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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Bergson, 1967)
Madeleine Barthélemy-Madaule, Seuil/ Ecrivant de toujours 77, (초 1967)1978, P. 192.
겉표지
첫 겉면; 벩송의 딸이 그린 베르그송의 초상화
첫 속면: HB 문양 [누구의 그림인지 알 수 없음]
뒷표지
마지막 겉면: Seuil/ Ecrivant de toujours. 출판된 학자들 알파벳으로 나열...
마지막 속면: HB 문양.
1쪽
물질 또는 정신, 즉 실재성은 우리에게 영속적인 생성으로 나타났다. (EC 272, Oe 725)
2쪽
벩송의 글씨: 알아볼 수 있게 쓰여져 있다.
qu'il faudra traverser un à un, on se découragera de partir, comme la flèche de Zénon; on n'y trouvera[verra] d'ailleurs aucun intérêt, aucun attrait. Mais si l'on enjambe l'intervalle en ne considérant que l'extrémité ou même en regardant plus loin, on aura facilement accompli un acte simple en un même temps qu'on sera venu à bout de la multiplicité infinie dont cette simplicité est l'équivalent. Quel est donc ici le terme, quelle est la direction de l'effort? Qu'est-ce, en un mot, qui nous est proprement demandé ?
Définissons d'abord l'attitude morale de l'homme que nous avons considéré jusqu'à présent. Il fait corps avec la société; lui et elle sont absorbés ensemble dans une même tâche de conservation individuelle et sociale. Ils sont tournés vers eux-mêmes. Certes, il est douteux que l'intérêt particulier s'accorde invariablement avec l'intérêt général; on sait à quelles difficultés insolubles s'est toujours heurtée la morale utilitaire quand elle a posé en principe que l'individu ne pouvait rechercher que son bien propre, et que quand elle a pretendu qu'il fut serait conduit par la à vouloir le bien d'autrui. Un être intelligent, à la poursuite de ce qui est de son intérêt personnel, fera souvent tout autre chose que ce que réclamerait l'intérêt général. Si pourtant la morale utilitaire s'obstine à reparaitre sous une forme ou sous une autre, c'est qu'elle n'est pas insoutenable; et si elle peut se soutenir, c'est [MR 32-33, 필사본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두 곳을 - et que 위에 quand을, fut 위에 serait를 - 쓰면서 고쳤고, 위의 한 곳은 출판에서, trouvera를 verra로 고쳐놓았다. 벩송의 글씨는 매끈하게 잘 쓴 것이다.]
3쪽
위에 제목과 저작가
Bergson
madeleine barthélemy-madaule,
그리고 아래에 총서이름과 출판사
écrivant de toujours / seuil
4쪽
[사진 설명]
“나의 어머니는 종교적 영혼이었다”
Sanguine de Moïna Mac Gregor(모이나라가 그린, 어머니의 혈색 좋은 모습).
모이나[모이라]는 베르그송의 여동생으로 맥그래고르(Mac Gregor)백작의 부인이 되었다.
5쪽
한 철학자의 생애는 그의 학설을 향해
어떤 서광도 던지지 않는다
제1장 생애 (La Vie) 5
제1장 생애와 사상
1. 생애
* [가족]
1859년 10월 18일 벩송(Henri-Louis Bergson)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인 미셀 벩송(Michel Bergson)[1818-1898]과 영국의 던캐스트 출신 카트린 레빈선(Cathrine Levinson)[1830-1928]의 둘째 자식(아들로서 첫째)로 태어났다. 이처럼 예언자들의 불꽃이 영국적인 절도와 신중의 내용을 보태어 그의 영혼과 그의 사상 속에 스며들 것이다. “... 어떠한 사유와 감정의 흐름도, 우리가 충만하다 여기는 신비주의에게 즉 크리스트교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주의에게, 유대 예언주의가 자극했던 만큼 기여하지는 못했다.”
철학자들 중의 가장 음악가다운 철학자인 벩송은 한 음악가의 아들이다. “나의 아버지는 보다 각별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편의 세레나데들, 연습곡들, 모음발성곡들을 작곡했으며, 이 곡들 가운데 「공상: 피아노를 위한 몽상」이 있다. 또한 그는 찬송가들과 기도곡들을 작곡했다. 이런 몽상과 열정의 극한에서 베르그송의 지속이 솟아날 것이다. 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이며, 독일의 삭스 주와 이탈리아를 거쳐서, 계속해서 프랑스에서, 스위스에서 결국에는 영국에서 정착했다. 이 아버지 벩송에서, 인류애는 인간들을 둘러싸도록 해주는 동심원적 원의 가장 큰 원이 아니라, 유태계 이민(la diaspora)의 오솔길들 중에서 구체적이고 비장한 연결망이었다.
앙리 벩송이 4살 되던 해, 가족은 파리의 라마르틴 18번지에 위치한 “새를 파는 상점에 속하는 집”을 떠났다. 그리고 처음에는 스위스 긴긴(Gingin)에 그리고 제네바에 안착했다. 이 거리가 “철학자들의 큰 길”(Boulevard des Philosophes)라는 믿기지 않을 경이로운 주소였다! 성숙한 나이가 되어서도 벩송은 어린 시절의 산악들로 되돌아오게 될 것인데, 이것은 루소가 그에게 그 만큼이나 사랑하게 해준 것과 같은 산악들인데, 아마도 그 산악들은 그에게 장-자크를 훨씬 더 잘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벩송의 가족은 행운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는데, 제네바 음악학교의 교소가 되었던 이 작곡가에게는 너무 많은 식구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범이 되었다. 부모들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인격들이었는데,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 인간이 된 벩송은, 행위해야 할 이러 저러한 기회에서 바로 그 순간에 그 인간이 주저하는 경우에, 부모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 했던가를 스스로 자문해야만 했다. 아버지 미셸은 아이러니까지도 겸손했다. 그 아이러니는 신중했고 이미 벩송의 것과 같다. “...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에게 나의 영국 간행물들 중의 작은 선택지를 동봉하여 보냅니다. 당신은, 과거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미래에 절망하는 편집자들의 일반 인식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므로, ”(1879년 8월 23일) 또한 그는 자부심이 강하나 가난하다. “내가 이 몇 줄을 당신에 알려줄 자유를 갖더라도 나를 용서해 주시겠지요. 그러나 배고품과 같은 필연은 유보라는 것을 모른다.”(1894년 1월 17일) 일곱 자식들의 어머니는 여행하는 예술가의 동반자 였는데, 그의 아들(벩송)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고급 지성을 지닌 여성이었으며, 단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종교적 영혼을 지녔으며, 그녀의 선함, 헌신, 평온함, 내가 대략 말할 수 있을, 그녀의 성스러움은 그녀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것이 초기 어린 시절부터 영웅들과 성자들의 상이다.
1866년(일곱) 벩송의 가족들은 다시 파리로, 마장따 거리 154번지(154, Boulevard Magenta)로 이사 온다. 스위스에서 매우 아름다운 작문을 했고 공부에 열성있는 꼬마 벩송은 아홉 살에 보나파르트(현 꽁도르세) 리세에 프랑스 장학생이었고, 라투르 도베르뉴 34 길(34 rue de la Tour d'Auvergne)에 있는 이스라엘 스프링거 연구소의 장학생으로 기숙생이 되었다. 열 살 되던 해 벩송은 파리에 혼자 남게 되고, 그의 부모들은 런던으로 이사했다. 벩송이 외톨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1870년 전쟁과 다음해 빠리꼬문을 거치는 때, 11살의 나이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그 당시 낯선 풍경은 아니었을 수 있었다. 그는 방학마다 런던으로 가곤했다. “나의 아들은 꽁도르세 중학교 2학년인데, 그 학교에서 매년 1등하였다(교육정보망을 통해 확인된 사항임). 아들이 바캉스를 보내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데, 총액이 겨우 62프랑 50상띰으로 그 여행을 해냈으니...”라고 아버지는 친구인 폴락 씨(M. Paulhac, s.d.)에게 1874년 3월 편지에 자랑스럽게 썼다.
런던에서 세 동생들은 각각 은행원, 상인, 배우가 되었다. 누이 중 하나는 맥그레고르(MacGregor) 백작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마담 벩송은 괴부가 된 뒤로도 영국 풀크스톤에서, [결혼하지 않은 딸 르네와 더불어] 98살까지 살았다.
* [학창시절]
“퐁딴(Fontames) 고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 교장 르그랑(Ch Legrand)
이제 보나빠르뜨 학교에 1868년 입학하여 1877년 (개칭된 이름) 퐁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교실에서 보낸 시간 이야기이다. 우수상 수상자 명부에는 놀라운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등 1학년에서부터 상들을 휩쓸었다. 고등학교 3과정에서 라틴어 번역과 수학에서 1등이었고, 희랍어 번역, 지리, 전체시험 에서도 상을 탔다. 프랑스어 작문과 역사에서 준입상을 했다. 고등학교 2과정일 때도 수상자 명단에 또 올랐다. 수사학 분야에서 벩송은 전국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강연에서 1등상(최우등상), 영어 1등상, 기하학과 우주형상학에서 2등상을 탔으며,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준입상을 했다. 철학분야에서 그는 전국경시대회에서 프랑스어 논문이 1등상, 수학 1등상을 받았다. 기초 수학분야에서 또한 전국경시대회에서 또한 수학, 우주형상학, 기계학으로 1등상을 탔다. 또한 각 고등학교에서 주는 특별상들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 의한 자기 스스로의 수상자였다. “ 당신이 그 당시에 있었던 창백한 청소년을 다시 보는 듯했다. 크면서 약간 후리후리하며 우아한 키, 노랑머리카락의 세련된 매력 .. 당신에게 눈길을 끌게 하는 이마, 넓은 이마 아래로 푹 파인 ... ” 르네 두믹(René Doumic, 1860-1937)은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벩송의 입회식 강론에서 이렇게 그를 상기했다. 특히나 “.. 그 만큼이나 공손한 어떤 고등학생을 결코 보지 못했다.” 나중에 벩송은 두 번이나 공손함에 대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영혼의 덕목 다른 인간들의 감성을 소중히 여기는데 있다.
모든 점에서 완성된 학생은 어려움 없이 파리의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érieure, ENS)으로 인도하는 왕도의 길에 들어섰다. 퐁딴 고등학교 마지막 수업들과 울름길(ENS가 길 주소)의 교육 사이에서 젊은 앙리 벩송의 철학적 지평은 어떤 것이었나? 그의 철학과 첫 접촉은 어떤 오베(Benjamin Aubé, s.d.) 선생님의 수업에서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바깔로레아를 준비 중이었고, 그 다음 나중에는 (노련한 자로서) 고등사범학교에서 이다. 고등학교에서 나는 어떤 오베 선생님을 철학교수로 맞이했는데 그는 카톨릭 교회 역사에 관한 책을 쓰기에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다른 사항으로 넘어가기 위한 강의들을 해주는 것으로 끝냈으며, 그는 철학을 빈약한 것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이처럼 벩송은 1936년 스위스 레만 호수 북쪽 변에 위치한 보(Vaud) 마을의 엘의 성(chateau de l'Aile)에서 쟝 드 라 아르쁘(Jean de La Harpe, s.d.)와 마주하여 자기 추억들을 상기했었다. 이런 텅빈 웅변적 사상과 대비되어 행복하게도 제반 학문들이 있었는데. 특히 수학이다. 나로서는 증명을 잘 알기 위해서 수업중 흑판의 증명들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집에서 나의 과목을 결코 공부하지 않았다 ...
그러고 나서 결국에는 라술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를 마주쳤다. ‘어느 날 나는 귀납법의 기초(Du fondement de l'induction, 1871)를 발견했다. ... 굉장한 책이었다! 나는 그 철학이 중요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매우 강하게 라슐리에의 변증법에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책 속에서 자연은 관념론적 전망에서 제시되었는데, 그 전망에서 각 관념은 “세계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여전히 라 아르쁘에 의해서 우리가 알게되는 하면, 또한 그가 수학자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의 작품을 읽었는데, 그는 그를 매우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확률론 수학자는 정확한 언어를 구사했으나 애석하게도 죽은 언어(langue morte)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벩송은 이 사상가들로부터 철학이 중요한 일거리(une occupation sérieuse)이지 언변의 장난(un amusement oratoire)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꾸르노로부터 스펜서로 이행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속’에 관한 부분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라슐리에 관해서는 벩송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헌정한 철학자이고 라베송(Félix Ravaisson, 1813–1900)은 1904년에 도덕-정치과학 학술원(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의 강론에서 존경의 찬사를 했던 철학자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칸트에 전념해 있었고, 울름가(파리고등사범학교의 주소)에 입학하여 알게 될 부트루(Émile Boutroux, 1845-1921) 보다 더 나은 젊은 벩송의 스승들이었다.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는19세기가 두 부분으로, 생명적인 것에 반대되는 주관성과 자연과 생명에 일치하는 유심론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단호한 방식으로 제시했다. 라슐리에는 의식의 삶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생물학적 생명에서 빌려왔다. 그는 “자연철학”의 용어를 채택하였으며, 이 철학에 정신의 차원들을 부여했다. 라베송은 1839년에 출판한 습관에 대하여(De l'habitude 1838)(학위논문)에서 이미 그 길을 제시했다. 동일한 힘이 가장 무기력하고 기계화된 지대[영역]들에서부터 의식적 의지의 수준에까지 존재를 생기를 불어넣어 활성화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 학설은 존재들과 사유의 통일성을 드러나게 했다. 라베송의 보고서 19세기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en France au xixé siècle, 1867)는 1867년에 “정신주의 실재론”에 대해 말했는데, 라베송은 그 보고서에서 이 명명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우주란 사랑의 현실화(l'acte d'amour)의 외적 측면이었다. 벩송은 1904년에 정치-도덕과학 학술원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느 분석을 통해서도 이 경탄할 만한 글들에 나타난 착상을 얻을 수 없다. 20대 학생들이 이 글들 속속들이 알았는데, 초기 젊은 시절의 위대한 열정이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펼쳐 놓은 그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채색법(l'inexprimable coloration)을 묘사하기를 거부하면서였다.’
실증주의적 고등사범학생 (Un normalien positiviste) 9
1878년 앙리 벩송은 고등사범학교에 3등으로 입학했다. 일등은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였다. 이 두 축은 기억할 만한 동기동창의 축이며, 시대의 축이기도 하다.
고등사범학교에서 벩송은 더 이상 라슐리에를 찾을 수 없었다. 부트루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벩송은 반(反)칸트주의자들 계열에 서 있었다. 그는 그 계열의 표본적인 모델이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트루의 자연 법칙들의 우발성(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점에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책은 1874년에 나왔지만 자연 속에서 생명과 반성의 큰 문턱들 수준에서 어떤 비결정성이 있음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 문턱들에서는 낮은 단계의 상태들이 연역될 수 없었다. 그것이 벩송의 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사례는 결고 아니었다. 올레-라프륀(Léon Ollé-Laprune, 1839-1898)은 카톨릭 신자이며 존경할 만한 철학자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매우 낡은 것들”에 대해 반복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벩송은 어떠한 영향도 입지 않았다. 그의 동급생으로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뒤르껭(Émile Durkheim, 1858-1917), 추기경 보드리야르(Alfred Baudrillart, 1859-1942), 물론 조레스도 있었다. 게다가 “뽕띠니의 열흘회”(Les Décades de Pontigny)(1910년)을 창설할 젊은 데자르당(Paul Desjardins, 1859-1940)이 전임강사였다. 벩송과 조레스 사이에는 커다란 경쟁 대결들이 연출되었다. 마담 모세-바스띠드가 벩송 교육자에서 조레스가 키케로가 역할을 하는, 벩송과 조레스가 벌인 시합의 일화를 기꺼이 이야기했다. 이 일화를 전한 것은 르네 두믹인데, 그는 조레스의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달변에 비해 벩송의 조리있는 논리에 승리를 부여했다. 벩송이 조레스에 대해 갖는 어떤 적대성이 이야기되고 한다. 그 적대성이 다음과 같은 화제들로는 가두어지지 않는다. ‘조레스, 내가 그를 알았을 때, 그는 웅변적이고 관대했다. 그가 나중에 사회주의로 나가 갔을 때, 나는 그를 시야로부터 잃었다.’ - 사회주의 문턱에서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재치가 넘친다! - ‘그러나 아직도 웅변적이고 관대함으로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 조레스편에서 말하자면, 조레스는 자기 옛 동료에게 졸업 후에 이렇게 썼다. “너가 파리에 학위논문을 발표하러 올 것이지? 나는 너에게 반론들을 제기할 거야. 기꺼이 손잡고 미스(Miss)를 포옹할 거야.” 미스는 벩송인데 동료들이 부른 별명이었다. 분명하게 그는 정치적 혁명의 경향들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유하는 것이 말씀에 관해 반성일 뿐이라고 여기는 “언어인”(homo loquax)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조레스를 겨냥했다고 나는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벩송이 아주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히 그에 대하여, 그의 말씀씀이가 현실태였고, 또 이미 완전히 주어졌던 그 원인 때문에 암살되어 죽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물론, 오히려 내가 바라건데, 조레스가 그의 웅변에도 ‘불구하고’ 벩송의 눈에는 영웅들 중의 하나로서 잘 맞는 인물이었다.
두믹은 여전히 일화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는 벩송을 작은 장면에서 상기한다. 그 장면에서 벩송은 유물론자 속에다 적절하게 분류해 놓았다. “어느 날 도서관의 책들이 땅 바닥에 있는 것을 본 학교 선생님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로 몸을 돌려서, 화를 내었다. ‘벩송씨, 땅바닥에 나뒹굴어진 이 책들이 보여요! 당신 사서의 영혼이 이로써 고통을 겪고 있어요!’ 그 당시 그의 모든 동기생은 외치기를, ‘그는 영혼이 없어요!’”
그의 학사 학위[1878년 5월 4일]과정은 별 이야기 없이 지나갔다. 교수자격 시험에서 벩송은 2등이었고 조레스는 3등이었다. “짜릿한 흥밋거리였지! 교수자격 시험 과목에서 나는 맘에 안 드는 과목에 걸렸어. 심리-생리학과목이야. 나는 그 과목을 혹평하기로 마음 먹었지. 나의 심사위원단, 특히 이 질문을 던진 교수가 이에 대해 약간의 소동을 일으켰는데 ... ” 벩송은 샤를 뒤보(Charles Du Bos, 1882-1939)에게 나중에 정확하게 말할 것인데, 심리학에 반대하는 내용의 부담이 그 심사위원단들 중에서 바로 그때 주심이었던 찬성자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주심자가 라베송이었다.
이러한 모범적인 학력은 1882년부터도[앙제로 발령났다]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교수들은 고등교육에서 시작하지 않았다[즉, 바로 대학교에 자리 잡지 않았다]. 앙제에서 고등학교, 클레르몽-페랑에서 고등학교를 거쳐서 파리의 고등학교로 왔다. 그는 여성 청중들에게 “매혹적 인물”(l'‘enchanteur)이었다. 아마도 그는 모든 학생들에게 용어의 깊은 의미에서 “매력”(le charme)이 있었으며, 동시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도 있었다. 1883년에 류크레티우스의 원전에 관한 찬탄할만한 수집록을 출판했다. 그는 또한 한 강연을 했는데, 나중에 나올 중요한 작은 책,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에 앞선 것으로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 웃는가?, 왜 웃는가’이다. 파스칼(Pascal)과 떼이야르의 고향인 끌레르몽-페랑에서 그는 자기 생각들의 결정적인 전환기가 이루어졌다. 거기에서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이 태어난다. 뒤보에게 그는 이 대화에서 본질적인 점들을 알려줄 것이다. 오랫동안 스펜서를 읽고서, 결국 벩송은 스펜서에게서 시간은 시간이 아니며, 진화는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그와 동시에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이 그를 당황하게 했는데, 난문제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화살을 날리는 것과 아킬레스와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에 관해서 쓴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DI)의 한 장[제2장]을 썼다. 벩송주의가 솟아 올랐다. (48PLA)
공격받은 철학(Une philosophie combattue) 13
학위 논문 두 주제는 끌레르몽-페랑에서 쓰여졌다. 그가 1888년 파리의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 고등학교와 앙리 4세(Henri IV) 고등학교로, 그리고 1889년 롤랑(Rollin) 고등학교로 지명된 뒤에, 그는 1889년 겨울에 이 두 주제를 발표했다. 주논문의 제목은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이고, 부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론(Quid Aristoteles de loco senserit, 1889)이었다. 소르본 교수였던 자네(Paul Janet, 1823-1899)가 보고자였다. 부트루는 심사위원단에 속했다. 아무도 “지속”(Durée)에 주목하지 않았다. 벩송은 화가 났었다. 1890년 그는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고등사범 재수생 반인 칸(khagne)반의 교수였다. 이들 중에 나중에 문학교수가 된 로끄(Mario Roques, 1875-1961)가 그의 강의를 노트했다. 우리는 이 노트를 참조할 수 있다. 노트들은 표준적인 전통주의를 따른 것인데, 벩송의 고유함을 상기할 아무 것도 없고, 강의들 중에 수학적인 것을 말한 것도 분명하지 않다.
1892년(서른 셋)에 그는 루이즈 뇌뷔르제(Louise Neuburger)[열아홉]과 결혼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루이즈와 종형제로서 결혼식에 들러리(garçon d'honneur)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일 년 후에 딸 쟌느(Jeanne Bergson)가 태어났다. 1894년에 벩송은 소르본 대학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후보명단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보명단에는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와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2)가 있었다. 그 대신에, 1896년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 1896)(MM)을 출간하고 난 뒤,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에 [와병 중인]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강의를 대신하기 위해 지명되었다. 그 자리는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인데, 벩송은 플로티누의 철학, 즉 엔네아데스 제4권을 다루었다. 1898년에 두 권의 중요한 철학 저술의 작가가 된 벩송은 또 다시 소르본에서 거절 당했다. 이번에도 후보직에는 세아이유가 있었다[이번에는 세아이유가 교수직을 차지했다]. 벩송은 이미 고등사범학교의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1900년에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RI)을 출판하였다. 뻬기(Charles Péguy, 1873-1914)는 나중에 이렇게 쓸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 고등사범학교의 강의에 참석했는데, ... 아무것도 대체할 수 없는 개인적 인상을 결국에는 갖게 된다는 것이 행복했으며, 우리는 그가 말했던 것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는 강의 하는 동안에 완벽하게, 확실하게, 피곤해하지 않고, 지칠 줄 모르고 잘 갖추어진 정확성으로, 겉보기에 연약하지만, 끊임없이 허위를 반박하며...” 그는 [1900년] 꼴레쥬 드 프랑스에 교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1907년에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1907)(EC)가 출판되었을 때 그의 철학은 시련의 전투를 겪게 되는데, 이 책은 출판 후 여러 해 동안, 대학 학자들에게, 바티칸 성직자들에게, 유물론자들에게, 유심론자들에게, 모라주의자들 등등에게 화약고로써 폭발하는 맹위를 떨치게 된다. 뻬기는 1914년 3월 12일 그에게 편지를 쓰기를 “만일 내가 당신의 놀이(게임)속에 있었더라면, 그 신봉자들이 당신을 깔짝거리게 하는 짓은 결코 없다...”고 한다.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승리들 구가함에도 불구하고, 벩송은 영웅적인 시대에 항상 승리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가 활동 중인 이 당시에 두 가지 중요한 저술이 있다. 하나는 소르본 대학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들이 철학자들 보다 더 장점을 이해한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에서 싸웠고, 프랑스철학회에서 토론해야 했다. 그 자신의 편에는 뻬기와 르르화(Édouard Le Roy, 1870-1954)가 있었다. 실존철학자인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된 형제작가인 제롬 따로(Jérôme Tharaud, 1874-1953)와 쟝 따로(Jean Tharaud, 1877-1952), 시인 뻬기, 크리스교 철학자인 블롱델(Maurice Blondel, 1861-1949), 종교사가인 바루찌(Jean Baruzi, 1881-1953), 부인인 러시아 유대계 출신 라이사(Raïssa Maritain, Raïssa Oumançoff 1883-1960)와 함께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부부[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벩송의 신랄한 비판자가 된다], 그 외 많은 다른 사람들은, 알자스 유태계 출신 프랑스 역사가인 이작(Jules Isaac, 1877-1963)이 말했듯이, 그의 “가지런하며 부드럽고 낭낭한 목소리”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그 외에도 강의실 앞에 있는 긴 의자에는 상류 부인들의 하인들과, 하인들이 먼저 와서 줄을 기다렸다가다 대신 들어가는 부인들도 있다. 벩송은 강의실에서 훨씬 더 많은 이들을 맡았다.
이런한 성공이 그에게 대한 찬성도 반대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벩송은 한 시대 문화의 목소리였다. 그는 주로, 시간[지속], 기억, 자유라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특히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말했다. “숲속의 빈터”처럼, “샘물의 신선함”처럼! 리용출신 작가인 땅끄레드 드 비장(Tancrède de Visan, 1878-1945)은 “밝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교외의 긴 의자가 가지런히 놓인 꼴레쥬 드 프랑스의 작은 방”을 회상했다. 그 방에서 한세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거기서 이들은 이제까지 결코 들어보지 못했기나 한 것처럼, 이들이 찾고자했고 동시에 이들이 필요로 했던, 한 스승의 날아 갈듯 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곤 했다. 그리고 편집인이 된 피에르-껭(Léon Pierre-Quint, 1895-1958)은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실은 몇 시간 전부터 만원이 되었다. 갑자기 교단에는 깡마르고 조이는 검은 복장으로 한 낯선 개구쟁이(un étrange diablotin) 같은 인물이, 윤기있는 금발머리카락에 대머리에다 마르고 작은 얼굴로 솟아올랐다. 그 얼굴에 생경한 푸른 두 눈은 생각지도 못한 깊이에서 샘물을 길어 올리는 것 같았다.”
훨씬 나중에, 헝거리 출신으로 맑스주의자이며 레지스탕스였던 폴리쩌(Georges Politzer, 1903-1942)는 벩송주의를 최종적인 “철학적 과시 행진”이라고 규정했다. 이 행진에서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이 형이상학을 재발견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1914년 1월에 벩송은 올리비에(Émile Ollivier, 1825-1913)에 자리를 계승하여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꽃으로 덮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벩송은 거기에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 나는 춤추는 여자가 아닙니다.’
(48PLB)
공인된 철학 Une philosophie officielle 15
왜냐하면 벩송은 1789년 혁명의 원리들이 스며든 부르좌계급 인본주의(l'humanisme)를 구현할 것이나, 그러나 조레스는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사회주의로 갈 것이다. ‘나는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관습상으로 온건주의자, 본능적으로 자유주의자(un liberal)이다'. 벩송은 프랑스의 위대한 부르좌이며 바레스(Barres)와 프루스트 만큼이나 프랑스 문화의 담지자이다. 벩송은 그런 덕목들을 가졌으나, 그는 그만큼의 정치적 한계도 있다. 사유를 정제하는 실험실 안에 있었던 그는 대중의 소문에는 거리를 두었다.
‘모든 것은 높은 곳에서 온다’ 또한 라베송이 말했듯이 “신호는 높은 곳의 영역에서 출발이지”... 관대함은 자유로운 대학의 덕목이지. 그 관대함(la générosité)은 인민에게로 향해 가길 바란다. ‘그것은 부자들로부터 나오고, 노동자 계급들의 영혼상태를 변형시키는 것은 상위계급들에 의존할 것이다’라고 벩송은 라베송의 관념들을 상기시켰다. 라베송과 벩송에서 역사란 ‘자신들의 기원으로부터 고상함(la noblesse)’을 의식했던 자들의 너그러움(la munificence)에 의해 주조된다. 역사는 대중들의 격렬한 항의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시대 전체가 벩송주의 안에서 승화되어 재인식될 수 있었다.
꼴레쥬 드 프랑스의 들어간 후에, 몇 가지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명예들이 들이닥쳤다. 1901년 도덕정치아카데미에 회원이 되고, 1902년에 기사(Chevalier) 훈장도 받고, 1909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과학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1936년에 그 세부사항을 다시 이야기 하게 될 “사절단들”속에 벩송을 뒤따라가는 것도 신기한 일이 될 것이다. 맨 처음으로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이 프랑스를 원조하도록 몇몇 학술원 회원들과 함께 그를 스페인에 보낼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외교 사절단에서 그만두어야 할 뻔 했다. 정부는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을 어떤 사람을, 즉 “신분 높은 교수”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를...? 루이 오베르(Louis Aubert, 1878-1944)가 외무부에 있는 베르뜰로(Philippe Berthelot, 1866-1934)에게 말을 던졌다.“벩송 - 벩송? 그런데 그 철학자 말이지! - 바로 그래, 철학자이며 외교관이지, 형이상학으로 자격증을 갖고 있지 ...” 벩송은 여러 달 동안 와싱턴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영향은 미국의 전쟁의 개입에 부담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전쟁을 넘어서 평화를 위한 지속가능한 조직화, 즉 아마도 그때까지는 그 이름에 대해 발설되지 않았던 “국제연맹(Société des Nations)”을 예상했다. 결국 1918년에 총리 겸 전쟁장관인 조르쥬 끌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는 동부전선 재구축에 도움을 얻기 위해 벩송을 미국으로 보냈다. 이처럼 전쟁 동안에도 벩송은 행동을 위해 일신은 던지기 위해 가족과 자기 연구실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고향인 프랑스 깊이 사랑했다.
(48PLD)
시련의 날들: “낙관주의가 필수적이다” Les temps d'epreuve: "L'optimisme s'impose" 16
그 사실을 겪으면서, 1940년의 돌발사태가 발발하였을 때, 벩송은 오래 전부터 불행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의 딸 잔 벩송(Jeanne Bergson)은 1893년에 태어났는데 회화와 조각에서 상당한 재능을 타고 났으나, 출생에서부터 농아였다. - 그녀는 부르델(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제자였다.
1925년에 그는 자신의 조금씩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류마티즘의 첫 발병이 시작되었다. 이 병세는 극단적인 피로 다음에 온 것이었다. ‘12년 또는 14년 동안이었다. 나는 진정한 휴식을 하루도, 아니 반나절도 갖지 못했다’ 그는 모호하게 다가오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국제지식인협력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de cooperation intellectuelle, CICI)의 절박한 문제들을 여전히 풀어가다가, 1925년에야 사임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가 행했던 “소중한 연구들”은 질병의 시간들과 상당한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들이다. 이리하여 그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MR)이 쓰여 졌고, 바로 이 책에서 그는 삶이란 일상적인 면에서 착하고 동시에 환희는 정신적인 면에서 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친구인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제임스의 경험의 다양함들(Variétés de l'expérience)(원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들: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A Study in Human Nature, 1902, 프랑스어로 번역 1905) 이란 책이 이십 여년 전에 매우 정감있게 자신의 주의를 끌게 했다고 썼다. 삐에르-껭(Léon Pierre-Quint)은 또한 그의 생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서 본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벩송은 매우 늙어 있었다. 내가 그를 다시 본 마지막 경우에, 그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라고 직접 미안해했다. 나는 그의 움직일 수 없는 손을 잡고서 ‘안녕하십니까’(bonjour)라고 관습적인 몸짓으로 인사해야 했다”. 그는 자기 책상 뒤에서 마비된 체 앉아 있었는데,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앞에 작은 나무판으로 막아 자기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꼬마와 같았다. 나는 그의 몸이 훨씬 더 쪼그러 들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의 얼굴은 오히려 두툼했다. 그럼에도 그의 피부는 더욱 가죽 같았으나, 그의 두 눈 속에는 여전히 불꽃이 살아있었다.” 그는 불평하지 않고서 설명했는데. “자기에게 ... 먹기 위한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의사들이 나에게 요청한 간병의 주의사항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저술을 조각 조각으로 작업해야 했고, 전체적 계획과 함께 완성하기에 앞서서 작성을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거스릴 정도가 아닌 글쓰기를 뻣뻣한 듯한 오른 손으로 쓸 힘은 아직 남아 있다.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에 관한 그의 저술을 끝내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마지막 책의 환희의 찬가는 그 책의 의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만일 사람들이 그 책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한 추억-이미지 대신에, 그 책의 문투라 할 사건에 대한 거의 순수 추억(le souvenir presque pur)을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몸은 점점 쇠잔 해지는 이 인간에게 노벨 문학상(1928, 예순아홉)과 레지옹 도뇌르 최고 훈장(Grand croix)(1930, 일흔하나)의 광채들이 쏟아진다. 거의 하늘로 날아 솟아오를 듯한 정신의 경지에서 올라서 1937년 데카르트 학술대회에 그는 우리들의 가장 경이로운 발명들의 위험에 관해서 경계의 태세를 드러냈다. 이 발명작업들이 우리들을 배반하고 있었는데, 신비주의가 기계주의로 향해 관심을 쏠리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지라도, 그 발명 작업들이 도약에 장애물을 만든 하강의 힘으로 벩송의 변증법에 복종하게 한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하강하지 않았고, 하부에서부터 오는 힘을 받은 세계는 파국으로 갈 것이다. 1933년 이래로 자기 집무실에 박혀 있었던 벩송은 히틀러주의 발흥을 엿보고 있었다. 1940년 7월에 그는 상시르-쉬르-르와르(Saint-Cyr-sur-Loire) 에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11월에 그는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로, 즉 그가 1929년 이래로 죽 거주했던 보세주르대로(Bd. Beauséjour) 47번지 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
“벩송씨는 1월 4일 지난 토요일에, 81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별 고통 없이 폐렴(congéstion pulmonaire, 폐충혈)으로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이 유명인사의 몸은 월요일, 필연적으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여건들 속에서 그의 자택에서부터 가르쉬 묘지로 운반되었습니다. 장례행렬도 없었고, 추도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전부에게는 아마도 훨씬 더 많은 묵상에 잠긴 생각과 특별한 상실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1941년 1월 9일에 당시 아카데미의 총서기였던 뽈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표현했었다.
이렇게 폴란드 유태계 하시디즘의 후예인 벩송은 프랑스 태생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가르쉬의 작고 아담한 묘지에 안치되었다. 묘지의 평석아래에는 아버지 미셀 벩송의 심장과 찬탄할 만한 어머니의 가슴을 환희로 가득하게 했던 이런 직함들이 새겨져 있다.
앙리 벩송,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며
도덕 정치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고,
레지옹 도뇌르 최고훈장을 받았다.
그 가까이에 1946년 이래로 그의 부인 루이즈 뇌뷔르제가, 그리고 1961년 이래로 그의 딸 잔 벩송이 쉬고 있다.
1967년 5월 11일에 만신전(Panthéon)의 표석 명단에 올랐다. 이것은 가장 높은 관점에서 평가받았다는 표시로 벩송에게 최종적인 존경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철학자 앙리 벩송에게, 그의 작품과 삶이 프랑스와 인류 사상을 영광스럽게 하였다는 점에서.”(48PLF)
후기: 만일 ... 나는 스스로 개종했을 텐데 ( En epiloguq: "Je me serais converti si... 19
벩송은, 라이사 마르땅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가 카톨릭에 ‘도덕적 애착’를 갖는다고 선언하였음에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나의 남편은 세례의 결정적 한 발작을 넘지 않고자 결심했다”고 1941년 9월 9일에 벩송 부인은 무니에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충실성에대해 옹호했다. 남편은 자기 사유의 가벼운 수정이라든지 그리고 자신이 완성하고자 원하지 않았던 자기 실현의 인격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가 스스로 방어하기에는 이제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변질시켰다는 점을 그녀는 분개했다. 1937년 2월 8일 유언장에서 그는 정확하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의 반성은 내가 유대주의의 완전한 완성이라고 보는 카톨릭주의에 점점 더 가까워 졌다. 만일 세계에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반셈족주의의 어마어마한 물결을 몇 년 전부터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개종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 날에 박해받는 자들이 될 수 있을 사람들 가운데 남아 있고자 원했다.”
그리고 사실로써, 1941년 8월에 출판된 합류(Confluences)에서 장 발(Jean Wahl, 1888-1974)의 편지는 벩송이 임종의 침상에 한 신부를 들렀는데,, 그 신부 르리에브르(Lelievre, s.d.)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망자를 위한 기도문을 암송했다고 증언했다.
유언장은 벩송 자신의 이미 이루어 놓지 않았었던 것의 모든 출판을 금지했다.
유언장은 초상화로서 앙리 벩송의 모습을 이중적인 모습으로 밝혀 놓았다. 한편으로 그는 분명 사상가이며, 제시할 수 있었거나 증명할 수 있었던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를 분명히 확립된 것 저 넘어(피안)로 가게 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그는 한 영혼이며, 부름을 듣는 영혼, 기다리는 영혼이다. 그는 시간이 모자라 자신의 결정적 형식을 미래에 부여할 수 없었지만, 매우 신중하였기에 미리 앞서 나가기를 원지 않았던 그 미래를 향해 완전히 생애를 바친 그런 영혼이다.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는 그를 “개방 정신”에 충실한 채 남았고 하면서, 깊은 맘으로, 벩송은 완성된 개방보다 더 한 벩송주의자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충실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어두운 시기들에도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살았다. 들리는 부름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행 시기에도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인 유태인들의 순교에 참여에도 준엄한 정언 명법이 그에게 울려퍼졌다. (48PKG)
[22쪽]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 중 「창조와 사랑」의 필체 (Oe 1191, MR 270)
사람들은 한마디로 창조적 진화의 작가에 의해
시도된 기획을 ... 형이상학을 경험의 지평위에
옮겨놓기 위해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 사상 (La pensee) 21
사람들은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작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벩송도 마찬가지로 철학자이며 작가이며, 우연에 의해 결합이 아니다.
벩송의 담론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처럼, 모든 프랑스 인에게 접근 가능하다. 벩송은 새로운 용어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가장 새로운 것을 그리고 가장 난해한 것을 말할 줄 안다. 그에게 있어서 프랑스 언어는 예술 작품이었다. 작가의 가치와 철학자의 가치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벩송의 사유는 그의 보다 중요한 정확성을 나르는 한 문화의 표현이다. 이처럼 벩송은 추가적으로 작가인 것은 아니지만, 문체와 철학을 동일한 운동으로 사랑하는 의도상의 작가이다. 또한 그의 철학의 모델은 창조적 감동, 다시 말하면 예술적 창조의 과정이다.
벩송의 언어는 라신(Jean Racine, 1639-1699), 말브랑쉬(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페늘롱(Fénelon, 1651-1715)의 언어이다. 그의 언어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은 기표와 기의의 완전한 적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지속(la durée) [이미] 표현되었던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그 문장는 순수지속의 리듬 그 자체인 어떤 리듬과 결혼한다. 그 문장에서 이미지들은 미간행된 것들도 깜짝 놀랄 그런 것도 결코 아니며, 단지 정당한 것이다. 만일 그 언어가 수사학에서 벗어나 심층의 어떤 전율을 표시하지 않았더라면, 대학위주 사상이 매우 완전한 어법(une langue)을 공격하려 노렸을지도 모른다. 시인 뽈 끌로델(Paul Claudel 1868-1955)의 장미처럼, 그 어법은 심층자아의 음악성이라 할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이 음악성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임에도 이미 말해진 것과 같다 언어는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을 하나의 [신체] 기관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작가로서 벩송의 기적이다. (48P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