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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 217-283
§05. 587 av. J.-C. - 70 ap. Sur quelques régimes de signes 140-184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217-283.
§05.00. 도판 그림(140쪽): L’arche d’alliance avec la colonne de feu et la nuée(불 기둥과 구름이 있는 언약의 궤), Musé des arts dédoratifs, coll. Viollet. [// 로제-비올레 가문(Le nom de la famille Roger-Viollet) 1938년에 설립된 파리의 옛사진 대행사이다. 로제 비올레(Hélène Roger-Viollet, 1901-1985)가 설립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의 궤의 서열(Ordre de eu arche des Israelites): 새로운 체재(Un nouveau régime) (140, 215) - [내가 놀란 것은 궤라는 것이 궤짝을 기호로 하기보다, 아취(다리, 들것, 상여의 여)[소통]이라는 점이다. 두 개의 길이 있고 그 사이에 약속(계약, 협약)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약속을 위증하는 것이 죄악이다. 두 개의 길이 방향이 다르기에, 다시 말하면 인식의 틀이 다르기에 화해, 조화, 공명의 장이 필요한데, 그 장(영역)이 다리 위에 궤짝을 올려놓은 그림이다. 불기둥과 구름, 두 개(유일 신과 유목 신)의 야훼, 두 개의 나라(이스라엘과 유대) 등, 이중분절의 통합(통일성)을 위한 약속의 방식이 기호에서 문자의 시대로 바뀌는 것을 전587년으로 삼았을까? (50MKLD)]
- Le régime signifiant despotique. - Le régime subjectif passionnel. - Les deux délires et le problème de la psychiatrie. - Histoire ancienne du peuple juif. - La ligne de fuite et le prophète. - Visage, détournement, trahison. - Le Livre. - Système de la subjectivité: conscience et passion, les Doubles. - Scène de ménage et scène de bureau. - La redonnance. - Les figures de la déterriorisation. - Machine abstraite et diagramme. - Génératif, transformationnel, diagrammatique et machinique.
용어를 구분하기 위하여 기호[신호] 체제(un régime de signes) 속에서 여러 신호에 관한 학문이 있는데, 기호학(une sémiologie)은 언어와 연관해서 다루고, 기호론(une sémiotique)은 말씀의 의미와 기의 대상과의 관계를 다룬다고 해보자. 그러면 화행론(une pragmatique)은 말씀과 행동에 관한 것일 것이다. - 중세 유명론에서는 물체(감각, 비감각)에서 와는 달리 사유에서 의미(semo)와 음성(vox)으로 나누어진다. 의미는 두뇌에서 음성은 입(혀)에서 둘 사이의 배치문제 인데, 소리와 관련하여 두뇌의 배치에서는 두 가지(말하기 쓰기) 계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몸으로 행하기에는 두뇌가 귀(소리)와 연관도 있지만 눈으로 보기(이미지)에 더 많은 연관이 있다. 소리에 관한한 행동과 연관은 눈보다 속도와 범위가 넓다. 발 없는 말[言, 언]이 천리를 간다는 것은 매끄러운 면을 흐른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글은 패이고 줄쳐진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50MLE)
§05.01. 전제적 기표체제 217 Le régime signifiant despotique. 140
기호 체제라 불리는 것은 특수한 표현의 전(全) 형식화를 가리킨다. 적어도 그 표현이 언어적 표현인 경우라면 말이다. 기호체제(un régime de signes)는 기호계(une sémiotique)[기호론]를 구성한다. (140, 217)
만일 우리가 기표작용적 기호계를 기호론(la sémiologie)[기호학]이라고 부른다면, 기호론은 여러 기호 체제 중의 하나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체제는 아니다. 여기서 화행론(une pragmatique)으로 돌아가야 할 필연성이 나온다. 화행론에서 보면 언어(le langage) 자체에는 보편성이 없으며, 또한 충분한 형식화, 일반 기호론, 일반 메타언어도 없다. (140-141, 217)
기호의 [1]기표작용적 체제(le régime signifiant du signe) (기표작용적 기호 le signe signifiant)의 공식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를 제시하고, 또한 다른 기호만을 지시하며,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141, 218)
사람들은 지표(des indices), 즉 지시 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영토적 사태에 별 관심이 없다. 또 도상(des icônes), 즉 기표화 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재영토화의 조작에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기호는 이미 높은 정도의 상대적 탈영토화에 도달했다. 그래서 기호는 상징(symbole)으로 여겨진다. (141, 218) [참조: 177, 272, 원주 38. 퍼어스]
어떤 기호(les signes 신호)들이 신호가 된다. 그러한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은 아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형의 대기(大氣) 연속체(un continuum amorphe atmosphérique)에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물망을 형성하기 위하여 기호가 어떤 다른 기호들을 참조하는지, 어떤 다른 기호들이 그 기호에 덧붙여지는 지를 아는 일이다. 바로 이 무정형의 연속체가 일단의 “기의(signifié)”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무정형의 연속체는 기표 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기표의 매체(medium) 또는 벽(mur) 노릇을 할 뿐이다. (141, 218)
레비스트로스가 묘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세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알기도 전에 세계는 기표작용하기 시작했고, 기의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주어졌다. 당신 부인이 당신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오늘 아침 수위가 당신에게 행운을 빌면서 세무서에서 온 편지를 전해주었다. (141, 219)
편집증적 전제 체제: 이 기표들[일상인들의 움직임]은 나를 공격하고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의 의도들을 간파하고 그것들을 앞서나간다. 나는 항상 알고 있다. 나는 무력할 때조차 권력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가질 거야” (142 219)
이런 체제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끝이 나지 않는다. 이는 그걸 위해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무한한 빚의 비극적 체제이며, 모든 사람은 채무자이자 채권자이다. (142, 219)
기호들은 단지 무한한 그물망만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호들의 그물망은 무한히 순환적이다. 언표는 언표의 대상보다 오래 살아남고, 이름은 이름의 소유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기호는 다른 기호들로 옮겨가거나 잠시 다른 기호들 안에 보존되거나 하면서 자신이 의미하는 기의나 자신이 지칭하는 사태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142, 220)
하지만 고려할 것은 기호들의 순환성보다는 원들이나 사슬들의 다양체(la multiplicité)이다. 기호는 같은 원 위의 다른 기호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 다른 나선 위의 기호도 지시한다. 로버트 로위(Robert Lowie, 1883–1957)의 크로우족 이나 호피 족 남자들[의 예].. (142 220)
도약(les sauts)은 제멋대로 규칙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도약은 규제된다(d’interdits). 또 도약에는 금지가 있다. 가장 바깥에 있는 원을 넘어가지 말라, 가장 중앙에 있는 원에 접근하지 말라. (143, 221)
이 문턱들과 이 원들의 배분은 경우에 따라 변한다. 체계 안에는 근본적인 기만(une tricherie)이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도약하는 것, 장면을 이전하는 것, 다른 곳에 그 장면을 상연하는 것, 이것은 주체라는 사기꾼의 히스테리적 조작이며, 주체는 의미생성의 중심에 있는 전제군주의 편집증적 조작에 응답한다. (143, 221-222) [이는 주지주의 비판인데,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이 편집증적 조작이라는 측면과 닮았다. 단지 저자들이 주지주의적 주체를 히스테리환자로써 편집증의 영토에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50MLE)
게다가 다른 측면이 있다(140, 217과는). 기호작용적 체제는 모든 부분으로부터 방출되는 기호들을 원 안에 조직화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체제는 원들 또는 나선이 끊임없이 확장하도록 해주어야 하며, 체계에 고유한 엔트로피를 이겨낼 수 있도록, 그리고 새로운 원들이 생겨나거나 옛 원들이 재활할 수 있도록 중심에 기표를 다시 제공한다. (143, 222)
실로 의미생성(signifiant)과 해석망상(interprétose)은 땅의 병이든 피부병이든 인간의 질병이며 근본적인 신경증이다. (144, 223)
§05.02. 정념적인 주관적 체제 Le régime subjectif passionnel.
[이 항목은 정확하지 않지만, 우리로서는 인격성을 드러내는 얼굴에다 주관적 체제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한다. / 후-기표작용적 기호계에서야 현실화되는 “주체화(subjectivation)”가 주관적 체제가 아닐까 한다. (50MLE) ]
의미생성(signifiant)의 중심, ‘몸소 나선 기표(le Signifiant en personne)[인격화된 의미생성]”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그것은 순수 원리인 데다가 순수 추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닌 것(rien)이다. 결핍이냐 과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144, 223)
우리는 이 표현의 실체에 얼굴성(la visagéit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언어는 항상 얼굴성의 특질들을 동반한다. 또 얼굴은 잉여들의 집합을 결정화하며, 기표작용적 기호들을 방출하고 수신하고, 풀어주고 재포획한다. 얼굴(le visage)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 몸체이다. 얼굴은 모든 탈영토화된 기호들이 달라붙는 의미생성의 중심 몸체로서, 그 기호들의 탈영토화의 한계를 표시해준다. 목소리(la voix)는 바로 얼굴로부터 나온다. (144, 223)
전제군주-신은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하나 또는 여러 얼굴을 한다. 탈은 얼굴이다. 사제는 신의 얼굴을 관리한다. 전제 군주에게 모든 것은 공적(公的)이며, 공적인 모든 것이 공적인 것은 얼굴 때문이다. 거짓말(le mansonge), 기만(la tricherie)은 근본적으로 기표작용적 체제의 일부지만 비밀은 그렇지 않다. 역으로, 얼굴이 지워질 때, 얼굴성의 특질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떤 다른 체제에 들어와 버렸다고 확신한다. (145 224)
스트린드베리가 말했듯이 얼굴의 감시(Surveillance), 기표의 덧코드화, 모든 방향으로 발광(irradiation), 국지화되지 않은 편재. (145, 224-225)
끝으로 얼굴, 즉 전제군주의 몸체나 신의 몸체는 일종의 대응-몸체(contre-corps), 즉 수형자의 몸체 또는 더 잘 표현하자면 축출된 자의 몸체를 갖는다. (145, 225)
수형자는 우선 제 얼굴을 잃어버리는 자다. 또한 그는 동물-되기, 분자-되기에 진입하는 자로, 사람들은 그의 재를 바람에 흩뿌릴 것이다. (145, 225)
사진, 얼굴성, 잉여, 의미생성, 해석이 도처에서 개입한다. 기표의 슬픈 세계, 항상 현실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기표의 시원성(始原性, son archaïsme), 자신의 모든 양상들을 암시하는 기표의 본질적인 기만성, 기표의 심오한 익살스러움, 기표는 모든 부부 싸움들(les secènes de manage)[가정사 장면들]에서, 그리고 모든 국가 장치들 안에서 군림한다. (146, 226-227)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는 8개의 양상(huit aspects) 또는 원리로 정의된다. 1)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한다, 그것도 무한히(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 생성의 무제한성). 2) 기호는 다른 기호에 의해 돌려보내지며, 끊임없이 회귀한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 기호는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며, 끊임없이 중심에 의존하는 동시에 중심을 바꾸어 놓는다(기호들은 은유 또는 기호들의 히스테리). 4) 원들의 확장은 기의를 주고는 다시 기표를 주는 해석들에 의해 항상 보증된다(사제의 해석병). 5) 기호들의 무한한 집합은 하나의 주요 기표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기표는 과잉인 동시에 결핍으로 나타난다(전제군주적 기표, 체계의 탈영토화의 극한). 6) 기표의 형식은 실체를 갖는다. 또는 기표는 ‘얼굴’이라는 몸체를 갖는다(재영토화를 구성하는 얼굴성의 특질들이라는 원리). 7) 체계의 도주선은 부정적 가치를 부여받으며, 기표작용적 체제의 탈영토화 역량을 넘어선다고 비난받는다(희생양의 원리). 8) 그것은 보편적 기만의 체제이다. 이 체제는 도약들 속에, 규제된 원들 속에, 점쟁이의 해석에 대한 규제들 속에, 얼굴화된 중심의 광고 속에, 도주선을 다루는 태도 속에 동시에 들어 있다. (146-147, 227)
이런 기호계가 최초의 기호계도 아닐뿐더러, 추상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이 기호계에 특수한 특권을 부여할 어떠한 이유도 보이지 않는다. (147, 227)
우선 [2]전-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는데, 이른바 원시적(primitive) 기호계가 그것이다. 이것은 기호들 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들(des encodages naturels)에 훨씬 더 가깝다. 여기서는 유일한 표현의 실체인 얼굴성으로의 환원을 찾아 볼 수 없다. (147 228)
예컨대 몸체성(corporéité), 몸짓성(gestualité), 리듬, 춤, 제의(rituel) 이라는 형식들은 이질적인 것 안에서 음성적 형식과 공존한다. 여러 표현의 형식들과 여러 표현의 실체들이 교차되고 교대된다. 절편적이지만 다선적이고 다차원적인 기호계(une sémiotique)이다. (147, 228) [수렵(사냥)하는 유목민들의 기호계; 막사 관목숲, 막사이동 정도이다. 이는 정주적(농업적) 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제왕의 위계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숲의 벌채에서 정합적 계급을 형성한다고 해야 할까? (50MKE)]
또 하나의 기호계가 있다. 그것은 [3]반-기표작용적 기호계라고 부를 수 있다(특히 가축을 기르고 전쟁을 하는 섬뜩한 유목민들의 기호계가 있는데, 이들은 앞의 기호계에 속하는 수렵하는 유목민들과 다르다). 이 기호계는 절편성이 아니라 산술과 숫자 읽기에 의해 진행한다. 물론 수는 절편적인 계통들의 나눔이나 통합에 대단히 중요하다. (148, 229)
하지만 우선은 힉소스인에서 몽골인에 이르는 스텝의 위대한 유목민들의 고유한 군사 체계에서 채택되었으며 또 이것은 계통의 원리에 중첩된다. 비밀과 정탐의 행위는 이 ‘수’의 기호계의 중요한 요소이다. (149, 230)
넷째 기호 제체인 [4]후-기표작용적 체제에 대해 좀 더 특별히 말하려고 한다. 이 체제는 새로운 특성들을 갖고 있어 의미생성에 대립되고,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독특한 기법(un procédé original[독창적 절차])을 통해 정의된다. (149, 230)
이렇게 많은 기호체계들이 있다. 우리의 목록은 임의로 제한되었다. 하나의 체제나 기호계를 하나의 민족이나 역사적 시기와 동일시할 어떤 이유도 없다.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시기나 동일한 민족에서 특정 민족, 특정 언어, 또는 특정 시기가 특정 체제의 상대적 우의를 보증해준다는 점뿐이다. (149, 230)
우리는 기호체제들의 지도를 구성하려 한다. 우리는 그 지도들을 뒤집을 수 있고, 그 지도들의 특정한 좌표와 차원을 보존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우리는 사회구성체, 병리학적 망상, 역사적 사건 등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경우에도, 즉 “궁정풍 연애(amour courtois)” 시기로 날짜가 붙은 사회체계를 다룰 때나 “마조히즘”이라고 불리는 개인적인 기획을 다룰 때에도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149-150, 231) [외부세력이 권력이고 그 권력에 편승하는 제도 속에서 살아온 박근혜가 마조히즘이 아닐까?]
§05.03. 두 가지 망상과 정신의학의 문제 233 Les deux délires et le problème de la psychiatrie. 151
20세기가 시작될 때 진료술(la clinique)의 정점에 있던 정신의학은 비-환각적 망상(des délires non hallucinatoires)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환자에게는 “지적 쇠약”도 없이 정신적인 온전함이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편집증이고 해석적 망상들(délires paranoiaques et d’interprétation)을 보이는 첫째 주요 집단이 있는데 이 집단은 이미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타나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독립적인 [둘째] 집단이 있다는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 (150, 231-232)
이들과 다른 독립적인 [둘째] 집단은 에스키롤(Esquirol, 1772-1840)의 ‘편집광(Monomanie)’, 크래플린(Kraeplin 1855-1926)의 ‘호소망상(Quérulence)’에서 예시되며, 세리외(Paul Sérieux, 1864–1947)와 카프그라(Jean Marie Joseph Capgras, 1873–1950)의 ‘불평망상(délire de revendication)’ 그리고 클레랑보(Clérambault)의 ‘수난망상(délire passionnel)’에서 정의 되고 있다(“호소망상, 또는 불평, 질투, 색정광”). 한편으로 세리외와 카프그라, 다른 한편으로 클레랑보의 매우 훌륭한 연구에 따라 우리는 의미생성의 이상적체계, 즉 해석적-편집증적 체계와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 즉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를 대립시킬 것이다. (150, 232) [의미생성의 이상적체제가 상층이고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가 심층인 셈이다. 전자는 전-체제에서 대상화를 기능으로 이유를 찾고 후자는 탈-체제에서 사건에서 조건을 찾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50MMA)]
첫째 체제는 기만적인 시작에 의해, 하나의 관념 주위에서 조직되는 내생적인 힘들을 증언하는 숨은 중심에 의해 규정된다. (150, 232) [이들은 자신의 복사물 또는 대상물을 실재하는 것을 본떴다(simulacre)고 주장한다. 이 상층 철학사 주류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 왔다. 도덕이 아니라 정태종교가 뒷받침 해온 허구이다. ].
반대로 둘째 체제는 결정적인 외적 사건에 의해 관념보다는 정서(émotion)로, 상상보다는 노력이나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바깥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관념의 망상이라기 보다 행동의 망상). 또 그것은 한 구역에서 작동하는 제한된 성좌에 의해 규정된다. 또 그것은 하나의 선형적 계열이나 하나의 과정의 출발점인 “기본전제” 또는 “간략한 공식”에 의해 규정된다. 이 출발점은 새로운 과정의 출발점이 될 끝 지점까지 이르게 된다. 요컨대 그것은 무제약적으로 팽창 중인 원들의 동시성보다는 유한한 과정의 선형적이고 시간적인 이어짐에 의해 규정된다.
지적 쇠약을 동반하지 않는 이 두 가지 망상(deux délires)의 역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정신의학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정신의학자의 구성에서 핵심부에 있었다. 이것은 정신의학자가 태어날 때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51 233) [나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신학이 지닌 마지막 보루의 정신병 최료(퇴마)의 영역이 정신의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19-20세기 초의 일이다. 1차대전은 한꺼번에 형식논리의 학문을 무너뜨릴 것인데,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이 1919년 비엔나의 통일과학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지도 모르면서 체제의 수호자들(기사단)이었다. (50MLD)/ 20세기 초인데, 벩송의 저술(EC까지)에 반대자들 중에는 한사람은 카톨릭의 신부이며 파리 공식퇴마자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50MMA) ]
망상증 환자의 두 유형을 고려해 보자. 우선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미치지 않은 자들이 있다. 법원장 슈레버는 자신의 발산적 편집증 및 신과의 자신의 관계를 모든 방향으로 전개시킨다. .. 다른 쪽 극에는 결코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미친 자들이다. 다툼, 방화, 살인 같은 갑작스런 행동에 빠져드는 자들이 그들이다(에스킬롤의 네 가지 주된 편집광인 성적, 지적, 방화적, 살인적 편집광이 이미 여기에 해당한다. 요컨대 정신의학은 광기 개념과 관련해서 구성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광기 개념을 수정하면서 구성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두 방향 속에서 광기 개념을 와해시키면서 구성되었다. (151, 233-234) [둘째 편집광이 무섭다. 행동대들이다. 어벙이 연합과 일베가 이에 닮았다. 광기가 아니라 신앙으로 행하는 자들인데 45년 서북청년단을 그렇게 만든 것이 이승만 등과 합작한 일제부역자들의 사주를 받은 집단이다. 이들이 공산화 반대를 외치게 한 것은 1930년대 히틀러 집단과 유사한 점이 있다.]
따라서 정신의학자는 한편으로는 관용과 이해를 주장하고, 감금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개방식(open-door) 수용소를 호소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증대된 감시, 고도로 안전한 특수 수용소, 나아가 광인이 광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점 때문에 더 엄격한 척도를 요구했던 것이다. (234, )
우연히도 이 두 가지 주된 망상, 즉 관념적 망상과 행동적 망상을 구분하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 계급간의 구분을 따라간다(감금될 필요가 없는 편집증 환자들은 주로 부르주아인 반면 편집광과 정념적인 호소 망상증 환자는 대부분 노동자 계급과 시골 출신, 또는 정치적 암살범같이 주변부 계급에서 나온다). (152, 234)
따라서 우리는 기표작용적이고 편집증적인 전제군주적 기호 체제와 주체적이거나 정념적인 후-기표작용적 권위주의적 체제를 구분하려고 한다. 확실히 권위주의적인 것은 전제군주적인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정념적인 것은 편집증적인 것이 아니고, 주체적인 것은 기표작용적인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152 235)
예컨대 편집증적인 파라오와 정념적인 히브리인은 어떤가? 유대 민족을 보자. 기호들의 집합은 그것이 속해있던 이집트의 제국적 그물망에서 떨어져 나와, 도주선(une ligne de fuite)을 따라 사막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장 권위주의적인 주체성과 전제군주적인 의미생성을 대립시키고, 가장 정념적적이고 가장 덜 해석적인 망상과 해석자의 편집증적 망상을 대립시키고, 요컨대 선형적인 “소송이나 호소”와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물망과 대립시킨다. 너희의 호소(Votre revendication), 너희의 소송(votre procès), 그것은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한 말이며, 소송은 ‘수난’의 선위에서 계속된다. 역서 카프카는 자기 자신의 호소망상 또는 소송(procès) 개념을 끌어내며 ... (153, 236)
§05.4. 유대 인민의 옛 역사 236 Histoire ancienne du peuple juif. 153
우리는 여기서 유대 민족 역사의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사건을 간과할 수 없다.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신전 파괴 말이다(전587 및 후79). <신전>(le temple)의 역사 전체를 보라. 우선 궤(l’Arche)는 들고 다닐 수 있었고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 다음 솔로몬에 의한 ‘성전(une Maison)’의 건설, 다리우스(Darius) 시대에 있었던 재건설 등은 반복된 파괴 과정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띠는데,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두 시기는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 전605-562)과 티투스(Titus, 40?-81)[재위79-81]와 함께 찾아왔다. (153, 236-237)
‘악은 우리에게 다시 닥친다’는 공식이 유대 역사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가장 탈영토화된 선을, 희생양의 선을 따라야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의 기호를 바꾸면서, 그것을 우리의 주체성의 긍정적 선으로, 우리의 ‘수난’의 선으로, 우리의 ‘소송’ 또는 ‘호소’의 선으로 만들면서 따라간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희생양(notre propre bouc)이 [미래에] 될 것이고, 어린 양이 될 것이다. “사자처럼 피의 희생(du sang des scacrifices)로 숭배 받았던 신은 이제 배경으로 밀쳐지고, 희생된(sacrifié) 신이 장면의 전면(le devant de la scène)을 차지한다. (...) 신은 살해를 행하는(immoler) 동물이 되는 대신에 살해된 동물이 되었다 .” 우리는 뒤따라 갈 것이다. 우리는 땅과 바다(la terre et les eaux)를 분리하는 접선과 결혼할 것이다. (153, 237) [이해할 수 없다. 왜 하늘과 땅이 아니고, 땅과 바다란 모세의 홍해를 지칭하는 것일까?]
우리는 원모양의 그물망과 미끄러지는 연속체를 분리할 것이다. 우리는 분리성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거기에 우리의 길을 내고 기표의 요소들을 분리해낼 것이다(방주의 비둘기, la colombe de l’Arche). 그것은 좁은 행로(un étroit défilé), 사이(entre-deux)이다. 이 사이는 평균이 아니라 가는 선이다. (153-154, 237-238)
유대적인 특수성 .. 이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 못지않게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기호계는 유목민들의 반-기표작요적 기호계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히브리인들에게는 유목민의 과거가 있다. 그들은 유목민의 수적 조직화와 현실적 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특수한 유목민-되기가 있다. 그들의 탈영토화의 선은 유목민적 파괴라는 군사적 선을 많이 빌려왔다). 다른 한편 이것은 기표작용적 기호계 그 자체와 본질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향수는 히브리인들 자신과 그들의 신을 끊임없이 가로지른다(traverser). ... 우리는 이 혼합된 기호계 안에서 정념적이거나 주체적인 새로운 후-기표작용적 체제의 증거를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154, 238)
얼굴성(la visagéité)은 심오한 변화를 겪는다. 신은 자기 얼굴을 돌리는데, 아무도 그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한편 신에 대한 진정한 공포에 사로잡힌 주체도 자기 얼굴을 돌린다. 돌려서 옆 얼굴이 된 얼굴들이 빛나는 얼굴의 앞면을 대신한다. 이 이중의 얼굴 돌리기(외면) 속에서 긍정적인 도주선이 그려진다. 예언자는 이 배치물의 주요인물이다. 이 고유한 기호계(cette semiotique propre)[얼굴성]를 고려하면서, 예언주의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이다. (154, 238-239) [그 인물의 첫째는 모세이겠지, 어쩌면 벩송이 말하는 이중열망에서 예언자는 신도 주체도 아닌 새로운 도약, 즉 근원적 충력에 의한 도약을 하는 주인공이 예언자이겠지... 헤겔이 말하는 역사에서 이성의 간지(奸智 List ?)도 이중성일 것인데, 지양보다 양면의 부정에 의한 새로운 과정이 역사가 아닐까? / 그런데 스피노자라 한다. 원주가 없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카인에 관한 것이다. (50MMA)]
일찍이 자신을 외면한 신을 외면한 카인은, 자신을 죽음에서 피하게 해주는(fait échapper) 기호(le signe=표지)에 의해 보호받으면서,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간다. 카인의 표지(le signe). 제국의 죽음보다 더 나쁜 징벌? 그 유대인의 신은 집행유예를, 집행 유예된 현존을, 무제약적인 지불유예(l’atermoiement illimité)를 발명 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신은 신과의 새로운 관계인 계약(l’alliance)의 긍정성도 발명했다. 왜냐하면 주체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154-155, 239)
아벨은 아무것도(rien) 아니지만(그의 이름은 ‘헛됨(vanité)’이다), 카인은 참된 인간(le vrai homme)이다. 기표의 얼굴, 선지자(le devin, 점쟁이)의 해석, 주체의 자리바꿈을 부추기는[활성화시키는] 것은 속임수만(du truquage)의 또는 기만의(de la tricherie) 체계(le système) 가 더 이상 전혀 아니다 그것은 배반의 체제(le régime de la trahison), 보편적 배반의 체제이다. (155, 239) [체계는 의미론의 것이라면 체제는 기호론의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배반의 체제는 철학적으로, 스토아학파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역설의 논리에 가깝다. (50MMA)]
죽기 전에 모세는 배반이라는 위대한 찬송가의 말들(les paroles)을 받는다. 반대로 선지자[점쟁이]-사제와는 달리 예언자는 근본적으로는 배반자(traître)이다. 따라서 예언자는 신의 명령에 충실[성실한 독신]했기보다도 신의 명령을 더 잘 실현한다. (155, 239) [인민의 관대함을 교회에 다니는 신도가 충실(fidèle) 하기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작은 밭의 농부가 더 잘 실현한다. 글자 그대로 하는 이들보다 상황과 풍토에 맞게 행하는 자가 진정한 종교성을 지닌 자이다. 인민은 관대하고 온후하지만 분노가 차면 무섭다. 신도들은 인민을 배반자로 여길지도 모른다(50MMA)]
신은 끊임없이 신을 배반했던 주민들에게 행실을 고치라고 권유하라면서 요나(Jonas)를 니네베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요나의 첫 번째 행동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 하지만 요나는 신의 얼굴로부터 도망가면서 요나는 정확히 신이 원했던 것을 했다. 요나는 니네베의 악을 자기가 짊어졌던 것이다. ... (155, 240)
배반의 체계를 보편적인 것으로까지 밀어붙인 사람은 예수(이다. 예수는 유대인의 신을 배반하고 유대인들을 배반하며, 신에게 배반당하고(“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된 인간인 유다에게 배반당한다. .. 사람들은 예수에게 그가 신의 자손(sa filiation divine)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호(=징표 signe)를 요구한다. 예수는 요나의 기호를 언급한다. (155, 240)
카인, 요나, 예수는 기호들이 밀려들어 교체되는 세 개의 거대한 선형적 과정을 형성한다. 물론 다른 것들도 있다. 도주선 위에는 도처에 이중의 외면(le double détournement)이 있다. (MP 155, 240-241) [앞의 설명에 나오는 모세는 왜 빠뜨렸을까? - 모세는 다음 문단에 제시된다.]
§05.5. 도주선과 예언자 241 La ligne de fuite et le prophète. - 155
예언자(모세, 예레미아, 이사야)가 신이 맡긴 짐을 거절한 것은 위험한 임무를 거부했던 제국의 신탁(l’oracle)이나 선지자(le divin 점쟁이)가 그랬듯이 그 짐이 자기에게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요나의 경우처럼 숨고 도망가고 배반하면서, 복종했을 때보다 신의 의도를 더 잘 앞서갔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다. 예언자는 항상 신에 의해 강제된다(etre force). (155-156, 241) [카인, 요나, 예수 대 모세, 예레미아, 이사야 대립으로 놓았을까? - 전자는 종교성의 기호를 드러낸 자들이고 후자 삶에서 실행에 옮긴 자들일까? (50MMA)] / [러셀은 “서양철학사”(중세편, 제1부 교부철학, 제1장 유대교의 발전, 474-477쪽)에서, 예레미아는 여호와 이외 우상숭배를 벌하는 민족주의자로, 이사야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 종교적 혁신가로 설명한다. (50OKD)]
선지자(devin)[점쟁이]와는 달리 예언자(prophète)는 아무 것도 해석하지 않는다. 예언자의 망상은 관념이나 상상의 망상이기보다는 행동의 망상이다. 예언자가 신과 맺는 관계는 전제군주적이고 기표작용적인 관계보다는 정념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계이다. 예언자는 현재와 과거의 권력들(les pouvoirs)을 적용하기보다는 미래의 역량들(les puissance)을 앞서가서 탐지한다. (MP 156, 241)
§05.6. 얼굴, 외면, 배반 241 Visage, détournement, trahison. - 156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외디푸스 이야기 이다. 외디푸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아무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반부 전체는 제국적이며 전제군주적이고 편집증적이며 해석적이고 선지자[점술]적이다. 하지만 후반부 전체는 외디푸스의 방황이며, 자기 자신의 얼굴과 신의 얼굴을 이중으로 외면하는 그의 도주선이다.(156, 241-242)
오이디푸스는 아테오스(atheos)라고 불린다. 그는 죽음이나 유배보다 더 나쁜 것을 발명한다. 그는 이상하게 긍정적인 분리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을 걸으며, 그 선 위에서 방황하고 살아남는다. 휠더린과 하이데거는 거기에서 이중적 외면(le double détournement)의 탄생, 얼굴의 변화, 현대 비극의 탄생을 보았으며, 기괴하게도 그것을 그리스 인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 귀결은 살인과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라 집해유예된 살아남음, 무제약적인 지불유예이다. (MP 156, 242) [외디푸스 이야기 속에 방황이 있듯이, 들뢰즈의 “아리아드네” 또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후 방황과 새로운 삶이 있다. 탈영토화는 다양하다(?). ]
니체의 제안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의 반대인 오이디푸스는 그리스인들의 셈 족적인 신화였으며, ‘수난(la Passion)’ 또는 수동성(la passivité)의 찬미였다. 오이디푸스, 그리스의 카인. 정신분석으로 다시한번 돌아가 보자.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게 달려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MP 156-157, 242-243) [혼합된 기호계의 사례는 외디푸스만이 아니라 모세도 마찬가지인데 프로이트도 외디푸스를 다루고 말년에는 모세도 다룬다.]
하나의 혼합된 체제를 위한 절대적으로 다른 두 개의 기호체제. 하지만 바로 그 위에 가장 나쁘고 음험한 권력들이 정초된다. (157 243)
전제군주적인 편집증적 기만(la tricherie)[속임수]과 대립되는 권위주의적인 정념적 배반(la trahision)의 역사에 대해 한마디 더 언급하기로 하자. 모든 것은 불명예스럽다. 하지만 보르헤스(Borges)는 보편적 불명예의 역사를 말하는데 실패했다. (157, 243)
엘리자베스 시대의 모든 극장은 배반자의 배역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절대적 배반자가 되고자 하는 인물들, 궁정의 인간 그리고 심지어 국가적 인간의 기만과 대립되는 인물들로 말이다. (158, 244) [박근혜와 그 일당은 배반의 웃음거리(le comique)이다. 이 웃음 다음에 비극이 있어야 인간의 개인에 대한 되새김이 있다. 그런데 웃음거리로 끝나면 다시 개인은 면죄받았다는 듯이 사회에 배반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이승만의 동상이 다시 세워지는 것과 같다. 특이성의 숙명에 대한 관점없는 상층(기만)은 국가주의 또는 전제정 하에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전7천년”에서 보여준 것이다. (50MLD)]
헤르초크(Werner Herzog, 1942-)의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Aguirre)는 대단히 세익스피어적이다. (158, 245)
§05.7. 책 245 Le Livre. 158
기표작용적인 편집증적 체제냐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냐에 따라 책 또는 책을 대신하는 것의 의미가 바뀐다는 점은 명백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먼저 전제군주적 기표의 방출이 있고, 그리고 율법학자나 사제에 의한 그것의 의미 해석이 있다. (158, 245)
반대로 정념적 체제에서 책은 내면화되고 또 모든 것을 내면화한다고 얘기된다. 그것은 성스럽게 씌어진 “책”이 된다. 책은 얼굴을 대신하며, 자기 얼굴을 숨기는 신은 모세에게 [계율이] 씌어진 석판들을 준다. ... 얼굴이 기표의 몸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책은 정념의 몸체가 되었다. (158, 246)
바그너(Wagner, 1813-1883),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 조이스(Joyce, 1882-1941), 마르크스(Marx, 1818-1883), 프로이트(Freud, 1856-1939) 등은 여전히 <성서들(des Bibles)>이다. 정념적 망상이 심오하게[심층적으로] 편집광적(monomaniaque)이라면, 편집광(la monomanie) 그 자체는 유일신론과 그 <책> 속에서 자신의 배치물의 근본적인 요소를 발견했던 것이다. 가장 이상한 제의(le culte)이다. (160 247)
§05.8. 주체성의 체계: 의식과 정념, 분신들 247 Système de la subjectivité: conscience et passion, les Doubles. 160
이것이 정념적 체계 또는 주체화의 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원들 또는 팽창하는 나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의미 생성의 중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선의 출발점을 제공하는 주체화의 점이 존재한다. (160, 247)
기호가 주체들을 가로질러(à travers) 휩쓸려 들어가는 선형적 과정이 존재한다. 세 가지 상이한 영역들을 고려해보자. (MP 160 248)
1) 제국들과 대립되는 유대인들. ... 모세는 [신의] 얼굴을 대신하는 신의 석판들에 기반해서 구성된 언표행위의 주체이다.
2) 이른바 근대 철학 또는 기독교 철학. ... 언표의 주체는 몸 또는 느낌과 영혼의 결합인데, 이는 코기토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보증되며 필연적인 재영토화를 수행한다.
3) 19세기의 정신의학. 조증(manie)과 구별되는 편집광(monomaniaque), 이상적인 망상(délires ideéls)과 구분되는 주체적인 망상, 마법(sorcellerie)을 대신하는 “홀림”(possession), 편집증(paranoia)과 구분되는 정념적 망상의 느린 방출(dégagement) … .(MP 160, 248) - [(AO Ch1, §4 (40NKK))]
정념적 망상은 진정한 코기토이다. (MP161, 249)
후-기표작용적 체계의 정념적 선은 주체화의 점에 기원을 두고 있다. 무엇이든 주체화의 점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출발해서 주체적 기호계의 특유한 특질들을 발견할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중적 외면, 배반, 유예된 실존 따위 말이다. (161 249)
“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엉덩이 ... 여인의 아름다움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될 때마다 그 아름다움은 독특한 성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정념적 선이 출발할 때 있는 주체화의 점이다. (161, 250)
너가 이성적인 이상, 명령하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일 뿐이다.... 사람들은 예속의 새로운 형식을 즉 자기 자신 또는 순수 “이성” 또는 코기토의 노예 되기를 발명했다. 순수 이성보다 더 정념적인 것이 있을까? 코기토보다 더 차갑고 극단적이고 타산적인 정념이 있을까? (162, 251), [일반적으로 코기토를 타자아(Soi)처럼 생각하는데, 내자아(Moi)일 수 있다. 이런 고민은 불교에서 범아와 자아의 고민도 마찬가지 아닐까? (50MMB)]
알튀세르는 사회적 개인들이 주체로 구성된다는 점을 잘 파악해낸다. 그는 그것을 불러 세우기(interpellation)라고 명명한다(어이, 거기, 당신!). 그는 절대적 ‘주체’를 주체화의 점이라고 부른다. 그는 주체들의 “사색적 중첩(redoublement spéculaire)”을 분석하면서, 신, 모세, 유대민족(le peuple juif)의 예를 들어 이를 증명한다. 방브니스트 같은 언어학자들은 코기토에 아주 가까운 기묘한 언어학적 관상학(une personnologie)을 행한다. .. 언표의 주체[주어]로서 ‘나(le je)’는 항상 ‘그(un Il)로 대체될 수 있는 상태를 지시한다(“나는 겪는다, 나는 걷는다, 나는 숨 쉰다, 나는 느낀다...”) 하지만 언어학적 작용은 중요하지 않다. (162-163, 252)
정신분석적 코기토를 보자. 정신분석가는 자신을 이상적 주체화의 점이라고 하면서, 환자(le patient)로 하여금 이른바 신경증적인 옛날 점들을 포기하게 한다. 환자는 “분석수행자(psychanalysant)”라고도 불릴 것이다. (163, 253)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자기의 혼합된 기호계 속에서 주체화의 선에 완전하게 참여하고 있다. 정신분석가(psychanaliste)는 심지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도 없으며, 분석수행자(psychanalysant)[환자, 고객]가 해석의 책임을 떠맡는다. 정신분석을 받는 자(le psychanalysé)[고객]에 관해서 보자면, “자신의” 다음 면담이나 이전 면담을 따로따로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그만큼 더 나은 주체(un sujet 환자)이다. (163, 253) [분석수행자(psychanalysant)와 정신분석을 받는 자(le psychanalysé)는 동일인물인데, 마치 기표와 기의처럼 분할되며, 둘 사이에는 대칭이 없다. 저자들의 말 장난 같지만 분석이란 원래 그런 거다. 분석하는 순간에 총체적 자아와 대상적 자아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마치 이중 분절 같은 것이 있다. / 아래 설명을 보라 (50MMB)]
편집증적 체제에는 두 축이 있다. 한편으로 기호는 (기표를 통해) 다른 기호를 지시하며 다른 한편으로 기표는 기의를 지시한다. 이처럼 정념적 체제, 주체화의 선 역시도 두 축을, 통합축(syntamatique)과 계열축(paradigmatique)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방금 보았듯이 첫째 축은 의식이다. 정념으로서 의식은 정확히 말하면 두 주체의 이중화, 즉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 주체로서 이중화이며, 전자가 후자로 밀려나는 작용(le rabattement)이다. [/] 하지만 주체화의 둘째 형식은 정념으로서 사랑, 정념-사랑, 분신의 다른 유형, 이중화의 다른 유형, 밀려나기의(de rabattement) 다른 유형이다. 여기서도 가변적인 두 주체화의 점은 두 주체를 구분하는데 기여한다. 이 두 주체는 서로 얼굴을 맞대면서도 자신의 얼구를 감추며, 영원히 자신들을 접근시키고 또 갈라놓는 도주선, 탈영토화의 선과 결혼한다. (164, 253-254)
코기토가 자아만을 위한 정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념적인 사랑은 둘인 코기토이다. 정념-사랑에 잠재적인(virtuel)[가상적인] 유일한 주체의 이중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코기토에는 잠재적(potentiel) 커플이 있다. 클로소프스키(Klossowski)는 아주 강렬한 사유와 아주 열띤 커풀 사이의 이상한 상보성에 기반해서 가장 이상한 형상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164 254)
주체화의 선은 “분신”에 의해 완전히 점유되어 있지만, 두 종류의 분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선은 두 가지 형상을 갖는다. 즉 의식의 통합체적 형상 또는 의식적 분신은 형식과 관련되어 있고(‘자아’-‘자아’), 커플의 계열체적 형상 또는 정념적 분신은 실체와 관련되어 있다(‘남자’=‘여자’, 여기서 분신은 직접적으로 성의 차이이다). (164-165, 254-255)
§05.9. 가정사 장면과 사무실 장면 255 Scène de ménage et scène de bureau. - 165
우리는 혼합된 기호계 안에서 이 분신들의 생성을 따라갈 수 있다. 이 분신들은 혼합체뿐 아니라 퇴화를 형성한다. 한편으로 열정적인 사랑의 분신, 열정-사랑의 커플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부싸움”(la scène de ménage)에 이르기도 한다. 누가 언표행위의 주체인가? 누가 언표의 주체인가? 양성의 다툼. (165 255)
스트린베리(Strindberg)는 정념-사랑의 이러한 전락을 끝까지 밀고 가서 전제군주적 혼인 관계와 하스테리-편집증적 싸움으로까지 밀어 붙였다(“그녀”는 그녀 혼자서 모든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나에게 빚지고 있으며, 내 메아리였고 내 생각을 훔쳐갔다. 오 스트린드베리여!). (165, 255)
여기서 한 분신은 주체에 행위의 주체 역할을 점령하는 반면, 다른 분신은 단지 언표의 주체에 그치고 만다. 코기토 자신은 “사무실 장면”(la scène de bureau), 관료제적 사랑의 망상이 된다. (165, 256)
한번 더 말하자면 후-기표 작용적 체계 안에는 의식-사유와 열정-사랑이라는 두 모습들(deux figures)이 있다; 혼합된 전락[추락] 또는 조합 안에는 관료적 의식과 혼인 관계라는 두 계기들(deux moments)이 있다. 그러나 혼합된 것 속에서도 독창적 선(la ligne originale) 은 기호계적 분석에 의해서[기호론적 분석의 조건들 아래서] 쉽게 추출될 수 있다. (165, 256)
§05.10. 잉여 256 La redonnance. 165 -
다른 체제의 기표작용적 잉여와는 다른 잉여가, 즉 의식과 사랑의 잉여가 존재한다. 기표작용적 체제에서 잉여는 기호들 또는 기호의 요소들(음소, 문자, 한 랑그에서 일군의 문자들)을 변용시키는 객관적 빈도(fréquence)라는 현상이다. (165-166, 256)
반대로 후-기표작용적 체제에서 잉여는 주체적 공명(résonance subjective)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무엇보다 연동소들(les embrayeurs)을, 즉 인칭대명사들과 고유명사들을 변용시킨다(affecter 영향을 준다). (166, 256)
기표작용적 체제와 주체적 체제, 그리고 그 각각의 잉여를 구분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것들이 수행하는 탈영토화의 운동이다. (166, 257)
§05.11. 탈영토화의 모습들 257 Les figures de la déterriorisation. 166-
그리고 사태는 우리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꼬여 있다. 주체화는 도주선에 긍정적 기호를 강요하며, 탈영토화를 절대에까지 가져가며 강렬함을 가장 높은 정도로까지 가져가고, 잉여를 재귀적 형식으로까지 가져간다 등. (166-167, 257-258)
인간을 구속하는(ligoter) 주된 지층들은 유기체, 의미생성과 해석, 주체화와 예속이다. 이 지층들이 모두 함께 우리를 고른판과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분리시킨다. (258)
탈지층화 하는 것[은], 새로운 기능, 즉 도표적(diagramatique) 기능으로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고], ... 의식으로 생의 실험을 만드는 것[이고], ... 의식과 사랑으로 CsS을 만드는 것[이고], 주체화를 소멸하기 위하여 사랑과 의식을 사용[이용]하는 것[이다]. “자석 같은 매혹자이자 촉매자인 가장 위대한 연인이 되기 위해서, 우선 완전한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깊은 지혜를 체험해야만 한다.” (167, 258-259) [탈지층화는 붉은 여왕처럼 계속 움직이며 탈영토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역일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로서 배치된 방식으로 기계화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접합일 것이다(connexion). / 밀러는 삶의 숙명에 순종하는 바보가 되라 정도일까?]
더 이상 나무 형태의 노드가 아니라 리좀 식의 되풀이요 솟아오름인 잉여는 없는가? 말을 더듬는 자가 되어라,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어라.
“지 마 지배 마 수동 마 지배하지 마
지배하지 마 너희들의 수동적인 정념을 마
.............................................................................
지마 처먹지 마 지 마 지배하지 마
너희들의 쥐 너희들의 배급량 너희들의 쥐꼬리 배급량 마 마 ...” (168, 259)
세 가지 유형의 탈영토화를 구분해야만 하는 것 같다. 우선 상대적이고, 지층들에 고유하며, 의미생성과 더불어 정점에 이르는 탈영토화, 둘째로 절대적이고, 아직 부정적이고 지층적이며, 주체화에서 나타나는 탈영토화(‘이성’과 ‘정념’[Ratio et Passio]). 끝으로 고른판 또는 기관 없는 몸체 위에서의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가능성(événtualité). (168 259-260)
§05.12. 추상기계와 도표 260 Machine abstraite et diagramme. 168-
물론 우리는 내용의 형식들(예컨대, ‘신전(le Temple)’의 역할 또는 ‘지배적 현실(une Réalité dominante)’의 위치 등)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공적인 조건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주는 몇 가지 기호계들을 떼어내어 다루었다. 전-기표작용적 기호계(la sémiotique présignifiante). 여기서는 언어의 특권을 나타내는 “덧코드화”가 널리 시행된다. ... 기표작용적 기호계(la sémiotique signifiante), 여기서 덧코드화는 기표와 기표를 방출하는 국가 장치에 의해 완벽하게 수행된다. .. 반-기표작용적 기호계(la sémiotique contre-signifiante). 여기서 덧코드화는 표현의 형식 또는 언표행위의 형식으로서 <수>에 의해 확보되고 또 그것이 의존하는 <전쟁 기계>에 의해 확보된다. ... 후-기표작용적 기호계(la sémiotique poste-signifiante). 여기에서 덧코드화(le surcodage)는 의식의 잉여에 의해 확보된다. (168, 260)
그런데 우리는 두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으로 내용의 형식들로 만들어진 이 기호계[기호론]들은 추상 작용이면서도 구체적이다. .. [다른 한편] 모든 기호계[기호론]들은 혼합되어 있으며 그렇게만[혼합된 채로] 기능한다. .... 일반 기호론[기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169, 260-261) [
예컨대, 어떤 체제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기표작용적 기호계와 후-기표작용적 기호계에 관한 도표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구체적 혼합물의 가능성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169, 261)
169쪽 도표: 1. ‘중심’ 또는 기표(le Signifiant), 신의 얼굴성(visagéité), 독재자[전제자]의 얼굴성. 2. 사제와 관료들이 있는 ‘신전(le Temple)’ 또는 ‘궁전(le Palais)’. 3. 원 형태의 조직화. 같은 원 위에서 또는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 기호. 4. 기표를 다시 부여하기 위한 기표에서 기의로의 해석적 전개. 5. [여기에서부터 나선형을 벗어나 수평선으로] 희생양(le bouc expiatoire), 도주선의 봉쇄. 6. 속죄양(le bouc émissaire), 도주선에 대한 부정적 기호(signe) . (169. 261)
그러나 보완적이면서도 아주 상이한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추상적이거나 순수한 어떤 기호계(une sémiotique)을 다른 한 기호계(une autre)로 변형시킬 가능성이 그것이다. 언어의 특수한 성격인 덧코드화에서 유래하는 번역가능성에 힘입어서 말이다. (169, 262)
170쪽 도표: [나선형을 벗어나(생명체의 웃지층에 이르러) 활동성을 넘어서 의식의 의미화 과정에서 두뇌와 더불어] 1. 의미생성의 중심을 대체하는 주체화의 점. 2. 외면하는 두 얼굴[이중분절의 속성화] 3. 언표행위의 주체, 이것은 외면 속에서 주체화의 점으로부터 나온다. 4. 언표의 주체 이 위로 언표의 주체가 되돌아간다. 5. 사제(prêtres)의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관료제를 갖춘 유한한 선형적 과정의 연속. 6. 여기에는 해방되었지만 아직 파편화된 도주선이 부정적이고 봉쇄된 채로 남아있다. (170, 262)
새로운 기호계[기호론]가 창조되는 것은 항상 변형을 통해서이다. 번역은 창조적일 수 있다. 새로운 순수 기호 체제들은 변형과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기서도 일반 기호로는 없다. 오히려 기호계 변환(transsémiotique)이 있을 따름이다. (170, 263)
유비적 변형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잠, 마약, 사랑의 환희는 어떤 표현들을 형성한다. 이때 이 표현들은 기표작용적 또는 주체적인 체계를 전-기표작용적 체제로 번역한다. (171, 263)
기독교가 “미개인”과 “야만인”에게 전파되면서 이상한 창조적 번역을 겼었다. 아프리카 특정한 상업 유통만에 화폐 기호가 도입되자, 이 기호는 조절하기 매우 어려운 유비적 변형을 겪게 되었다(이 유통공간이 파괴적 변형을 겪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미국 흑인들의 노래들은, 이것은 특히 파롤들을 포함하는데, 훨씬 더 좋은 예이다. (171, 263)
또한 “검게 칠한 얼굴(face noircie)”을 한 백인들이 말과 노래를 강점하고, 한편 흑인들 쪽에서는 자신들의 얼굴을 더욱 검게 만들고 백인들의 것을 변형시키거나 번역하면서 자신들이 춤과 노래를 되찾을 때, 우리는 얼굴성이라는 특수한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는지를 보게 된다. (171, 264) [이중분절이 내부에서 생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와 만남에서 하나의 공생관계로 되기가 되는 과정도 있다. 흑인들의 재즈와 영가는 그 일부일 수 있다. (50MLD)]
(“아프리카에서 춤은 비개인적이고 성스럽고 음란하다. 남근이 솟아오르고 바나나처럼 만져질 때, 우리가 보는 것은 “개인적인 발기”가 아니라 부족의 솟아오름이다. (…) 대도시의 후치-쿠치 무희는 혼자서 춤춘다. 이 사실은 그 자체로 비틀거리는 의미를 보여준다. 법이 반응과 참여를 금지하는 것이다. 원시 제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단지 몸의 “암시적인” 움직임들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암시하는 것은 관찰자 개인에 따라 변한다.”) (171-172, 264)
진정한 기호계적 번역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학적, 어휘적, 심지어는 구문론적 변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미친 말하기(parler-fou)로는 충분하지 않다. (172, 265)
기표작용을 하는 환자와 해석하는 정신분석가 대신 이제 기표 작용을 하는 정신분석가가 있으며, 모든 해석을 떠맡는 것은 바로 환자이다. 킹슬리 홀(Kingsley Hall)의 반-정신의학적 경험 속에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된 전직 간호사 메리 반즈(Mary Barnes)는 ‘여행(le Voyage)’이라는 새로운 기호계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으며 최악의 정신분석적 해석 체계를 집단적 망상으로서 재도입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그녀에게 행해진, 또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행해진 모든 것을 해석했다 ...) (172, 265)
마약이나 그 밖의 다른 것들 그리고 분위기 변화 따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카스타네다(Castaneda)의 책들을 보라. 그의 깊은 관심들 중 하나는, 인디언이 어떻게 해석 메커니즘과 싸워서 자신의 제자에게 전-기표작용적 기호계 또는 더 나아가 탈기표작용적 도표를 주입시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둬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장소,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너 스스로 기호화하라고(Sémiotise toi-meme). ... “” (173, 266)
§05.13. 발생적, 변형적, 도표적, 기계적 267 Génératif, transformationnel, diagrammatique et machinique. 173 .
따라서 화행론은 이미 두 개의 성분(deux composantes)을 제시한다. 첫째 것을 발생적(générative) 성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둘째 것은 변형적(transformationnelle) 성분이다. (MP 173, 267) ,
둘째 성분은 가장 심오하며, 첫째 성분의 요소들을 측정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볼세비키 유형의 언표들은 언제 나타났으며, 레닌주의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절연하면서 어떻게 독창적인 기호계를 창조해내는 진정한 변형을 작동시켰는가? 설사 그것이 스탈린 식 조직화라는 혼합된 기호계 속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 모범적인 연구에서 장-피에르 파예(Jean-Pierre Faye)는 주어진 사회적 장에서 새로운 언표 체계로 가시화된 나치즘을 생산해낸 변형들을 상세히 연구했다. (173-174, 267)
기호계, 다시 말해 기호 체제 또는 표현의 형식화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언어이상인 동시에 언어 이하이다. 언어는 자신의 “초선형성(surlinéarité)”이라는 조건을 통해 정의된다. 랑그는 음성학적, 구문론적, 의미론적 질서의 상수들, 요소들 관계들을 통해 정의 된다. (174, 268)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이, 기호 체제들은 때로는 다양한 랑그들을 지나가고 때로는 동일한 랑그 안에 분배되는, 그리고 구조와 혼동되지도 않고 특정한 질서의 통일성과 혼동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것들을 가로지르면서(croiser) 이것들을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나게 하는 언어의 존재[현존] 함수들(fonctions d'existence)일 뿐이다. (MP 174, 268) [croiser는 교차 교직하는 의미이다]
그러니 배치물이 기표에 의해 또는 주체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역으로 기표나 주체는 배치물 안에 있는 언표행위의 변수들에 속하는 것이다. (174, 269)
하지만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동요한다. 하나의 기호 체제를 언어 이하의 것이 되게 하는 이유는 또한 그것을 언어 이상의 것이 되게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배치물의 단지 한 측면만이 언표행위와 관련되고 표현을 형식화 한다. (175, 269)
서로 전제되는 두 형식들, 즉 표현의 형식들 또는 기호 체제들(기호계적 체계들)과 내용의 형식들 또는 물체의 형식들(물리학적 체계들)을 동시에 설명하는 어떤 것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상적인 기계(la machine abstraite)라고 부르는 것이다. 추상적인 기계는 배치물의 모든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구성하고 결합한다. 그리고 얘기(dire)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추상적 기계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언어보다 “더 많다.” (175-176, 269-270)
추상적인 기계 자체는 물리학적이거나 물체적이지도 않고 기호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도표적(diagrammatique)이다(그것은 인공과 자연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인 기계는 실체가 아니라 질료(matière)에 의해 작동하며, 형식이 아니라 기능(fonction)에 의해 작동한다(opérer). (176, 271)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를 단지 기능들과 질료들만이 존재하고 있는 양상(l’aspect) 또는 계기(le moment)를 통해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도표(un diagramme)는 실체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며, 내용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다. 실체가 형식을 부여받는 질료인 반면, 질료는 물리학적으로건 기호계적으로건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실체이다. (176, 271) [질료가 실재성이라하면, 실체는 가상성 또는 기표에 가깝다. (50MMB) ]
우리는 그것이 입자(une particule)인지 기호(un signe)인지 말할 수조차 없다. 강렬함의 정도들, 저항의 정도들, 전도성(傳導性)의 정도들, 가열의 정도들, 늘어남의 정도들, 빠름 도는 지체의 정도들만을 나타내는 질료-내용[이며], 수학적 표기나 음악적 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텐서들(tenseurs)”만을 나타내는 기능-표현[이다]. (176-177, 271-272) - [여기서 “그것이”이란 의미상으로 추상적 기계이며, 또한 추상적 기계들의 질료들이 입자인지 또는 기호인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질료는 수학의 각각의 단위들만큼이나 특이성(내용)이며 이질적 힘들의 표출이기도(표현) 한다. (50MMB)]
이런 의미에서 도표(les diagrammes)는 영토적 기호인 지표(des indices), 탈영토화에 속하는 도상(des icônes), 상대적 또는 부정적 탈영토화에 속하는 상징(des symboles)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도표장치(diagrammatisme)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는 최종심급에 있는 하부구조도 아니며 최상위 심급에 있는 초월적 이념도 아니다. (177, 272-273) [참조, 앞에서(141, 218)]
또한 추상적인 기계들은 고유명들(그리고 날짜들)을 갖고 있다. 물론 이 고유명들은 사람이나 주체가 아니라 질료와 기능을 가리킨다. 음악가의 이름과 학자의 이름은 색, 뉘앙스, 색조, 강렬함을 가리키는 화가의 이름처럼 사용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료’와 ‘기능’의 접합접속이다. 목소리와 악기의 이중적인 탈영토화는 바그너-추상기계(une machine abstraite-Wagner), 베베른-추상기계(*-Webern)로 표시되리라. 물리학과 수학에서는 리만-추상기계(*-Riemann), 대수학(기저의 몸체와 결합되는 첨가선이라 불리는 임의의 선에 의해 정확히 정의되는)에서는 갈루와-추상기계(*-Galois)를 말할 수 있다. (178, 273) [추상기계로서 고유명은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활동의 첨점을 이루는 자를 지칭한다. 19세기는 특이성을 드러내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음악의 수학이지만, 사회학에서 꽁트, 역사에서 맑스, 진화론에서 다윈, 철학에서 벩송 등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국가주의를 변방으로 도주하면서 탈영토화의 길을 간 사람은 키에르케골, 맑스, 니체, 프로이트 이다(이 넷은 헤겔을 벗어난다). 20세기 독일 철학에서는 후설, 하이데거, H, 3H가 있는데 이들도 또한 경계선을 따라 미끄러져 가는 자들이다. (50MMC)]
따라서 도표적인 층[수준]위에나 고른판 위에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기호체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내용의 형식과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표현의 형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표는 특질들, 첨점들 만을 알뿐이다. (178, 273)
그래서 표현은 여러 체제나 기호계로 들어가는 지표들, 도상들 또는 상징들을 구성한다. 또한 내용은 여러 물리적 시스템, 유기체, 조직화 안으로 들어가는 몸체들, 사물들 또는 대상들을 구성한다. 질료와 기능을 결합시키는 보다 깊은 운동, 즉 지구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서 절대적 탈영토화는 이제 각각의 영토성, 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탈영토화, 그리고 보충적 재영토화라는 형식으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확실히 모든 것은 언어적 지층과 더불어 정점에 이른다. (178, 274)
층들(les strates)은 표현들과 내용들을 취급한다. 이것들의[표현들과 내용들] 각각은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실체화되어 있고 형식화되어 있고, 또한 이것들[층들]의 독립성 또는 실재적 구분을 보장하는 이중 분절의 집게들(des pinces)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층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다시 나누어지는 이원론을 지배 한다. (178-179, 274)
특히 도표장치와 공리계적 유형의 작동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창조적인 도주선을 그려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특질들을 결합하기는커녕 공리계는 모든 선들을 봉쇄하고, 모든 선들을 점 체계로 종속시키며, 모든 부분에서 도주를 시작한 대수와 기하의 표기법들을 정지시킨다. (179, 275)
힐버트(Hilbert)와 드 브로이(de Broglie)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었다. 그들은 질서(l’orde)를 다시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공리화, 기호화, 물리화는 도표가 아니라 오히려 도표의 반대이다. 고른판의 도표에 맞서는 지층의 프로그램. (179, 275) [도표는 한눈에 조망한다. 반면에 프로그램은 순서를 따라가야 하며, 그 연결 과정에 전개와 전환이 있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도 순서를 따라야 한다. / 공리 체계도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정리와 증명에서 앞의 것을 인정하면 그냥 그 순간에 도표상 인정으로 이해와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앞을 자른 것은 기억 또는 생명 지속을 자른 것과 같다. (50MMC)]
공리계가 발명과 창조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리계는 도표를 정지시키고 고착시키며 도표를 대체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또한 그것은 구체적인 것을 위해서는 이미 너무 크고 실재적인 것을 위해서는 너무 작고 견고한 추상 수준에 스스로 자리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수준인지를 볼 것이다. (180, 276)
하지만 한편으로 고른판, 고른판의 도표들 또는 고른판의 추상적인 기계들 대 다른 한편으로 지층들, 지층들의 프로그램들 및 지층들의 구체적인 배치물들 사이의 이원론에 만족할 수는 없다. 추상기계들은 도표들을 전개하는 그른 판위에만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이미 거기에 있으며[진화(전개) 과정상], 지층들 일반 속에 감싸여 있거나(enveloppées) “끼워넣어져(encastrées)”있으며, 또는 심지어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을 동시에 조직하는 개별 지층들 위에 그려져 있다. (180, 276)
한편으로 지층들이 도표의 질료들 또는 기능들 – 지층들은 이것들을 표현과 내용이라는 이중의 관점에서 형식화하는데 –을 포획하지 않는다면 지층들은 결코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할 것이다. ... 다른 한편 추상적인 기계들이 탈지층화된 입자-기호들을 추출하고 가속하는 권력이나 잠재력(절대로의 이행)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추상기계들은 결코 현존하지 않을 것이고 지층들 안에 이미 들어 있지도 않을 것이다. 고름(la consistance)은 총체화하지도 않고 구조화하지도 않고 탈영토화한다(예컨대 생물학의 지층은 통계학적 자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첨점들에 의해 진화한다). (180, 276) [탈영토화의 첨점이란 생물학 또는 진화론에서 변이들의 생성과 발전이다. 새로운 종은 언제나 탈영토화를 먼저 한 종이다. 지층의 고른 면위에 모든 종들은 열심히 재영토화 속에서, “놀라운 엘리스의 나라”에서 붉은 여왕처럼 쉼 없이 걷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의 숙명이다. (50MMC)] ㅇ
기호 체제에는 단지 두 개의 성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네 개의 성분이 있는데, 그것들이 ‘화행론(la Pragmatique)’의 대상을 이룬다. 첫째가 발생적(générative), 성분이다. 이것은 하나의 언어적 지층 위에 표현의 형식이 어떻게 여러 조합된 체계들에 호소하는지를, 다시말해 모든 기호체제 또는 모든 기호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혼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181, 278)
둘째는 변형적(transformationnelle) 성분이다. 이것은 하나의 추상적인 체제가 어떻게 다른 체제로 번역될 수 있는지, 다른 체제 안ㅇ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 그리고 특히 다른 체제들로부터 창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둘째 성분이 보다 심층적(profond)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181, 278)
셋째 성분은 도표적(diagrammatique)이다. 이것은 기호체제들 또는 표현의 형식들을 취하는데, 그로부터 입자-기호들을 추출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형식화되어 있지 않은 입자-기호들, 형식이 없고 서로 조합될 수 있는 특질들을 구성하는 입자-기호들 말이다. (181,279) 계
끝으로 마지막 성분은 문자 그대로 기계적(machinique)이다. 이것은 추상적 기계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배치물들 속에서 실행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구체적인 배치물들은 표현의 특질에 판이한 형식을 부여하지만, 내용의 특질에 판이한 형식을 부여재주지는 않는다. (182, 279)
따라서 화행론(또는 분열분석, schizo-analyse)은 원형적이면서도 발아하며 리좀을 형성하는 네 성분들로 표상될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아 두 저자는 푸꼬의 표상의 네 성분의 변형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푸꼬에게서 논리(수학)의 용어(관념), 문법(언어)의 단어(표상, 개념), 과학(물리와 생물)의 사물(대상), 정치경제학의 상품(화폐)의 상징화와 도표화 과정이다. 이에 비에 새로운 형이상학을 사유한다는 측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층들의 연관에서 탈영토화하면서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다. (50MMC)]
182(280)쪽 그림 [원의 순환 오른쪽에 시계 방향으로 밑에서부터 1, 2, 3, 4로 원의 4분할]
1) 발생적 성분: 구체적인 복합적 기호계들, 그것들의 혼합들, 그것들의 변주들에 대한 연구.
2) 변형적 성분: 순수 기호계들, 그것들의 변형들-번역들, 새로운 기호계의 창조에 대한 연구
3) 도표적 성분: 추상적인 기계에 대한 연구, 즉 물리적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관련해서 기호적으로 형식화되지 않을 질료들의 관점으로부터 연구.
4) 기계적 성분: 배치물들에 대한 연구. 추상적인 기계들이 내용의 질료들을 물리화하는 것과 동시에 배치물들은 추상적인 기계들을 실행시키고 표현의 질료들을 기호화 한다.
화행론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집합이다. [1] 발생적 성분 안에서 혼합된 기호계들의 사본(le calque) 만들기. [2] 체제가 번역되고 창조될 가능성 및 사본들 위로 발아할 가능성과 더불어 체제의 변형적 지도(la carte) 만들기. [3] 각 경우에 잠재성 또는 결과적 돌출로서 작동하고 잇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도표(le diagramme) 만들기. [4] 집합을 나누고 운동(운동의 선택, 도약, 변이와 더불어)을 순환시키는 배치물들의 프로그램(le programme) 만들기. (182 280)
예컨대, 우리는 임의의 “명제(une proposition)”, 다시 말해 구문론적, 의미론적, 논리적으로 정의된 언어적 집합을 “나는 너를 사랑해”라거나 “나는 질투나...”와 같은 개인 또는 집단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첫째로] 우리는 집단이나 개인에게서 이 명제가 어떤 “언표(énonsé)”[언질(言質)]에 대응하는지를 물으면서 시작한다(왜냐하면 하나의 명제가 완전히 다른 언표들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83, 280-281)
[1]전-기표작용적 “나는 너를 사랑해”가 존재한다. 이것은, 밀러(Miller)가 말했듯이, 춤이 부족의 모든 여자들과 결혼하는 것과 같은 집단적 유형을 띤다. [2]반-기표작용적 “나는 너를 사랑해”가 존재한다. 이것은 분산적이고 논쟁적인 유형으로서. 전쟁 속에, 펜테실레이아(Penthésilée)와 아킬레우스(Achille)의 관계와 같은 힘 관계 속에 포착된다. [3]의미생성의 중심에 보내지며 해석에 의해 기표들의 전 계열을 기표작용적 사슬에 대응케 하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존재한다. [4]열정적 또는 후-기표작용적 “나는 너를 사랑해”가 존재한다. 이것은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하는 과정을 형성하며,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과정 … 등을 형성한다. (183, 281).
둘째로 특정 순간에 특정 집단이나 개인 안에서 그 명제에 대응되는 언표가 일단 결정되면, 우리는 혼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다른 체제 안으로, 다른 체제들에 귀속되는 언표들 안으로 번역 또는 변형될 가능성들을 찾는다. (183, 281)
셋째로 우리는 이 명제에 대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언표들을 창조하려고 모색할(chercher) 수 있다. 그 언표들이 관능의 사투리, 조각난 물리학들과 기호계들, 탈주체적 변용태들이요, 구문론, 의미론, 논리학이 붕괴되는 의미생성 없는 기호들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가장 나쁜 것에서부터 가장 좋은 것까지 포함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183, 281-282)
이 마지막 모색(cette dernière recherche)은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기계들, 도표들, 도표적 기능들 작동시키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과 상호 전제 관계에 있는 기계적 배치물들, 기계적 배치물이 행하는 표현과 내용의 형식적 구분, 단어들의 투자, 가괸들의 투자를 작동시킨다. (184, 282)
러셀의 논리학에서 촘스키의 문법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든 방법, 언어에 보편자를 부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은 이미 너무 추상적인 동시에 아직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은 층위를 승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악의 추상으로 떨어진다. (184, 282)
기호체제들이 참조하는 것이 바로 언어(le langage)이며, 모든 기호론, 모든 언어학, 모든 논리학을 붕괴시키는 것은 추상적인 기계들, 도표적인 기능들, 기계적인 배치물들을 갖고 있는 기호 체제들이다. 보편적인 명제 논리[러셀]나 즉자적인 문법성(gramaticalité)[촘스키]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대자적인 기표(de signifiant pour lui-même)도 없다. 언표들과 기호화 작용들 “뒤에는” 기계들[인격들]만이, 배치물들만이, 또한 성층작용을 가로질러 상이한 체제들을 지나가며 언어의 좌표들과 현존의 좌표들을 피해가는 탈영토화의 운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화행론(la pragmatique)은 논리학, 통사론, 또는 의미론의 보족물(le comlément, 보충물)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하는 기저의 요소(l’élément de base)[substrat ou apeiron]이다. (184, 283)
(40NKK 7:31), (정리시작8:20, 50MLC) (13:17, 50MLD) (24:27, 50M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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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공방전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중요 사건 중 하나이며,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도시와 예루살렘의 신전을 파괴했다. 미래의 로마 황제 티투스와 더불어 그의 부지휘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 및 정복하며, 유다이아 임시 정부가 예루살렘에 세워지던 때인, 봉기가 일어난 66년 이래로 계속된 유다이아의 반란 세력들을 통제해냈다. // 유대교 학파 중 하나인 아모라임은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 만연했던 "이유없는" 증오에 대한 신의 처벌로 인한 것으로 여겼다. 절망에 빠진 많은 유대인들은 이교를 위해 유대교를 저버린 걸로 생각되며, 다른 많은 이들은 유대교내 증가하던 기독교 종파로 들어갔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기독교의 유대교적 뿌리로부터 기독교의 분리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이었는데, 예수를 반성전주의자로서 묘사하고, 성전의 파괴를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처벌로서 본 복음서에서 반영되었듯이,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나머지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여 반응하였다. 한/위키(2021년 4월 26일 (월) 13:30에 마지막으로 편집]
제5장 [체제]에서; 기호 체제는 공동체의 삶이 총체적 단위를 의미할 것이다. 체제(le régime)는 체계(le système)와 다르다. 들뢰즈는 기호체제에 대해 총체적 사유의 변환과 관련하여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체계는 체제 내에서 여러 그룹(단체, 학문분야)의 논리적 인과성 또는 기능성(함수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체제는 발생적인 내용을 안고 있고, 체계는 실행에서 경과와 과정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기호들은 체제와 연관인가? 감화에서 지각들이 인식적 자료들이라면, 기호들은 현실화에서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대상화는 사물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관계와 연관에 관한 것으로, 진위에 대한 의미 규명이라기보다 삶에 주의에 적합과 비적합 또는 적응과 부적응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비적합과 부적응은 거짓 또는 부정이라기보다, 그 당시 상태 또는 환경에서 조목받지 못한 것이라 지나쳤지만 시간이 지남에서 중요성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적관계보다 비유기적 관계라 한 것 같다. (54R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