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금성 산장지기 유창서씨
앞서 한국의 대표적인 산장지기들 중에는 털보가 많다고 했는데 그 털보파 산장지기의 
수장쯤 되는 분이 권금성 산장지기 유창서씨라고 볼 수 있겠다.
1970년대 말쯤이었던가, 설악산 사진작가로 유명한 김근원씨의 사진전이 서울에서 열렸었다.
아직 설악산에 대해서는 초짜였던 나는 이재춘 선생과 이 사진전 구경을 갔었다. 모두 흑백사진이었는데 우리는 사진 속 설악의 웅장하고 황홀한 매력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명한 공룡능선이나 천화대 사진을 보고도 초짜인 우리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궁금해 했었다. 그때, 베레모에 털북숭이의 한 사나이가 다가와서 ‘저기가 설악의 어느 봉우리에서 바라본 무슨 봉우리’라고 우리에게 친절하게 사진설명을 해주는 것이었다. 이분이 알고 보니 바로 유창서씨 였고 우리와는 첫 대면 이었다.
그 후 설악산 등반을 갔을 때 설악산 소공원에서 가끔씩 뵀었는데, 그분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녔다. 설악산의 유일한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면 바로 권금성 산장이 있었다. 이 산장의 커피는 산악인이나 관광객들에게 늘 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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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금성 산장>
유창서씨는 아버지에게서 두 가지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 한 가지가 억센 '힘'이며 나머지 하나가 바로 '털'이다. 노다지 광산을 가졌던 선친은 거부열전에 기록될 만큼 돈도 많았지만 얼굴에 수염도 많았다고 한다. 그 수염을 9남매 중 셋째인 유창서씨 에게만 고스란히 물려준 것이다.
유창서씨는 외설악 구조대를 이끌고 여러 사람을 구한 공으로 82년에 자연보호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 서훈식 때 그의 유난스러운 수염이 문제가 되었다. 표창할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수염을 깎고 오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듣고는 “화장실에 잠깐 갔다 오마” 하고는 설악으로 줄행랑쳐 버렸다.
"쇠붙이 하나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맞바꿀 곰 같은 놈이 어디 있겠나." 하고서.
그는 평안북도 의주가 고향으로 1954년 배재고교 1학년 때부터 등산을 시작해, 1957년 첫 설악산 등산을 시작했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설악산에는 69년부터 정착해 이기섭 박사와 함께 자리를 본 권금성산장을 지켜왔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 설악산 산악구조대를 창설해 초대회장을 지낸 바 있으며, 45세 이상의 한국 원로산악인들의 모임인 한국산악동지회 회장으로 산악인 원로들의 산악캠프를 열기도 했다. 또 에코클럽의 창립멤버로 함께 하는 등 왕성한 산악활동을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있을 때도 구조상황이 생기면 부르는 일이 많았다. 그에 관해 유창서씨는 "그때는 산에 다니는 사람 숫자가 없어서"라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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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만장봉에서 사고가 나자 유창서씨가 천축사까지 부상자를 업고 내려갔다. 1958년 11월/김근원 촬영>
유창서씨가 설악산과 인연을 맺은 것도 故 김근원씨의 사진 전시에서 설악산의 풍경을 보고는 "저런 곳이 있구나. 가보자!"하며 설악행을 감행했던 것. 교통이 좋지 않아 설악에 가기 매우 힘들던 시절이었지만 산사람의 열정 앞에 그런 일쯤은 방해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운명이었는지 그는 설악산과 만나자마자 구조 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설악산 등산로 개척자 이기섭 박사에 관하여 짚고 넘어가야 겠다. 이 박사는 이화여대와도 인연이 깊다. 1913년 황해도 수안에서 출생. 38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으며 54년 이대부속병원장, 64년 속초시의사회장을 역임했다. 서울산악회장을 맡았으며 64년 설악산악회를 창립했다. 66년 설악제를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93년에는 산악인의 문을 건립하는 등 산악문화발전에 공헌해 왔다. 56년 이대사범대학 산악부에서 구호반으로 등반에 참여해 처음 설악산에 올랐던 이기섭 박사는 62년 이화여대 부속병원장의 자리를 내놓고 홀연 속초로 이주했다. 이유는 “설악산이 좋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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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속초에서 외과전문의로 개업한 이 박사는 속초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무의촌 진료활동을 펼치며, 예전의 서울산악회장 경력을 살려 64년 등산인들과 함께 설악산악회를 창립했다. 설악산을 등산하는데 1주일씩 걸리고, 군용 A텐트나 이불을 싸들고 등산하던 시절, 이 박사를 비롯한 등산인들은 64년 천불동계곡의 암벽 일대에 등산로를 개척하는데 힘을 보탰다. 설악산의 유명한 ‘천화대’도 이박사가 명명하였다.
70년 설악관광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해 설악산의 명물이 된 소공원에서 권금성까지의 케이블카를 건설했다. 그러나 케이블카 공사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업비가 들어가자 일부에서 이박사가 비리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의 눈길을 던졌으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박사는 설악을 떠나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4.19이후의 무질서 속에서 사제의 도리가 짓밟히는 것이 싫어 이대부속병원장의 자리를 그만두고 설악으로 내려온 이 박사에게 또 한 번 씻지 못할 상처였다.
설악산을 떠난 지 2년 만에 이 박사는 설악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대 김옥길 총장이 설악동 피골 일대에 의료센터를 설립할테니 책임자가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고, 미련 많은 설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의료센터 설립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이 박사는 속초보건소장과 도립병원 의사 등 고달픈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6년 12월 25일 94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으며 장례는 속초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유언대로 고인이 평소 사랑했던 설악산 자락에 뿌려졌다.
설악의 매력에 빠진 나는 한창 젊을 때라 거의 매년 설악산을 찾다시피 했었다. 용대리에서 출발해 백담계곡을 거쳐 마등령을 넘기도 하고, 수렴동을 거쳐 대청봉을 넘기도 하고, 장수대에서 서북주능을 넘어 흑선동계곡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한계령에서 서북주능을 거쳐 백운계곡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공룡능선도 넘고, 오색에서 출발해 대청봉과 화채봉 능선으로 해서 권금성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지금은 화채봉 능선이 출입 통제가 되어 갈 수가 없지만 당시에는 통제가 되지 않아 두어번 넘기도 했었는데, 어느 해인가 권금성 산장에 도착했더니 유창서씨가 있었다. 난 산장안에 잠시 들어가서 땀에 젖은 옷을 좀 갈아입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더니 의외에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니, 등반객의 이정도 청도 들어주지 않을만큼 산장인심이 야박한가? 좀 섭섭하기도 했다. 그는 화채봉 코스가 출입통제 된 이후로는 이를 위반하는 등반객들의 산장 이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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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주봉에서 하강하는 유창서씨. 1958년 10월/김근원 촬영>
‘설악산 반달곰’ 유창서씨가 지키고 살던 권금성산장은 지난 2009년 철거되어 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추억도 사라졌다. 그는 요즘은 거의 매일 고성군의 바닷가에서 낚시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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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하는 유창서 씨>
또 한 분, 설악산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린 김근원씨 얘기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기에 그분의 얘기와 작품 몇가지를 곁드려 올려본다. 그가 산을 처음 본 것은 한국전쟁 중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였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종로의 집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그의 눈에 멀리 있는 산이 들어왔다. 북한산이었다. ‘산은 변함없이 아름답구나.’ 이튿날 그는 소년 때부터 만져온 카메라를 둘러메고 산행에 나섰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작가는 북한산을 시작으로 50년 가까이 한국의 산에 올라 명산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기록해 왔다. 백두대간의 설악산·지리산·소백산·태백산 들이 그의 렌즈에 포착되어,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사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는 한국 산 사진계의 어른으로 꼽힌다. 그가 산을 기록하는 방식은 이후 한국 산 사진의 길이 되었다.
“산을 알면 누구나 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대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구도 찍을 수 없는 것이 산이다.” 산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포착하는 일이 쉬운 것 같지만, 사진가의 마음이 산의 마음과 교감하지 않으면 ‘재주로 찍은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산을 좋아하는 조훈현 국수도 80년대 초 김근원씨의 카메라 장비를 들고 함께 설악산 산행을 했다고 하는데 자그마한 분이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어찌나 잘 다니는지 감탄했다고 한다.
작가는 한국의 명산을 모두 흑백으로 담았다. 흑에서 백에 이르는 그 무한대의 톤이 산을 표현하기에 제격인 데다, 흑백 사진 특유의 박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분은 2000년 11월 6일 타계하였다.
<산악사진작가 김근원 씨와 설악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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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계곡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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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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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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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봉 부근의 해골. 6.25 전사자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