다 하나이다. 그것이 없으면 문제가 된다. 전등은 다르지만 전기는 하나다. 이 하나를 힘써 지키라는 것이다. 등도 중요하지만 등을 등 되게 하는 전기가 중요하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바깥에 있는 전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전선을 끊어버리면 집안에 몇 100만 원짜리 샹들리에를 갖다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 하나를 힘써 지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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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은 바로 교회를 하나 되게 한다. 죽고 다시 난 그 영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한다. 그것 이외 다른 것이 들어오면 분열된다. 죽고 다시 난 그것이 아니면 다 분열시킨다. 분열시키는 것은 전부 죽지 않은 것이 분열시킨다. 죽고 다시 난 것은 분열시킬 수가 없다. 그런데 분열시키는 것은 죽지 않아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아담이니까. 그래서 아담이 죽어야 될 이유가 있다. 그 영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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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지체를 하나 되게 한다. 손 발 눈 코 입이 있는데 이 지체들이 어떻게 하나 되는가? 우리 몸 안에 있는 생명이 그것을 하나 되게 한다. 서로 의논해서 그런가? 서로 회의를 해서 그런가? 서로 아무런 대화도 없다. 그렇지만 생명이 하나이니까 발이 뜨거우면 손이 얼른 가서 잡고 왼손이 뜨거우면 오른손이 가서 막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생명이 하나이니까. 생명은 지체를 하나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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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다시 산 이 인격은 인생을 하나 되게 한다. 이것만이 하나 되게 할 수 있다. 다른 것으로는 전부 실패했고 그냥 실패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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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그 영의 하나 되게 함을 지켜야 한다. 교회는 다른 조건이 없다. 오직 죽고 다시 난 그 영만이 유일한 조건이다. 교파들마다 교리를 가지고 전통을 가지고 하나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교리도 아니고 전통도 아니고 습관도 아니다. 참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죽고 다시 난 과정을 거친 그 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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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나됨의 근거는 우리의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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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의 근거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왜 우리는 하나인가? 몸이 하나이고 영이 하나이고 소망이 하나이고 주님이 하나이고 믿음이 하나이고 침례가 하나이고 하나님이 하나이고 아버지가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우리는 다 하나다. 모든 사람 위에, 모든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바로 그 영은 이 모든 것의 하나가 되는 근거가 된다. 몸을 어떻게 하나되게 하는가? 어떻게 영이 하나되게 하는가? 어떻게 소망을 하나되게 하는가? 어떻게 주를 한 주가 되게 하는가? 어떻게 믿음을 한 믿음이 되게 하는가? 어떻게 한 침례가 되게 하는가? 그것은 전부 다 죽고 다시 난 그 영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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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하나됨을 위해 부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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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왜 부름 받았는가? 이 하나를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한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오.”라고 되어있다. 부르심의 목적에 맞도록 행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은 교인으로서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은 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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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심의 목적은 그 영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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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나됨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생활이다.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영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그 영은 무엇인가? 몸의 생명이다. 오늘 교회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 영이다. 참된 교회 생활은 몸을 위한 것인데 몸을 위하려면 그 영을 지켜야 된다. 죽고 다시 난 그 영을 지켜야 몸이 하나가 되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가 되지 않는다. 교리를 만들면 또 교리를 만든다. 지식을 만들면 또 지식을 만든다. 전통을 만들면 또 누가 다른 전통을 만든다. 이런 것을 만들면 만들수록 다 분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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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분열하게 하고 그 영은 하나되게 한다. 어디서든지 지식이 들어오면 분열되게 된다. 세상에서도 각자 아는 것 때문에 분열되지만 교회는 특별히 지식 때문에 분열된다. 그래서 지식의 나무라고 한다. 생명의 나무냐 지식의 나무냐? 지식은 결국 교리다. 어떤 사람이 분명히 은혜를 받았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그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식으로 흡수한다. 분명히 처음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는데, 다음 사람들은 지식이 되는 것이다.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지방교회에서는 ‘오 주 예수여!’를 잘 부른다. 교리화되다싶이 했다. 교리라고 하지는 않지만 실행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분명히 어떤 분이 처음에 그것으로 은혜를 받은 것은 틀림없다.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오 주 예수여!’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도 너무 감격하면 ‘오 주님!’이라고 할 것이다. ‘오 주님’이라고 하나 ‘오 주예수여!’라고 하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고 분명히 그렇게 해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런 감격이 없이 그 사실을 배우면 교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지식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남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가르치는 문제가 아니다. 본인은 자기가 감격해서 ‘오 주여!’를 했다.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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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예가 바울은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나를 아신바 되었다고 했다. 왜 그랬는가? 자기는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는 갑자기 빛을 만났다. 자기 생각과 너무나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바울이 볼 때 나는 이렇게 쫓아다녔지만 나보다 앞서신 이가 나를 먼저 알고 있었구나. 내가 모태에 있기 전에 나를 아신바가 되었구나. 이렇게 고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는가? 예정론을 만들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정리를 하다 보니까 예정론이 되었다. 이중 예정론, 구원 받을 사람과 멸망 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졌다. 내가 대구에 왔을 때 학생들에게 제일 많이 받았던 질문이 예정론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장로교가 대단히 센 곳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마다 예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물론 학생들도 애매하니까 확실치 못하니까 물어보았을 것이다. 구원 받을 사람을 따로 정해놓았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다. 멸망 받을 사람을 따로 정해놓았다면 가서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말해보았자 멸망 받을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디에 써놓은 것이 아니니까 어차피 알아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구원 받을 사람이나 멸망 받을 사람이 아무리 정해져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구원 받을 사람인지 멸망 받을 사람인지 모르지 않느냐? 어차피 전도를 하면 다 해야 될 덴데 그 이론을 알면 무엇 하겠느냐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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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떤 한 개인의 경험이 그 사람의 경험이 될 때는 괜찮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갈 때는 지식이 되기가 쉽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주장이 생겨나게 된다. 지식은 반드시 주장을 하게 된다. 경험은 감격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은혜를 입지만 지식은 주장을 하게 된다. 우리 교회도 초창기에 주장을 많이 했다. 주장을 하면 분당이 생긴다. 주장을 하게 되면 어떤 주장을 따라 가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또 다른 주장을 하면 그쪽을 따라 가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주장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염라대왕도 생겼다. 나오기만 나오면 심판을 하니까. 참 재미있는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 주장파도 있고 염라대왕파도 있었다. 이것은 다 지식 때문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 은혜를 입었으면 자기가 넘쳐나서 은혜가 넘쳐날 일이지 주장을 할 일이 아니다. 주장은 지식이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지식이다. 어떤 교리를 세워놓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식이다. 어떤 전통을 세워놓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역시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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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사람은 주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자기 은혜를 내놓기가 바쁜데 무엇을 주장하겠는가? 그리고 은혜란 각각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획일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은혜를 받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각자가 받은 은혜가 다르니까 획일화가 안 된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다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렇게 안 된다. 아마 방언도 처음에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방언이 나왔을 것 같다. 방언을 해서 이것이 어떻게 하다보니까 지식이 되었다. 다음에는 주장을 하게 된다. 방언을 받지 아니하면 침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방언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이 딱 갈라진다. 방언 받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 침례를 못 받은 사람이라는 지식으로 규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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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한테는 무엇이 오든지 간에 이상하게 지식화된다. 왜? 우리가 지식의 나무를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 구조가 그렇게 생겼다. 무엇이든 오면 지식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사람이 갖고 있다. 그것 때문에 물론 문명이 발전했지만 절대로 교회는 안 된다. 세상에는 필요하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지식으로 잘 정리하는 사람이다. 검은 것과 흰 것을 구별하는 사람이어야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색깔이 일곱 가지인데 어떤 아이는 아무리 보아도 다섯 가지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미술 공부를 못한다. 분명하게 일곱 가지여야 된다. 머리가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구별하는 능력이다. 분별하는 능력이다.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지금 시험을 보고 있다.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리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막걸리인지 소주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가 잘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머리로 하는 것보다도 몸으로 때우는 것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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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세상에서는 필요하다. 세상 일 하는 데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일을 시켜놓으면 된장을 만들어놓으라고 하면 고추장을 만들어놓기 때문에 안 된다. 그런데 교회는 지식이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명의 곳이기 때문에 지식이 들어오면 파괴가 된다. 지식이 들어오면 분열이 된다.
부르심의 목적은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다. 그 영은 몸의 생명이다. 이것은 죽고 산 것이니까 지식이 아니다. 아무리 정리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 잘 정리해보았자 그렇다고 내가 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그 영이 충만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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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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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겸허해야 되고 온유해야 되고 오래 참아야 되고 사랑 안에서 서로 짊어져야 하고 화평의 매는 줄로 띠를 만들어서 그것으로써 그 영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는 것이다. 겸허하려면 어떻게 겸허해야 되겠는가? 죽은 사람만 겸허할 수 있다. 사람은 겸허할 수가 없다. 죽지 않으면 겸허가 안 된다. 온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죽지 않고는 온유할 수가 없다. 오래 참으려면 죽은 사람만 오래 참을 수 있지 산 사람은 오래 참지 못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 짐을 짊어지려면 자기가 없어야 된다. 이것들이 화평의 매는 띠가 된다. 바닷가에 가면 그물을 연결해놓은 고리가 있다. 그물을 바다에 넣어놓아도 위에 있는 띠 때문에 흩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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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의 매는 띠! 이런 것으로 띠가 되어서 그 영의 하나됨을 지킨다. 우리는 왜 화평해야 되는가? 왜 온유해야 되는가? 왜 겸허해야 되는가? 왜 오래 참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건축을 위한 삶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겸허할 필요가 없다. 자기를 위해서는 온유할 필요가 없는데 건축을 위해서 겸허하고, 건축을 위해서 온유하다. 연합전선으로 같이 가려면 나는 빨리 갈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못 가면 내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그래야 같이 갈 수 있지 나만 힘 좋다고 튕겨나가 버리면 전선이 무너져버린다. 정말로 전선을 위한 사람은 정말로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속도가 빠를지라도 그것을 조절해야 된다. 옆에 사람이 같이 가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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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삶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할 때도 바로 이것이 무너지면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서 자기 잘났다고 올라가버리면 한쪽이 비워져서 적이 그쪽으로 들어온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화평의 매는 띠를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혹시 잘난 것이 있더라도 겸허해야 되고 좀 강퍅한 것이 있더라도 온유해야 되고 못 참을 일이 있더라도 오래 참아야 된다. 내 것은 내가 먹고 네 것은 네 먹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서로 사랑 안에서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고 이렇게 남에게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건축이 된다. 나만 잘 살겠다고 하면 건축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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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 영의 하나됨을 실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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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의 하나됨을 실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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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은사들을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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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은사들을 주셨다. 이 은사들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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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됨을 실행하기 위해 은사들을 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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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말인데 하나됨을 실행하기 위해서 은사들을 주셨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은사들이 있는데 그 은사들이 자기 잘나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됨을 실행하려고 주신 것이다. 보통 은사라고 말할 때 병고치는 은사나 방언하는 은사를 생각한다. 여기는 그런 은사가 없고 전부 섬기고 봉사하는 은사다. 왜 주었는가? 그 영의 하나됨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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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위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가 된 이들을 이끌어 가셨다가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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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된 자들을 잡아다가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말은 포로를 잡아다가 하늘까지 끌고 올라갔다는 말이다. 하늘 구경을 시킨 다음에 내려올 때는 우리에게 선물이 된다는 말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포로가 되었더니 끌고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다. 올라가보니까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러니까 내려올 때는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내려온다. 영 다른 세계를 보고 와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포로들을 잡아다가 선물로 주었다는 말은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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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는 우리가 포로가 되지 않으면 은사들이 될 수 없다. 포로가 되지 않고는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가 없다. 혼자 힘으로 하늘에 오를 수가 없다. 누구도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하늘에 오를 자가 없다. 결국 우리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야 가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살던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와이를 가겠는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간다. 사탕수수 밭에 일꾼이 필요하니까 사람들을 사러 왔다. 이 사람들을 사다가 사탕수수 밭의 일꾼으로 써먹었다. 그것이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갈 때는 돈 번다고 갔는데 막상 먼 바다를 지나서 가보니까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래서 거기서 완전히 노예처럼 종살이를 했다. 사실은 돈 번다고 갔지만 포로로 잡혀간 셈이다. 그 2세 3세 4세들이 하와이에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은 이제 미국 사람들이 돼버렸다. 내가 아는 사람도 성은 김 씨인데 자기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면 한국 사람인데 본인은 미국 사람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미국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그 사람은 한국말을 하지 않고 말끝마다 미국말만 한다. 완전히 미국 사람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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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예수님 계신 데 갈 수가 없다. 내 생각으로 십자가에 갈 수가 없다. 포로로 끌려가야 가는 것이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어떻게 가겠는가? 포로로 끌려가서 미국에 사는 흑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지금 미국 사람들이 돼버린 것이다.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케냐 사람이고 어머니가 백인이어서 혼혈인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당선된 날을 케냐에서는 국경일처럼 임시 공휴일을 하겠다고 한다. 만일 미국에서 이 사람이 잘해서 4년 후 중임하여 8년을 무사히 잘 마친다면 미국 역사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흑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기게 되고, 미국 국민들의 민주역량이 그만큼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흑인을 못 본다. 앞으로도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른다. 킹 목사, 아브라함 링컨을 보면 백인우월주의를 가진 사람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몇 몇 사람들이 지독한 사람들이 있다. 정말 무사히 8년을 마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포로로 잡혀왔던 그 사람들이 미국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미국말을 한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왔던 존슨도 아프리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말을 하고 미국말 밖에 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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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리스도에게 포로로 잡혀가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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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면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됨(신도, 신언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 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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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포로로 잡은 자들을 선물로 주었다.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다시 선물로 은사들로 주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직임이 나왔다.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모두 주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원래 어떤 사람들인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도 사도가 되려면 먼저 포로로 잡혀가야 사도가 될 수 있다. 목자가 되려면 포로로 잡혀갔어야 된다. 안 잡히고는 지식밖에 전할 수가 없다. 잡혀갔다가 온 사람만 실제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해도 외국말이다. 한국 사람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적당히 하여 그 사람들이 알아들으면 되고 그 사람들과 똑같이 발음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도 옛날에는 영어를 하려면 그 사람들과 똑같이 해야 되지 않는가하고 생각했는데, 오래 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미 큰 다음에 가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안 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적당히 하면 되겠다. 헬로우하는 것을 할로우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알아들으면 되었지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 없고 어차피 외국말이다. 그 사람들도 우리말을 하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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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물이 되려면 은사가 되려면 먼저 포로로 끌려가야 된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다. 오늘날 이것을 지식으로 배워서 하니까 제대로 되겠는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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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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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와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성도들을 온전케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 은사들은 병 고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은사들은 직임을 말한다. 이 직임을 맡은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성도들을 온전케 해야 된다. 온전케 하는 표준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데 있어야 된다. 목수가 대패질을 아무리 잘하고 톱질을 아무리 잘해도 집을 짓는데 맞게끔 자르고 대패질을 해야지 맞지 않게 해버리면 아무리 톱질을 잘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대패질을 잘해도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은 거기에 맞도록 해야 된다. 제주에서 히노끼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편백나무인데 그 나무로 욕조를 짜면 향이 좋고 좋다고 하여 누가 그 나무가 있다고 한다. 그 나무가 오래되면 무지무지 비싸다. 100년 200년이 되면 엄청나게 비싸다. 욕조 하나를 짜는데 몇 천만 원씩 한다. 제주 것은 겨우 10년생 15년생으로 조각이다. 그것이 있다고 해서 얼마가 드느냐고 했더니 얼마 들지를 않아 짜보라고 했더니 매끄럽게 짜놓기는 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짜놓지를 않았다. 내가 신신당부를 했다. 배를 만들듯이 해라. 내가 목선을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그림도 만들어주고 다 해주었다. 그런데 뒤주처럼 짜왔다. 그래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더 짜보라고 했더니 더 좋은 뒤주를 만들어왔다. 그러니 물이 줄줄 샐 수밖에 없다. 배를 만들듯이 만들어야 물이 안 샐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안 돼서 두 번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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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온전하게 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되면 배 만들듯이 만들라는 것을 뒤주 만들듯이 만들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기둥처럼 깎으라고 했더니 말뚝처럼 깎아버리면 집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온전케 해야 된다. 우리의 온전함은 어디에 있는가? 건축에 적합한 것이 온전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그 사람이 온전하다고 하려면 여러 가지 기능면에서 도덕적인 면에서 온전하다고 말하겠지만 세상에서는 건축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겠지만 우리는 건축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가 분명하게 있다. 뒤주를 만들려면 나무를 어떻게 깎아야 되는가? 배를 만들려면 나무를 어떻게 깎아야 되는가? 딱 정해져 있다.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할 필요가 없다. 건축에 적합한 인격이 가장 완전한 인격이다. 건축에 좋은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누가 신령한 사람인가? 건축에 적합한 사람이 가장 신령한 사람이다. 이 건축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까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많이 하면 신령해진다거나 여러 가지 은사가 있으면 신령해진다거나 방언하는 사람보다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더 낫다거나 병 고치는 사람이 더 낫다가 되게 되는 것이다. 신령하다는 개념이 여러 가지다. 요즘 영성 운동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신령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신령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신령해지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신령해지는지 목표가 없다. 그래서 중구난방이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매일 저녁에 꿈을 꾸면 저 사람은 신령하다고 한다. 신기한 꿈을 매일 꾸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구나가 될 것이다. 작두위에서 춤을 추어도 발이 손상되지 않으면 신령한 무당이라고 하는 것처럼 일반 사람들이 못하는 어떤 것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참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목표가 없으니까. 썬다싱과 같은 사람은 새들과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령해졌다, 신비적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는 신비적인 것을 보고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목표가 없으니까. 그러나 건축 안에서 보면 새와 말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새와 말을 한다고 해서 건축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밤마다 천당에 왔다갔다 한다고 건축이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전혀 개념이 다르다. 기독교 역사에서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건축을 해보면 과연 건축이 될 것인가? 너무 특별해서 건축이 안 될 것이다. 조각이 비슷비슷해야 서로 붙는다. 그래야 통이 될 것인데 이것이 너무 다르면 통이 될 수 없다. 내가 생각할 때 옛날에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유명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목표가 없을 때 하는 생각이고 건축이라는 절대적인 목표를 놓고 볼 때는 오히려 방해거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건축이라는 목표를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방해거리다. 이만큼씩 돌을 쌓아서 담을 쌓고 있는데 큰 바위덩어리가 하나 나왔다면 정원석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담장을 쌓는 데는 방해거리다. 그것 하나를 놓아두면 담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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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목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제각기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뾰족하기로 유명한 사람, 어떤 사람은 납작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인데 이런 것을 갖다가는 전시장에나 쓰지 건축에는 도무지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가 건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하나님은 정말 지혜로우시다. 이제 우리 모두의 심판은 거기에 있다. 건축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있다. 건축을 하고 나면 나머지 것은 다 버리고 고물상으로 간다. 건축에 필요한 것만 건축을 통해서 영원히 남는다. 내가 새와 말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한 건축으로 남아야 된다. 여기서 내가 없고 건축만 남게 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은 ‘나는 없고 건축만’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건축에 해당되지 않으면 전부 방해거리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건축에 방해가 된다면 이것은 제거해야 된다. 건축이 목표니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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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 왔다. 하나님에게는 창세전부터 이 몸이 필요하다. 이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 성도를 온전케 해야 된다. 사역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엇을 목표로 사역할 것인가? 건축을 목표로 사역해야 된다. 왜 구속을 받아야 되는가? 건축 때문에 구속을 받아야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구속되어야 되는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서 구속되어야 했다. 구속은 하나의 수속이었고 과정이었다. 목표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사람들이 출애굽기라고 이름한 이유도 애굽에서 나온 것, 그 구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구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절반 이상이 건축에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의 목표가 출애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건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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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구속이 필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도 필요하고 믿음도 필요하고 다 필요하다. 하지만 목표는 건축에 있는 것이다. 이 건축 안에 와서 우리는 다 평균하게 된다. 건축 안에서는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특별한 사람도 없고 특별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손가락도 있고 발가락도 있는데 따로 따로 떼놓고 보면 다 다르다. 손가락은 길쭉하고 발가락은 짧다. 그런데 한 몸 안에서 보면 손가락은 길어야 되고 발가락은 짧아야 된다. 발가락이 손가락처럼 길면 곤란할 것이고 걸어 다니기가 불편할 것이다. 적당히 짧으니까 걸어 다니기가 쉽다. 또 손가락이 발가락처럼 짧으면 뭘 잡으려고 해도 안 잡히고 곤란하다. 적당히 길어서 잡을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몸 안에 있을 때는 조화가 되는데, 몸 안에 없을 때는 다 불필요하다. 내 손가락이 남자 손치고는 예쁜 손인데 잘라 놓고 보면 징그럽다. 아무리 미인의 손가락이라도 잘라놓으면 징그럽다. 몸에서 떨어져나가면 금방 징그러운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누가 손가락이 떨어져 소금물에 넣어 돌아다녔는데 가는데 마다 안 받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버렸다. 몸에 붙지 않은 지체는 시체와 마찬가지다. 징그러워져버린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내 몸이었는데 조금 전 잘라지기 전까지는 내 몸이라고 생각되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이 변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징그러워진다. 지체는 꼭 몸에 붙어있어야 된다. 죽기 살기로 꼭 몸에 붙어있어야 된다. 그래야 혈액을 공급받아서 불그스레한 핏빛이 있는 손바닥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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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에서의 하나됨에 이르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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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믿음에서 하나됨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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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믿음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믿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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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우리는 하나여야 되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음에서 우리는 하나여야 된다. 우리는 신실함에서 하나가 되어야 된다. 믿음에서 하나됨에 이르게 한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하나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음에서 하나다. 거기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우리 교회에는 없다. 이 정도는 됐는데...가 아니라 더 깊어져야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한 유일한 인격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 유일한 인격을 믿는다는 말은 객관적인 말이 아니라 이 유일한 인격 이외에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내 일생에서 이 유일한 인격 이외에는 더 영광스럽고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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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을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간다. 지식으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살 사회, 내가 지금 살 사회, 내가 어디에 살 것인가? 이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경륜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하나님의 경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굳이 교회에 있을 필요가 없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을 실현하는 노정 가운데 있는 것인데, 이 길에 있다가 이것이 안 된다면 우리는 허탕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망할지라도 바벨론을 향해 가든지 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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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일생과 관계된다. 내가 어디에 속해 살 것인가? 나는 어느 사회 사람인가? 나는 어느 편 사람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결정된다. 내가 속한 세계는 어디인가? 나는 어느 사회에 속해 있는가? 어떤 사람은 대구교회가 조그마하고 얼마 안 되는데 영원한 앞날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현상을 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자기는 세상에 나가서 여러 군데 속해보려고 생각한다. 이것도 내 사회고 저것도 내 사회로 전부 자기 사회인 줄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정해져있다. 세상에서도 그렇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친구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나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정말 나를 위할 사람은 그 중에 또 몇 명 되지 않는다. 정말로 나를 아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또 몇 명 안 된다. 내가 넓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넓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좁은데 살고 있고 지극히 몇 몇 사람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엄청나게 큰 사회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만큼 많은 이런 사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기껏해야 계모임 몇 사람밖에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밥 먹는 정도밖에 안 된다. 초등학교 동창생부터 모여 보았자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것이 다 친구가 되겠는가? 친구도 아니다. 정말로 나와 함께 일생을 살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은 몇 명되지 않는다. 그것도 경쟁 대상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아주 넓은 사회를 굉장히 큰 사회를 가지고 있다.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큰 사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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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큰 사회를 선물로 받았다. 설사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1000년 후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세상에 산다고 해도 겨우 친구 2~3명도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친구는 2~3명도 없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날마다 만나고 있는데 설사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1000년 후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받을 것을 다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축복인지 모른다. 이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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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됨에 이르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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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 하나됨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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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를 포함한 사람임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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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 하나님 아들의 지식은 첫째는 우리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다.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와는 아예 씨가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아는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사도들이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보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보도한 내용만 갖고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우리를 포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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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를 포함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살면서도 포함되고, 죽으면서도 포함된 사람이다. 한 운명의 사람이다. 그것을 우리가 철저히 알아야 된다. 신이냐 인간이냐 아무리 논쟁을 해도 끝이 나겠는가? 성경 어디에 가면 하나님이라고 되어있고 어디에 가면 분명히 사람인데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맞추겠는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영생이시다. 그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이런 표현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그 사람의 실재를 보면 또 완전히 사람이다. 아버지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인지 신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사람인지 신인지 우리가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나를 포함한 사람이다. 나를 포함하지 않았으면 그분이 행한 일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운동선수가 아주 멋있게 운동을 한 것과 똑같다. 이번에도 김연아 선수를 보니까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는데 물론 한국 사람은 기분은 좋지만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를 포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아마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다. 어떻게 얼음판에서 그렇게 빙빙 도는지 정말 신기하다. 왜냐하면 나는 반 바퀴도 돌지 못한다. 공중에서 바람개비 돌듯이 도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갔을 때도 정말 신기했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다 똑같다. 한발로 빙빙 도는 것을 보면 황홀하고 눈을 뗄 수가 없다. 스릴있게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지 신기하다. 신기하지만 나를 포함해주지 않으니까 단지 나는 신기하다고 구경할 뿐이다. 예수님보고도 사람들이 많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소용이 없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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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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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그분의 죽으심이 단순한 순교가 아니고, 나를 처리한 것이구나. 나를 포함하고 나를 처리한 것이구나. 특별히 아까 말한 대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그 나를 처리한 것이구나. 선악과의 마지막은 분열이다. 선악과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신 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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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우리를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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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구나. 부활이 무슨 신기한 사건, 피겨 스케이팅처럼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나를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은 자가 저렇게 사는구나. 죽은 줄 알았더니 저렇게 사는 삶이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거듭난 것이다. 나를 새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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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우리로 세상을 정복케 하기 위해 승천하셨음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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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세상을 정복케 하기 위해서 승천하신 분이다. 그분이 승천했다는 것을 사도들이 말한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사람이 지극히 높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분이 지극히 높이 된 것을 보고 우리는 자부심이 생겼다. 왜 모두 돈 많이 들여 선수들을 육성하는가? 세계무대에 나가서 그 사람들이 국위 선양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덜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살 때 선수가 가서 태극기를 날렸다면 그 순간은 가난도 잊어버리고 후진국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세계에서 깃발을 날린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만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 맛으로 돈을 들여 선수를 육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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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지극히 높이 되셨다. 하나님 보좌에 오르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두렵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가장 존귀한 분이라면 아까 말한 대로 그 유일한 인격이 가장 존귀하다면 우리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가장 존귀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도 부럽고 저것도 부럽다. 그것이 가장 존귀하다면 부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맨 처음에 이 인격의 존귀함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부러워하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정말 유능한 전도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업적을 올리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목회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다 있다. 사업하는 세계에 가면 돈 버는 것이 목적이듯이 목회하는 세계에서는 그런 목적이 있다. 그런 것을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 내가 수천 명 앞에서 공공연히 나는 이런 분을 가장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왜? 목회에 아주 성공한 사람이니까 수천 명 군중 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만일 내가 이 유일한 인격의 존귀함을 몰랐더라면 나는 평생 그런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때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때보다 더 유명하다. 그때는 몇 만 명밖에 안되었는데 지금은 몇 십만 명이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선교를 하고 있는 세계적인 인물이니 지금은 부러움이 얼마나 더 했겠는가? 그때 내 부러움이 100이었다면 지금은 그 부러움이 만쯤 올라갔을 것이다. 그 사람의 주가가 올라 간만큼 나의 부러움도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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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일한 인격만이 가장 존귀한 것이라는 것이 눈앞에 보이면서 싹 사라져버렸다. 잘할 사람은 잘해라. 10만 명을 하든지 50만 명을 하든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 100만명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잘 나가는 것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옛날에는 너무너무 위압이 되고 관계가 되었는데 싹 사라져버렸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오니까 싹 사라진다. 절대적이고 중요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도 만일 부러워하는 것이 아직 남아있다면 뭔가 부족하다. 정말로 발견하면 다 사라져버린다. 말씀도 절대적인 말씀을 듣고 나면 다른 것을 못 듣는다. 안 듣는 것이 아니라 시시하니까 못 듣는다.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꽁보리밥 먹으려면 못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름집회를 가면 아이들이 무서워서 재래식 변소를 못 간다고 난리였다. 수세식 변소를 가던 아이들이 시골에 가서 재래식 변소를 가려면 천길만길처럼 보일 것이다. 시커먼 곳에 빠질 것 같고 냄새도 폴폴 나니까 그것 때문에 못 오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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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우주 안에서 그 유일한 것을 발견하면 내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분은 승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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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음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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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 주는 우리와 한 영이 되기 위해서 영이 되었다. 오늘 지금 우리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영과 연합된 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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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그분의 모든 일은 교회를 얻기 위하심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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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모든 일은 교회를 얻기 위하심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많은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많이 한다. 설교를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여호수아 갈렙처럼 되어야 된다고 하고, 성경에 나오는 예가 많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계속 선한 사마리아 사람만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 여호수아 갈렙을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은사만 강조하고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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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무엇 때문에 성경 안에 모든 것이 기록되었는가? 전부가 교회를 위한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가 된다. 방언을 해도 교회를 위한 것이고 병을 고쳐도 교회를 위한 것이고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니까 만일 그것이 교회로 건축되지 않는다면 다 헛일이다. 아무리 신기한 일이 있어도 다 헛일이다. 교회밖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왔고 무엇 때문에 죽으셨고 무엇 때문에 부활 하셨는가? 교회를 얻기 위해서다. 내가 이것을 알아야 되고 이것을 실행하려면 날마다 죽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한 면으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끝났다. 나에게는 옛 사람이 없고 새 사람뿐이다. 그런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 왜 그런가? 앎을 실행하려면 내가 예수가 함께 완전히 죽었구나. 나는 없고 오직 그분만 있구나. 이것을 알았으면 내가 가만히 혼자 앉아 있으면 괜찮지만 그것을 실행하려면 날마다 죽어야 된다.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서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고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한다. 참 이상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 끝난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하려면 죽음 없이는 실행이 안 된다. 날마다 자기의 죽음이 표현되어야 실행이 되지, 자기 죽음이 표현 안 되면 실행이 안 된다. 한번 죽어버리면 쉽다. 매도 한번 맞아버리면 쉽다. 오늘 맞았는데 내일 또 맞으러 가면 모레 또 맞으러 가면 죽을 지경이다. 매 맞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한다. 어쩌다가 모르고 한 번 맞는 것은 괜찮은데, 다음날 또 맞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목매달고 죽는 것이 낫다. 매 맞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고 한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어렵다. 내가 그것을 실행할 때마다 내 죽음을 내놓아야 된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내놓아야 실행이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실행이 안 된다. 그러니까 앎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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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충분히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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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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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개인적으로 성장하나 단체적으로 완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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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단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인격이 성장하지만 단체적으로 완성이 된다. 나무들은 다 각자 자란다. 자랄 때는 자기 혼자 자라지만 완성은 어디에서 되는가? 건축 안에서 완성된다. 개인적으로 자라지만 단체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개인적으로 자라지만 단체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내 운명이다. 아무리 나 혼자 자라보았자 단체적이 되지 않으면 완성이 안 된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왜 있는지 이유가 없다. 철근이 왜 있는지 이유가 없다. 건축하는데 가보아야 철근이 왜 있는지 안다. 집 짓는데 벽돌이 왜 있는지 모른다. 벽돌은 왜 저런 모양으로 찍어야 되는지 모른다. 왜 둥글둥글하게 찍지 않고 네모나게 찍었는지 모른다. 건축에 가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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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체적으로 완성되는 사람들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했다. 나 혼자 완성되지 않고 연합해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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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온전한 지체가 온전한 몸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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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지체가 온전한 몸이 된다. 온전하지 않은 지체는 온전한 몸이 될 수 없다. 나무가 자라면서 구불구불하게 자라면 건축에 들어오지 못한다. 곧게 자라야 서까래가 되거나 기둥이 되는데 자기 멋대로 자라버리면 건축에 들어오지 못한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가끔 잊어버리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다고 전화가 오는데 자기 혼자다. 여러 번 하다가 지난번에는 확실하게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뒤로는 전화가 안 온다. 이렇게 하면 전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계속 그렇게 놔둘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충만하고 기쁘고 만족해도 건축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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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지체가 되어야 온전한 몸이 된다. 사실은 나무도 혼자 놔두면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더군다나 소나무 같은 것은 성질이 그래서 혼자 놔두면 자기 멋대로 돌아간다. 또 크면서 나무가 빌빌 돈다. 소나무를 키우려면 처음에 밀식(密植)을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반듯하게 큰다. 그것은 쓸 수가 있는데 자기 멋대로 혼자 자란 것은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가 되는 것이다. 자랄 때도 사실은 교회를 통해 자라야 된다. 그래야 곧게 자란다. 밀식을 하면 좀 부대끼기는 부대낀다. 나무가 어렸을 때는 밀식을 해야 된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2~3m 띄워놓으면 나무가 이상해져버린다. 손해날 줄 알지만 처음에는 밀식을 해놓았다가 크는 데에 따라서 솎아야 된다. 그래야 나무가 제대로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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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라야 그것이 제대로 쓸모 있는 것으로 자라지, 자기 혼자 신령하게 자라버리면 건축에는 쓸 수가 없게 돼버린다. 온전한 지체가 온전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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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성장은 인격적인 것으로써 인격이 안정되면 온갖 바람에 요동치 않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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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인격적인 것으로써 인격이 안정되면 온갖 바람에 요동치 않게 된다. 바람에 요동하는 문제가 나왔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풍조가 있다. 이런 교훈 저런 교훈의 풍조도 있고, 이런 실행 저런 실행의 풍조도 있고 여러 가지 풍조가 주기적으로 밀려다닌다. 인격이 안정되면 여러 가지 풍조가 와도 그 풍조에 밀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먹고 산다. 먹고 건강하게 장성한다. 그런데 인격이 안정이 안 되면 자꾸 밀린다. 이 바람이 불면 이쪽으로 밀렸다가 저 바람이 불면 저쪽으로 밀렸다가 자꾸 바람에 밀려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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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 말이 나왔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런 대로 풍조가 있었는데 오늘은 오늘 대로 풍조가 있다. 대구교회는 대구교회대로 풍조가 있고 가끔 한 번씩 바람이 분다. 여기서 인격이 안정이 안 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격이 딱 못 박혀 있어야 되는데, 너무 일찍 뛰어내려 설죽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이다. 인격은 십자가에 딱 못 박아놓아야 한다. 그래야 꼼짝 못하고 잔소리 못하고 있지 조금만 풀어놓으면 또 잔소리 한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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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분명하게 그 죽음 안에 매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뜨기가 쉽다. 바닥에 딱 안정이 되어야 된다. 자꾸 뜨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딱 자리를 잡고 있어야 된다. 뿌리가 땅에 박혀야 되는데, 깊이 박히지 못하면 바람에 쓰러져버린다. 히말리야시다 나무가 보기가 참 좋다. 내가 대구에 맨 처음 들어올 때 보았던 인상이 히말리야시다였다. 다른 데서 못 보던 것이었다. 남국적인 정서로 나뭇가지가 늘어져있는 것이 너무 멋있었다. 뒤로 보니까 나뭇가지를 다 잘라버리고 막대를 보기 싫게 해놓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바람이 불면 넘어진다는 것이다. 잎이 무성한데 비해서 뿌리가 약하여 바람이 불면 넘어진다고 한다. 나무가 품위 있고 귀족적이고 너무 멋있다. 내가 동대구에 내려서 들어오는데 그 나무가 있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뒤로 보니까 다 잘라서 보기 싫게 만들어놓았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넘어진다. 그 뿌리는 어디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이 우리의 뿌리이다. 거기서 우리가 딱 박혀있어야 우리 속에 잔소리가 없어진다. 온갖 바람에 요동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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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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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자랄 때는 아무데나 자라면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로 자라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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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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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이니까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되지 다른 데로 자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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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려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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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려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참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간편하게 가장 정확하게 참된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또 이것보다 참된 것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날아다니는 것들은 잘못되기가 쉽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움직이니까. 영적이다. 신령하다는 것은 조금만 잘못하면 사기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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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면 사기를 당할래야 당할 수가 없다. 꼼짝 못하니까 당할 수가 없다. 사탄도 와서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안 된다. 다른 것은 사탄이 와서 움직일 수가 있다. 바람처럼 움직일 수가 있다. 성령은 바람이라고 했다. 영도 바람이다. 그러면 악령도 바람이다. 다 바람이다. 동남풍이 불다가 서북풍이 불듯이 바람은 마음대로 부는 것이다. 어디가 참인지 붙잡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닻을 내려야 된다. 참된 것에 닻을 내려야 된다. 아무리 태평양을 건너다니는 배라 하더라도 모든 배는 닻이 있다. 닻이 없으면 정착할 수가 없다. 큰 배가 닻에 매여 꼼짝을 못한다. 이리도 못가도 저리도 못 간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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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이 참된 것이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참된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딱 붙잡혀있어야 된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듯이 박고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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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몸 안에서 행함(엡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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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서 행해야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몸 밖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행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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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는 지체에게 공급하고 지체는 각각의 분량대로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결합되고 짜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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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지체에게 공급하고 지체는 각각의 분량대로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결합되고 짜여진다. 머리는 계속 우리에게 어떤 생명을 공급한다. 공급 받는 것은 우리 지체들이다. 그 지체들은 자기의 분량대로 역사해야 되고 자기의 역사대로 기능을 발휘해야 된다. 지체의 기능대로 분량은 발휘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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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체는 그리스도를 공급받고 교회 안에서 각각의 분량대로 기능을 발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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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는 그리스도의 공급을 받고 교회 안에서 각각의 분량대로 기능을 발휘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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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몸은 지체의 역할을 통해 사랑 안에서 건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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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지체로써 지체의 역할을 통해서 건축된다. 지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몸 전체가 아니라 몸 안의 일부분이라는 말이다. 팔은 정말 필요한 것이지만 내 몸의 일부이다. 발은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내 몸의 일부분이지 결코 발이 독립적으로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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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체로써 분량을 발휘한다는 말은 자기 분수만큼 발휘한다는 뜻이다. 자기 분수만큼 발휘하면 남을 판단할 수가 없다. 자기 분수만큼도 발휘하기 바쁜데 손이 발에게 너는 왜 그러냐고 할 수가 없다. 발이 손더러 너는 왜 그러냐고 할 수가 없다. 왜? 지체는 자기 분량대로만 역사해야 되니까. 손은 손 할 일만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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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는 것도 각각의 지체대로 받는 것이니까 자기 받는 대로만 역사해야 된다. 전도를 할 때도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안 된다. 무엇을 알더라도 하나를 확실하게 알면 그것만 이야기해야 된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 모른다고 하면 된다. 하나도 문제가 안 된다. 자기 안 것만 말하면 전도가 된다. 그런데 확실히 모르는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해버리면 상대방이 혼란에 빠져서 안 된다. 꼭 자기가 아는 것 하나만 이야기하면 되고,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하면 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모른 것을 아는 체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다. 전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 뭘 많이 알아서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똑똑해서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그 사람은 하나밖에 모른다. 그런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전도를 한다. 한 가지만 확실하게 알면 전도를 하는구나. 이것저것 다 알면 못하는구나. 나는 이것저것 알다보니까 전도를 하나도 못한다. 한 가지만 알아야 된다. 안자매님은 전도를 많이 했는데 오직 한 가지밖에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서 온다. 처음에 저렇게 전도가 될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오래 보다보니까 저래야 전도가 되는구나. 유식한 사람은 데리고 오지 못한다. 나는 유식하니까 더 못 데리고 온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으면 이것저것 다 대답하다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물었는지도 모르게 되니까 가버린다. 무조건하고 한 가지만 주장하고 한 가지만 내세우는 사람이 전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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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아니라 지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결국은 몸을 건축하게 된다. 손은 손의 일만 잘하면 몸이 건축된다. 발은 발의 일만 잘하면 몸이 건축된다. 손이 모든 일을 다 해서 몸이 건축되는 것은 아니다. 손은 손의 일만 하면 몸이 건축된다. 눈은 눈의 일만 하면 몸이 건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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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분량만큼만 역사하면 분량만큼만 내놓으면 저절로 건축이 된다. 소모임을 할 때도 지방 순회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려고 생각하면 실패하고, 나는 멍석을 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 된다. 멍석만 깔아주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하면 된다. 멍석을 잘 깔아주는 사람이 결국은 잘한다. 2~3시간 많이 이야기해도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멍석 깔아준 사람은 교회를 살리는 것이다. 지방 순회하는 분들도 2~3시간 혼자 말하려고 하지 말고 멍석을 깔아주면 된다. 각각의 분량대로만 역사하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건축이 된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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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하나는 인격과 그 몸이다. 유일한 인격에 유일한 몸!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이 받은 대로 지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지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말은 몸뚱이로 역할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체로서만 역할한다. 지체로서 역할은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지체로서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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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몸은 이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다. 내가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면 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몸이 조성된다. 나는 교회를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내가 받은 것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몸을 따로 만드시는 이가 있다. 나는 몸을 만들 줄 모르니까 내가 받은 것만 말했을 뿐이고 받은 것만 나타냈을 뿐이다. 그러면 몸이 이루어지 않을 것 아닌가? 그것이 아니고 몸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다. 내가 몸을 이루려고 할 필요가 없고, 나는 지체로서의 역할만 충분히 하면 된다. 그러면 몸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야 그 몸이 온전한 몸이 된다. 인위적으로 몸을 만들어놓으면 괴물이다. 사람이 아무리 재주껏 만든다고 해도 사람이 생명을 만들 수도 없고, 또 생명 아닌 것을 만들어놓으면 다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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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몸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그분이 몸을 어떻게 만드실 것인지를 봐야 된다. 어떻게 몸이 나타나는지 어떻게 몸이 만들어지는지를 봐야 된다. 우리가 스스로 몸을 만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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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지키고 실행하는 것! 유일한 인격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 유일한 사회를 지키고 실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책임이고 생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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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어디가 길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는 저희들을 주님께서 유일한 길로 인도하셔서 이제 우리가 유일한 것을 알게 하시고 유일한 인격 유일한 사회를 우리 앞에 두고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유일한 한 인격 안으로 단순화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유일한 사회 안으로 우리의 목표를 단순화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신성한 목표 안에서 주님의 머리되심 안으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고 당신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우리가 이르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교회가 오직 주님의 조성하심에 따라서 조성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