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플라1404뤼시스
뤼시스(Lysis Λύσις ou Sur l'amitié)(Lusis ē Peri Philias) (전384년경)
M. Dixsaut, in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63. (P.2190.)
디소(Monique Dixsaut s.d.) 프랑스여성철학자. 고대철학 플라톤전공, 3대학명예교수.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Aristoclès 427-347; 80살) 기원전384년경에 쓴 작품.
이 대화편은 친애(l'amitié, φιλία)를 다룬 작품이다. 뤼시스는 진솔한 친애가 있다고 한다. 이 개념은 그리스 사회에서 폭넓은 개념으로, 두 인격사이에서 우정(친애)적 관계,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 관계,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에서 관계, 동성애적 욕망을 아우른다. 이 대화편은 이런 여러 관계들의 특수한 본성에 관해 어떠한 확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47OMI)
# 등장인물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히포탈레스(Hippothalès) 히에로님의 아들(fils d’Hiéronyme), 뤼시스의 동료이며 연인관계이다.
크테시포스(Ctésippe, Κτήσιππος) 소피스트의 젊은 제자. 메넥선(Ménexène)의 사촌, 이 두 인물은 뤼시스(Lysis)편에 나온다. 또한 이 둘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참석했다. .
메넥세노스(Ménexène, Μενέξενος) 기원전 5세기경,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테시포스의 제자이기도 하고 사촌이다. 뤼시스의 친구. 플라톤이 말하기를 정치가 데모폰(Fils de Démophon)의 아들이다.
뤼시스(Lysis, Λύσις)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인. 데모크라테스(Démocratès)의 아들 또는 . 메넥세노스의 최상의 친구.
-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Xenophōn, v.-440, 426 ou 430 - v.355) 철학자, 역사가, 장군. 속기술(sténographie)발명자이다. 아바나즈(Anabase), 헬레니끄(Les Helléniques: Histoire de la guerre du Péloponnèse), 회상록(Mémorables, Memorabilia, Ἀπομνημονεύματα; Apomnemoneumata)
# 내용
친애(l'amitié, φιλία)는 사회적 관계 그리고 또한 가족적 소속에 독립적인 감정을 지칭한다. 자연적 토대의 부재(不在, cette absence) 때문에, 사람들은 크세노폰(Xénophon)의 그 소크라테스처럼, 유용한 친애로부터 양심문제(casuistique)를 연역할 수 있다. 팔라이스트라(palestre, παλαίστρα, 격투장, 레스링장)에서 뤼시스(Lysis, Λύσις)와 메넥세노스(Ménexène, Μενέξενος)함께 했던 대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이 소년에 의해 끌린 매력을 논리적으로 번역하는 데 어려움을 지적한다. 사랑이 문제거리 일 때, 소크라테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사랑의 담론은 아첨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이다. 교육적인 강압은 정당화되고, 단지 지식만이 자유롭고 유용하게 만들고 친구(ami)를 만든다. 만일 사람들이 “친구”라는 권한부여(l'attribution)의 양식을 분석한다면, 상호성도 그것의 부재도 규칙이 될 수 없다.
친애(l'amitié, φιλία)의 원인에 관한 한, 두 가지 주장(deux thèses)가 대치된다.
1) 닮은 것은 닮은 것의 친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닮은 한에서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나쁜자들도 서로간에 친구일 수 있을테니까.[친구의 정의가 유유상종으로 될 수 없다] 그리고 착한자들은 서로간에 충분할 수 있을 테니까. [착한자들 끼리는 친구가 아니라도 서로 착하게 대하니까].
2) 각 대립자는 [다른] 대립자를 원한다. [얼핏들으면 적의 적은 우군이다와 같은데, 적의 적이 친구라는 것은 진정한 모순관계일 때 인데 그런 세상이 있냐..아니다] 그러면 적은 친구의 친구이게 되고[형식논리로 대입하여 적 대신에 친구를 넣으면, 친구의 친구가 적인가? 당연 아니지] 나쁜녀석은 착한녀석의 [대립하는] 착한녀석이 된다. [이쯤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2식이 거짓추론이라는 것과 유사하다. 토끼는 생물이다. 식물도 생물이다. 고로 토끼는 식물이다가 아니듯이 말이다.]
착하다와 나쁘다 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가 현존한다. 즉 그 매개는 나쁜것에는 영향을 받기는 하나 스며들지 않는 것이고, 착한 것에서 마치 치료제처럼 영감을 받으리라.
친애하는 사물들[인격이 아닐 경우]은 상대적으로 목적에 맞게만[맞을 때만] 치료제이다. 선이란 제1의 의미에서 친구이다. 악이 그칠 때, 그러면 사람들은 선을 욕망하는 것도 그칠 것인가? [악이 없으면, 그러면 선한 행위 하려는 욕망을 그만 둘 것인가? 그래 선도 문제고 욕망도 문제다.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정의하려고 의도하는가?] 욕망, 자연적으로 자기에게 고유한[알맞은]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 그 욕망은 “고유한” 과 “비슷한”을 구별할 수 있는 조건에서 탐구되었던 토대(le fondement cherché)일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교육자들이 도착하여 “논증에 취한”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을 중단시켰다. 친애는 [논증에서] 항들의 외재성[외연]을 연결하는데는 무능하다. 이 연결을 회복해야할 필요가 있고, 선과 덕목[훌륭함]을 매개로 해서 자연적 친화성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법률(8권)에서 가져온 해결을 발전시킬 것이다.
닮은 자들은 덕목에 따라서 친구들이다. 반대자들은 류(le genre)에 의해서 친구들이다. [친구가 되는 것은 상위 덕목의 추구, 또는 공동체의 선을 위한 추구 즉 빨강이를 추구하는 것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파랭이 또는 신자유주의자는 인민총체의 잉여를 나누어 먹기하는데 혈안이 된 부류 이다. 우리 인민들이 얼마나 많은 잉여를 생산하니 올해도 9천억이나 미국에 주고도 살아가는지, 잉여 착취자는 흡혈귀이다. 공적 자금이라면 인민의 노동잉여를 지벌에게 또는 공기업을 사기업으로 전환하는 자들에게 먹이는 것은 참 나쁜 방식이다. 이를 선전하는 자들은 흑마술에 걸린 자들이다.]
뤼시스(친애φιλία에 관하여)의 궁지몰림들(les aporie)은 동일자(le même)를 정체성(l'identique)에로, 차이자(l'autre)를 대립자(le contraire)에로 환원을 배제하는 논리를 알리는 만큼이나 [다음에 나올] 플라톤의 애정술의 전개를 알린다.
[철학을 정의(定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철학 답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문제에 대해 해결로서 실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사실은 이것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행위가 많은 것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기에 앎과 행이 함께 병진 또는 변증법적으로 나아간다. 그 착한 행위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실행하면서 전진이라기보다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 한 소열제의 왈: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 하고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 하라: 악이 (아무리) 작다 하여도 하지 말고, 선이 작다 하더라도 아니하지 말라. 친애의 행위는 이러할 것이다.
(47PKF)
# 참고 자료들
* 뤼시스(Lysis), 강철웅, 정암학당플라톤전집, 이제이북스, 2007, P. 152.
* 참조: Lysis, traduction, notes, introduction par Louis-André Dorion, 2004.
[도리옹(Louis-André Dorion, 1960-) 퀘벡출신, 고대철학전공, 파리1대학에서 브룅슈비그(Jacques Brunschwig, 1929-2010)지도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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