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2 : EMPTINESS 법문 2 : 빔(공)
1. In the previous talk I spoke of emptiness as being an important subject but the occasion didn't permit me to give it the special attention necessary for a thorough understanding. So as some aspects of this subject of emptiness remain obscure, today I have come to talk about it specially. 전번 법문에서 빔(공)을 중요한 주제라고 언급했지만,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특별한 주목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빔(공)이란 이 주제의 어떤 면들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므로 오늘은 특별히 빔(공)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Emptiness is the most difficult to understand of all the Buddhist Teachings because it is their innermost heart. Being called a heart it must obviously be something subtle and profound. Its understanding does not lie within the scope of mere conjecture or the sort of pondering that ordinary people are accustomed to. It can only be understood by determined study. 빔(공)은 붓다 가르침 중에서 가장 내부 깊숙한 심장 속에 있으므로 매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심장이라고 불리므로 그것은 명백히 미묘하고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그 이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익숙한 숙고나 단순한 추측의 범주 내에 있지 않습니다. 빔(공)은 확고한 결심으로 공부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The most essential meaning of the word 'study' is of the unceasing, dedicated observation and investigation of whatever arises in the mind, be it pleasant or unpleasant. Only one familiar with the observation of mind can really understand Dhamma. One who merely reads books cannot understand and what's more may even go astray. But one who tries to observe the things going on in the mind and always takes that which is true in his or her own mind as a standard has no way to get, muddled. Such a person will be able to comprehend Dukkha and the cessation of 공부한다는 말은,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마음에 일어나는 무엇이든지 끊임없이 관찰과 조사에 몰두하는 것이 그 가장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마음을 능숙히 관찰할 때에만 실제로 담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책만 읽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이에 더하여 빗나간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항상 자신의 마음에서 진실한 것을 기준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혼란되지 않으며 빗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둑카(고)와, 둑카(고)의 소멸을 이해할 수 있고, 궁극에는 담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읽을 때,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From the moment of birth to the time of death we must train ourselves in this way, examining the contact of the mind with the objects that surround it and the nature of the results of that contact, for in that natural process there will inevitably be both pleasure and pain and observing them will make 'the mind wiser and more resilient. To keep observing the nature of our thoughts generates a mind emptied of Dukkha, and so, is the very best knowledge there is. Through it we gain familiarity with the realization or awareness of emptiness.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과 주위 사물의 접촉과, 이 접촉의 결과로 생긴 것의 성품을 조사 검토하는 식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과정에서 즐거움과 고통은 피할 수 없이 있을 것이며,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을 더 지혜롭고 유연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성품을 계속 관찰하면 둑카(고)가 없는 마음이 생기고, 그리고 그곳에는 최상의 앎이 있습니다. 그 앎을 통해 깨달음 또는 빔(공)을 알아차리는 것에 친숙하게 됩니다.
Please think back to the point made in the last talk that the Commentators all called the Buddha the 'Spiritual Doctor' and divided disease into two kinds: that of the body/mind and that of the spirit. Both diseases of the body and those of the mind such as are treated in mental hospitals were considered to be Physical Disease. Spiritual Disease, or Mental Disease as they called it, refers to the disease that must be treated with Dhamma. So I would like to make the point that if you are really to understand disease you must make this division: take diseases of the body and of the mind (the mental body) as being both physical disease. As for spiritual disease it is not a disease of the brain or nervous system but is an illness affecting truth discerning awareness (satipanna), that which knows our life and the world as they truly are. So it refers to Ignorance or the wrong understanding that springs from ignorance and causes the wrong actions that lead to Dukkha:, even if physically and .mentally we are quite healthy. 지난 법문에서, 모든 주석서에서는 붓다를 '영적 의사'라고 불렀고, 병을 두 종류, 즉 몸-마음의 병과 영적인 병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몸의 병과, 정신병원에서 치료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병은 육체적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영적 병, 또는 주석서에서 정신적 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담마로 치료해야 하는 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병을 이해하고자 하면 몸과 마음(정신체)의 병을 모두 육체적 병으로 간주하는 분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영적 병은 뇌나 신경계의 병이 아니라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사띠-빤냐)'에 영향을 주는 병을 말합니다.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은 우리 삶과 세계를 있는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병은 무지에서 일어나고 둑카(고)에 이르는 잘못된 행동의 원인이 되는 무지 또는 잘못된 이해를 말합니다. 비록 육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영적 병이 있습니다.
When we are suffering from Spiritual Disease with what must we treat it? We must treat it with emptiness. What's more, emptiness (sunnata) is not only the cure of the disease but is also the freedom from disease. There is nothing beyond emptiness. The medicine which cures the disease is the knowledge and practice that gives birth to emptiness. When emptiness has appeared, it will be the cure of the disease and alter recovery from the disease there will be nothing save emptiness, the state void of Dukkha and void of the mental defilements that are the cause of Dukkha. This emptiness, which has that wide breadth of meaning, is self-existent: nothing can come to touch it, develop it, improve it, or do anything to it. Thus it is a timeless state, for it mows neither birth nor death. Its 'being' is not the same as the being of things which are born and die but since we have no other word to use, we say 영적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무엇으로 치료해야 할까요? 영적 병은 빔(공)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빔(공)은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병에서 해방되게 합니다. 빔(공) 위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약은 빔(공)을 생기게 하는 지식과 실천입니다. 빔(공)이 나타났을 때, 빔은 병을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이며 빔을 구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빔은 둑카(고)가 없는 상태이며, 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인 정신적 오염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빔(공)에는 넓은 의미가 있으며, 스스로 존재합니다. 어떤 것도 빔(공)을 건드리거나 계발하거나 향상시키거나 그에 어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빔(공)은 시간을 초월한 상태입니다. 탄생과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태어나고 죽는 사물의 존재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를 표현할 다른 말이 없기 때문에 '불변의 빔(공)'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합니다.
If anyone realizes, that is to say if anyone's mind realizes this thing, then it will be the medicine that cures the disease and the immediate recovery from disease, a state timelessly empty. It is true health. Please keep trying to grasp the meaning of this word emptiness, or sunnata as it is in Pali, as I explain it point by point. 누군가 깨달으면, 즉 누군가의 마음이 이것(빔)을 깨달으면, 병을 치료하고 즉시 병에서 회복되어 영원한 빔(공)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건강입니다. 이 빔(공), 팔리어로 순냐따(sunnata)란 말의 의미를 포착하는 노력을 하기 바랍니다. 빔(공)의 의미를 이제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Firstly, consider the point that the Buddha declared that every word that he, the Tathagata [14] spoke referred to the subject of emptiness. He spoke of no other matter, either directly or indirectly. Any talk unconnected with the subject of emptiness is not the speech of the Tathagata but of disciples of a later time who liked to speak at great length to show how clever and articulate they were. 우선, 붓다께서는 따타가따가 한 모든 말은 '빔(공)'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라고 선언하신 점을 숙고해 보십시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다른 주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빔(공)이란 주제와 관련이 없는 법문은 어떤 것도 따타가따가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후대 제자들의 말입니다. 특히 얼마나 명석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지 보이려고 길게 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제자들의 말입니다.
One can, if one wants to, add much more, for example: that emptiness is the absence of self or what belongs to self, for the word emptiness has a whole host of applications. Although the characteristic of emptiness remains constant, its expressions are innumerable. That being so, we will aim to examine emptiness only as absence of Dukkha and the defilements that are the cause of Dukkha and as the absence of the feeling that there is a self or that there are things which are the possessions of a self. This is emptiness as it relates to our practice of Dhamma. 누군가 설명을 더 많이 보태어 주기를 원한다면, 예를 들어, 빔(공)은 자아가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빔(공)이란 말은 모든 지주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빔(공)의 특성은 변하지 않으나 수없이 다르게 표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둑카(고)와 이의 원인이 되는 오염원이 없고, 자아가 있다는 느낌이 없고, '자아에 속하는 사물이 있다'는 느낌이 없는 것으로만 빔(공)을 검토하겠습니다. 이것은 담마의 실천과 관련된 빔(공)입니다.
If we enquire which of the Buddha's utterances dealing with this matter can be taken as authoritative statements we will find that in many places the Buddha taught us to know how to look on the world as being empty, as in the phrase of ''Sunnato lokam avekkhassu mogharaja sada sato' which means "You should look on the world as being empty. If you can be always aware of the emptiness of the world, death will not find you." 이 문제를 언급한 붓다의 말씀으로서 믿을 만한 구절을 찾고자 하면, 많은 곳에서 붓다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빈 것으로 바라보는지 알도록 가르치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으로서, "순냐또 로캄 아웩카쑤 모가라자 사다 사또(sunnato lokam avekkhassu mogharaja sada sato)"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세상을 빈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항상 세상을 빈 것으로 알아 차릴 수 있다면, 죽음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These words of the Buddha enjoining us to see the world as being empty show that it is the highest thing. Anyone who wants to be without problems concerning Dukkha and death, should look on the world, i.e. "on all things, as they truly are namely as empty, neither 'I' nor 'mine'. The statements of the Buddha that follow on from show the benefits: 'Nibbanam paramam sunnam and 'Nibbanam paramam sukham', which translate as 'Nibbana is the supreme emptiness' and 'Nibbana is the supreme happiness'. You must understand that Nibbana is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of Dukkha, means the same as supreme emptiness, and that it is possible to know and realize an emptiness that is not supreme, an emptiness that is in some way deficient or false. The truth-discerning awareness must be so impeccably clear that one has not the slightest feeling of 'self' or 'belonging to self' for it to be called paramam sunnam, supreme emptiness. Supreme emptiness is Nibbana because it completely extinguishes the things that are on fire, the stream or whirlpool of flowing and changing phenomena. Thus the supreme emptiness and the supreme extinction are one and the same thing. 세상을 빈 것으로 보라고 이르신 붓다의 이런 말씀은 그렇게 보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둑카(고)나 죽음과 관련하여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자는 세상, 즉 모든 사물을 진실로 '나'나 '내 것'이 없는 '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붓다의 말씀은 (세상을 빈 것으로 볼 때) 그 이득을 말해 줍니다. '닙바남 빠라남 순냠'과 '닙바남 빠라남 수캄'은,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빔이다'와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행복이다'로 번역되는 말씀입니다. 닙바나(열반)는 둑카(고)의 완전한 소멸이고, 최상의 빔(공)과 같은 것이며, 불완전하고 그릇된 빔(공)을 알고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은 한 점 나무랄 데 없이 투명하여 '최상의 빔'이라 불리므로, (열반에 이른) 자는 '자아가 있다는 느낌'이나 '자아에 속하는 사물이 있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습니다. 최상의 빔은 불타는 사물을 완전히 끄서 식히고, 유동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흐르고 변하는 현상을 완전히 소멸시키므로 닙바나(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빔과 최상의 소멸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As for the saying that Nibbana is the supreme happiness, it is an expression in the language of relative truth, a sort of enticing propaganda in the language of the common man used because in general people are infatuated with happiness, they want nothing else. So it is necessary to tell them that Nibbana is happiness and what’s more it's the supreme happiness. But truly speaking Nibbana is greater than happiness, beyond it. It is emptiness. It can't be said to be either happiness or suffering because it lies beyond both the suffering and the happiness known by the common man. But when one speaks like this, people don't understand and so it's said instead, in the language of the worldly, that it is ultimate happiness. This being so, when using the word happiness you must be careful to use it in its proper sense. It is not the happiness that people generally see or aspire to. It is a different sort of happiness, it is the state empty of every single thing that proliferates, flows, and changes. Thus it is truly lovely, truly refreshing and truly desirable. For if there is still flowing and changing, a constant swaying and rocking, how can there be happiness? '닙바나(열반)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은 상대적 진리를 나타내는 언어상의 표현입니다. 일반인들은 행복에 홀려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므로 보통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마음을 끌어 (담마를) 가르치기 위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닙바나는 행복이고, 더우기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닙바나(열반)는 행복보다 더 높은 것이며, 행복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그것은 빔(공)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괴로움이나 행복을 초월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행복이나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할 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므로, 세상말로 대신하여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므로 행복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주의하여 타당한 의미로 사용해야 합니다. 열반(빔)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고 갈망하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행복이며, 증식하고 흐르고 변하는 사물이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실로 멋지고 진실로 신선하고 진실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아직 흐르고 변하는 것이 있어서 계속 흔들리고 동요한다면,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Thus the feelings of pleasure arising from contact with the various sense-objects are illusory, they are not the ultimate happiness. The happiness of the common man is not the supreme happiness of Nibbana that is emptiness. So in hearing the phrase 'Nibbana is the supreme happiness' don't go jumping to the conclusion that Nibbana is exactly what you're looking for and start dreaming about it without taking into consideration that it is also supreme emptiness. 다양한 감각 대상이 접촉하여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은 환영일 뿐이며, 최상의 행복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의 행복은, 빔(공)의 상태인 닙바나(열반)라는 최상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최상의 빔(공)'이란 말도 고려하지 않고 닙바나(열반)는 자신이 찾고 꿈꾸는 것과 꼭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The saying of the Buddha which deals with the practice in regard to emptiness is the one that is the heart of the Buddhist Teachings: 'Sabbe dhamma nalam abhinivesaya' which translates literally as 'No dhamma whatsoever should be grasped at or clung to'. If one amplifies the meaning a little it may be rendered as 'no one should grasp or cling to anything as being I or mine'. 'No one' means that there are no exceptions; 'should grasp or cling' means to give rise to ego-consciousness; 'as being I' refers to the feeling called ahamkara, the grasping at a (non-existent) soul or abiding ego-entity; 'as being mine' refers to the feeling called mamamkara, the grasping at phenomena as being connected to ego. So don't have ahamkara or mamamkara with regard to anything at all starting from a worthless speck of dust up to valuable objects such as diamonds, sapphires, gems and the objects of sensual desire, and on to things higher than that - Dhamma, its theory, practice and attainment, the Path - Realizations, their 빔(공)에 관한 실천을 언급하고 있는 붓다의 말씀은 '붓다 가르침(붓다 담마)'의 핵심입니다. 그 말씀은 "삽베 담마 날람 아비니웨사야"로서, 직역하면 '어떤 담마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그 의미를 좀 확대하면,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을 '나'나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No one should grasp or cling to anything as being I or min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No one'은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should grasp or cling'는 자아 의식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as being I'는 아함까라(ahamkara)라 부르는 느낌, 즉 (존재하지 않는) 영혼이나 영속하는 자아 실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as being mine'은 마맘까라(mamamkara)라 부르는 느낌, 즉 현상을 자아에 관련된 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찮은 먼지 한 점부터 시작하여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보석과 같은 귀중품과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 즉 담마, 그 이론, 실천과 성취, 그리고 도(道)의 깨달음, 그것의 과(果)와 닙바나(열반)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것에 관해서도 아함까라('나'라는 느낌과 집착)나 마맘까라('내 것'이라는 느낌과 집착)를 가지지 마십시오. 어떠한 것도 '나'나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고, 붓다께서 직접 그런 상태(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 확언하신 가르침입니다.
He said that to have heard the phrase sabbe dhamma nalam abhinivesaya, is to have heard every phrase of the Teachings, to have put it into practice is to have done every practice, and to have reaped the fruits of that practice is to have reaped every fruit of the Buddhist Teachings. So we don't need to be afraid that there is too much to understand. The Buddha made the comparison that the things that he had realized were as many as all the leaves in the forest but those which he had brought out to teach were a single handful. The 'single handful' he was referring to was this principle of not grasping at or clinging to anything as being self or as belonging to self. 붓다께서는, '어떤 담마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르침을 모두 들은 것이고, 이 말에 따라 실천하면 모두 실천한 것이며, 이 실천의 결실을 거두면 가르침의 모든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해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숲에 있는 모든 잎 만큼 많지만 보여야 할 것은 '단 한 줌'이라고 하였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단 한 줌'은 '어떠한 것도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 이 원칙이었습니다.
To have heard this phrase is to have heard every phrase because all subjects are condensed within it. Of all the things that the Buddha taught there wasn't one that didn't deal with Dukkha and the elimination of Dukkha. Grasping and clinging are the cause of Dukkha. When there is grasping and clinging there is Dukkha. The practice is to make the non- arising of grasping and clinging final and permanent, so that the mind is unceasingly empty. Just that is enough. There is nothing else to do. 이 구절을 들으면, 모든 주제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으므로 모든 구절을 들은 것입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은 둑카(고)와, 둑카(고)의 소멸을 다룬 것입니다. 움켜쥠과 집착은 둑카(고)의 원인입니다. 움켜쥠과 집착이 있으면 둑카(고)가 있습니다. 실천(수행)은 마음이 끊임없이 비도록 움켜쥠과 집착이 영원히 하나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해야 할 다른 것은 없습니다.
'This practice is every practice'. Try to think if there's anything that remains to be practised. At any moment that any person, whether it's Mr. Smith or Mrs. Jones or anyone at all, has a mind that is free of grasping and clinging, what will there be present in their minds?
'이러한 실천(수행)이 실천(수행)의 모든 것입니다.' 실천해야 할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순간에 어느 누구이든 움켜쥠과 집착에서 해방된 마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Please think it over. We can take it step by step from the Triple Refuge to virtuous conduct, samadhi and the discernment of truth, on to the Path Realizations, their Fruits and Nibbana. At that moment they have reached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ngha, for to have a heart free of the mental defilements and Dukkha is to be one with the heart of the Triple Gem. They have reached them without having to shout out Buddham saranam gacchami [16]or any of the rest of it. Crying out Buddham saranam gacchami and so on is just a ritual, a ceremony of entrance and is an external matter; it doesn't penetrate to the Buddha, Dhamma, and Sangha in the heart. If at any moment any person at all has a mind empty of grasping at and clinging to 'I' and 'mine', even if it's only for an instant, it means that the mind has realized emptiness. It is pure, radiant and at peace. It is one and the same thing as the heart of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ngha. Thus at any moment that one has a mind empty in this way one has taken refuge, one has reached the Triple Gem. (무집착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삼귀의(붓다, 담마, 및 상가에 귀의)에서 시작하여 계율을 지키고 고요함을 계발하며 진리를 식별하는 통찰력을 계발하면서 한 단계씩 나아가서, 도(道)를 깨닫고 그 과(果)와 닙바나(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붓다, 담마, 및 상가에도 이른 것입니다. 정신적 오염원과 둑카(고)에서 해방된 마음은 삼보(붓다, 담마, 및 상가)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붓다에 귀의합니다'나 나머지 글귀 중의 어떤 것을 영송하지 않고도 귀의처에 이릅니다. '붓다에 귀의합니다' 등을 영송하는 것은 단지 의례 의식의 첫부분이며 외적인 일입니다. 이 영송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붓다와 담마와 상가를 통찰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순간에 조금이라도 '나'와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면, 비록 한 순간일지라도 그것은 마음이 빔(공)을 깨달았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 마음은 순수하고 빛나고 평화롭습니다. 그 마음은 붓다, 담마, 및 상가의 마음과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빈 마음을 가진 순간에는 그 사람은 귀의한 것이며 삼보에 이른 것입니다.
To move onto giving dana (alms) and making donations. The meaning of giving dana and donations is to relinquish, to end all grasping at and clinging to things as being 'I' or 'mine'. As for giving in order to receive a much greater reward, such as giving a tiny amount and asking for a mansion up in heaven, that's not giving, it's just a business deal. Giving must be without strings attached a casting off of things that we grasp at and cling to as being 'I' and 'mine'. At the moment that one has a mind empty of ego-consciousness, then one has made the supreme offering, for when even the self has been given up, what can there be left? When the 'I - feeling' has come to an end then the 'mine - feeling' will vanish by itself. Thus at any moment that a person has a mind truly empty of self, when even the self has been completely relinquished, he or she has developed giving to its perfection. 다나(보시)를 생각해 봅시다. 다나(보시)를 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 즉 사물을 '나'와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조금 주고 천상의 저택을 바라는 것과 같이 더 많은 보답을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다나(보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상거래입니다. 다나(보시)는, '나'와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는 사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때에 그 사람은 자아 의식이 없는 마음을 가진 것이며 최상의 다나(보시)를 한 것입니다. 자아가 버려졌을 때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나라는 느낌'이 사라지면 '내 것이라는 느낌'도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 진정으로 자아가 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 즉 자아 조차도 완전히 버려졌을 때, 그 사람은 다나(보시, 보시라는 바라밀)를 완전하게 계발한 것입니다.
To move onto Sila (Virtuous Conduct), one who has an empty mind, free of grasping at and clinging to a (non-existent) self or to things as being possessions of a self, is one whose bodily and verbal actions are truly and perfectly virtuous. Any other sort of sila is just an up-and-down affair. We make resolutions to refrain from this and abstained from that and then we can't keep them. It's up - and - down because we don't know how to let go of self and the possessions of self right from the start. There being no freedom from self there can be no real sila, or if 다음, 실라(지계, 계율을 지킴)를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 비어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자아나 자아를 가진 것으로 여기는 사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해방된 사람은, 몸으로 하는 행위나 말로서 하는 행위가 진실하고 완전히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다른 실라(지계)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이것을 삼가고 저것을 절제하고자 하는 결심을 한다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바로 자아와 자아를 가진 것을 내려 놓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자아'에서 해방이 없다면 진정한 실라(지계)일 수가 없습니다. 자아가 있다면 불만족(고)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의 실라(지계), 즉 아리야칸따실라(ariyakantasila)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하여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세속의 실라(지계)입니다. 그것은 결코 초세속의 실라(지계)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비어 있을 때에만, 단지 한 순간이든, 하루 밤이나 낮이든,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에 관계없이 그 사람에게 진정한 실라(지계)가 있는 것입니다.
As for samadhi, an empty mind is the supreme samadhi, the supremely focused firmness of mind. The straining and striving sort of samadhi isn't the real thing and the samadhi which aims at anything other than non-clinging to the five khandas is micchasamadhi (wrong or perverted samadhi). You should be aware that there is both micchasamadhi and sammasamadhi (right or correct samadhi). Only the mind that is empty of grasping at and clinging to 'I' and 'mine' can have the true and perfect stability of sammasamadhi. One who has an empty mind has correct samadhi. 사마디(집중)에 대해 말하면, 빈 마음이 최상의 사마디(집중), 즉 마음이 최상으로 확고히 집중된 상태입니다. 긴장되고 애쓰는 부류의 사마디(집중)는 진정한 사마디가 아닙니다. '오온(다섯 가지 무더기, 몸, 느낌, 인식, 의지적 행위,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마디(집중)는 밋차사마디(잘못된 사마디)입니다. 밋차사마디와 삼마사마디(올바른 사마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빈 마음만이 사마디의 바르고 완전한 흔들리지 않음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빈 사람은 올바른 사마디(집중)에 있습니다.
Here we reach panna (the discernment of truth). It is clearly indicated' that knowing or realizing emptiness, or being emptiness itself is the supreme panna because at the moment that the mind is empty it is supremely keen and discerning. In contrast, when delusion and ignorance enter and envelop the mind, causing grasping at and clinging to things as self or possessions of self then there is supreme foolishness. If you think it over you will easily see for yourself quite clearly that when these things have left the mind there can be no foolishness. When the mind is empty 다음, 빤냐(지혜, 진리를 식별함)를 생각해 봅시다. 빔(공)을 알거나 깨닫거나 또는 빔(공) 그 자체가 최상의 빤냐(지혜)임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마음이 비어 있는 순간에 최고로 예리하고 명석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미혹과 무지가 일어나 마음을 감싸고 사물을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게 되면, 극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깊게 생각해 보면, 이 사물들이 마음에서 떠났을 때 어리석음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아주 분명히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고 '나'와 '내 것'이 없을 때, 완전한 앎, 즉 빤냐(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빔(공)과 빤냐(지혜), 즉 진리의 식별(사띠빤냐,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두개의 유사한 것이 아니고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진정한(또는 완전한) 빤냐(지혜)는 빔(공), 즉 미혹의 어리석은 집착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미혹이 없어지면, 순수한 상태, 즉 빤냐(지혜) 또는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인 진정한 본래의 마음이 됩니다.
The word mind (citta) is being used here in a specific way. Don't confuse it with the 89 cittas or 121 cittas of the Abhidhamma. They are a different matter. That which we call the true original mind, the mind that is one with panna refers to the mind that is empty of grasping at and clinging to self. Actually this state shouldn't be called mind at all, it should be called emptiness but since it has the property of knowing we call it mind. The various schools call it by various names but strictly speaking it's enough to say that the true fundamental nature of mind is satipanna, truth-discerning awareness, absence of grasping and clinging. Thus in emptiness lie perfect panna. 마음(찌따)이라는 말은 여기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에 나오는 89가지 마음 또는 121가지 마음과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본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빈 마음, 즉 빤냐(지혜)와 하나인 마음입니다. 여러 교파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마음의 진정한 본래 특성은 움켜쥠과 집착이 없는,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 즉 사띠빤냐입니다. 그러므로 빔(공)에 완전한 빤냐(지혜)가 있습니다.
Now going on to the Path Realizations, their Fruits and Nibbana. Here the progressively higher levels of emptiness reach their culmination in Nibbana, which is called paramasunnata or paramam sunnam - supreme emptiness. So now you may see that right from taking refuge onto giving dana, sila, samadhi and panna there is nothing other than emptiness, non-clinging to self. Even the Path Realizations, their Fruits and Nibbana itself do not exceed emptiness but are its highest, supreme level. 이제, 도(道)의 깨달음, 그 과(果)와 닙바나(열반)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점진적으로 더 높은 빔(공)의 수준으로 나아가면 그 정점인 닙바나(열반)에 이릅니다. 이 닙바나(열반)는 빠라마순냐따 또는 빠라남순냠, 즉 최상의 빔(공)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로 귀의(삼귀의)에서 다나(보시), 실라(지계), 사마디(집중), 및 빤냐(지혜)에 이르기까지 그곳에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빔(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道)의 깨달음, 그 과(果)와 닙바나(열반)에도 빔(공)보다 높은 것은 없습니다. 빔(공)은 최상의 수준(단계)입니다.
Consequently, the Buddha declared that having heard this teaching is to have heard all teachings, to have put it into practice is to have done all the practices and to have reaped the fruits of that practice is to have reaped all fruits. The meaning of the word 'emptiness' is an essential point that you must try to keep in mind.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이 가르침(빔의 가르침)을 들으면 모든 가르침을 들은 것이고, 가르침을 실천하면 모든 실천을 한 것이며, 실천의 결실을 거두면 모든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빔(공)이란 말의 의미는 마음에 간직하려고 힘써야 할 근본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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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붓다 담마 원문보기 글쓴이: 호잔
첫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메일로 보내주신 붓다 가르침의 정수를 정리해서 보려고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