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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적 영혼 불멸 사상
<서론>
안식일교회가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은 크게 서너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안식일문제이고 두 번째는 조건적 영혼불멸 사상이 며 세 번째는 재림과 조사심판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하여 일반 기성교회에서는 안식일교회의 핵심교리라고 보고있으며 기독교의 비평입장에서는 이들 핵심교리가 일반교회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 교회는 이단이라 고 규정한다. 이에 대하여 안식일교회 측은 이의를 제기한다. 안식일교회가 일반교회와 다른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일반교회가 모체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사도신경 내용등)를 안식일 교회에서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안식일교회의 핵심쟁점내용중 두 번째인 조건적 영혼불멸 사상에 대한 비평은 무엇이며 변증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참고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할 것은 본지 지상논쟁의 서술방법중 비평보다 변증의 기회를 많이 할애한 이유에 대하여 첫째는 비평의 내용이 처음부터 비평자들이 간략히 서술하였기에 그중에 핵심만을 요약한 것이며 둘째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안식일 교회측의 변증 기회를 한 번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차원과 논리상 비평보다는 변증의 분량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독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인간의 본성과 불멸>
▲ 비평 : 훼케마
안식일 교회는 죽음과 더불어 영혼이 멸절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에 의하면 영혼은 단순히 한 개체 전부를 의미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살아남아 있는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살아남아 있지 않으므로 사람은 죽음과 함께 완전히 비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친다.
▲ 해설 : 안식일 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개신 교회나 카톨릭교회와 다른 점은 제칠일 안식일 준수와 함께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에 관한 신앙이다. 일반 교회들은 사람의 영혼은 본래부터 불멸의 속성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을 때에 몸을 떠난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생전에 행한 선과 악에 따라 곧바로 천당<천국>이나 지옥, 혹은 카톡릭교회의 경우 연옥으로 간다고 믿고 가르친다. 또 칼빈주의 개혁교회중 일부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혼은 본격적인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임시 수용과정인 중간상태에 머물며 예수 재림까지 생전에 행한 선악에 따라 예비적인 평안이나 고통을 겪는등 일종의 개신교식 연옥을 거친후에 재림시 천국이나 지옥에 영원히 처한다고 가르친다. 이상의 모든 가르침에서 영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의인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악인은 지옥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는 영원지옥설을 필연적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사실인가? 이에 반하여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성경에 쓰여진 대로 아래와 같이 믿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홀로 불멸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다. 그날까지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의식 상태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되어 그들의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끌어올려질 것이다.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인 둘째부활은 그후 천년이 지난다음에 있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부활하고 승천한 의인들이 영생하는 것처럼 둘째 부활시에 육신으로 부활한 불의한 사람들은 심판의 불에 사루어짐으로써 영원히 멸절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혼불멸 대신 영혼멸절을 영원지옥 대신 악인소멸을 믿고 똑같은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이토록 상반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교리는 여럿이 있을 수 있어도 올바른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 가지 방법밖에 있을 수 없다. 죽음의 진상을 모르고 사는 것은 종착지를 모르고 여행하는 것과 같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계시다. 이토록 중요한 사후문제에 대해 크게 상반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교회를 혹독하게 비평한 박영관씨나 탁명환씨 등 국내 인사들이 자신들의 저서에서는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지나친 것은 오히려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평은 현대 칼빈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훼케마씨의 저서에 근거하고 있다.
▲ 비평 : 탁명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인간도 육도 죽어도 영원영원하도다
▲ 변증 : 안식일 교회
훼케마씨와 탁명한씨 모두 이구동성으로 영혼은 불멸임을 강조하고 그렇게 믿지않는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참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인가?
하나님의 속성인 불멸
성경은 분명히 불멸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인간의 어떠한 부분<영혼>도 불멸이라고 말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죽음에 반대되는 뜻의 불멸, 곧 불사란 말의 신약 원어는 아다나시스인데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아니함이 있다(딤전 6:16)고 선언되었다. 그리고 예수재림시 의인들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부활할 때에 비로소 이 죽을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 ; (고전15:53~54)이라고 천명했다. 썩거나 파괴되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의 불멸을 가리키는 신약원어는 아프다르시스인데 역시 만세의 왕 곧 썩지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 롬 1:23)께만 속한 속성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예수재림시에 부활한 의인들과 홀연히 변화된 살아있는 의인들이 누리게 될 상태라고 분명히 밝혔다(고전 15:52~54).
그러므로 이상에 언급된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그러한 불멸성은 사람이 날때부터 타고난 속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요 3:16;36, 11:25) 예수재림시에(요일 5:11, 고전 15:51~53) 비로소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선물인줄로(롬 2:6, 딤후 1:10)믿는 것을 조건적 불멸이라고 하는데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 비평 : 훼케마
안식일 교회는 조건적인 불멸을 믿고 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타고난 불멸성을 소유하지 않았고 불멸의 영혼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불멸성은 하나님만 소유하신 것이라고 한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불멸성은 어떤 부류의 사람 곧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믿는다.
▲ 변증 : 안식일 교회
이상에 기록된 비평은 정죄받아야 할 이단의 교리가 아니라 옹호되어야 할 정통 진리임을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선입관에 좌우되거나 한 두 마디 논증으로 다루어선 안될 중대한 관심사이므로 신.구약성경을 망라한 철두철미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바르게 이해하자면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들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인간 창조의 재료로 쓰여진 이곳의 흙은 히브리어 아파르로 흙덩어리가 아니라 땅의 미세한 입자를 가리키는 땅의 티끌을 의미한다(욥 38:38, 34:15,시 103:14, 창 3:19)사람을 비롯한 동식물의 생명의 기본단위는 세포인데 이 세포는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고 단백질이 주성분인 원형질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유황, 인, 카리, 칼슘, 마그네슘등 실제로 흙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흙과 동일한 원소들을 취하여 창조의 지혜로 세포를 조성하시고 몸의 각 부분을 친히 고안하여 구성에 있어 완전한 인간을 만드셨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이렇게 완전한 형체를 갖춘 인간이 생체활동을 하자면 세포에 생명력을 제공하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써 세포의 생화학 작용이 시작되게 하셨다. 이 일은 몸의 조성과 동시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곳의 생기는 히브리어의 「니슈맛 하임」(nishmat chayymim)인데 호흡이란 뜻의 네솨마(neshmamah)와 살아있음(living)을 뜻하는 하이(chay)복수는 하임이 합쳐진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인 것이다. 같은 뜻의 표현으로 창세기 7장 22절에는 「니슈맛루아흐 하임」이 쓰였는데 앞의 말에 덧붙여진 「루아흐」(ruach)역시 호흡을 가능하게 하는 바람, 공기를 뜻하며, 노아홍수 때에 죽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 곧,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 7:22)는 표현이 쓰여졌다.
「구약성경의 생기-루아흐」
「호흡」,「바람」,「기운」의 뜻을 가지고 사람에게 생명력을 제공하는 이 「생기」는 주로 히브리어의 「루아프(ruach)」로 구약성경에 389회가 쓰였는데, 성령을 가리킨 것을 비롯하여 (94회),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과 문맥에 따라 「호흡」,「생기」,「기운」,「정신」,「마음」,「신(spirit)」, 「영」등으로 번역되어 히브리어의 배경이 없는 사람들을 자칫 혼란에 빠뜨린다. 예를 들면,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이곳은 「신」이란 창세기의 「루아흐」인데 어떤 영이나 한자가 뜻하는 정신이나 귀신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당시 불어넣으신 생기 또는 호흡인 것이다. 시편 146편 4절에서는 같은 「루아흐」를 「호흡」으로 번역하여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한다고 바르게 번역했다. 에스겔 37장 5절에서는 루아흐를 마른 뼈에 들어가 부활시키는 생명소인 생기로 번역했고 시편 104편 3절에서는 호흡으로 번역했다. 루아흐를 전도서 12장 7절에서처럼 신으로 번역하면 큰 혼란이 생긴다. 예로 욥기 27장 3절에서 욥은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묘사하기 위해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있느니라」고했다. 이 곳의 기운은 다름 아닌 「루아흐」인데 신으로 번역했더라면 하나님의 신이 내 코에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될뻔했다. 코로 드나드는 것은 호흡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루아흐를 신으로 번역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의식을 가진 「영」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번역될 경우에만 그렇다. 단지 창조시에 하나님에 의해 공급되었던 생명소인 호흡 곧 생기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표현인데, 그것은 일반 짐승에게도 일어나는 동일한 현상이다.(창 7:22, 전 3:19~21)
「신약성경의 생기 - 퓨뉴마」
호흡, 바람, 생기, 성령을 뜻하는 구약의 루아흐를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프뉴마(pneumma)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신약에 385회 쓰였는데 성령이나 악한 영으로 번역한 것을 비롯하여 번역하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영」(spirit), 「마음」(심령), 「정신」, 「바람」등으로 표현했고 심지어 「영혼」로 번역하기도하여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했고, 사도행전 7장 59절에서는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하여 이곳의 영혼은 마치 사람을 죽을 때 몸에서 떠나가는 혼백같은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이곳의 영혼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뉴마」인데 사람이 죽을 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생명의 근원인 생기, 호흡, 혹은 생명자체를 뜻하는 말로 우리말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의식을 가진 혼백이 떠나는 것처럼 오해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 믿는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욥 33:4) 전도서(12:7)의 경우처럼 신(루아흐)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구약에서 389회 쓰여진 「루아흐」나, 신약에서 385회 쓰여진 「프뉴마」비록 「신」이나 영, 때로 「영혼」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성령을 가리킨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과 연관되어 쓰여졌을 때 불멸이라거나 죽은 뒤 몸을 떠나 의식을 가진 것으로 표현된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이렇듯 확고한 성경의 확증 때문에 굴지의 구약 학자인 카일(C.P. KKeil)과 델리취(F.Delitzsch)도 그들의 창세기 주석에서 때로 「신」이나 「영」으로 번역되는 「루아흐」이 사람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그런 영이나 영혼이 아니며, 단지 사람이나 일반 동물의 생명소로서 필요한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일뿐임을 확인하고 있다.(창 6:17; 7:15,22; 왕상 17:17) 사람이 동물과 다른점은 생기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데 있는 것이다.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앞서 말한 과정을 거쳐 흙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된 생체조직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생명소인 생기가 작용하면서 인체는 갖가지 생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은 두뇌의 활동을 통하여 의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생명체 곧 생령이 된 것이다.
「구약성경의 생령 - 네페슈」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네페슈 하야」(nepheshc hayah)인데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하야」과 「숨쉬다」은 동사 「나파슈」에서 나온 명사인 「네페슈」이 합쳐져 「숨쉬며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 곧 생명체를 뜻한다. 그래서 새 국제번역(NIV)이나 개역 표준역(RSV)성경등은 그것이 무슨 몸이없는 혼 같은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예전처럼 「생령」(living soul)으로 번역하지 않고 「산 존재」(living being)로 고쳐 번역한 것은 잘한일이다 한때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슈 하야를 생령(living soul)으로 번역했던 흠정역(KJV)도 새 흠정역을 내면서 「산 존재」(living being)로 바꾼 것은 특기할 일이다. 「생령」혹은 「영혼」등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네페슈」은 구약에 무려 754회나 나오는데 그중에 22번은 새, 물고기, 짐승 등을 가리켰으며, 7번은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다. 영혼(네페슈)을 불멸의 혼백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다음의 성경절에서 확인해보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 17:11)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신 12:23) 이상에서 「생명」으로 표현된 말은 히브리어 「네페슈」인데 자주 영혼으로 잘못 오해되는 말이다. 네페슈를 불멸의 영혼으로 생각하고 생명대신 영혼을 넣어 말을 만들어 보라. 「육체의 영혼은 피에 있다」든지 「피는 그 영혼인즉 네가 그 영혼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말라」은 희한한 말이 된다. 피가 생명일 수는 있어도 영혼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영혼으로 번역된 이 네페슈를 일반이 오해하는 대로 그런 불멸의 혼백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가? 도살장에 죽어 넘어진 소나 밥상에 오르는 물고기, 석쇠에 걸려 구어지고 있는 닭들에게도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어불성설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실제로 물고기, 새, 파충류와 육축들이 인간과 동일한 「네페슈」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0,21,24,30절에 「생명」은 모두 네페슈의 번역이다. 그런데 역시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이나 문맥에 따라 네페슈는 「사람」,「생명」,「생물」,「짐승」,「마음」 죽은 사람 등으로 표현되었고 절반 이상은 영혼(soul)으로 번역하여, 마치 죽은 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혼백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십상이게 만들었다. 참뜻인 생명(life)으로는 119번 번역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혼으로 대부분 번역되어 불멸의 혼백으로 인상을 주는 이 네페슈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생명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인간 속에 있는 어떤 독립적인 본질로 죽을때 몸을 떠나 존재하는 무슨 귀신같은 불멸의 혼백이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다.
「신약성경의 생령 - 프쉬케」
살아있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구약의 히브리어 「네페슈」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는 「프쉬케」(psuche)인데 신약성경 전체에 105번 쓰여졌다. 이말 역시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생명」로 40번, 「마음」로 3번 표현되고, 「영혼」으로는 58번이나 번역되었다. 이러한 말의 혼동 때문에 다음과 같은 혼란을 일으키는 비평이 나오게 마련임을 실례로 든다.
▲ 비평 : 훼케마
신약성경에는 최소한 두 번 「프쉬케」 이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인간의 어떤 양상임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첫 번 예가 마태복음 10장 28절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구절에서는 「프쉬케」은 안식일교회의 가르침처럼...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명칭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몸이 죽을 때 프쉬케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 변증 : 안식일교회
말 뜻의 혼동과 함께 선입관이 가져오는 혼란이 단순한 말씀을 복잡하게 만드는 실례이다. 이 말씀을 계속 설명해 내려가는 문맥인 마태복음 10장 38절에 의미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기목숨(프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앞 절인 28절에서 「영혼」로 번역한 같은 말을 39절에서는 「목숨」, 즉 「생명」로 바르게 번역하여 본 뜻을 바르게 드러내고 있다. 참뜻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육신의 생명을 빼앗길지라도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골3:3)음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그 영원한 생명(요 5:24; 요일 5:11,12)은 핍박자들이 빼앗지 못할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잠시뿐인 육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까지도 두려워말라는 격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골 3:4)날 것이며, 생명을 잃을지라도 다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0장 28절 말씀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같은 내용의 말씀인 누가복음 1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4.5절) 오히려 마지막 심판때에(계 20:12~15)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반대의 뜻이다. 왜냐하면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고 선언되어 있어 영혼을 불멸이라는 생각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죽은 후에도 영혼이 있다는 두 번째 증거로 훼케마씨는 다시 다음의 예를 들고 있다. 두 실례 가운데 두 번째 것은 계시록 6장 6~11절에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프쉬케의 복수인 프쉬카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하니...
제단 아래 있는 영혼
▲ 변증 : 안식일 교회
훼케마씨는 위에 묘사된 영혼들이 순교당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로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채 부르짖고 있다고 강조한다. 말이 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각 시대 모든 순교자들의 형체도 없는 허다한 영혼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좁은 제단 아래 오글오글 밀집해 있으면서 원통함을 참지못하여 소리지른다는 뜻인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
주지하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주로 상징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실례로 앞 장인 5장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 어린 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것으로 계시에 나타났다(계 5:6). 모든것을 통찰하시는 완전한 지성의 상징인 일곱눈과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인상 깊게 상징한 일곱뿔이다. 분명히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는가? 제단은 성소의 뜰에 있던 것으로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렸다.(레 1:5; 3:2; 17:6).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들의 희생의 피도 제단아래 있는 것으로 적절히 상징되었다. 또한 같은 레위기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17:11) 속죄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피는 희생제물의 피는 제물의 생명(프쉬케)이 희생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결국 피가 부르짖는 것이다. 어떻게 피가 브르짖는가? 하나님께서도 아우를 죽인 가인을 향하여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말씀하셨다. 이른바 문학에서의 의인법이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다고 표현되었다(히 12:24)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6:11)셨다고 했는데 육신의 실체도 없다고 상상을 하고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는가? 상징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면 이상과 같이 해석상의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훼케마씨가 신약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프쉬케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어떤 본질이라는 증거로 제시한 이상의 두 경우가 모두 성경과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주장임을 밝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신.구약성경에 「생기」,「호흡」,「신」,「영」,「영혼」,「생명」,「목숨」,「생물」,「마음」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가 아래와 같이 분포되어있다.
(구약.히브리어) - 루아흐 : 289회, 네페쉬 : 754회, 네솨마 : 25회
(신약.헬라어) - 프뉴마 : 358회, 프쉬케 : 105회
→ 총계 : 1658회
그런데 이토록 1658회나 쓰여진 말들이 「영」이나 「신」,「영혼」으로 번역되기는 했어도 그것 자체가 불멸이라거나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되어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말이 단 한군데도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 두 군데라도 분명히 적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이 불멸이요 결코 죽지 않는지 1658번 성경에 물어보라. 한결같이 압도적인 대답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수백번 사용되면서도 단 한 번 어디에서고 영혼은 본질적으로 죽지않는다든지 영이 불멸이라고 말하는데가 없다. 불멸이 영혼이나 영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이런 일은 이상하고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