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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교부들의 영성 – 필로칼리아 Philokalia (863P)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새삼 되돌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영성은 얼마나 때가 묻고, 세속적이며, 타락했는지, 부끄러워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소중한 글들을 묵상해 가며, 나를 채찍질 한다.
사랑하는 주님!
나를 온전히 성령으로 聖別(성별) 되게 하소서. 아멘.
겸손-명성과 인기를 멀리하라
(잠29:23) 사람이 교만(驕慢)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謙遜)하면 영예(榮譽)를 얻으리라.
죽기까지 나를 쳐서...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貌樣)으로 나타 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대 니스테로스 교부가 한 수사와 함께 사막을 거닐고 있다가, 뱀을 보자 두 사람 다 달아났다.
“무서우시죠, 사부님! 당신도 역시?” 라고 묻는 수사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
“나는 무섭지 않네, 이 사람! 하지만 뱀을 보고 도망친 게 내겐 좋은 일이야. 그렇게 함으로써 헛된 명성이라는 악마로부터는 도망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
존경 받는 교부가 제자와 함께 있을 때 뱀을 보고 도망치는 것은 사부로서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되지만, 그 훌륭한 사부는 자신의 체면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뱀을 무서워 하지 않는 비범한 수도사라는 헛된 명성을 얻게 될 것을 더 무서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사부의 반전을 통해 그의 사려 깊은 신중과 분별, 겸손을 깨닫고 무릎을 치게 만들게 한다. 사막 교부들의 이야기 속에는 겸손, 동정, 유머, 순종, 청빈 등 삶에 대한 관조와 지혜가 숨어 있다.
사막 교부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명성과 인기였고,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다 보면 위선적이 되고, 무엇보다 마음의 영적 풍요가 메말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사막 교부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금욕적인 훈련을 절제했고,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공동체의 규범에 맞게 행동하고, 비록 자신의 규범과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일반적인 원칙에 충실하게 따랐다.
어느 날 안토니에게 이 사막에서 자기 보다 더 훌륭한 수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가 침묵 속에 있을 때에 자신보다 훨씬 더 훌륭한 누군가가 이 사막의 깊은 곳에 살고 있으며, 서둘러 그를 만나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다음 날 안토니는 ‘나의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그의 종을 만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고 말하면서, 당장 암자를 떠나 여행 길에 올랐다.
안토니는 여행 도중 괴물 스런 야수들을 만났다고 한다. 낮에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밤에는 불빛 하나 없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안토니는 3일 동안의 여행을 계속했다.
마침내 폴의 동굴에 도착한 안토니는 폴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까마귀가 가져다 준 빵과 수정 같이 맑은 샘물을 마시며 저녁 식사를 했다.
폴은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60년 동안 매일 이렇게 빵을 보내 주셨는데, 안토니가 온 것을 아시고 자기 군사들의 군량으로 평소의 두 배를 보내 주셨다고 말했다.
폴은 안토니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폴은 오래 전부터 안토니가 이 사막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안토니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폴의 육신을 장사 지내도록 안토니를 보내신 것이라고 했다. 안토니는 울면서 폴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폴은 안토니에게 집에 가서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에게 주었던 망토를 가져다가 자신의 시신을 싸 달라고 부탁했다. 안토니는 폴이 아타나시우스와 망토에 관해 알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폴의 내면에서 그리스도를 뵙는 것 같았던 안토니는 폴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폴의 눈과 손에 작별의 키스를 하고, 삼일 길을 걸어 자기 암자로 돌아 왔다. 안토니는 두 제자에게 자신이 사막에서 엘리야, 요한과 같은 폴을 만났다고 말해 준 후, 그 망토를 들고 다시 집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없을 동안 폴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 갔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여행의 둘째 날, 안토니는 천사와 선지자와 사도들 사이에서 눈처럼 빛나는 폴이 천국을 향해 올라 가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안토니는 자신이 그 남은 길을 얼마나 빨리 갔는지 마치 날아 가는 새가 된 것 같았다고 후에 이야기해 주었다. 폴의 동굴에 도착해 보니 폴은 머리를 세우고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안토니는 처음에 폴이 살아 있는 줄 알고 옆에서 기도했다.
그러나 폴의 육체는 기도하는 자세로 식어 있었다. 안토니는 기독교 전통에 따라 찬송과 시편을 읋으며 폴의 시신을 밖으로 옮겼는데, 땅을 팔 삽이 없었다.
너무나 난감해 하는 안토니 앞에 사자 두 마리가 나타 나더니, 죽은 이 앞에 엎드려져 크게 포효했다. 안토니는 그 사자들이 폴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 사자들은 앞 발로 땅을 파기 시작하더니, 망자를 눕힐 만한 충분한 묘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사라져 버렸다.
안토니는 폴을 장사 지낸 후에, 그의 유품으로 폴이 야자수 나무 잎으로 직접 짠 튜닉을 가지고 돌아 왔다.
인간은 자신이 성취한 것으로 인해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교만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리코폴리스의 존
무릇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무엇 보다도 겸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코폴리스의 존.
'나의 자녀들이여, 나는 우리 교부들의 업적에 대해 당신들에게 이야기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면적으로 교만해지고, 우리의 상급을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테르무티우스.
흔히 수도승의 겸손이, 악령을 쫓는다.
한 원로가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자, 악령은 교활하게도 이렇게 물었다.
"누가 염소고, 누가 양인지 말해 주시오."
원로가 대답했다.
“내가 염소다. 하지만 누가 양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이 말에 악령은 “네 겸손 때문에, 내가 떠난다.”고 부르짖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겸손은 곧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며, 십자가 표지다. 그것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이다. 악령은 겸손에 맞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악령이 지니지 못한 갑옷이다.
어떤 형제가 파코미우스에게 “당신이 본 환시를 말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그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죄인이라, 하나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소.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 환시인지 들어 보시오. 당신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위대한 환시오.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이오. 보이는 인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소? 이것이 매 순간 주님을 보는 성인의 능력이오.”
마귀에게 사로잡힌 살마이 입에 거품을 물고서 한 은수사의 뺨을 때렸다. 그런데 그 은수사는 그에게 다른 쪽 뺨을 내밀었다. 그의 지극한 겸손함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마귀는 그에게서 즉시 나가 버렸다.
한 노인이 말했다. “교만이나 허영심이 당신에게 들어 올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모든 계명을 지켰는지, 당신의 대적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의 죄악들로 인해서 슬퍼했는지, 자신을 무익한 종이며, 모든 사람들 중의 가장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완벽한 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한 노인이 말했다. “시험을 당할 때 너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고, 다만 자신에게 ‘이것은 내 죄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말하여라.”
노인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우리는 마귀들에게 이렇게 공격을 당합니까?"
노인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칭찬을 무시하는 태도, 겸손, 가난, 그리고 인내 등의 무기를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한 수사가 노인에게 물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네게 악을 행한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서, 침묵하라."
한 노인이 말했다.
"만일 천사가 참으로 당신에게 나타난다면, 그를 영접하지 말고 다만 자신을 낮추어 '저는 죄인이므로, 천사를 만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한 노인이 수실에서 정진하는 중에 마귀들을 보고서, 그들을 조롱한 이야기가 있다.
한 마귀는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모습을 나타 내면서 말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이다."
노인은 그를 보고서 눈을 감아 버렸다. 마귀가 그에게 말했다.
"왜 눈을 감느냐? 나는 그리스도이다."
노인이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뵙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듣고서, 마귀는 사라졌다.
한 노인이 말했다.
"나는 교만함으로 얻은 승리보다는, 겸손함을 인한 패배를 더 좋아합니다."
한 수도원에 형제들이 지은 모든 죄까지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는 수사가 있었다. 그는 심지어 음란죄까지도 자신의 죄로 돌리고 고백하는 기도를 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몇몇 수사들은 그에 대해 투덜대며 말했다.
"이 사람은 그토록 많은 죄를 짓고, 일은 전혀 안하는군."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는 그의 영적 교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교만으로 짠 모든 돗자리 보다, 차라리 그가 겸손으로 짠 한 장의 돗자리를 갖겠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증거를 보기 원하느냐?"
그리고는 형제들이 짠 모든 돗자리와 그 수사가 짠 한 장의 돗자리를 가져 오게 해서는 불을 지피고 그것들을 모두 그 속에 던졌다. 그 수사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돗자리가 다 타버렸다.
이것을 본 모든 수사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그의 앞에 엎드렸다. 이후로 그들은 그를 교부의 한 사람으로 대하게 되었다.
한 노인이 말했다.
"하나님이 네게 양심의 가책과 겸손을 주시도록 기도하라. 네 죄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 갖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오직 자신을 다른 사람 보다 낮게 여기라.
여인과 소년과 이단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네 혀와 네 배를 통제하고, 포도주를 입에 대지 말라.
만일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말하면 그와 논쟁하지 말고 다만 '예'라고 대답하고, 만일 그가 나쁜 일에 관해서 말하면 다만 그에게 '당신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라고 말하고, 그가 말한 것에 관해서 그와 논쟁하지 말라. 이것이 겸손이다."
누군가가 노인에게 물었다.
"'우리는 천사를 본다' 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항상 자신의 죄를 보는 사람이 복 되다."
무더운 날씨에 한 노인이 요단강 가에 있는 자기 동굴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동굴 속에서 그는 이빨을 드러내 놓고는 으르렁 대고 있는 사자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노인은 사자에게 말했다.
"왜 울부짖고 있느냐? 이 곳은 너와 내가 있기에 충분한 방이 아니냐? 만일 함께 있고 싶지 않다면, 네가 나가거라."
사자는 그 곳을 나가 버렸다.
83.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동료 수도사들이나 함께 생활하는 형제들과 비교하는 사람은 미혹되어, 하나님과 전혀 맞지 않는 길을 걸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거나, 하늘 나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진보한 사람들은 겸손한 정신으로 이 길을 따라 감으로써 마귀의 책략들을 극복하며, 무정념의 날개를 달고 겸손으로 단장하고서 영적 조명의 고지에 도달합니다.
84. 교만하고 주제 넘은 사람은 결코 양심의 가책에 의해 조명을 받거나 겸손의 은혜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9)라는 말씀처럼, 겸손으로 말미암아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의 빛이 수여됩니다. 교만하고 주제 넘은 사람은 정념들의 밤에 둘러 싸일 것인데, 그 때 인간의 본성이라는 숲 속에 있는 온갖 짐승들이 주위를 배회하며, 시끄러운 주제 넘음의 새끼들인 자부심과 음란의 마귀들은 삼켜 절망의 구덩이 속에 밀어 넣을 대상을 찾아 다닙니다.(시104:20~21, 벧전5:8).
고독(침묵)
아르세니우스(360년경 출생)는 로마인으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왕자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될 정도로 높은 학식과 덕망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호화로운 궁궐에 살면서도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주여, 저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 때 주님은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너는 구원 받을 게다.'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 392년에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막으로 나아 가, 수도에 정진하며 동일한 기도를 드렸다. 그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을 피하고 침묵하며 내적 고요를 실천하여라. 그것이 완덕에 이르는 근본이니라."
세상을 피해 고독에 거하며 내적 침묵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아르세니우스는 이 세상 가치의 노예가 되었던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금식1
성적 순결 다음으로, 사막 교부들이 즐겨했던 금욕적 투쟁에는 금식이 있었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금식부터 극히 적은 양을 먹거나 배부르지 않을 정도의 소식을 하는 등 다양한 차원이 있었다.
사막의 교부들은 인간의 본성, 음식의 포식, 악마의 계략 등에 의해 죄악이 사람을 공격해 온다고 보았기에, 특히 금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수사가 원로들에게 빵을 대접했는데, 원로들이 작은 빵을 두 개씩 먹고 그만 두자 접대한 수사가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 만은 배불리 드시도록 간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각자 열 개 씩을 더 먹었다. 평소에 그들이 자기 필요량 보다 얼마나 적게 먹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수사는 걸으면서 식사를 했는데, 이는 음식을 먹는 쾌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러한 금식의 목적은 육체의 욕심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려는 것이었다.
단식과 굶주림 속에 사는 사람은 영혼을 귀찮게 공격해 오던 적들이 와해 되어 무너짐을 보게 된다. 입 속의 음식이 적을 때 인간의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육체의 욕망을 다스릴 힘을 얻게 되는 법이다.
금식을 하는 방법에 있어 극단적인 행위들이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빠스똘 교부는 매일 규칙적으로 먹되 배 부르지 않도록 조금씩 양을 줄이는 것을 최상의 단식법으로 소개했다.
"요셉 교부가 빠스똘 교부에게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단식해야 합니까?>
빠스똘(포이멘? 혹은 에울로기우스?) 교부는 대답했다.
<내 생각으로는 매일 규칙적으로 먹되, 배부르지 않도록 조금씩 양을 줄여야 하네.>
<그러나, 당신이 젊으셨을 땐 이틀 계속 단식하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 듣게. 나는 사흘도 일주일도 단식했지만, 위대한 어른들이 그 모든 걸 자세히 검토해 보고, 매일 먹되 양을 줄임이 좋은 방법임을 발견했네. 부드럽고 용이하므로 왕도랄 수 있는 그 길을, 그 분들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거야.>
현대인들은 음식을 쾌락을 위해서 먹는다. 그래서 식도락가처럼 더 맛있는 것들을 찾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입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먹는 재미야말로 인생의 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쾌락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는 진정한 삶의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기에, 쾌락은 쉽게 빼앗기게 된다.
사막 교부들은 음식의 절제를 통해 육체의 쾌락을 포기하는 대신, 영혼의 기쁨을 맛보았다.
쾌락과 기쁨은 서로 반대 개념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다만 비교를 하자면 쾌락이 순간적이며,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라면, 기쁨은 영속적인 것이며, 내적인 고유의 것이며, 이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이라곤 하나도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사막 교부들은 그 어떤 꿀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먹었고, 하나님과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소박한 즐거움 속에 살았다.
그들에게 먹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충만한 정신적인 기쁨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빠스똘 교부는 만약 수도자가 두 가지 것을 미워한다면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두 가지란 바로 안락과 허영심이었다.
은수사 존은 처음 3년 동안은 주일 날 성찬에 참예하는 것 외에는 전혀 음식을 먹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리코폴리스의 존은 매일 약간의 과일만 먹었고, 피티리온은 소량의 옥수수 스프 만을 먹었다.
바윗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기 위해 완전한 금식일로 지켰고, 다른 날에는 보통 저녁 때 성찬식을 마친 후에 식사를 하는 것이 규범화 되어 있었다.
보통 수도사들은 하루 중 제 9시에 가벼운 식사를 했다.
그들은 음식을 먹는 횟수만 제한한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와 양도 제한했다.
식욕으로 인한 분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묵상한다는 본질적인 일이 이 금식 고행에는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파테르무티우스는 사막으로 들어 간 시초에 5주일(3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사막에서 물과 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것을 먹으라고 주었다.
초기 사막 교부들이 단식과 고행으로 놀랄 만한 공덕을 쌓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40일을 버틴 수도승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단식은 사수 시기, 혹은 강한 유혹을 극복할 필요가 있을 때나 행하는 것이다.
불결의 악령에게 유혹을 받은 야코부스는 동굴로 들어 가, 40일을 단식한 후 반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비슷한 유혹을 받은 모세는 사막 한가운데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42일을 머물렀다.
사르마타스는 40일 단식을 자주 반복했다고 전해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는 포이멘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는데, 지혜와 분별을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는 사순절 기간 40일 동안 빵도, 물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주일에 그저 식사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양배추 몇 잎을 씹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르는 어떤 속세 음식도 취하지 않고, 12년을 보냈다.
하나님은 생계를 당신께 맡긴 수도승을 기적적으로 양육시킨다.
아노우프와 요한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 났다.
헤론도 석달 동안 성체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견뎠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속세 음식을 제공 받은 사람도 있다.
리코폴리스의 요한은 2~3일 간격으로 식탁 위에서 빵 하나 씩을 발견했다.
파테르무티우스는 매 주일 빵 한 개씩을 받았는데, 이것으로 다음 주일까지 연명했다.
엘리아스는 3주간의 단식 후, 인근 사막의 모래에서 돌연히 야채와 샘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자기 곁에 따뜻한 빵과 꿀과 여러 종류의 과일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수도승은 가끔 육체의 요구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온전한 천상적인 삶을 꿈꾸곤 한다.
일년 내내, 아니 한 평생 사순 시기처럼 단식한 이들도 없지 않다.
스케티스에서 한 원로가 어느 형제에게서 사순 시기가 임박했다는 전갈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단식의 시작과 끝을 모른지도 50년이 되었소. 내겐 한 평생이 단식이오."
40일 간의 완벽한 단식이 사막에서 예외적인 것이었다면, 수도승들은 보완책으로 짧은 단식을 자주 했을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단식한 원로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다.
팔라디우스는 안토니우스가 토요일과 주일에만 식사를 했다고 전한다.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매 이틀 간격으로, 때로는 나흘 간격으로 식사했다고 한다.
포이멘은 젊은 시절 자주 이틀, 사흘, 나흘, 또는 한 주 전체를 먹지 않고 보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매일 조금씩 먹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교부들의 왕도'라고 한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해 주는 카시아누스도 "여러 날 연장된 엄격한 단식보다는, 매일 절제되고 분별 있는 식사가 더 낫다"고 강조했다.
4세기 말부터 하루 한 끼 식사가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한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끼 식사하면 짐승이다."
카시아누스 시대에 빵 두 개는 대개 독 수도승의 하루 정량이었다.
그들은 제 9시에 하나를 먹었고, 하나는 손님과 나누기 위해 보관해 두었다. 손님이 없는 수도승은 저녁에 나머지 하나를 먹었다. 그러나 하루에 빵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전날 종일 굶었을 때만 빵 두 개를 먹었다.
젊은 시절의 포이멘은 빵 하나로 만족했다.
켈리아에서 몇몇 원로가 먼저 작은 빵 두 개를 먹은 후, 손님들의 권유로 열두 개를 더 먹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역시 켈리아 사막에서 에바그리우스는 매일 작은 빵 두 개를 먹었다.
스케티스에서도 빵에 소금을 친다.
파프누티우스는 소금기 없는 빵은 병에 걸리게 한다고 말했다.
빵과 소금은 파코미우스 금욕가들의 일상 식단이기도 했다.
페르메의 테오도루스는 6년 동안 매일 빵 두 개씩 먹었다고 한다. 그는 아침에 소금을 조금 친 빵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저녁에 스프처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몇몇 수도승은 바구니와 돗자리를 빵과 교환했다.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사막에 간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칙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도 이해된다.
대부분의 은수처에 화덕과 가마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4세기 텍스트들은 엄격한 규칙이 서서히 완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세레누스)는 각자 자두 두 개와 무화과 한 개, 콩 다섯 알씩만 먹었다. 이 사막에서 더 이상 먹는 것은 죄악이다.
독 수도승은 탐식과 허영심을 억누르기 위해서 항상 주요리에 극소량의 기름만 사용했다.
이로써 기름기가 목구멍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그 맛을 알 수 없었고, 기름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허영심도 비껴 갈 수 있었다.
치즈와 기름은 각기 고유한 맛이 있어, 수도승의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식품이다.
일반 규정..
식사의 빈도, 소비된 음식, 음료의 양과 질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포만감을 피하고, 약간 배고플 정도로 육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한다.
"육체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만큼이 아니라, 육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만큼 먹는 것" 이것이 기본 원칙이며 황금률이다.
압바 모세가 카시아누스에게, 저 유명한 리코폴리스의 요한이 지나친 단식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악령의 충동질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독 수도승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음식을 스스로 규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원로의 통제가 있어야 한다.
탐식의 악령은 고행을 완화시키고, 허영의 악령은 고행을 강화시킨다.
도로테우스는 자기 육체에게 이렇게 외쳤다.
금식3
<금식이 주는 축복> - 마이크 비클 $ 다나 캔들러
사실 금식은 연약함과 비천함을 드러 내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기본적인 욕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연약성에 대해 더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덧없는지와 함께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금식 기간에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파악하게 되고, 우리의 근원자의 끝없는 무한하심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금식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더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덧없는 세상의 쾌락을 향하여‘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다.
먹지 않아서 육체적으로 연약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더 민감하게 된다. 더 깊은 단계에서 예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연약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훨씬 더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금식이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계시와 만남에 이르는 길이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금식해야 할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어 보라.
금식은 겁낼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가져야 할 실질적인 삶의 훈련이다.
금식이란 하나님의 능력, 사랑, 그리고 더 깊은 경험과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금식을 통해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금식의 사전적 정의는 음식을 금하는 것이다.
금식은 목적 그 자체이기보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금식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뜻을 행하는 데 있으며, 그 분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상은 진실로 엄청나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더 경험하게 되는 정도는 금식의 은혜를 붙드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 마이크 비클
예수님의 첫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마22:37).
금식은 하나님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나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와 같은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핵심적인 답이 된다.
금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소위 ‘신랑을 위한 금식’은 그리스도의 몸이 신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힘을 얻게 만들어 준다.
육적인 생각은 ‘기도나 금식을 왜 하는 거지?’라고 따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기도와 금식으로 이루어진 삶에 담겨진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삶을 드릴 만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에 의해서 움직인다.
우리가 기도와 금식에 헌신할 때, 천사와 귀신의 활동을 포함한 영적인 영역이 영향을 받는다.
기도와 금식은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우리가 능동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영적인 무기이다.
성경이 말하는 금식의 기본 원리
1. 초청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갈망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금식으로 초청하신다.
2. 일종의 역설
금식의 역설은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이 강건해진다는 것에 있다.
3. 일종의 은혜
정기적인 금식에 의해서 우리의 육체가 최상의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은 만들어 놓으셨다.
매주 아니면 매달, 매년 정기적으로 별도의 금식하는 날을 지정해 놓고 금식에 접근하는 생활 양식을 더 추천한다.
4. 겸비케 만든다.
성경은 금식을 우리의 영혼을 ‘겸비하게’하고, ‘괴롭게’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5. 금식이 예배이다.
주님 앞에서 금식하는 것은 주님을 엄청나게 필요로 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쏟아 부을 준비를 더 잘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금식한다.
성경이 말하는 7가지 형태의 금식
1. 개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기 위한 금식 - 찰스 피니, 존G. 레이크, 찰스 웨슬리, 에터, 심플 맥퍼슨, 마헤쉬 챠브다 등
2.‘종말의 때’에 대한 예언적 계시를 얻기 위한 금식 - 다니엘
3. 우리의 도시, 혹은 나라에 임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한 금식 - 느헤미야, 여선지 안나, 사도 바울
4. 위기를 끝내가 위한 금식 - 요나, 모세, 에스라, 한나, 다윗, 요시야, 아합왕
국가적인 위기 금식의 예 - 1588년 영국 무적함대 위협 앞에서, 나폴레옹이 영국 침략을 준비할 때, 제 2차대전 때에 턴케르크에서 영국군 40만이 철수할 때에...
5. 보호를 요청하는 금식 -에스라, 다니엘, 에스더
6. 인도를 요청하는 금식 - 사도 바울
7. 하나님과의 만남과 친밀함을 위한 금식과 신랑을 위한 금식
신랑을 위한 금식은 갈망에 관한 것이다.
아5:8 -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것은 신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임재를 애통한 마음으로 갈망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애통하게 갈망하지 않는 마음은 현재의 메마른 영적인 상태를 그저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한다.
‘애통하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이라도 맛보게 되면,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이다.
갈망이 갈망을 낳고, 깊음이 깊음에게 부르짖는 것이다(시42:7).
신랑을 위하여 애통함으로 금식하는 것은 이 시대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따라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분명히 하는 방법이다.
신랑을 위하여 애통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단의 유혹 하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랑을 위한 금식은 바로 지금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는 것이다.
신랑을 위한 금식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동경 가운데로 들어 가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극하여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소유인, 하나님의 애정과 임재 속으로 온전히 들어 가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무디어지거나 게을러지기 쉽다.
신랑을 위한 금식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고, 무딘 부분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애정을 더욱 크게 경험하게 한다.
신랑을 위한 금식은 또한 우리의 영혼에 거룩함을 가져다 준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애통함이 수반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앓이가 커지게 되면, 우리 안에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에 반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인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타협하거나 죄를 짓고 사는 삶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사랑앓이가 우리를 강권하는 대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놓게 된다.
금식이란 말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사58:3,5).
사랑 때문에 하는 금식은 우리 마음 속에 타협적인 일들과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는 우리의 불경건함을 드러 내어 준다.
금식은 우리의 마음을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고, 인간의 영을 저절로 무디게 하여 더럽히는 어두운 세상을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가 의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열쇠는 우리 안에 내재된 정욕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정욕은 아주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데, 그것은 교만, 분노, 투기, 절도, 부도덕, 포르노, 비통함, 증오, 비방, 질투, 술취함, 음식이나 오락에 대한 탐닉, 합법적 내지는 불법적인 각종 중독 등을 포함한다(막7:21~2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2~1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금식은 자발적으로 약함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금식은 능력과 약함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금식은 육체를 드러 내고 잠잠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우리의 육신은 자연 상태에서는 우리의 영을 지배한다.
금식은 이 지배를 의도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인데, 금식으로 우리 영이 육신보다 잠시동안 상위의 위치를 얻게 된다.
성경은 자기 부인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질식되어 있고, 둔해져 있다.
금식의 삶은 우리들을 울부짖는 영혼의 급류 아래에 둠으로써, 우리 영적 건강의 실제를 보게 한다.
아무도 자신의 어두운 면이 폭로 되고, 자신의 중독증이 드러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금식은 겸손하게 만든다.
금식의 핵심은‘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사58:5) 것이다.
금식의 다섯가지 형태가 산상수훈 안에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음식, 시간(섬기는 것), 에너지, 돈과 말하는 것, 원수 축복을 위해 금식해야 한다.
마6;1~18절
마이크 비클
금식은 정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적인 것, 곧 기독교에 관한 교 과과정 101에 해당되는 것이다.
대적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금식 - 마17:15~21, 빌3:19.
아무도 그들이 음식을 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의 식욕(먹고 싶은 욕망)이 우리들의 계획들 보다 먹는 것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들 중 하나로 놓도록 우리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미식가들... 음식을 신뢰하는 올가미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음식은 태생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적인 욕망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음식도 그 선물들 중의 하나이다.
우울증 - 폭식...
우리들의 육체는 성령의 전이다.
서구 사회의 많은 신자들이 먹는 것과 즐기는 것과 노는 것에 사로잡히는 덫에 걸려 있다.
음식을 통한 영적인 속박
에덴동산
겔16:49 - 소돔의 죄를 일반적으로 부도덕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도덕함을 다른 죄악들의 부산물이었다. 그 소돔의 죄는 네 가지의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음식의 풍요, 만연한 게으름, 가난한 사람을 돕기를 거절하는 탐욕,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자 음식과 시간과 돈을 잘못 사용하게 만든 교만이었다.
이것들은 촉수가 되어 인간의 영에까지 내려 가 성적인 도착이라는 더러운 오물을 끌어 올렸던 것이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겔16:49)’
민11:4~6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우리들이 이것에 빠져 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들을 덜 사랑하시거나 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은 그것에 의해서 둔해진다. 우리의 열정을 음식이나 편안한 삶에 넘겨 준다면, 우리의 삶을 주장하려는 그들의 권세에 우리를 복종시키는 것이 되어서 결국 그들의 지배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그 동안 이것이 간과되어 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
금식은 우리의 육체적 욕망에 탐닉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도록 한다.
중독.. 흉악의 결박을 풀게 한다.
금식생활에 대한 다섯가지 보상. - 마이크 비클
1. 금식은 하나님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예민하게 한다.
2. 금식은 의롭고 초점에 맞춰진 삶을 위한 우리의 역량을 크게 해 준다.
3. 금식은 계시의 성령으로 마음에 빛을 비춘다.
4. 금식은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에 대한 깊은 감각을 강화시킨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떤 누구와 관계가 있는지 알고자 하는 부르짖음이 있다. 신랑을 위한 금식은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우리들의 계시를 강화시킨다.
5. 금식은 우리의 육체를 세워 주며, 우리의 신체적 건강과 영적인 친밀감을 증대시켜 준다.
금식생활에 있어서의 7가지 어려움
1. 신체의 약화와 부작용들
2. 신진대사의 변화
3. 정신력의 약화
종종 정신이 맑지 못하고 몽롱할 때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때때로 멍하거나 단절된 것 같고 마음이 산란하다고 느낄 때 이러한 정신적인 대가를 인식하게 된다.
사람들의 이름 같은 것이나, 해야 할 일을 잘 잊어버리게 된다.
의사소통하는 것이 때때로 더 힘들게 된다.
이러한 정신력의 약화는 분명히 괴로운 것이며, 때때로 부끄럽기 조차 할 것이다.
4. 감정적인 스트레스
금식을 하는 동안 쉽게 귀찮아지고 자극 받는 것은 정상이다.
그것은 종종 소음, 접촉 그리고 행동에 대해 과민해진 신경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달콤한 임재를 느끼는 동안, 외부적인 요인들에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5. 단기간의 효율성 상실
빈번한 금식에 수반되는 에너지와 집중력 결여로 인하여 우리들의 사역과 사업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비록 단 기간 동안의 이러한 실질적인 효율성 저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강화된 의욕을 발견하게 된다.
6. 인간 관계의 혼란과 사회적인 압력
세례 요한을 귀신 들렸다고, 다윗도 그의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처럼 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금식은 우리 영에 두려움을 없애 준다.
참된 교제는 서로 서로 하나님의 생명과 계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7. 마귀로부터의 공격이 증가됨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속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마귀의 공격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그의 활동을 우리속에서 증가시킴에 따라, 마귀도 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이 커진다는 것이다.
대적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이 풀어지는 생활 양식을 목표물로 삼는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는 20년 동안 격심한 금식과 기도로 주님을 섬겼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역설적인 진리는 금식은 더 많은 마귀의 공격을 부르나,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가 대적의 공격을 이겨 내도록 우리를 돕는 한 방편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요일4:4).
금식 생활에 있어서 7가지 위험
우리가 금식할 때 어떤 동기를 가지고 하든지 우리 속의 무언가가 강하게 된다.
1. 마귀의 속임과 거짓 교리들- 사단과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3)
금식은 마치 다이너마이트와 같아서,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금식은 사람의 영을 영적인 영역에 민감하게 하는데, 그 영역은 진짜와 마술적 영역, 둘 다를 포함한다.
2. 고립주의
3. 가난의 영
4. 식사 장애
5, 율법주의와 종교의 영
6. 부적절한 금욕주의나 자기 부인
7. 영적 교만
세계적인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포스트 모더니즘
금식 영성
엘머 타운즈 <금식 기도를 통한 영적 승리>
1. 제자 금식(막9:29) - 나쁜 습관, 중독적인 죄..
2. 에스라 금식(사58:6) - 무거운 멍에를 끌러 준다. 가로 막는 세력, 장해물 극복
3. 사무엘 금식(삼상7:6) -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회개.. 부흥..
4. 엘리야 금식(사58:6) - 모든 멍에를 끌러 준다.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문제(부정적 자기 이미지, 우울증, 탈진, 낙심) 극복
5. 과부 금식(사58:7) - 다른 사람들의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킴. - 사르밧 과부.
6. 사도 바울 금식(사58:8)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 전폐, 회심, 사명 받음..
7. 다니엘 금식(사58:8, 단1:8) - 치료가 급속히 임함, 더 건강해짐.
8. 세례 요한의 금식(사58:8) - 의의 완성
9. 에스더 금식(사58:8, 에4:16) - 나라의 위기를 극복, 느헤미야의 금식(느1:)
하나님께서 기도와 금식을 영화롭게 하심을 압니다.
윌리암 바클레이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유형의 금식을 정죄하셨지만, 금식이 인생과 삶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는 결코 의도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따라 우리의 방식대로 금식을 잘 실천해야 할 것이다.’
J. 로벗 클린턴
‘금식은 새로운 사역을 활짝 여는 데 필요한 “능력신학”의 열쇠가 될 것이다.’
리차드 포스터
‘나는 연구를 통해서 1861년~1954년까지 약 100년 동안 금식을 주제로 쓴 단 한 권의 책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처럼 거의 전적으로 버려진 훈련을 성경에서는 아주 빈번히 언급하고, 세기 세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열심히 실천하였음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기적-초자연적인 능력
바울로 교부는 "사람이 순수함을 지니고 있으면, 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그 사람에게 순종하게 된다"고 기적의 원천에 관해 말하였다.
코프레스는 이교도들과의 싸움에서 불 시련을 견뎌냈는데, 이것은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대적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폴로와 그의 동료들은 감옥에 있을 때에, 베드로처럼 천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리코폴리스의 존은 계속 선지자로 불리웠다.
여호수아를 위해 태양이 멈추었듯이, 파테르무티우스를 위해서도 태양이 멈추어 섰다.
엘리야가 박해를 피해 도피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듯이, 광야에서도 떡이 공급되었다.
기적들이 먼 과거에만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전통 안에 있었으며, 그들은 '구세주께서는 과거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요즈음에도 수도사를 통해서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dunamis’, 즉 ‘능력’ 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위에 임하고 있었다.
1. 투시의 기적
그것들은 주로 선지자들의 통찰이나 예지와 동등하게 위대한 통찰과 예지의 예로서 기록되었다.
리코폴리스의 존은 장래를 예고할 수 있었으며, 선지자의 계열에 속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예언을 취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였는데, 저자는 그것을 금욕 생활의 결과요, 그에 대한 상급이라고 보았다.
테온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2. 사막의 꿈이다.
꿈에 대해선 유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수도사들이 꿈에 대해 크게 조심했다는 점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는 일에는 미혹의 위험이 많다. 하나님 보다는 악마들이 꿈과 환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매우 조심했으며, 개인적인 계시는 불신하며 반드시 시험해 보았다.
오르는 꿈 속에서 마왕을 보고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쫓아 냈다.
사탄이 은수사인 존에게 성찬을 제공했다. 그러나 존은 즉시 그가 대적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둘째 꿈이란 수면 속에 초점을 맞추고 극화되는 위기의 순간들, 전환점,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들을 말해 주는 자연스러운 언어였다는 점이다.
오르, 아폴로, 그리고 은수사 존은 여러 해 동안 홀로 은둔생활을 한 후에, 꿈속에서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라고 말해 주는 천사를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파테르무티우스가 회심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도 꿈 때문이었다.
그는 도둑질을 하면서 살던 중 꿈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황제가 되어 말을 타고 오셔서 그를 자기 군대에서 일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
필레몬은 원래 악사(樂士)였는데, 호민관이신 그리스도를 꿈 속에서 보고 회심을 확인했다.
아폴로는 동생이 자기를 위해 사도들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께 기도하며,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을 보았다.
꿈 속에서 교부들 자신이 나타 나기도 한다.
리코폴리스 존은 자기를 만나기를 원하는 여인의 꿈 속에 나타 났다. 그는 꿈 속에서 그녀를 책망했으며, 또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3. 치유의 기적이다.
리코폴리스의 존은 병자에게 바를 기름에 축복했고,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엘리아스와 오르를 찾아 왔고, 테온은 자기의 수실 창문에 기대어 서서 밖에 있는 병자들을 축복했다.
코프레스는 자신을 병 고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사소한 일이요 의사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완전하고 온전해진다.
4. 자연의 기적들
수도사들과 동물들의 관계.
문제는 어디에서 신적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이다.
베스가 하마와 악어에게 인간들과 평화로이 지내며, 사람들의 땅을 파괴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모운은 두 마리의 뱀에게 자기의 수실을 지키라고 요청했고,
헬레는 나일강을 건널 때에, 악어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마카리우스는 눈을 다쳐 보지 못하는 하이에나 새끼들을 치료해 주고, 그 보상으로 양가죽을 받았다.
인간은 올바른 질서 안에서 다시 회복된 창조 세계와 하나가 되었으며, 그 질서 안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면류관이 된다.
광야에서 금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의 기적적인 양식인 거룩한 떡이 공급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파테르무티우스에게는 매주 신비한 떡 한 덩어리가 주어졌으며, 3년 동안 천사가 오르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고, 아폴로는 부활절 날에 떡을 받았고, 헬레에게도 천사가 떡과 대추야자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수도사가 자기의 생활에 태만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의 떡도 줄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금식은 성경 및 기도 속에서 인간에게 떼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는 관념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이다.
인간이 음식을 적게 먹을수록, 아담이나 광야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떡을 먹을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은수사들은 하나님을 관상할 때에 '빛'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오리겐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이미지이다.
아폴로를 감옥에 가둔 수비대 대장의 집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
어느 성인의 집에 들어 가 도둑질하려던 강도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떤 도둑은 훔친 야채로 음식을 조리하려고 했으나, 야채가 전혀 익지 않았다.
성인과 하늘의 능력이 결합함으로써 그들이 하늘이 임할 수 있는 한 단면이 된다는 것, 그리고 외면적인 능력의 행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들의 근본적인 주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사랑'이었다.
파코미우스의 말
'만일 당신이 순결하고 겸손한 사람을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위대한 환상이다. 보이는 사람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위대한 환상이 어디 있겠는가?'
아모운
종종 강도들이 그의 빵과 양식을 훔쳐 가곤 했다. 어느 날 그는 사막으로 가서 두 마리의 커다란 뱀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것들에게 그의 수실 앞에서 문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한번은 인근 시골 마을을 휩쓸고 다니며 고통을 주는 커다란 뱀을 없애 달라고 아모운에게 요청했다. 새벽녘에 그는 괴물이 항상 다니는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세 번 기도했다. 그 때 뱀이 나타 나서 그에게 덤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무서워 하지 않고 뱀에게 말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커다란 바다 괴물을 멸하기로 된 분께서 너도 멸하실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마자 뱀은 입으로 피가 섞인 독을 모조리 내뿜고는 죽었다. 낮이 되었다. 농부들이 와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 지독한 냄새를 참을 수 없어서 그 짐승 위에 모래를 잔뜩 덮었다.
파테르무티우스의 기적
한번은 그가 과거에 자기의 제자였는데 병들어 떠나 간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해 사막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마을까지는 아직 꽤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요12:35),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11:9)라고 하신 구세주의 교훈을 실천했기 때문에, 밤에 마을에 들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는 해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마음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네 운행을 멈추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지평선 위에 반쯤 걸려 있던 태양은 그대로 멈추어 그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여러 시간 동안 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파테르무티우스는 병든 형제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침대로 다가 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고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과 육신 안에 계속 사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형제가 일어나 앉더니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빌1:23). 내게는 육신 안에 살아 남는 것이 중요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자녀여, 그렇다면 평화로이 잠드시오. 그리고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 중재해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형제는 다시 자리에 눕더니,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파테르무티우스는 죽은 형제를 장사 지내고 밤새도록 찬송을 했습니다.
그는 또 다른 병든 형제를 방문했습니다.
그 형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 오자 몹시 괴로워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파테르무티우스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대의 태만한 생활에 대한 기억들이 그대의 고발자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가려는가?'
그 형제는 이 세상에 조금 더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렇게만 되면 새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파테르무티우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생명이 끝난 이제야 회개의 기회를 구하는가?
그대는 평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대는 자신의 상처를 고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상처를 더 추가하기를 원하는가?'
그런데도 형제는 계속 그에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그는 병든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생활에 더 이상 악을 더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대를 위한 그리스도께 기도해 주겠다. 그 분은 선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므로, 그대가 조금 더 살면서 모든 것을 보상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형제를 위해 기도한 후에 그는 '보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 세상에서 3년을 더 살 수 있게 해 주셨다. 너는 온 영혼으로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형제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사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3년이 거의 다 흐른 후, 그는 그 형제를 다시 마을로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그 형제는 인간이 아니라, 천사 같이 변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형제들이 모였을 때에 그는 완전히 건강한 상태인 그 형제 주위에 그들을 둘러 앉히고 밤새도록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졸음을 느끼더니, 잠이 들어 그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한 후에, 적절히 장례식을 거행하고 그를 묻어 주었습니다.
"그는 종종 나일강을 걸어서 건너 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일 강물이 그의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집의 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는데, 그가 하늘을 날아 갑자기 형제들이 있는 이층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 냈습니다. 그는 종종 마음 속으로 어느 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어느덧 그 곳에 와 있곤 했습니다.
한번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사막에서 돌아 오는 중에, 환상 중에 하늘나라로 올라 가서 진정한 수도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든 선한 것들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자기의 육체가 낙원으로 옮겨져서 많은 무리의 성도들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낙원의 과일들을 먹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냄새 좋은 커다란 무화과를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무화과였는데, 실제로 병든 사람이 그 냄새만 맡아도 그 즉시 병 나음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마귀가 그에게 순금이 가득한 바로의 보물 창고를 보여 주었는데, 그는 마귀에게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말했다.
코프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교부 파테르무티우스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이런 일이나 이보다 더 큰 일도 행하셨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히11:38) 다른 훌륭한 분들도 우리 이전에 살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저는 자와 눈먼 자를 낫게 하는 것을 어찌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사들도 자기들의 기술을 사용하여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나는 그들에게 '만일 당신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이 사막의 모래에서도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서 우리가 밟고 다니던 모래를 웃옷에 담아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그것을 축복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믿음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그 후에 그들은 그 모래와 옥수수를 섞어서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 그 지역의 땅은 이집트의 어떤 지역의 땅보다 비옥해졌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 되어, 매년 모래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통해 또 한번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언젠가 나는 도시로 가는 도중에 마니교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평민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그와 토론을 하였는데도,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리에 커다란 장작불을 지피시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그 불 속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우리 중에서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 참 신앙을 소유한 자일 것입니다.'
내 말대로 장작불을 지핀 후에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을 그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마니교도는 '우리가 따로 따로 불 속에 들어 갑시다. 당신이 제안을 했으니 먼저 들어 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가 성호를 긋고 나서 불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나는 30분 동안 불 속에 있었는데, 그 동안 불길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전혀 나를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본 무리는 소리를 치면서 마니교도에게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서 들어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은 그를 붙잡아서 불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것을 본 군중들은 그를 도시에서 쫓아 내며 '그 협잡군을 산 채로 태워 죽여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환호하면서 나를 호위하여 교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파테르무티우스)는 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만나러 찾아 오는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교도 한 사람이 그 밭에 들어 와 야채를 훔쳐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는 3시간 동안 그 야채를 요리하려 했으나, 요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야채들은 뜨거운 솥에 넣어도 처음 밭에 있던 상태로 그대로 있었고, 물도 전혀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서, 야채를 우리에게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몇 명의 형제들이 우리를 방문중에 있었습니다. 그 야채들은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함께 먹었고, 우리에게 두 배의 기쁨, 즉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형제들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부 소우로우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치지 않고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하겠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마자 순풍에 항해할 준비가 완전히 갖춰진 보트 한 척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을 거슬러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사흘 길인데...)에 도착했습니다.
폴은 '하나님께서는 사흘 후에 그 성인(아노우프)를 하늘로 데려 가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