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 카작(Kazak)에서 온 안부
샤샤가 우랄강에서 아주 큰 잉어를 잡았네요(복장은 IS같지만 아주 마음씨가 착한 고려인입니다)
물반 고기반인 우랄강이 넘실넘실 흘러갑니다.
릴 낚시를 두대 걸었네요. 아마 이 낚시로 잉어를 잡은 모양입니다.
너무 멋있는 아띠라우의 하늘입니다. 마치 천지창조 때 하늘의 모습같지요.
Good morning 36!
이 시간 제가 일하고있는 문산 복합화력발전소 건설현장의 전광판 온도계는 26.6도입니다. 점차 더 더워져서 한시간 후인 2시쯤에는 아마 28도는 오를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날씨는 일 하기에도 놀기에도 뭘 해도 다 좋은 그런 날씨입니다. 건설현장 특성 상 평일과 진배없이 일을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른 평일과는 다르게 맘적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 글도 쓰고 여기저기 밀린 전화도 합니다. 스마트폰이 카톡 카톡 노래을 불러서 카톡을 여니 36친구들 사이로 낮선 러시아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잠시 멈칫하다 순간, 저는 아! 샤샤(Sasha)로구나. 하고 열어봤습니다. 멀리 카자흐스탄의 서쪽 끝 카스피안바다에 잇닿아 있는 석유도시 아띠라우(Atyrau)에서 샤샤가 안부를 전해온 것입니다. 제가 아띠라우를 떠난 지 어언10년, 어떻게 샤샤는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앞자리가 019였고 다음이 319였던 내 번호는 알고 있었겠지만 벌써 오래전에 010 2319로 바꿨는데도 용케 카톡이 들어온 것입니다.
샤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오십대 중반쯤 일겁니다. 그는 연변에 살던 조선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카자흐스탄의 아띠라우까지 흘러가서 고려인 ‘이라(Ira)'와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뒀습니다. 벌써 큰 아들이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답니다. 제가 좋아했던 루디밀라집사님이 벌써 할머니가 됐다는 소식도 전해왔습니다. 루디밀라집사님, 서툰 한국말로 아직은 마흔아홉이라고 했고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이란 노래를 좋아하며 자주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맑고 유난히 푸르렀던 아띠라우의 하늘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오늘 샤샤는 아띠라우의 하늘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우랄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푸른 하늘을 보니 제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저는2003년3월부터 2005년9월까지 2년 반 동안 아띠라우에 있었습니다. 2003년 초에 지인으로부터 카자흐스탄의 정유공장건설현장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었고 저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었습니다. 그래서 Mr. Akita라는 JGC ARR(Atyrau Refinery Reconstruction)프로젝트 현장소장을 만났고 그가 받아들여 아띠라우현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참, 여기서 그냥 넘길 수 없는 한 가지의문(?)이 있습니다. JGC의 ARR건설현장의 Manager급 Staff은 거의가 일본인이었고 전기(이태리인), QC(말레시안)만 외국인이었는데 가장 중한(?)보직인 Piping Manager를 왜 한국인으로 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제가 일을 하면서 자연히 알게 됐습니다. Owner인 카스 무나이 가스(Kaz Munai Gas / 한국의 석유공사와 유사한 기관)의 배관담당 감독이 ‘오가’라는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JGC는 저 같은 한국인을 ‘오가’의 상대로 택한 것이었습니다. ‘오가’는 한국인 성씨인 오씨를 부르는 고려인들의 표현입니다. 그는 가끔씩 저를 부를 때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단 한마디 한국말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띠라우는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티(Almaty)에서 서쪽으로 3000km떨어져있고 비행기로 2시간 반이 걸리고 같은 나라지만 1시간의 시차가 납니다. 인구는 약20만 명인데 그 중 고려인이 3,000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띠라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저를 포함해서 한국인이 6명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파송된 젊은 김선교사님 내외분과 그 아들, 미국시민권자로 사업을 하시던 김사장님 내외분 그리고 저 이렇게 가 한국인 모두였습니다. 저는 매주일 마다 김선교사님이 사역하는 고려인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샤샤를 포함한 많은 고려인들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는 선교사님이 한국말로 설교를 하면 현지 고려인이 러시아어로 통역을 하면서 예배가 진행됩니다. 그 당시 연세가 칠십에서 팔십 가까이 되신 고려인 할머니들이 10여 분 됐고 젊은 고려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도 제법 많이 교회에 왔었습니다.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아, 예. 일 없습니다. (북한식이지요) 그리고 할머니 하시는 말씀, 내 오늘 반찬 좀 같고 왔으니 갈 때 같고 가기요. 반찬은 우리나라 말이지요. 그러나 그곳 식품시장에 가서 반찬이라고 말 하면 다 알아들 들었습니다. 무채를 썰고 양배추도 무채같이 썰어서 고추 가루로 비빈 듯한데 그 안에 물론 젓갈이 들어가 있고 마치 함경도 식혜처럼 굵직한 생선토막도 들어있었습니다. 맛이 좋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여흥을 즐겼습니다. 덩실덩실 한국 춤도 추고 러시아민요를 부르며 멋지게 군무를 추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아띠라우 시내 중심에는 ‘우랄강(Ural River)’이 흘러 가까운 ‘카스피안 해’ 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우랄강은 우랄산맥에서 발원하여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강폭은 250m에 수심은 약 3m정도 됐습니다. 금문교 같은 멋진 아치형다리가 걸쳐져 있습니다. ‘우랄강(Ural River)’동편은 아시아이고 강 건너 서편은 유럽으로 다리 동편입구에는 "ASIA"라고 현판을 달은 작은 종각이 서있고 서편에는 똑 같은 크기 모양의 종각에 "EUROPE"이라는 현판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휴일이면 강변에서 산책을 즐기며 다리를 넘나들며 유럽과 아시아를 오고 갑니다.우리숙소는 그린호텔(Green Hotel)이었는데 아시아 쪽에 있었습니다.
아띠라우와 그 주변 지역은 기원전부터 스키타이, 사르마트 등 여러 기마민족들의 활동무대였고, 13세기에는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손자 '바투가' 가 세운 '금장한국(알툰 오르두 또는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치크(Saraychik)"가 근처에 세워지는 등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습니다. 현재의 아띠라우 역시 1644년부터 교역도시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석유가 사방으로 흘려나가고 다른 나라에서 식료품이 이곳으로 실려오고 있습니다. 이 도시 아띠라우에서 파는 과일과 채소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겐트"에서 기차에 실려서 이곳까지 온답니다.
수도 아스타나에서 서쪽으로 3천km넘게 떨어진 이 '시골'에는 국제공항이 있고 공항에서는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모스크바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등 을 오가는 국제선 직항기가 뜨고 내리고, 미국과 유럽인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습니다. 비나 눈이 오면 거리는 온통 진흙탕이 되고 흙먼지가 온 시가지를 뿌옇게 만들며 3월 말경, 날씨가 조금 풀리기 시작하면 모기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길 거리를 다닐 수 가 없는 작은 도시 아띠라우의 서쪽 유럽지역에는 새로 지은 고층 사무실 빌딩과 값비싼 화려한 호텔들, 깔끔한 고급 빌라촌 등 이 사치스러운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도시입니다. -다음에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네요.
소중한 인연들을 가지고 있네요. 나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4년을 살았는데 그 때 추억이 인생 전반에 걸쳐 있는 것 처럼 비중이 커요.
지 총무는 어떻게 카자스탄까지 가셨는지?
난 7년전 정년을 하고 형님이 계신 볼그그라드에 가서 6개월간 고려인들 한글을 가르쳐 주고 왔는데..
거기 교려인들중에도 샤샤라는이름이 있었는데 나타샤도 있었고......
나도 1년까지는 서로 연락이 됐는데 지금은 소식 돈절~!
좋은 친구를 두었으니 우정을 계속 나누시기를,
사진은 고려인들 한글 공부 시간 ~~~일주일에 두시간씩 세번 수업을 했는데 내가 올때 쯤은 제법 한글을 익히고 대화도 쫌 가능했는데/
잉어는 급냉동으로 집에까지 배달이 됐나요?
매운탕으로 일품일텐데 기대됩니다.
쐬주한잔 카~악 ㅋ
( 나 벌써 더위먹었나봐 하하하)
하, 날씨 덥네요! 박형, 오랜만입니다. 잘~감사.
영배총무, 수고많습니다! 그랬군요. 난 나만 사우디 갔다 온 줄 알았답니다.
정현형, 언제 한번 블라딕 보스톡이나 원동 아무데라도 가 봅시다. 속초에서 배타고.
기훈형, 잘 지내죠?첫 토요산행 때 봅시다. 핫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