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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를 들어서며>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여러 조각의 섬들로 구성된 오키나와.
이 오키나와는 어떠한 해석 속에 지금 일본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있는지 그 궁금증을 자아내는 섬이다.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란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이라기 보다는 류쿠 왕국으로 해석되기에 더욱 더 알맞은 오키나와.
이 오키나와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부터 그 논의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이 섬은 서로에게 있어 역사의 작은 부분으로 치부되기엔 너무나 큰 존재로 다가오는 중요성을 띄운다.
2차 세계대전 일본과 미국간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곳, 전쟁 후 미국의 점령 하에 놓여 있다가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되는 등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던 곳.
그럼 여기서 오끼나와는 어느부분에 그 초점을 두어 논의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느 시기를 관점으로 논의되어야 하는가의 물음을 던져 준다. 일단 이 문제점에서는 오끼나와가 왜 대두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것과 동일 해석되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오키나와의 대외 관계와 근세와 근, 현대의 오키나와를 살펴봄과 함께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속 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그 외 세부적인 사항들을 참고로 이끌어 내며 오키나와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키나와 그 물음에 대하여>
1. 오키나와의 언어, 위치, 기후
1>언어
"우치나 구치"
천 황제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의무교육을 자랑하는 일본의 문자 해독률은 100%에 가깝다. 그런 일본의 한 현에 불과한 "오키나와"의 언어를 언급한다고 하면, 의외로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행정구역상 일본의 한 현인 "오키나와"의 공용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이다. "오키나와"에는 사투리라는 짧은 한마디 단어로 부를 수 없는, 그리고 그렇게 불러서도 안될 [우치나 구치]가 있다.
1609년 우리가 '왜'라고 불렀던 '사츠마'의 침략 이후, '글말'인 문자는 이전부터 빌려쓰던 중국 글과 강요된 일본글을 사용했지만 '입말'인 언어만큼은 [류쿠어],즉 [우치나구치]라고 하는 "제나라 말"을 써 왔다.
[류쿠]의 고유언어인 "우치나구치"는 일본말과 그 음운구조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말을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우치나구치"를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 때문에 일본이 경험한 유일한 국내 지상전인 "오키나와전" 당시에 단지 "우티나구치"로 말했다고 하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쓴 채 일본군에게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류쿠어-우치나 구치"에 대한 언어학자들의 분석은 대단히 다양하다.
왜냐하면, 언어학적으로 볼 때 "우치나구치"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 교류도 많았던 중국과도 전혀 다르고 대만 위주의 원주민족의 언어와도 질적으로 다른 특질을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언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대 일본열도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약3세기부터 6세기 무렵까지에 걸쳐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그 일부의 갈래가 현재의 오키나와 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가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우치나 구치안에도 많은 방언의 갈래가 있어 그 근거를 분명히 밝혀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고 해석된다.
2>위치
위치와 관련되어 불리고 있는 "오키나와"(류쿠식으로 발음하면 우치나)라고 하는 이름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가장 엄밀하게 오키나와 섬 그 차체를 의미하는 경우와 오키나와 본도 주변의 여러 섬들을 포함한 오키나와 제도를 의미하는 경우,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로, 마야코군도나 야에야마군도 까지를 포함한 행정구역으로서의 오키나와현을 지칭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1)"오키나와섬"은 큐슈로부터 중국대륙을 따라 타이완에 이르는 약1300㎞의 해상에 연이어 펼쳐지며 활처럼 연결된 "류쿠호"의 한가운데, 즉, 큐슈지방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685㎞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2)"오키나와 제도"는 지질학이나 지리학에서 "류쿠호"라고 불리고 있는 섬들의 "띠'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을 '제도'가운데 하나이다. 류쿠호는 큐슈의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는 '오스미제도'와 '도카라제도'를 시작으로 그 아래의 '아마미제도', 이어'오키나와섬'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제도"가 위치하고 있다. 이 밑으로 '미야코지마'가 중심인 "미야코제도"와 '이시가키지마'를 중심으로 한 "아에야마제도"로 나뉘는 "사키시마제도"에 이르는 약 1300㎞에 이르는 긴 섬들의 띠이다.
3)세계지도상에서 일본 큐슈의 밑에서부터 이르기까지, 중국대륙을 활처럼 감싸며 점점이 이어지는 200여 개의 섬들의 '띠'가 바로 "류쿠호"인데, 이 "류쿠호"의 수많은 제도들 가운데 특별히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제도"와 미야코제도와 야에야마 제도를 합쳐서 일컫는 "시키시마 제도"가 일본의 행정구역상의 오키나와현이 된다. 행정구역상의 오키나와현은 북위24도에서 27도, 동경122도에서 123.30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3>기후
아열대 해양성 기후에 속하는 오키나와 현의 연평균 기온은 약 21.5에서 23.8도 사이이며, 가장 춥다고 하는 1월의 평균기온도 약 16도 정도이다.
연중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는 오키나와에서는 눈이나 우박은 물론, 얼음이 어는 것을 볼 수도 없다.
해양성 기후대에 속하기 때문에 가장 덥다고 하는 7월의 평균기온이 27.7도 정도이고 섬을 관통하며 불어오는 바닷 바람 덕분에 예상처럼 그리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다. 그래도 아열대성 기후의 높은 습도덕분에 주택가 곳곳에 있는 "빨래방"에서는 늘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절기의 기온 자체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일사량과 자외선의 양은 한국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현지 사람들은 하절기에도 주로 긴 팔 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날씨와 관련된 현지 사람들의 이러한 생활의 지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일본의 대표적인 여름 관광지인 오키나와의 현지인들은 낮에는 바다를 찾지 않는다. 동이 트고 나서 한 두시간, 혹은 일몰을 전후한 몇 시간을 이용 바다를 찾는다.
아열대성 기후라"스콜"이라고 하는 비도 잦다. 재미있는 것은 겨울이라해도 "해"가 나면 덥다는 것이다.
2. 시기별로 본 오끼나와(유구)
1>유구의 등장
오키나와 역사에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일본 국가틀 바깥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불과 약 500년 전 일본의 모습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때 홋카이도가 일본에 속하지 않았으며 전주민족인 아이누의 자유로운 천지였다. 류쿠호 섬들에도 독자적인 국가로서 유구 왕국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은 결코 균질적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닌 것이다.
유구란 중국 측이 명명하여 사용되어진 이름이다. 즉 명나라 태조가 유구에 대해 조공을 권유하는 국서에서 이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유구의 국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879년 일본에 병합되면서부터 오키나와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유구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3만여 년 전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유구에 관한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수서》로 7세기 초 수양 제가 '유구'에 원정군을 파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2>근세의 유구(1607-1879)
일본 전국을 통일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조선침략을 위한 준비로 시마즈씨를 통해 유구에 군량미 징납을 강압적으로 요구해 왔다. 시마즈씨는 유구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큐슈 남부의 영주로 일본의 유구 무역의 절대 우위의 입장에 있었다. 7천명 병사의 10개월 분의 군량미 요구에 접한 유구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운데서도 국가안위를 우려한 나머지 요구 분의 반을 징납하고 나머지 반은 시마즈씨에게 빌려 겨우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기간 유구는 명의 힐책을 우려하여 시마즈씨를 위시한 일본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정보를 신속히 명에 전달하는 등 친명 정책을 확고히 지속했다.
유구의 친명 정책으로 유구에 대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시마즈씨는 무력 침략을 막부에 요청했고 유구를 통한 명과의 관계회복이 좌절되었다고 인식한 막부가 이를 허락했다. 시마즈씨는 3천의 군사로 유구를 침략했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유구는 10일만에 전지역으로 점령당하고, 상령왕 이하 1백여명이 포로로 잡혀 시마즈씨의 영토인 사츠마에 압송되었다. 이에 이르자 막부는 유구를 시마즈씨의 영토로 허용하면서도 상씨왕조를 온존시키게 해 유구왕국의 체제는 존속되었다. 유구를 실질적으로 병합하면 명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게 되고 유구왕을 명의로 한 명과의 조공무역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시마즈씨의 유구 지배정책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우선 법령을 선포하여 유구의 대명무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왕이나 중신의 취임에는 시마즈씨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문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한 토지조사를 근거로 매년 일정액의 조세 등을 납입케 하고 사츠마의 관리가 유구의 수도 나하에 상주하여 유구정부를 감시케 하였다.
한편 명은 1612년 유구가 파견한 조공사절에 대해 입국을 거부하고 기존의 조공주기를 2년에서 10년으로 대폭 제한했다. 이는 유구의 조공무역이 시마즈씨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막부와 시마즈씨는 유구의 조공무역을 회복하기 위해 유구 지배의 사실을 대외적으로 철저히 은폐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전개했다. 그 결과 유구내의 일본적 풍습과 문화는 표면에서 사라졌다. 명이 책봉사를 파견하면서 조공주기를 2년으로 회복시켜 준 것은 1633년의 일이다. 당시 명은 새로 일어난 청과 대적하기에 급급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복속되었으면서도 왕국의 형태만은 유지된 유구의 현상을 묵인하였던 듯하다.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국을 석권해 나가자 명의 책봉을 받고 있던 유구의 입장도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의 요구에 응하여 책봉을 받고 청과의 조공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이후 유구는 2년을 주기로 조공무역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조공사절을 파견한 다음해에 귀국하는 조공선을 마중한다는 명목으로 접공선의 파견도 허용되기에 이르자 매년 조공선과 접공선을 교대로 보내 조공무역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대륙에서 청의 지배가 아직 불안정하던 1666년 시마즈씨의 의향을 받아 등장한 정치가가 우지조수이다. 그는 유구왕을 보좌하며 왕국의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개혁을 진행시켰다. 그의 이러한 개혁을 사상 면에서 지탱한 것은 일본과 유구의 본디 하나였다는 일유동조론이었다. 원래 이 이론은 사츠마의 유학자에 의해 제창되어 유구에 전래된 것으로 사츠마의 지배 하에 있는 유구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3>근, 현대의 중국사
1835년 미국의 페리는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기 직전 유구에 내항하여 유구왕과의 교섭을 시도하기도 했다. 미국은 유구가 일본의 지배 하에 있는 현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일본과의 교섭이 실패할 경우 유구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일본의 개국에 성공한 페리는 유구에 대해서도 개항을 강요하여 조약을 체결시켰다. 뒤이어 유구는 네데란드,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직후 메이지정부는 유구를 일본의 직속령으로 삼기 위한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5년 메이지정부가 유구에게 청과의 관계단절을 강요하자, 유구는 기존의 대일, 대청관계의 유지를 희망하여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메이지정부는 4년후 군대를 파견하여 유구왕국을 해체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정식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유구는 친청파가 청의 구원을 요청하는 등 저항하게 되고 그 영향으로 청과 일본간에 외교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메이지정부의 유구지배정책은 강화되어 갔고 1894년 청일 전쟁의 일본승리로 타이완마저 일본에 할애되기에 이르자 유구문제는 애매한 채로 일본의 영토로 고정되어 갔다.
20세기에 이르자 오키나와의 인구가 증가하여 1920년대 말의 경제공황기에는 60만을 넘었으나, 그 중 70%가 농민이었고 게다가 그 대부분도 영세농이었다. 1940년 일본이 급기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방위의 전선기지로 중시되어 오키나와 수비군이 배치되고 현민 총동원체제로 진지구축이나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1945년 봄에 시작된 오키나와 지상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필사적인 저항을 하는 가운데 오키나와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의 차별과 편견에 의해 무고하게 스파의혐의 등으로 다수 학살당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오키나와는 미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1972년 일본 영토로 다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3. 유구의 대외관계
1>15,6세기 유구의 대외관계
유구의 명에 대한 주요 조공품은 유구의 특산물인 말과 유황이다. 말은 군마로 유황은 화약의 원료로 쓰였기 때문에 몽고세력을 완전히 중국에서 구축하려 한 명으로서는 귀중한 물품이었다. 명이 중국왕조로서는 최초로 유구에 조공을 권유한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명은 건국 초부터 해금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인의 해외무역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해역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유구는 중계 무역자로 화려하게 부상할 수 있었다. 더구나 명으로부터 "유구의 조공 편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대형의 선박을 하사 받아 적극적인 해외무역이 가능해졌다. 16,6세기 유구왕국은 아시아의 무역거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무역으로 획득한 경제력으로 국내를 통일했으며 국가기구도 정비하게 된다. 유구는 일본산품을 구입하여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판매했고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 무역해 온 물품은 다시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을 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구의 중계무역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우선 명의 해금정책이 이완되어 중국무역선이 직접 동남아시아 해역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포루투칼, 에스파냐 상인들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일본과의 중계무역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후기왜구의 출몰, 일본상인의 동남아시아 진출 등으로 인해 유구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역은 1570년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이에 명에 대한 유구의 조공무역 의존도는 더욱 증대된다.
2>19세기 오키나와의 대외 관계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폐번치현 국가재저의 기초를 확립한 지조개정 구지배계급의 가록을 폐지한 질록처분등 근대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유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사츠마가 죠슈와 더불어 메이지 정부의 중추를 차지하게 되자 이제 그들에게 진공무역 따위는 의미 없는 일이 되었고, 무엇보다 메이지 정부의 위신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구를 독립국 체제로 두는 것보다 근대 국가 일본의 판도에 확실히 편입시키는 편이 훨씬 중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청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또 유구 지배층에 대한 설득이란 점에서도 신중하게 조금씩 추진될 필요가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전국적으로 실시한 폐번치현 이듬해인 1872년에 우선 유구국을 유구번으로 유구 국왕을 유구 번왕으로 격하하여 다른 구대명과 마찬가지로 화족의 일원으로 포함시켰다. 동시에 개국 후 일본에 설치된 각국 공사에게 유구의 외교사무를 일본 외무성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통고하였다. 이때 이미 유구는 도쿠가와 막부가 맺은 것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미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 일본과 유구 근해에는 미국과 유럽 제국의 군함과 상선, 포경선등이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개국 전인 1844년과 1846년 유구 근해에 프랑스 군함이 접근해 와서 오만한 태도로 화친, 통상, 기독교 포교 3가지를 요구하였다. 영국이 청나라에 아편전쟁을 건 직후의 일이다.
이 사건은 유구뿐 아니라 사츠마번과 막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막부는 "유구는 일본 구역 밖에 있으므로 기독교 포교는 허용할 수 없어도 무역은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막부는 유구를 일본에서 잘라내어 거기서 구미열강의 진출을 저지시키려는 고식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한편 막부에게서 이런 방침을 이끌어낸 시마즈씨는 외국들과의 무역이익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비 강화에도 이를 이용하고자 프랑스와 군함을 사들이는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 시마즈씨나 사츠마번 번사들은 국가이익보다 자기 번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그들에게는 자기 번이야말로 '나라'였던 것이다. 일본이란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과 민족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심화되는 것은 근대 국가에서 군민교육을 철저히 실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일본의 유구 복속
1>일본의 유구복속
일본측 사료에 유구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도 아아나파'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이며 시기로는 616년이다. 이후 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남도'의 사람들이 일본에 조공을 행하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기록에 불과하다. 일본과 유구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교섭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무로마치시대에 와서였다.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은 1414년 12월에 쇼군아시카가 이에모치가 유구왕 상사소에게 보내는 답서이다. 그 내용은 유구왕의 서한과 진상물을 확실히 수령했다는 것이었다. 1480년 2월 막부가 시마즈씨를 통해 유구의 조공을 재촉하고 있는 서한에도 유구의 조공선을 이전처럼 파견하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로마치막부와 유구와의 관계는 유구가 공물을 현상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일종의 조공관계였다. 그러나 양국 간엔 조공무역보다 유구가 남해산의 향료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무역품을 일본의 사카이에 가져와 행하는 사무역관계가 주로 행하여 졌다.
1588년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씨를 통해 유구의 복속을 요구해 왔다. 이에 답하여 유구가 히데요시에게 축하의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그 다음해이다.
유구사절을 접견한 히데요시는 유구를 복속국으로 간주하고 조선침략에 즈음해서는 유구에게도 부담을 지우게 된다. 즉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군 7천명의 10개월치 군량 징납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유구가 히데요시의 복속 정책에 그저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중국침략 계획을 신속히 명에 전달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기도 한다.
2>미군의 오키나와 지배
미국이 오끼나와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지배하려 한 의도는 미-일 안보조약에 근거한 기지와는 다른 역할을 오끼나와 기지에 부담시키는 데 있었다. 그 다른 역할이란 다음의 두가지였다.
하나는 오끼나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지로서 확보해 두고자 한 점이다. 미-일 안보조약에는 일본이 미국에 부탁하여 기지를 두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령 미군이 핵무기를 들여오거나 공격 기지로 자유롭게 사용하려 할 경우 일본 국민들의 큰 반발에 봉착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때 정부가 조약을 방패삼아 국민의 불만을 누르려고 하면 일본 정부의 입장만 위태롭게 될 것이다. 즉 주권국가와 맺은 조약은 그 조문에 '특권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다 해도 그 나름대로 제약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와 같이 미군이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경우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기지를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는 미군에게 기지 제공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제공된 기지의 토지소유자가 이에 반발할 경우 이들 토지를 강제적으로 수용하거나 사용하기에 앞서 그에 따른 법적 절차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미군에게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 토지수용법인 「미군용지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지배권을 장악한 오키나와에서는 이러한 법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군이 발하는 포령, 포고라 불리는 명령이 법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끼나와에서는 문자 그대로 '총칼과 불도저'를 앞세운 토지강탈이 강행되었다. 만약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건설되지 않았을 것이다.
3>일본이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부터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무엇이 변하였는가? 군정 아래 무권리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정부의 경우는 오키나와 반환을 이용하여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 전 지역의 군사기지를 정리 및 통합하고자 하였다.
오키나와 반환이 결정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본토의 미군기지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일본에 오키나와가 반환되었다고 하지만 미군 범죄나 미군 기지와 관련된 사건 및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그때마다 현 의회와 시, 정, 촌 의회는 항의 결의를 반복하고 시민단체들도 항의운동을 전개하였다. 복귀 후 25년 동안 미군이 저지른 사건 및 사고에 대해 현 의회가 결의한 항의만 해도 실로 125번에 달한다. 그런 항의행동의 밑바닥에서 반전, 반기지 투쟁의 불씨를 지켜온 사람들은 바로 '반전 지주'들이었다.
<일본의 율도국 오키나와>
유구, 오키나와 이 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 유구왕국과 오키나와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분명 그 차이는 확연하다. 일본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다른 생활권에 속해 있는 느낌을 주는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유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독립된 왕국으로서 중국의 속국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조선 왕조처럼 중국의 황실과는 신하의 나라로 관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보다도 차라리 중국의 왕실과 더욱 친분을 가졌으며 그들 오키나와도 메이지 정부 이전까지는 하나의 독립 왕국으로 한국, 중국, 일본과 중계무역을 통한 한나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대가를 치르게 된 오키나와. 그로 인해 27년 간의 미군 지배체제와 1972년 이후에도 오키나와가 반환될 때 다시 체결한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의거하여 아직도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으로 남은 오키나와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오키나와가 아니였을까하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 있어서도 아니 한국, 중국, 일본, 미국 그 외 수많은 나라들의 목표 대상이었던 오키나와. 과연 오키나와는 정말 일본의 오키나와인가 아니면 유구왕국인가란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참고 문헌》
아라사끼 모리테루,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역사 비평사, 1998
하우봉 외, 「조선과 유구」 아르케, 1999
휴맨 카인즈, 「오끼나와」이상사, 1973
평화스런 오끼나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전쟁의 처참한 상흔이다. 1945년 3월 23일, 작은섬 오끼나와에 대한 미군 비행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어, 이후 90일간 오끼나와는 태평양전쟁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6월 한달 동안에만 인구 1인당 52발의 탄환이 발사되었으니 가히 "철(鐵)의 폭풍"이라 할 만하고, 세 달 동안 20여 만 명의 인명이 손실되었다. 전사자 중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았으며, 일본군의 군국주의 세뇌와 선동으로 인한 집단자살도 적지 않았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끼나와 한가운데에 상륙하여, 한 달만에 슈리성 이북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5월 중순 슈리성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일본군은 이미 정규부대의 8할이 전사하여 궤멸상태에 빠졌다. 병력의 1/4~ 1/3이 전사하면 항복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5월 22일 일본군은 주민을 방패로 삼아 남부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오끼나와 남단의 조그마한 기얀[喜屋武] 반도에는 군인 3만, 주민 10만이 독안의 쥐처럼 갇힌 상태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내몰렸고, "죽음의 방황" 끝에 "자살의 벽"에서 몸을 바다에 던졌다. 이처럼 섬 주민들이 대거 피를 흘리게 된 것은 일본군 사령부의 지구옥쇄(持久玉碎) 작전 때문이었다.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할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사수하고자 한 이 작전은 어느 정도 주효하였지만, 그것은 오끼나와인의 피로 성취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항복자는 전사자의 네 배정도 되지만, 오끼나와전에서는 옥쇄작전으로 전사자가 항복한 사람의 5.5배나 되었다.
심포지엄 둘째날(27일), 전쟁 유적지를 공식 답사하는 것으로 공식일정이 시작되었다. 촛불을 켜들고 조심스레 들어간 곳은 아부치라가마 또는 이토카츠호라 불리는 곳. 가마[ガマ]가 종유굴 등 자연동굴이라면, 호(壕)는 전쟁때 인공으로 구축한 것을 말하지만, 두 가지가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길이 2km정도의 이토카츠호는 오끼나와 전투때 주민들의 피난호이자 일본군 진지 및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침침한 동굴에서 오끼나와 현지인들이 방언으로 대화하면 일본군은 스파이 혐의로 처형하였다. 동굴 중간쯤 있는 꽤 넓은 장소가 야전병원, 5월 말 남부 철수때 중환자 약 200명이 내버려진 채 죽어간 곳이다. 여기서 일행이 모두 촛불을 끄자 주변은 칠흑과 같은 암흑뿐, 간혹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동굴의 울림을 타고 소름을 더한다. 오끼나와를 대표하는 히메유리[姬百合] 유적도 190명의 소녀들이 동굴 속에서 죽어간 것을 기린 것이니,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죽어간 백합 같은 소녀들.....아마도 전쟁의 진정한 단면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오끼나와 한국인 위령탐에서
- 평화기념공원-
미국 함대의 포격에 죽어간 오끼나와 영령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아름다운 오끼나와 앞바다에 미군 군함이 가득히 진주했다고 한다
다음 코스는 오끼나와 남단 이토만[系滿]시 마부니[摩文仁] 언덕의 평화기념공원. 여기는 남부철수 이후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현재 평화기념자료관, 평화의 주춧돌, 평화의 광장과 평화의 불꽃, 한국인위령비 등이 있다. 현립 평화기념자료관은 마치 한 권의 책처럼 질서정연한 체제로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책의 서문격으로 건립 이념이 요약되어 있고, 제1-제4 전시실에는 주민과 평화의 입장에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3실 증언의 집에는 각종 증언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책으로 묶어놓았을 뿐 아니라, 각자 직접 들을 수 있게 오디오시설을 부착해놓았다. 자료관 마지막에는 "희생의 대가로 얻은 양도할 수 없는 신조"가 시처럼 걸려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인간이지만/ 그 이상으로, 전쟁을 막는 것 또한 / 우리들 인간이 아닌가"
역사 기억은 현실 이해의 반영일 터, 오끼나와에는 신가이드라인 통과 및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 보조를 같이하
여 태평양전쟁의 상처를 은폐하고 미군기지에 대해 현실 보상의 논리를 펴는 경향도 있다. 현 지사를 비롯한 행정당국은 평화기념자료관의 전시 내용을 감수위원의 승낙도 없이 변경하였다가, 현민의 비판에 의해 원상 복구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 자료관과 마주보는 위치에 새 자료관이 건립되고 있는데, 여기로 이전되면 전시 내용과 설명 또한 적지 않게 변질될 것이라고 한다. 이날 저녁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오끼나와 현립 평화 기념 자료관의 전시 개찬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기념관 앞에는 아·적군을 불문하고 전몰자 236,09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평화의 초석]이 방사선으로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니 겨우 136명(북한 82명, 남한 54명). 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오끼나와에 연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명단과 생사 여부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원 구석에 별도의 한국인위령탑이 있는데, 피해자 한국인이 가해자 일본인과 같은 장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에서 세웠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돌로 무덤을 만들었고, 그 앞에는 영혼을 조국으로 인도하는 양 한반도 방향으로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1975년 유신정권의 최정점에서 세워진 것이며, 비문 글씨도 오끼나와전 당시 일본 장교였던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 즉 박정희가 쓴 것이다. 현실을 비틀기 위해 역사를 세우는 이러한 모순 앞에서, 이국 땅에서 방황하던 영혼들이 믿고 화살표를 따라 조국으로 올 수 있을는지?..... 향불이 붙지 않아 일행은 애를 태웠는데, 이것은 단지 저 무심한 바람 때문이리라, 갈길 잃은 영혼의 방황 때문은 아니리라. 애써 자위하지만, 돌아서는 걸음, 가볍지 않다.
방사선으로 펼쳐진 평화의 초석을 구심하는 자리에 평화의 광장이 있다. 원형 분수대의 출렁이는 물결 밑바닥에는 세계지도와 더불어 "평화의 물결, 영원하여라(Everlasting Waves of Peace)"가 새겨져 있고, 그 한가운데 평화의 불이 6월 23일 일출 방향으로 서 있다. 6월 23일을 기린 것은 일본군 사령관이 자살하고 공식적으로는 전투가 끝난 날이기 때문인 듯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은 명칭이 될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종전일이 실종되거나 평화운동으로 기리지 못하는 우리의 실정과는 무척 대비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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