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은 예로부터 말(한문으로 말 마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몇 사람이 둘러 않으면 자연스레 말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이 가운데 대부분은 말과 연관지어 영천을
깎아내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영천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영천이 말과 연관지어졌는지, 또 그 같은 유래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잘 모르는 형편, 오래 전에 영천에 역마가 있었고 신라의 도성인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말이 많았을 것으로 어렴풋이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과연 영천과 말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향토사학자들은 정립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 영천과 말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말을 갈아타는 역마가 이 지역에 크게 성행했다는 것과 곡물주산지였던 영천지역의 곡물상들이 쓰던, 부피를 재던 되와 말이 말로 와전됐다는 설이다.
영천에는 오래된 속설로 '잘 가는 말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이란 말이 있다. 영천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높은 재들이 유난히 많았다. 안강과 포항지역에서 넘어오는 시티재와 신녕과 경산 하양에서 넘어오는 갑령재, 청도방면의 오재, 청송방면의 노귀재 등이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이곳을 넘어 오던 행인들은 경주를 지척에 두고 마지막 휴식처인 영천에서 숨을 고르게 됐고 말의 먹이를 주고 편자를 교환하는 말죽거리가 크게 형성됐다.
당시에는 경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말과 행인의 입성을 규제했으며, 그런 말들이 금호강변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섰다고 전해진다. 말을 타고 도성으로 입성하면 부자로 취급받아 도적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영천에 말을 매어두고 경주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곡물주산지인 영천의 지리학적 영향에서도 말과 관련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영천에는 과거 영남제일의 5일장이 섰고 지금도 영천장은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경북에서 생산되는 각종 곡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왜관은 미곡, 영천은 잡곡이 집결됐다.
이 가운데 콩은 영천의 대표적인 상품이 됐다. 당시 영천장 상인들은 타고난 상술로 한번맺은 단골을 끊지 않기 위해 장사인심이 후했다. 영천상인들은 전국에서 모인 곡물 중간 도매상들에게 되와 말을 수북이 담아 주었고, 이 같은 장사인심은 다른 장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면서 '영천에 가면 되와 말이 좋다'는 말이 나왔다. 이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영천장 되도 말도 좋다'에 이어 '영천 되말 좋다'로 변했다는 것.
또 영천은 큰장이다 보니 소규모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5되들이 소두말로는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10되들이 대두말을 사용하게 됐는데 영천에 가면 대말을 사용한다해서 '영천 대말'이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