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덕유능선에서(9월 13일, 일)

[南嶺]

1. 산행 참가 산우

동문산악회 선후배 산우 131명(13~41회)

2. 산행 시간 기록

무주리조트 11:05

설천봉(1,520m) 11:25

향적봉(1,614m) 11:40

중봉(1,594m) 12:00

백암봉(송계삼거리, 1,490m) 12:15

동엽령(1,260m) 13:20(점심 ~13:50)

무룡산(1,492m) 15:20

삿갓골재(1,289m) 16:20

황점마을(600m) 17:30

3. 산행 落穗

十勝地의 하나라는 넓고 깊은 德裕山群의 중심부를 단숨에 찾는 산행이다. 덕유산群은 빼재에서 육십령까지 약 70리 대간길의 산군인데 향적봉이 최고봉이다.

南進 산행의 순서가 어긋나 아쉽지만 신임 단장의 귀여운 욕심 때문에 8년만에 다시 찾는 이 산길에 대한 감회가 새롭다.

당시에도 리조트에서 리프트를 타고 오른 설천봉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남한의 제4고봉인 향적봉을 오르고 남덕유산 아래 영각사까지 하늘길이 제대로 열리는 덕유능선의 봉우리들을 구름에 달 가듯이 미끄러져 넘어갔었다.

유장하고도 壯快한 능선에서 산속의 산을 넘어가며 듬직한 큰산의 초록품에 안기는 산행의 느낌이 그윽했었다.

오늘 산행의 총거리는 14km 남짓이지만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의 도계를 이루며 남서쪽으로 흘러가는 덕유능선 대간길은 백암봉(송계삼거리)에서 삿갓골재까지 8.4km이다. 오늘 대간길에서 조금 빗겨나 있는 북덕유산 봉우리들(향적봉, 중봉)까지 덤으로 오를 수 있으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산행인가.

향적봉과 중봉의 돌탑과 바위탑들, 지난 세월을 그리며 亞고산지대의 적막감에 젖어있을 枯死木들, 푸른 바늘침잎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구상나무의 숲, 천년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朱木들도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고추잠자리 맴도는 덕유평전의 오솔길에 다투어 피어날 산꽃들의 미소도 떠오른다. 

무주 리조트 스키장에서 차례차례 8인승 리프트에 올라타니 10여분만에 산록을 거슬러 올라 설천봉에 닿는다.  

스키장 건설로 천년 주목과 녹색 윤기 흐르는 구상나무가 거의 다 죽고 봉우리가 찢겼다는 설천봉에 안개가 끼는 듯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계절도 벌써 백로가 지나고 우레 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는 추분이 다가왔으니 산중의 가을이 이미 찾아온 느낌이다.

덕유 하늘의 표정이 수시로 변한다. 비구름 몰려오면 산중이 흐려지고 비구름 흩어지고 뭉게구름 사이로 햇빛 비쳐오면 푸른 하늘 아래 세상이 밝아진다. 

설천봉에서 간단한 체조로 산행 준비를 하고 천천히 나무 계단길을 15분쯤 밟아 올라가니 돌탑이 서 있는 향적봉이 기다리고 있다.

이 봉우리가 향나무와 비슷한 주목이 많아 향적봉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주목 자생지가 상당히 파괴된 지금 그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나.

옛날 이 곳을 찾았던 어느 선비가 <주목을 향나무라 하면서 어찌 향나무에서 향기가 나지 않소>라고 안내하던 스님에게 묻자 <미륵불이 세상에 올 때 향기가 나리다>라고 대답하였다던가. 미륵불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지만 산악회의 미륵불 같은 아우들이 오늘 산행을 함께한다.

향적봉에서 바라보는 사방의 경치가 아득하고 그윽하다.

저 멀리 아련한 지리능선은 구름에 살짝 가렸는데 가까운 곳에 귀봉을 넘어온 대간 줄기가 백암봉에서 방향을 틀어 새의 양쪽 날개죽지처럼 나뉘어져 남덕유산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반갑다. 산길 먼곳에 남덕유산과 장수덕유산이 솟아 육십령쪽을 가르키는가. 가야산과 충남쪽 산들은 방향만 가늠해본다.

남덕유산 아래 영각사에서 향적봉까지 걸어오르고 당일에 구천동 계곡 삼공리로 내려선 어느 시인의 덕유산 시가 생각난다. <오십년 걸어온 길 하루에 걸어보았다> 했으니 아마도 키가 작은(다섯 자)이 시인이 인생 오십줄에 이 산길을 걸으며 지나온 인생을 돌아봤을 터이다.

<가을 깊은 날-덕유산에서, 이향지, 1941~

가을 깊은 하루는 도시의 미아가 되어

덕유산 오십리 능선을 사슴처럼 걸어라.

천만리 따라온 빗방울 창에 기대 잠들 때

새벽바람에 눈뜨는 푸른 별빛을 모아

갓 돋은 아침해 안개바다에 빠뜨려도

상고대 만발하여 마음 달래주는 길.

삿갓골재 넘어온 바람에 억새꽃 호호 날렸던가.

무룡산 바위에 돋은 이끼의 흰 눈썹에 웃었던가.

동엽령 갈림길에서 마음 흔들렸던가.

덕유평전 조릿대들만 빈둥빈둥 푸르던가.

향적 바위 봉우리에 다섯 자 키를 더하니

안개속에 접혔던 길 햇살 아래 펼쳐진다.

오십년 걸어온 길 하루에 걸어보았으니

구천동 맑은 물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른다.>

구천동 계곡이 언뜻언뜻 내려다 보이는 향적봉대피소 부근을 지나며 백련사쪽을 바라본다. 나제통문이 구천동 33景의 제1경이고 향적봉이 제33경이던가.

어제 내린 비에 약간 젖은 듯한 산길이 높은 곳에서 유유자적 흘러간다. 벌써 산중의 가을이 깊어진 듯 키 작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고 구절초, 쑥부쟁이, 망초 같은 들국화류의 산꽃이 도처에 피어나 미소짓는다.

햇빛 비쳐오면 지리산 연봉과 가야산 산줄기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서대산과 계룡산 같은 충남의 산들도 잘 보인다 하지만 구분해 낼 수가 없다.

아주 온유한 산길에 八方이 툭 틔고 마음도 그만큼 탁 트여온다. 뒤돌아보는 의젓한 중봉의 풍경이 높은 곳에 올랐음을 실감케 한다.

이른바 덕유평전을 지나는 산길에 산꽃이 만발해 있다. 산꽃아! 네 이름을 몰라서 미안하구나. 누구의 싯귀대로 <내가 가야 꽃이 핀다>인가.

처연하도록 그윽한 고사목 사이로 고대하던 千年 朱木, 푸른 잎에 살짝 물기 머금어 빛나는 구상나무 群落地가 눈에 띈다.

푸른 주목과 푸른 구상나무 이파리에 겨울철 눈꽃이 두툼하게 피는 광경이 달력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아닌가. 이곳의 고즈넉한 풍경이 덕유산의 대표 敍情이다.

대간길과 만나는 송계삼거리 백암봉에 닿는다. 거창쪽 송계사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무주쪽으로 잘 보이는 흰 암봉이 있다하여 백암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고 빼재에서 지봉과 귀봉을 거쳐 백암봉에 닿은 대간길이 거의 구십도로 휘어져 동엽령을 향해 남서진을 시작하는 곳이다.

때때로 숲길을 이루는 산길은 대체적으로 하늘길이 되어 동엽령으로 편하게 내려간다. 

왜 이 산이 德裕란 좋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봉우리와 골짜기의 아름다운 풍광은 그 이유를 슬며시 알려 준다. 누구나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가질 수 있기에 저절로 덕유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산길인데 오른쪽이 전라도 무주, 장수쪽이고 왼쪽이 경상도 거창, 함양쪽인가. 내려다보는 국토의 山河는 장엄하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이 아름다운 산길이 옛날 신라와 백제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겠지만 작금 엄연히 영남과 호남을 잇는 이 산길이 오히려 두 지역을 가르는 심리적 분단선으로 고착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지역 감정을 타파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 정치 능력의 한계, 감성의 마비를 탓하여야 하나. 산길에서 자주 들리는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기는커녕 때로는 듣고 싶지 않기도 하다.

 

구름이 몰려왔다 흩어지는 산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다. 덕유능선을 걷는 맛이 바로 이런 맛인가. 구름 흩어지는 사이 발 아래 태평스럽게 졸고 있는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볼 때면 세상사의 근심과 걱정이 구름 흩어지듯 사라지는 느낌이다. 깊은 산중의 푸르름이 주는 향긋한 기운을 들이마시며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하늘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걷는다.

 

이 편안한 길에서 어느 거구의 아우가 바윗길 돌뿌리에 걸려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큰 낭패를 겪을 뻔 했으니 아찔했는데 크게 다친 곳이 없다니 불행중 다행이다.

무주쪽 칠연계곡으로의 갈림길이 있는 동엽령에 닿아 훌륭한 점심터인 나무 데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음의 점을 찍으며 형님이 따라주는 붉은 술 한 모금 마셔본다. 산중의 망중한을 즐기며 발걸음의 회포를 푸는 시간에 햇빛은 밝게 쏟아지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하다.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와 무주군 안성면을 잇는 고개인 동엽령은 겨울잎 고개라는 뜻이지만 예전에는 동업(同業)이재라고 불렸다 하니 거창과 무주쪽에서 등짐을 지고 오르는 장사치 동업자들이 이 고개 위에서 반갑게 만나 술 한 잔 나누지 않았겠는가.

구름이 바람에 흩어지는 이 고개에서 산길을 열심히 걸은 동문 선후배 산행 동업자들이 김밥과 과일을 나누어 먹고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서로의 가슴을 적신다. 산중의 밥과 과일은 기본點이고 시원한 맥주와 호박색 액체는 응용點이다.

동엽령에서 3km 남짓 떨어진 무룡산을 향해 밋밋한 오르막을 계속 올라간다. 뒤돌아보면 아스라해진 향적봉과 의젓한 중봉이 응원의 눈길을 계속 보내주고 앞쪽으로는 삿갓봉, 남덕유산, 장수덕유산이 한층 가까와져 있다.  醉仙緩步의 발걸음으로 덕유산 서정을 만끽하며 산꽃이 다투어 피어난 오르막을 걸어 무룡산에 오른다.

스스로 흥에 취해 용처럼 춤추는 봉우리라는 무룡산에서 여유롭게 흘러가는 덕유산 줄기의 봉우리들을 살피며 안식의 시간을 갖는다. 하산지인 황점 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된다는 이야기인가.

삿갓재 대피소로 내려가는 길도 산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 그윽한데 뒤돌아보면 가까운 곳의 못보던 암봉들이 그윽하고 바로 앞쪽에 구름이 벗겨진 검푸른 삿갓봉이 앵돌아지게 솟아 있다. 오늘 저 봉우리를 넘어 영각사까지 가지 않는 것이 다행인가.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하니 오늘의 대간 산길이 끝난다. 1999년 개장했다는 이 산장에 퇴계의 시에 나온다는 <遊山如讀書>라는 글귀가 쓰인 예서체 현판이 보인다. 산길에서 노니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오늘 책 몇 권을 읽었는가.

 십여년 전 친구들과 남덕유산 아래 영각사를 출발하여 삿갓재에서 고기 굽고 술 한 잔 하면서 산중의 하룻밤을 지내고 이 산길 오십리 길을 걸어 향적봉을 오른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어느 겨울날 칠연계곡에서 동엽령을 올라 향적봉까지 눈 쌓인 길을 걸어간 산행이 오히려 더 옛날 같은가.

삿갓재 대피소에서 4.2km 떨어진 거창군 병곡면 월성리의 황점 마을까지 내리막 산길이 조금 지루하고 어쩐지 어스름이 일찍 깔리는 느낌이다.

쉬지 않고 걸어 내려와 맥주 한 캔을 목넘김의 감촉을 즐기며 단숨에 들이킨다.

산행의 끝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의 맛은 지친 발걸음을 위로해주고 열에 들떠 있을 오장육부를 단숨에 식혀주는 마약과도 같은 맛이다.

술 기운이 살짝 도는 가슴 속에 덕유산의 산그림자가 스쳐가는데 황점 마을의 쉼터에 편안히 앉아 언젠가 남덕유산을 오르기 위해 먼저 올랐던 의젓하게 솟은 남령을 바라다보며 산행을 마친다.

章

2015. 9

 

 

[조규선]

오랜만에 들어왔네요. 대전에서 가가운 덕유산 산행~~ 즐감 ~~~

[마우]

오랜 만에 들어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