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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모발현 파티마(Fatima) 대성당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침 일찍 성모 발현성지 파티마(Fátima)를 가려고 왕복 버스표를 끊었는데 타고 보니 파티마가 종점이 아니고 이튿날 우리가 갈 포르투(Porto)가 종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예 배낭을 메고 파티마를 들른 다음 곧바로 포르투로 갈 껄.... 쓸데없이 다시 리스본으로 갔다가....
파티마는 버스를 타면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다.
파티마 성당 / 히야친타, 루치아, 프란치스코 / 당시 신문 기사
가난한 포르투갈 시골 동네 파티마의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7살의 히야친타(Hyacintha), 9살의 프란치스코(Francisco)와 10살의 루치아(Lucia)는 1917년 5월 13일부터 그 이후 10월 13일까지 인근의 이레네(Irene) 골짜기에서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매달 만났다고 한다.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친 남매간이고 루치아는 사촌이었다. 3번째로 성모 마리아를 만난 뒤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접 성모님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음 달 10월 13일, 아이들의 말을 확인하려고 신문기자와 7만여 명의 군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날씨는 시커먼 구름이 온통 뒤덮이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는데 오후 1시경, 갑자기 비가 그치고 먹구름들이 물러갔으며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와 묘한 은빛 원반처럼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루치아가 군중을 향해 태양을 보라고 크게 소리치자 하늘에는 여러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고, 태양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한 태양이 하늘에 있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전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이 현상은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십 km 떨어진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두 목격하였다. 훗날 수녀가 된 루치아는 성모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 부인이 입은 옷은 반짝거리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것이었다. 부인이 입은 옷은 발밑에까지 늘어뜨려졌으며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로 보였고,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한 슬픔도 비치고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부인의 손은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고서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모님의 모습이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오직 세 어린이들에게 보이고 들렸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주교님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고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免償)을 주었다.
파티마가 성모발현의 성지로 알려진 후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Basilica/성전)가 건축되기 시작하여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성당의 양쪽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광장이 있는데 한쪽에 자그마한 성모 발현 기념성당이 있다. 이 파티마 성모 발현성지는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 많이 알려졌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다고 한다.
1967년 5월 13일, 성모님 첫 출현 후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했다고 한다. 2007년에는 파티마에 신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광장 앞에 추가로 성당을 지었는데 8,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공사비는 모두 순례자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미사 전 성모님을 모신 가마를 뒤따르는 깃발의 행진과 대성당 모습
마침 우리가 가던 날이 9월 29일 주일이어서 대 광장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는데 광장은 이미 수만 명이 운집하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의자도 없이 모두 맨바닥에 앉거나 서서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가 아닌 사람들인 듯 사람 숲을 헤집고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도 있다.
미사를 보는 사람들의 가운데 통로는 묵주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가는 신자들의 행렬이 끝이 없는데 광장 입구부터 제단 앞까지 200m도 넘을 거리를 수없이 왕복한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옆에 따라가며 손수건으로 땀도 훔쳐 주고 비틀거리면 부축도 하고....
또 광장 안쪽에는 초를 봉헌하는 곳이 마련되어 있는데 봉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놓을 자리가 없어 옆쪽에 큰 불구덩이를 만들어 놓아 초를 들고 오는 사람들은 그 앞에 이르면 초를 잡고 기도를 드린 후 불구덩이에 초를 던지는데 시커먼 불꽃과 연기가 엄청나게 치솟는다.
초도 작은 초가 아니고 굵기가 팔뚝만 한, 1m도 넘는 초를 서너 개씩 들고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 행렬이 100m도 넘는다. 미사는 간단한 기도로 마무리하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5.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Compostella) 대성당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 길 표시 가리비
포르투갈의 중세도시 포르투(Porto)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을 달려 스페인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였다.포르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언제 국경을 지났는지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비고(Vigo)를 지나는데 작은 강과 그 주변으로 그림처럼 들어선 조그만 도시의 모습이 환상적이다.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 있는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산티아고(Santiago)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종착점이다. 이곳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에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 라는 의미로,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별빛이 비치는 들판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 야고보 이야기>
성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데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로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데 어머니는 살로메이다. 이들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애제자로, 항상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최측근이었고 예수님이 야고보를 아꼈을 뿐 아니라 야고보도 예수님을 극진히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성질이 불같아서 예수님이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고 한다.신심이 깊었던 살로메는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묻는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그러자 둘이 동시에 “예, 할 수 있습니다!” 이 맹세를 들은 주님은 예언의 말씀을 하신다.“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이 말씀하신 잔은 바로 죽음의 잔, 고통의 잔,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잔이라는 뜻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낙담에 빠져있던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라고 하시자 야고보는 즉시 실천에 옮긴다. 당시 땅의 끝은 동쪽은 히말라야, 서쪽은 이베리아반도였다고 한다.야고보는 두 제자와 함께 수만 리 떨어진 땅끝 이베리아반도(스페인)의 갈라시아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마침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주후 44년) 야고보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했으며”(사도 12,2)이리하여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데 이는 어머니 살로메가 간청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님의 오른쪽에”,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는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 야고보를 중세 스페인어로 “성 이아고(Saint Iago)”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합쳐져서 산티아고(Santiago)가 됐다.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곧 ‘성 야고보’ 이다. 또 일명 산디에고(San Diego)로 표기되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는 제자 둘과 함께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Galacia)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오며 자신이 죽으면 복음을 전한 이곳 땅끝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야고보 순교 후 두 제자는 야고보의 시신을 모시고 이곳 갈라시아로 와서 묻으니 곧 오늘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야고보의 무덤이 잊혀져 찾지 못하다가 814년, 은수자(隱修者) 성 펠라지오가 한밤중에 빛나는 이상한 빛을 보고 부근의 동굴 속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즉시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시고 이곳 산티아고로 와서 모셨다고 한다. ‘별빛이 비치는 들판을 따라 걸어서....’ 그 후 유해를 봉안하기 위한 성당 건축에 착수해 829년 첫 성당 건물이 완공되어 유해를 모셨고,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 야고보의 유해를 모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Jean- Pied-de-Port)에서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Pyrénées) 산맥의 기슭을 따라 걷는 길인데 대략 800km 정도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25일 정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한 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하며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갈래의 순례길이 있다. 이곳은 세계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이 찾지만 특히 한국의 순례자들이 많아서 우리가 갔을 때도 여러 한국 팀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단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 오는 젊은이들도 있어서 놀라웠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데 우선 웅장한 건물에 놀라게 된다. 본당 건물 앞에는 널찍한 광장이 시원스럽고 부속건물들도 엄청나게 많고 웅장하다. 뒤쪽에도 널찍한 공원도 조성되어있고 건물들 사이로 여유 있는 공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내 어느 곳에서나 성당을 향하여 언덕의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길바닥에 놋쇠로 2m 정도 간격으로 가리비모양을 붙여 놓았는데 방사선 모양의 선들이 모이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성당에 도착한다.산티아고 순례길은 천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온 길로,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위와 같은 가리비껍질 표식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성당 앞 광장에는 조개껍질과 조롱박을 매단 순례지팡이를 팔고 있다. 이 순례길의 순례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12세기에 “산티아고 기사단(Orden de Santiago/일명 성 야고보의 검우회(劍友會)”이 조직되었다고도 한다.
이 기사단은 1160년경 순례자들 보호와 함께 스페인계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었다고 한다.
1174년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7세는 이 기사단의 중앙 수도원이 있는 우클레스 시를 이들에게 주었으며, 1493년, 이 기사단은 약 7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는데 그해 이사벨 여왕의 휘하에 들어갔다.그 후, 스페인군은 전쟁 때 돌격 함성이....‘¡Santiago y cierra, España!’(산티아고와 함께 돌격, 에스파냐!)
성 야고보 유해 참배 / 법석이는 참배객들 / 혼자 순례를 온 청년
대성당의 입구에는 야고보 성인의 동상이 있는데 모두들 만지고 입을 맞춘다. 대성당은 내부수리를 하는 중이어서 어수선한데 특히 이 성당의 자랑은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이름의 어마어마하게 큰 향로(香爐)를 성당 천정에 매달아 사제 8명이 줄을 당겨서 분향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수리를 하느라 칸막이를 하고 천으로 막아놓아 보이지 않는다. 성당 정문은 닫혀있고 뒷문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하고 있다. 다행으로 성 야고보의 유해는 참배할 수 있었는데 본당 제단 밑 지하에 모셔져 있는데 너무나 작고 소박해서 서글픈 느낌이 들었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니 눈물이 난다.이곳에서 혼자 순례길을 걸어온 전북대 출신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짬을 내서 25일 동안 걸어 오늘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너무 대견해서 격려의 말을 건네고 순례 내내 들고 왔다는 태극기 귀퉁이에 격려의 글도 써 주었다. 맨 마지막에 “73세 세계배낭여행가 白忠基Augustino..”그런데 이 녀석, 말은 안했지만 태극기의 깃대를 반대쪽에 매었다!! 멍청한 녀석... ㅎ이곳에서 2박을 했는데 다른 곳은 가지 않고 이곳을 두 번 와서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그늘에 앉아 쉬다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 둘... 45일 동안 걸어서 도착했다고 한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