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특별히 문한영선생님이 참석하시길 바란다고 미리 서대문교도소측에 청을 넣어 두었는데도 그 날 가보니 교도소측에선 정치범들 아닌 '잡범'들만 참석이 허용된다고 하였다. 강당은 일제시대때 지어진 오래 된 건물이라 이백명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협소한 구조였고, 나는 문선생님이 참석 못하신다 싶으니 서운하여 힘이 빠져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때부터 항일투쟁한 선조들의 뜻과 피가 얼룩진 대단히 의미있는 역사적 장소라고 나는 먼저 역설했는데 재소자들은 거기에 대해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날은 특별히 한 학년 후배인 테너 조영남(趙英男)군을 데리고 가서 그는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를 했다. 그때까진 아직 그의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을 때였지만 워낙 기량이 뛰어난 친구라 많은 박수를 받았다.
조영남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6.25때 피난 온 후 충남 예산 삽교천에 살아 충청도가 제 2의 고향이 된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고 가난하여 그는 대학 말기에 미8군에 가서 노래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이 퍼져 교수들이 그 사실을 알게되었고 세상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만 지상최고이며 순수음악이라고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교수들에게 조영남이 팝송을 부른다는 건 바로 신성모독죄에 해당되어 말들이 많았다. 급기야 교수들은 교수회를 열어 토의한 결과 조영남을 제명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것이 왜 여태까지 그가 서울음대 수료라고만 되어있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참으로 이해할수 없었던 것이 초대 음대학장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을 위시해서 그 때 두번째 학장인 김성태(金聖泰 1910~2012)학장 그리고 각 원로교수들이 하나같이 일제 때 친일활동을 열심히 하던 분들이었음이 떠올라 나는 어찌 뭐 묻은 개가 작은 티끌 하나 묻은 불쌍한 작은 강아지를 탓하는가 싶어 의아스러웠다. 누가 더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그렇게 졸업을 못한 그는 이제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했던지 69년 어느 날 탐 죤스가 부른 <딜라일라>를 번안가요로 터트리면서 대 히트를 치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을 걷는다. 그 전까지 가수들에게서 볼수 없었던 그의 폭발적인 클래식 창법은 글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그를 탑가수로 올려 놓는다. 왜 클래식에서 팝으로 진로를 바꿨냐는 기자 질문에 "클래식만으로는 나의 이 정열과 감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서'라고 대답 하였다. 그는 후에 미국 트리티니 신학대학교를 나오고 91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콘서트까지 가졌는데 지금은 서울음대동문회의 명예회원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해 70년엔 그 십여년 전에 국내에서 인기를 모으며 왕성하게 노래하던 김시스터즈가 도미하여 활동하다가 일시 귀국하여 시민회관(그 후 7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78년 다시 준공 개관되며 세종문화회관으로 개칭됨)에서 가진 내한공연에 조영남이 초청가수로 초대받아 노래하였다.
김시스터즈는 전설적인 가수 이난영의 세 딸들로 59년에 도미하여 'Charley Brown' 이란 노래로 미국 빌보드 챠트 4위까지 오르며 미대륙을 휩쓴 한류의 원조격이었다. 십대 소녀들이 이십대가 되어 귀국해서 가진 공연에 당시 막 샛별처럼 떠 오른 조영남이 게스트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조영남은 그때 <신고산타령>을 불렀는데 '신고산이 우루루루 함흥차가는 소리에~'하는 가사를 그 해 바로 얼마전 와우동에 와우아파트가 새벽에 붕괴되어 많은 주민들의 사상자를 낸 큰 사건을 빗대어 '와우 아파트가 우루루루- 하는 소리에~' 라는 가사로 개사해 불렀다가 정보부의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미 유명해져 있던 그는 그 후 군 복무 중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 안가로 사용하던 삼청각에 불려 가 '황성옛터'를 불러줄 것을 요청 받았으나 '각설이 타령'을 불러 또 한번 위기에 처한 것을 최초의 여성변호사였던 이태영(李兌榮)박사의 도움으로 모면한다.
팝쏭을 불러 퇴학까지 당하더니 신고산타령으로 위기에 몰리고 다시 각설이 타령으로 곤욕을 치룰 위험에까지 처하니 그는 평생 노래때문에 유명해지고 노래때문에 고역을 당하는, 말 그대로 노래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을 산 셈이다.
그 당시 위정자들은 노래같은 작은 문제로도 비위가 틀어지면 말 안듣는다고 중정으로 잡아들여 두드려 패는 마치 잘 삐치는 어린아이들 같았으니, 훗날 '미인'으로 유명한 신중현(申重鉉)도 박정희가 유신 찬양노래의 작곡부탁하는 것을 거절했다가 정보부에 끌려가 사흘동안이나 흠씬 두들겨 맞고 나온 일이 있다.
와우아파트는 당시 '불도저'란 별명의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 1926~1997)이 전시효과를 위해 자랑삼아 마포구 와우지구에 지은 아파트였는데 준공 불과 4개월만에 붕괴되어 그 충격의 파장도 컸다. 붕괴 후 검찰수사 결과 기둥 하나에 19 미리 철근 70개씩 들어가야 할것을 5개만 넣는 등 엄청난 부실공사가 들어나 그 사건으로 김현옥은 시장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해 71년에 박정권에 의해 다시 내무부장관으로 거뜬히 복귀된다. 수많은 시민들의 사상자를 낸 책임자는 장관으로 승진되고 그 참사를 민요에 잠깐 반영한 가수는 중정에 쫒기는 시대. ('였다'를 생략하는 것은 그러면 지금은 용산참사 등의 책임자가 처벌되는 시대인가 하는 것을 확언할 수 없어서..) 김현옥은 96년 지방선거 때 다시 부산시장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아니었다면 부산직할시도 '불도저' 식으로 오만 곳이 다 파 헤쳐 져 그 다음 해 그가 완공도 못 보고 타계했을 땐 부산시는 흙더미 천지였을 뻔 하였으니.
70년 와우동의 그 붕괴사고로 새벽에 잠자던 영문도 모르던 죄없는 주민 33명이 압사하고 수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니 그 부실공사는 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엄청난 사고로 까지 같은 맥이 이어진다.
본시 민요란 그 시대상을 반영하여 풍자적으로 백성들의 입에 올려지며 형성되는 법이다. 민심이 천심이라, 그렇게 민요로 불리워지면서 백성들은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을 보아도 후렴만 같고 메기는 부분에선 그때 그때 가사가 즉흥적으로 창작되어지므로 그 가사들은 항상 작자미상으로 남아있다. 구한말 일제시대 초기에 불리워진 아리랑에 보면,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 띄여라 노다 가세.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 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무나.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 말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배 띄여라 노다 가세.
핍박받는 민초들의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이 민요를 부른다고 그 당시에도 백성들이 잡혀가진 않았을진데 당시 가장 사회의 큰 이슈가 되는 와우아파트 사건을 민요에 올렸다고 쑈가 끝나기도 전에 당장 중정에서 시민회관 무대 뒤로 조영남을 잡으러 들이 닥쳤고 그는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뒷문으로 도망친다. 그렇게 본시 정통성 없이 집권하는 자는 그토록 자신이 없는 것인가 보다.
다재다능하며 평생 이리저리 튀는 행각을 벌이던 조영남은 이제 가수 하나만이 아닌 화가, 작가, 방송인, 작곡가 작사가 등의 여러 타이틀을 갖고 있다. '미네르바 폄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05년엔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이란 대담한 제목으로 써낸 책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허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서 친일이란 단어는 상당히 용인되는 분위기인지 다시 계속 인기를 모으며 방송 출연에 나서고 있다.
첫댓글 와우아파트 무너진날 무너진 아파트에 하숙하던 친구 걱정에 점심먹고 무너진 아파트까지 갔었지요. 마치 모래성 무너진틋 시멘트를 얼마나 빼돌렸는지 .. 결국 그날밤 뉴스에 그친구는 발굴 한시간 전에 세상을 떴다고 같이 뭍혀있다 살아나온 같은집 하숙생이 전해주더군요. 시골 출신으로 무지 순진하고 눈 큰 친구였는데 ..
조영남 선배되시는 군요. 저도 좋아하는 가수입니다.
조영남은 학교다닐 때 성격도 좋고 노래도 잘 해 인기였는데 우리 학년엔 왠지 쓸만한 테너가 없어서 오페라같은 행사를 할 땐 그를 빌려와(!) 쓸 정도였지요. 멕시코민요 <제비>를 그가 작사로 개사해 부른걸 들어보면 문학소질도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나 그의 정치 사회적 의식은 그 문학이나 음악 미술의 예술 감성을 못 따라오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