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잊혀진 모교 관동(關東)중학교>
정연수 담임선생님(트럼펫 케이스를 들고) / 1, 2반 영재(?)들과 담임선생님
관동중학교(關東中學校)는 1960년에 강릉농고 안에 개교되었다가 우리 제1회 졸업생만 내고 1963년 초에 폐교(閉校)가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리송한 점이 많다.
개교되었을 때 교장, 교감도 따로 없었고 선생님들은 새로 발령을 받고 오시긴 했는데 몇몇 과목은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맡아 가르쳤다. 교실은 고등학교 건물의 가장 앞쪽에 있는 제일 좋은 건물을 썼는데 중학교 선생님들의 교무실은 따로 있었다.
매주 월요일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은 고등학교 형들의 한쪽에 우리 중학생들이 서서 같이 조회를 했다. 그런데 학교 정식 명칭에 병설(倂設)이라는 말이 붙지 않은 것을 보면 농고 병설은 아니었고 독립된 중학교였던 셈이니 더욱 이상하다.
교문 기둥의 한쪽에는 강릉농업고등학교(江陵農業高等學校), 다른 한쪽은 관동중학교(關東中學校)라 붙어 있었고 아침에 규율부들이 교문에 섰는데 같은 교문의 한쪽은 고등학교 형들이, 다른 한쪽은 우리 중학교 규율부들이 섰다.
63년 우리가 1회로 졸업을 하면서 1, 2학년 재학생들은 경포중학교가 개교되면서 완전히 학교가 문을 닫았는데 우리는 중학교 졸업증명서를 떼려면 경포중학교로 가야 한단다.
어떤 연유로 학교가 개교되었었는지, 또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1회 졸업생만 내고 학교가 폐교되었는지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가 없다.
1983년에 교동에 남녀 공학의 관동중학교(關東中學校)가 새로 설립되었다는데 우리가 다니던 관동중학교와는 완전히 별개인데도 교명(校名)의 한자가 같아서 내가 관동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동의 관동중학교는 1회 졸업생이 서른 살 남짓 정도인데 70대 늙은이가 졸업했다니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요새는 예전의 우리 모교 관동중학교를 아는 사람들이 매우 드문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연배의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한편 서글픈 감이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몹시 어려웠던 시기라 그 당시 중학교로 진학한다는 것은 꿈 같은 시절이었다. 여자들은 어쩌다 한두 명 진학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남자들도 중학교 진학생이 졸업생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살림에 여유가 있는 집도 ‘여자가 무슨 중학교를∼∼’하던 시절이었다.
남자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일을 돕거나 이발사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고, 여자들은 집안일을 돕거나 시내의 양장점이나 양복점 혹은 미용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기술을 배워 돈을 좀 벌다가 시집을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뜨거운 여름에 논밭에서 일도 하지 않고 하얀 가운(Gown)을 입고 이발 가위를 찰칵거리는 이발사가 너무 부러워 이담에 꼭 이발사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邱井國民學校) 졸업이 임박했을 때인데 담임선생님이 부르시더니 농고 안에 관동중학교라는 새 중학교가 생기는데 학교장의 추천을 받으면 장학생이 되어 입학시험도 치르지 않을뿐더러 입학금을 면제받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어머님과 의논하여 보라고 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줄곧 전교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고 6학년 때에는 전교 어린이회장도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었는데 그런 나에게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 2남 2녀가 있던 우리집은 너무나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까짓 쓸데 없는 공부는 무슨.... 열심히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지...’
당시 어머님의 말씀이었는데 내가 조르자 결국 입학을 허락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학(中學) 진학이 결정은 되었는데 입학금, 1학기 등록금은 면제받았지만 몇 푼 되지 않는 교과서대, 교복값 등이 문제였다.
당시 이웃에 사는 살림이 좋은 고모부께서 교복값을, 과수원을 하던 이씨네 과수원(현 임마누엘 과수원)집에서 가방과 모자, 교과서대를 도와주어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었고 이것이 곧 내 인생 전환점의 큰 디딤돌이 되었던 셈이다.
후일 우리 관동중학교 동기들은 대기업의 중진, 몇몇은 대학교수, 나와 같이 교직에 있었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 진학을 포기하였다가 관동중학교가 생기는 바람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관동중학교를 누가 설립했었는지, 설립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농촌에 농사꾼으로 묻힐 뻔 했던 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어 국가의 동량(棟樑)으로 키워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당시 농고는 농과(農科), 축산과(畜産科), 임과(林科)로 세 개의 과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형들은 농과(農科)를 ‘똥과’, 임과(林科)를 ‘싹다리과’, 축산과(畜産科)를 ‘돼지과’라 서로 부르며 놀렸다.
싹다리는 마른 소나무 가지를 뜻하는 강릉지방의 방언(方言)이다.
함께 다니던 강릉농고 형들은 전쟁 직후라 나이가 많은 형들도 있었고 심지어 결혼을 한 형들도 있었는데 형들은 우리 중학생들을 무척이나 귀엽게 챙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농상(農商) 축구 정기전이 있으면 우리 중학생들도 카드섹션에 참가하였는데 뙤약볕 아래 몇 시간씩이고 운동장에 나와서 연습하던 기억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