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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원어강해설교 7회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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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께 속하여 성령의 일을 깨달음
본문: 고전 2: 10-16
Ⅰ. 서론
앞에서 사도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참 지혜라고 하였으며, 이를 깨닫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본 문단에서는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란 성령께 속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성령께 속한 우리들이 성령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받았으며, 세상과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 없음을 가르친다.
본문의 구성은 10-11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보이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다음 12-13절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달으며,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써만이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며, 마지막 14-16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하나, 신령한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Ⅱ. 본문강해
1. 성령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보이심
10-11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성령으로 나타내셨는데, 성령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요 4:24)이심을 가르친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셨다는 뜻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라고 할 때 이것이란 앞의 문단에서 말한 하나님의 지혜를 뜻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말한다.
보이신다라는 <아포칼립토>는 보통 계시하다라고 번역하는데, 감춰졌던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이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였던 것이 드러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를 알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오직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계시하셨다는 뜻이 아님을 이해하여야 한다. 같은 바울 사도의 편지인 딤전 2:4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자가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들이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므로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만 알게 하신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써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로 인하여 영에 속한 것을 분변할 수 있는 영적 인식력이 두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에 속한 일들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성령의 계시로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또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결국 심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신다고 하였는데, 통달한다는 <에류나오>는 막힘없이 통하여 안다는 뜻이다. 곧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신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11절에서 사도는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겠느냐 라고 설의법으로 묻는다. 사람의 사정이란 겉으로 드러난 형편이 아닌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프뉴마>이 안다고 한 것은 그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이야말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된다. 즉, 사람의 본질은 껍데기 육체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는 내부의 영이 모든 의식활동의 주체가 된다. 영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인격적 삶을 살게 되는데, 이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불순종과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단절되었지만, 인간 내부에 있는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 정, 의라고 하는 인격적 특성을 나타내게 한다.
동물은 영이 없으므로 아무리 지능이 높다고 하여도 인격 활동을 할 수 없다. 곧 인간처럼 체계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고, 긍휼이나 효도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으며, 무엇을 신앙하는 종교적 행위를 할 수 없다. 지난 일을 회개하면서 앞날을 설계하는 등의 의지적인 부분도 불가능한 것이다. 동물이 생각하는 것은 뇌의 활동에서 비롯되므로 본능적 영역에 국한된다. 인간도 정신 작용의 일부가 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루는데 필요한 인격적 활동은 마음속에 있는 영의 활동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구조를 육<사르크스>과 영<프뉴마>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고 있으며, 육과 영이 결합한 상태가 살아있는 사람이며 육에서 영이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가르친다. 혹자는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삼분설을 주장하면서 육과 영 외에 혼이 있다고 하는데, 혼(魂)이란 '생명, 목숨'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쉬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 형성된 개념이다. <프쉬케>는 단지 육과 영이 결합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지 사람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아무튼 우리의 외형을 이루고 있는 육체라는 것은 용기에 불과하며, 실제로 우리의 본질은 육체 안에 담겨져 있는 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정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능력의 일체를 뜻하므로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주님께서 요 4:24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성령이라고 가르치신 것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곧 성령인데, 바울 사도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하는가? 이는 성령이란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요 4:24)이시지만,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본질(고후 3:17)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즉, 성령이라는 한 본질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요 10:30)가 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비밀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이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만드시는 두 분의 본질이시다.
따라서 성령은 곧 하나님 그 자체로 이해해야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히 구별(요 14:28)되지만 한 성령 안에서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성령을 굳이 제 삼의 별도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삼위일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Tritheism)이다. 곧 삼위이체론(三位異體論)이 되고 만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원어로 여는 로마서」pp. 449-454 를 참고하라.
2. 성령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
12-13절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달으며, 성령의 일은 성령으로써만이 분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프뉴마 코스무>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롬 5:12-17에서 보듯이 세상 모든 자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아담의 죄와 그가 받은 사망의 저주에 연합된 운명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들은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 하에 붙들린 채 고통하며 신음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아담과의 연합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둘 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 새롭게 연합되는 길밖에 없는데, 주님께 연합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은혜로 주신다는 말은 <카리조마이>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우리의 구원이므로,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인식하여야 할 뿐 아니라 은혜 안의 삶을 유지하여야 한다.
12절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로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음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말은 믿는 자마다 믿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져서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믿음을 고백하는 즉시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이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행 10:47)은 당연한데, 믿는 자마다 먼저 성령을 받은 자로 간주되므로 나중에 세례를 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행 19:2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 말이 어리석은 말이 되고 만다. 이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말인데, 모든 믿는 자마다 성령을 먼저 받고 믿는 것이라면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따라서 12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지만,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13절에서 '이것'을 말한다는 것은 10절의 '이것'과 같은 내용으로 7절의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은 세상 지혜와 웅변으로 깨닫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성령<프뉴마 하기온>의 가르치신 것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성령의 가르치신 것이란 성령의 계시와 조명을 뜻한다. 이는 또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과 영적 지식은 모두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 신령한 일을 신령한 것으로 분변한다는 말의 해석에는 헬라어 분석이 필요하다. 신령한 일이라는 <프뉴마티카>는 <프뉴마티코스>의 복수형으로 '영적인 것들'이라는 뜻으로서 복음을 비롯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영적 지식을 가리킨다. 신령한 것으로라고 한 <프뉴마티코이스>는 수단을 표현하는 복수 여격으로서 '영적인 것들로써'라는 의미인데, '성령의 계시를 받아 깨달은 대로'라는 뜻이다. 또한 분변하다라는 <슁크리논테스>는 함께 판단한다는 <슁크리노>의 수동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관한 영적 지식은 세상 지식으로 알 수 없고 오직 영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영적 감응력(感應力)으로써만이 이해되어진다는 의미이다.
3.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
14-16절은 육에 속한 세상 사람과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성도의 차이를 말하면서 육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으므로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성도들은 영적인 일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안다는 것이다.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를 번역한 말로서 '자신의 육체적 생존에 급급하여 사는 세상 사람'을 의미한다. <프쉬키코스>는 목숨, 생명, 생존 또는 사람 자신이라는 뜻의 <프쉬케>에서 온 말이므로 의식주와 같은 자기의 생존에 연연해서 사는 상태를 가리키며, 이는 곧 15절의 신령한 자인 <프뉴마티코스>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사도는 이와 같이 세상에 속하여 자신의 현재적 삶에 연연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타 프뉴마토스 데우>이란 앞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이다. 세상 사람들이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1:18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도가 육에 속한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련함이라는 <모리아>는 헛되다라는 <모로스>에서 온 말이다. 곧 세상 사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자신의 생명과 무관한 헛된 것으로 생각하므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 곧 십자가의 도는 영적으로만 분변할 수 있다고 되풀이하는데, 이는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사도의 일관된 사상이다. 감각적 경험에 의존해 사는 세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영계에 속한 비밀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계에 속한 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계의 일은 영적<프뉴마티코스>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영적으로 분변한다는 것은 영계를 이해하고 영적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성령께 의존하여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특이한 환상적 경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영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절대 안 된다.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프뉴마티코스>인데 '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며 앞에서 말한 '육에 속한 자'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이는 무슨 영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갈 6:1-8에서 말하는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곧 영적인 사람은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장성한 사람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히 5:14에서 장성한 자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선악을 분변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순진한 아이인 <파이디온>이 아니라, 유치한 아이인 <네피오스>이다. 즉,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성령을 따라 영적으로 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사는 세상사람처럼 사는 자이다. 3:1에서도 사도는 영적인 사람을 어린아이와 대조시킴으로써 장성한 사람과 같은 개념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과 장성한 자가 선악을 분변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선악을 분변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하나님께 속하는지 아니면 육체에 속하는지를 안다는 말이다. 곧 성령을 좇아 사는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인 원리에 따라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 행위의 열매가 선할 수밖에 없다.
한편 그러한 성도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할 때 판단<아나크리노>은 일종의 심판을 뜻한다. 이는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하는 광의적 심판이 아니라 협의적 의미로서 악인에 대한 형벌 심판을 가리킨다. 세상은 믿지 않으므로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다. 성도가 믿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일이 있지만, 그들의 판단은 헛되므로 조금도 개의할 일이 못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로운 신분이 되었으며 그 행위가 선에 속하므로 하나님의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고귀한 것이다.
16절에서 사도는 영적인 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가지기까지 함으로써 주님의 교훈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가 주님의 마음<누스 퀴리우>을 알아서라는 말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한다. 곧 제자로서 스승이신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다. 주를 가르치겠느냐고 할 때 <쉼비바조>는 원래 함께 가다라는 뜻이었는데, 의미가 발전하여 논증하다, 증명하다, 가르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의미는 '누가 주님을 논증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누가 주님의 교훈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오신 주님을 모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며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주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남에게 주님의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Ⅲ. 결론과 적용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인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될 때 자신들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소개받았을 때 그것에 반응하며 그것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성도의 마음에 거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시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신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확실히 알고 영적인 일을 깨닫게 하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분별력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와 영적 지식인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된다. 그렇다면 성도라 하면서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욕구에 지배받으며 살고 있다면 진정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