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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回 公孫閼爭車射考叔 公子翬獻諂賊隱公
제7회: 공손알이 수레를 다투어 영고숙을 쏘고, 공자휘가 아첨하다가 은공을 죽이다.
話說鄭莊公得了世子忽告急文書,即時傳令班師。夷仲年公子翬等,親到老營來見鄭伯曰:「小將等乘勝正欲進取,忽聞班師之命,何也?」莊公奸雄多智,隱下宋衛襲鄭之事,只云:「寡人奉命討宋,今仰仗上國兵威,割取二邑,已足當削地之刑矣。賓王上爵,王室素所尊禮,寡人何敢多求?所取郜防兩邑,齊魯各得其一,寡人毫不敢私。」夷仲年曰:「上國以王命徵師,敝邑奔走恐後,少效微勞,禮所當然,決不敢受邑。」謙讓再三。
화설, 정장공은 세자 홀로부터 위급을 알리는 문서를 받고, 즉시 군사들을 회군시키려고 명령을 내렸다. 이중년과 공자 휘 등이 친히 본영에 와서 정장공을 보고 말하기를, “소장들이 승세를 타고 진격하려는데 갑자기 회군하라는 명령은 어찌 된 일입니까?” 하니, 정장공은 지략이 많은 간웅이라, 송나라와 위나라가 정나라를 습격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말하기를, “과인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송나라를 토벌하고 있는데, 오늘 상국의 군사들을 빌려 송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켰으니, 이미 영토를 깎아 벌을 내린 것이 족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송나라는 주나라에서 손님으로 대하는 높은 작위라 왕실도 평소에 예를 다하여 높이고 있습니다. 과인이 어찌 감히 더 많은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점령한 고성과 방성 두 고을은 제나라와 노나라가 각각 한 곳씩 차지하고, 과인은 추호도 욕심내지 않겠소.” 했다. 이중년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왕명으로 군사를 일으켰는데 우리나라도 뒤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으로 달려와서 적은 노력으로 조그만 공을 세웠습니다마는 이것은 예로서 당연한 것일 뿐이니, 결코 고을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듭 겸손하게 사양했다.
莊公曰:「既公子不肯受地,二邑俱奉魯侯,以酬公子老挑首功之勞。」公子翬更不推辭,拱手稱謝。另差別將,領兵分守郜防二邑。不在話下。莊公大犒三軍,臨別與夷仲年公子翬刑牲而盟:「三國同患相恤。後有軍事,各出兵車為助。如背此言,神明不宥!」單說夷仲年歸國,見齊僖公,備述取防之事。僖公曰:「石門之盟,『有事相偕』,今雖取邑,理當歸鄭。」夷仲年曰:「鄭伯不受,並歸魯侯矣。」僖公以鄭伯為至公,稱嘆不已。
정장공이 말하기를, “기왕 공자께서 땅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니, 두 고을을 모두 노나라에 주어 공자 휘께서 노도에서 세운 으뜸 공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니, 공자 휘가 다시 사양할 것도 없이 두 손을 들어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따로 장수를 뽑아 군사를 이끌고 고성과 방성 두 고을로 보내 지키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장공이 삼군을 배불리 먹이고, 이중년과 공자 휘와 희생 의식을 행하여 맹세하기를, “세 나라는 서로 걱정하고 도와서 다음에 무슨 일이 있으면 군사와 전차를 내어 서로 돕되, 만약 이 언약을 배신하면 신명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한편, 이중년이 귀국하여 제희공을 뵙고 방성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복명했다. 제희공이 말하기를, “지난날 석문(石門)의 회맹에서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고 했다. 오늘 다른 나라의 고을을 취했다면 당연히 정나라의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중년이 말하기를, “정백이 취하지 않고 모두 노나라에 주었습니다.” 했다. 제희공은 정백의 아주 공평무사하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再說鄭伯班師,行至中途,又接得本國文書一道,內稱:「宋衛已移兵向戴矣。」莊公笑曰:「吾固知二國無能為也!然孔父嘉不知兵,烏有自救而復遷怒者?吾當以計取之。」乃傳令四將,分為四隊,各各授計,銜枚臥鼓,並望戴國進發。再說宋衛合兵攻戴,又請得蔡國領兵助戰,滿望一鼓成功。忽報:「鄭國遣上將公子呂領兵救戴,離城五十里下寨。右宰醜曰:「此乃石厚手中敗將,全不耐戰,何足懼哉!」少頃,又報:「戴君知鄭兵來救,開門接入去了。」孔父嘉曰:「此城唾手可得,不意鄭兵相助,又費時日。奈何?」
한편, 정백이 군사를 돌려서 본국으로 행군하던 도중에 다시 본국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송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는 이미 대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두 나라 장수들의 무능함을 알겠다! 그런데 병법을 모르는 공부가가 자기 나라를 구하고자 하면서 어찌 다른 나라에 화풀이를 하나? 내가 마땅히 계략을 써서 그를 취하리라.” 하고, 곧바로 네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들을 네 부대로 나누어 각각 계책을 주었다. 이어서 군사들의 입에 나무 조각을 물리고 북을 눕히고 대나라를 향해 행군하게 했다. 한편, 송나라와 위나라는 군사를 합쳐서 대나라를 공격하고, 또 채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아서 북소리 한 번만 더 울리면 함락될 참이었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정나라가 상장 공자 려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대나라를 구하러 왔습니다. 지금 대성 50리 밖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했다. 우재 추가 말하기를, “그는 지난날 위나라 석후에게 패했던 장수로서 전혀 싸움을 모르는 자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했다. 조금 지나자 또 보고하기를, “대나라 군주가 정나라 구원병을 문을 열고 영접해 들였습니다.” 하니, 공부가가 말하기를, “손에 침을 뱉어 이 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뜻밖에 정나라 군사가 도우러 왔으니, 또 시일이 걸리겠구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했다.
右宰醜曰:「戴既有幫手,必然合兵索戰。你我同升壁壘,察城中之動靜,好做準准備。」二將方在壁壘之上,指手畫腳。忽聽連珠砲響,城上遍插鄭國旗號,公子呂全裝披掛,倚著城樓外檻,高聲叫曰:「多賴三位將軍氣力,寡君已得戴城,多多致謝!」原來鄭莊公設計,假稱公子呂領兵救戴,其實莊公親在戎車之中。只要哄進戴城,就將戴君逐出,並了戴國之軍。城中連日戰守困倦,素聞鄭伯威名,誰敢抵敵?幾百世相傳之城池,不勞餘力,歸於鄭國。戴君引了宮眷,投奔西秦去了。
우재 추가 말하기를, “대나라는 구원병을 얻었으니 필시 군사를 합쳐서 싸움을 걸어올 것입니다. 그대와 나는 함께 보루에 올라가서 성안의 동정을 살펴보고 나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했다. 두 장수가 바로 보루 위에 올라가 대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상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성이 연달아 들려 왔다. 이어서 대성의 성루 위에 정나라 깃발이 꽂히고, 공자 려가 갑옷을 갖춰입고 성루 위의 난간에 기대어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세 분 장군들이 힘써 준 덕분에 우리 주군께서 이미 대성을 취하셨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했다. 원래 정장공이 계책을 세우기를, 겉으로는 공자 려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여 대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실은 장공이 친히 전차를 타고 소란한 틈을 이용하여 대성에 진입했다. 정장공은 대나라 군주를 쫓아내고 대나라 군사를 병합했다. 그때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연일 계속되는 싸움에 지치고 또한 평소에 정백의 위명을 들었기 때문에 누가 감히 대항을 하겠는가? 몇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대나라는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정나라에 귀속되고 말았다. 대나라 군주는 가솔과 궁인들을 데리고 서쪽의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孔父嘉見鄭伯白占了戴城,忿氣填胸,將兜鍪擲地曰:「吾今日與鄭誓不兩立!」右宰醜曰:「此老奸最善用兵,必有後繼。倘內外夾攻,吾輩危矣!」孔父嘉曰:「右宰之言,何太怯也!」正說間,忽報:「城中著人下戰書。」孔父嘉即批來日決戰。一面約會衛蔡二國,要將三路軍馬,齊退後二十里,以防衝突。孔父嘉居中,蔡衛左右營,離隔不過三里。立寨甫畢,喘息未定,忽聞寨後一聲砲響,火光接天,車聲震耳。諜者報:「鄭兵到了。」孔父嘉大怒,手持方天畫戟,登車迎敵。
공부가는 정백이 이미 대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기가 가슴에 가득 차서 투구를 벗어 땅에 내 던지며 말하기를, “나는 맹세하건대 금일 이후로 정백과는 결코 같은 하늘에 살지 않겠다.” 했다. 우재 추가 말하기를, “그 늙고 교활한 도적은 병법에도 능합니다. 반드시 계속해서 우리 진영을 공격할 것입니다. 만일 안과 밖에서 협공하면 우리는 매우 위태롭게 됩니다.” 하니, 공부가가 말하기를, “우재께서는 어찌 그리 겁이 많으십니까?” 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보고가 올라오기를, “성안에서 사절이 개전 통지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했다. 공부가는 즉시 다음날 결전을 하자는 답서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위나라와 채나라 장수들을 불러 송나라를 포함한 세 갈래 병사들을 일제히 20리를 후퇴시켜,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공부가는 중간에 있고, 채나라와 위나라 군사들은 좌우에 진을 쳐서 그 간격이 3마장쯤 되었다. 군사들이 영채를 세우고 숨을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영채 뒤에서 포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이 하늘에 닿고 전차 구르는 소리가 귀를 흔들었다. 첩자가 보고하기를, “정나라 군사들이 기습해 왔습니다.” 했다. 공부가가 크게 노하여 손에 방천화극을 잡고 전차에 올라타서 적군을 맞이했다.
只見車聲頓息,火光俱滅了。才欲回營,左邊砲聲又響,火光不絕。孔父嘉出營觀看,左邊火光又滅,右邊砲響連聲,一片火光,隱隱在樹林之外。孔父嘉曰:「此老奸疑軍之計。」傳令「亂動者斬!」少頃,左邊火光又起,喊聲震地,忽報:「左營蔡軍被劫。」孔父嘉曰:「吾當親往救之。」纔出營門,只見右邊火光復熾,正不知何處軍到。孔父嘉喝教御人:「只顧推車向左。」御人著忙,反推向右去。遇著一隊兵車,互相擊刺。約莫更餘,方知是衛國之兵。彼此說明,合兵一處,同到中營。那中營已被高渠彌據了。
그러자 이내 전차 굴러가는 소리가 멎고, 불빛이 모두 꺼졌다. 공부가가 영채로 돌아오려고 하자, 왼쪽에서 포성이 다시 들리며 화광이 뒤를 이었다. 공부가가 영채를 나와 살펴보니, 왼쪽의 화광은 다시 꺼지고, 오른쪽에서 연달아 포성이 울리며, 한줄기의 불빛이 나무숲 사이로 은은히 나타났다. 공부가가 말하기를, “이것은 늙은 도적이 의심스런 군사로 우리를 현혹하려는 계책이다.” 하고, 전령을 내려, “함부로 난동하는 자는 참하리라.” 했다. 조금 지나자, 왼쪽에서 불빛이 또 일어나며 함성이 진동했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왼쪽의 채나라 진영이 습격당했습니다.” 했다. 공부가가 말하기를, “내가 몸소 가서 구해야겠다.” 하고, 막 영채의 문을 열고 나가자 오른쪽에서 화광이 다시 치솟는데, 도무지 정나라 군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부가가 말을 모는 사람에게 외치기를, “너는 오로지 전차를 왼쪽을 향하여 몰기만 해라.” 하니, 말을 모는 사람이 당황하여 반대로 전차를 오른쪽으로 몰자 한 떼의 전차와 마주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대략 두 시간 남짓이 지나지 않아서 비로소 그들이 위나라 군사임을 알았다. 두 나라 군사들이 서로 설명한 후 군사들을 합하여 중군의 영채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군 영채는 이미 고거미에게 점령당한 후였다.
急回轅時,右有潁考叔,左有公孫閼,兩路兵到。公孫閼接住右宰醜,潁考叔接住孔父嘉,做兩隊廝殺。東方漸曉,孔父嘉無心戀戰,奪路而走。遇著高渠彌,又殺一陣。孔父嘉棄了乘車,跟隨者止存二十餘人,徒步奔脫。右宰醜陣亡。三國車徒,悉為鄭所俘獲。所擄鄭國郊外人畜輜重,仍舊為鄭所有。(此莊公之妙計也。)史官有詩云:主客雌雄尚未分,莊公智計妙如神。分明鷸蚌相持勢,得利還歸結網人。
공부가가 급히 전차를 돌리려는데, 오른쪽에는 영고숙이, 왼쪽에는 공손 알이 두 갈래 군사가 이르렀다. 공손 알은 우재 추와 교전하고, 영고숙은 공부가와 싸우게 되었다. 양쪽의 군사들은 서로 있는 힘을 다하여 마구 싸우던 중에 점점 동쪽 하늘이 밝아 왔다. 공부가는 더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길을 뚫고 달아났다. 고거미가 그 앞을 가로막자 한바탕 싸우다가 공부가는 전차를 버렸다. 뒤를 따르는 군사는 스무 명 남짓에 불과했고 걸어서 달아났다. 우재 추는 싸움 중에 죽고 세 나라의 전차와 병사들은 모두 정나라의 포로와 노획물이 되었다. 정나라는 공부가에게 사로잡혔던 포로와 약탈당했던 가축 및 치중도 다시 찾았다. (이번 싸움은 정장공의 묘한 계책이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나기 전에, 장공의 지혜와 계략이 귀신같이 묘하구나. 황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놓지 않았으니, 이익은 그물 치던 어부에게 돌아갔구나.” 했다.
莊公得了戴城,又兼了三國之師,大軍奏凱,滿載而歸。莊公大排筵宴,款待從行諸將。諸將輪番獻卮上壽。莊公面有德色。舉酒瀝地曰:「寡人賴天地祖宗之靈,諸卿之力,戰則必勝,威加上公,於古之方伯如何?」群臣皆稱千歲。惟潁考叔嘿然。莊公睜目視之。考叔奏曰:「君言失矣!夫方伯者,受王命為一方諸侯之長,得專征伐;令無不行,呼無不應。今主公託言王命,聲罪於宋,周天子實不與聞。況傳檄征兵,蔡衛反助宋侵鄭,郕許小國,公然不至。方伯之威,固如是乎?」
정장공이 대성(戴城)을 얻고, 또 (포로로 잡은 宋衛蔡) 삼국의 군사들과 정나라 대군이 함께 개선가를 부르면서, (치중과 노획물을) 마차에 가득 싣고 본국에 돌아왔다. 정장공이 크게 잔치를 열고 종군했던 여러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장수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려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정장공이 얼굴에 후덕한 기색을 띠며 술잔을 들어 땅에 뿌리며 말하기를, “내가 하늘과 땅과 조상의 신령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여러 경들의 노고 덕분에, 싸우면 반드시 이겨서 위엄이 (三公의 위인) 상공(上公)에 못지않게 되었다. 경들은 과인이 옛날의 방백(方伯)과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천세!”라고 칭송하는데, 오직 영고숙만이 아무 말도 없었다. 정장공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영고숙이 아뢰기를, “주군께서는 말씀을 잘못 하셨습니다. 무릇 방백은 왕명으로 한 지역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벌의 전권을 받고, 명령한 대로 행하며, 부르면 응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 주공께서 왕명을 구실로 송나라의 죄를 물었으나, 천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항차 정벌군을 청하는 격문을 여러 나라에 보냈으나, 채와 위 두 나라는 도리어 송나라를 도와 정나라를 침입했으며, 성(郕)과 허(許)같은 작은 나라도 공공연히 토벌군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방백의 위엄이 진실로 이와 같겠습니까?” 했다.
莊公笑曰:「卿言是也。蔡衛全軍覆沒,已足小懲。今欲問罪郕許,二國孰先?」潁考叔曰:「郕鄰於齊,許鄰於鄭。主公既欲加以違命之名,宜正告其罪,遣一將助齊伐郕,請齊兵同來伐許。得郕則歸之齊,得許則歸之鄭,庶不失兩國共事之誼。俟事畢獻捷於周,亦可遮飾四方之耳目。」莊公曰:「善!但當次第行之。」乃先遣使將問罪郕許之情,告於齊侯。齊侯欣然聽允。遣夷仲年將兵伐郕,鄭遣大將公子呂率兵助之,直入其都。郕人大懼,請成於齊,齊侯受之。就遣使跟隨公子呂到鄭,叩問伐許之期。莊公約齊侯在時來地方會面,轉央齊侯去訂魯侯同事。時周桓王八年之春也。
장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소! 채나라와 위나라는 전군이 전멸하였으니 이미 약간 징벌했다고 할 수 있소. 지금 성나라와 허나라에 그 죄를 묻고자 하는데,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를 먼저 정벌해야겠소?” 하니, 영고숙이 말하기를, “성나라는 제나라와 이웃이고 허나라는 정나라와 인접해 있습니다. 주공께서 그들이 명령을 어긴 것을 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의 죄목부터 명백히 알리십시오. 그리고 한 장수를 제나라에 보내어 제나라로 하여금 성나라를 치게 하고, 그런 뒤에 제나라 군사를 청해서 함께 허나라를 치십시오. 성나라를 얻으면 제나라에 주기로 하고, 허나라를 얻으면 정나라가 차지하기로 하면, 두 나라가 함께 일하는 우의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일이 끝난 뒤에 승리를 주나라에 바치면 또한 사방의 이목을 눈가림할 수가 있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좋소. 다만 순서에 따라 행해야 하겠소.” 하고, 즉시 사신을 보내서 성나라와 허나라의 명령을 어긴 죄를 묻고, 제나라에 (두 나라를 쳐서 각각 나누어 차지하자는) 계책을 알렸다. 제희공이 흔연히 수락하고, 이중년을 장수로 삼아 성나라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도 대장 공자 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도아 성나라 도읍으로 바로 쳐들어갔다. 성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강화를 청하자, 제희공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희공이 사신을 공자 려와 함께 정나라에 동행하게 하여, 허나라를 정벌할 시기를 물어보게 했다. 정장공은 제희공과 시래(時來:땅이름) 지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다시 제후에게 부탁하여 노후와도 같이 하도록 주선해 주기를 청했다. 그때가 주환왕 8년(기원전 712년) 봄이었다.
公子呂途中得病歸國,未幾而死。莊公哭之慟曰:「子封不祿,吾失右臂矣!」乃厚卹其家,錄其弟公子元為大夫,時正卿位缺,莊公欲用高渠彌。世子忽密諫曰:「渠彌貪而狠,非正人也。不可重任。」莊公點首。乃改用祭足為上卿,以代公子呂之位。高渠彌為亞卿。不在話下。且說是夏,齊魯二侯皆至時來,與鄭伯面訂師期。以秋七月朔,在許地取齊,二侯領命而別。鄭莊公回國,大閱軍馬,擇日祭告於太宮,聚集諸將於教場。重制「蝥弧」大旗,建於大車之上,用鐵綰之,這大旗以錦為之,錦方一丈二尺,綴金鈴二十四個,旗上繡「奉天討罪」四大字,旗竿長三丈三尺。
공자 려가 귀국하던 도중에 병을 얻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정장공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자봉(子封)이 박복하여 죽었으니 내 오른팔을 잃었구나!” 했다. 정장공은 공자려의 유족들을 후하게 보살펴 주고 그의 동생 공자원(公子元)을 대부로 삼았다. 공자려가 죽어 정경의 자리가 비자, 정장공은 고거미를 임용하려 했다. 그러나 세자 홀이 은밀히 간하기를, “고거미는 탐욕스럽기가 이리와 같아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중용하면 안 됩니다.” 하니, 장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을 고쳐 제족을 상경으로 삼아 공자 려의 자리를 대신케 하고 고거미는 아경(亞卿)으로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편 그해 여름에 제희공과 노은공(魯隱公)이 시래에 당도하여, 정백과 만나 (허나라) 정벌군을 일으키는 날짜를 정했다. 가을 칠월 초하루에 허나라 땅에서 모이기로 하고 정장공과 제희공은 명을 받들고 헤어졌다. 정장공은 귀국하여 군마를 사열하고, 택일하여 태묘에 제사하여 고한 후에, 여러 장수들을 훈련장에 모이게 했다. 정장공은 큰 모호기(蝥弧旗)를 다시 만들어 큰 수레 위에 세우고 쇠사슬로 동여매게 했다. 이 큰 깃발은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2척이고, 가장자리에는 24개의 방울은 매달았으며, 깃발 위에 ‘봉천토죄(奉天討罪;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한다)’라는 네 글자를 커다랗게 수놓았다. 또한 그 깃대의 길이가 3장 3척이나 되었다.
莊公傳令:「有能手執大旗,步履如常者,拜為先鋒,即以輅車賜之。」言未畢,班中走出一員大將,頭帶銀盔,身穿紫袍金甲,生得黑面虯鬚,濃眉大眼。眾視之,乃大夫瑕叔盈也。上前奏曰:「臣能執之。」隻手拔起旗竿,緊緊握定。上前三步,退後三步,仍豎立車中,略不氣喘。軍士無不喝采。瑕叔盈大叫:「御人何在?為我駕車!」方欲謝恩,班中又走出一員大將,頭帶雉冠,綠錦抹額,身穿緋袍犀甲,口稱「執旗展步,未為希罕,臣能舞之。」眾人上前觀看,乃大夫潁考叔也。御者見考叔口出大言,更不敢上前,且立住腳觀看。
정장공이 명령을 내리기를, “이 대기를 손에 들고 평상시처럼 걷는 장수가 있다면 선봉으로 삼고 노거를 주겠다.”고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열에서 한 대장이 뛰어나왔다. 머리에는 은빛 투구를 쓰고, 몸에는 붉은색 전포에 금빛 갑옷을 입은, 그 장수는 검은 얼굴에 수염은 곱슬하고, 짙은 눈썹에 큰 눈을 가졌는데, 사람들이 보니, 바로 대부 하숙영(瑕叔盈)이었다. 하숙영이 (전당 위로) 올라와 아뢰기를, “신이 능히 잡겠습니다.” 하고, 한 손으로 깃대를 뽑아 단단히 잡고서 앞으로 3보, 뒤로 3보를 걷고, 다시 수레 위에 깃대를 꽂았는데,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보고 박수갈채를 쳤다. 하숙영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마부는 어디에 있느냐? 나를 위해 수레를 몰아라.” 했다. 하숙영이 정장공에게 사은하려고 하는 순간, 반열에서 또 다른 한 대장이 뛰어나오는데, 머리에는 꿩깃으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녹색 비단을 이마에 둘렀으며, 붉은색 전포에 물소 가죽 갑옷을 입고, 외치기를, “기를 들고 걷는 것쯤이야 별로 희한할 것도 없습니다. 신은 기를 들고 능히 춤을 출 수 있습니다.” 했다. 여러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보니 이는 곧 대부 영고숙이었다. 수레를 몰고 오던 마부가, 큰소리를 치는 영고숙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서 동정을 살폈다.
只見考叔左手撩衣,將右手打開鐵綰,從背後倒拔那旗。踴身一跳,那旗竿早拔起到手,忙將左手搭住,順勢打個轉身,將右手托起。左旋右轉,如長槍一般,舞得呼呼的響。那面旗捲而復舒,舒而復捲,觀者盡皆駭然。莊公大喜曰:「真虎臣也!當受此車為先鋒。」言猶未畢,班中又走出一員少年將軍,面如傅粉,唇若塗朱,頭帶束髮紫金冠,身穿織金綠袍,指著考叔大喝道:「你能舞旗,偏我不會舞,這車且留下!」大踏步上前。考叔見他來勢兇猛,一手把著旗竿,一手挾著車轅,飛也似跑去了。
문득 보니 영고숙이 왼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깃대를 묶은 쇠사슬을 풀더니, 다시 손을 등 뒤로 넘겨 깃발을 거꾸로 잡아서 몸을 솟구쳐 한번 뛰니 깃대는 쑥 뽑혀 이미 그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왼손으로 깃대를 움켜잡고, 몸을 빙빙 돌리면서 문득 오른손으로 깃발을 치켜들었다. 그는 다시 기를 왼쪽으로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니, 깃발이 마치 긴 창과 같이 되었다. 영고숙이 춤을 추자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고, 말렸다가 다시 펴지고 펴졌다가 다시 감기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놀랐다. 정장공이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호랑이 같은 신하로다. 마땅히 이 수레를 받고, 선봉이 되어라.” 했다. 장공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열에서 또 한 사람의 소년장군이 달려나왔다. 얼굴은 분을 바른 듯이 하얗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로 바른 것 같이 빨겠으며, 머리는 속발하고 자금관을 썼으며, 몸에는 금사를 넣어짠 녹색 전포를 입었는데, 영고숙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외치기를, “네가 기를 들고 춤을 출 수 있는데 나라고 할 수 없겠느냐? 수레를 잠깐 멈추어라!” 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영고숙이 그 소년 장군의 흉악하고 사나운 기세를 보고, 한 손으로는 모호기의 깃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수레의 끌채를 잡으며 마치 나는 듯이 달아났다.
那少年將軍不捨,在兵器架上,掉起一柄方天畫戟,隨後趕出教場。將至大路,莊公使大夫公孫獲傳語解勸。那將軍見考叔已去遠,恨恨而返,曰:「此人藐我姬姓無人,吾必殺之!」那少年將軍是誰?乃是公族大夫,名喚公孫閼,字子都,乃男子中第一的美色,為鄭莊公所寵。孟子云:「不知子都之姣者,無目者也。」正是此人。(平日恃寵驕橫,兼有勇力,與考叔素不相睦。)當下回轉教場,兀自怒氣勃勃。莊公誇獎其勇曰:「二虎不得相鬥,寡人自有區處。」另以車馬賜公孫閼,並賜瑕叔盈。兩個各各謝恩而散。髯翁有詩云:軍法從來貴整齊,挾轅拔戟敢胡為!鄭庭雖是多驍勇,無禮之人命必危。
그 소년 장군이 놓치지 않으려고 병장기 시렁에서 방천화극 한 자루를 집어 들고 훈련장 밖으로 쫓아나갔다. 그들이 큰길로 나가자 장공은 대부 공손획(公孫獲)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두 사람이 싸우기를 그만두라는 명을 전하게 했다. 그 소년 장군이 보니 영고숙이 이미 멀리 가버렸으므로 분한 마음으로 돌아오며 말하기를, “그 놈이 우리 희성(姬姓) 공족 중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니 내가 반드시 죽이리라!” 했다. 그 소년 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공족 대부로써 이름은 공손알(公孫閼)이라 하고 자는 자도(子都)라고 했다. 남자 중에서 제일 가는 미남으로서 장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맹자가 이르기를, “자도(子都)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면 이는 눈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 사람이었다. (평소에 공손 알은 장공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멋대로였으며, 또한 용기와 힘을 겸비하여 영고숙과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훈련장에 돌아온 공손 알은 여전히 노기를 참지 못했다. 장공이 그의 용력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호랑이 같은 두 장수들은 서로 다투지 말라. 내가 스스로 처리할 것이다.” 하고, 따로 공손 알과 하숙영에게 수레를 각각 상으로 하사하자, 두 사람은 모두 장공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헤어졌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군법은 원래 정돈됨을 귀하게 여기는데, 수레를 두고 방천화극을 뽑으니 이 어쩐 일이냐! 정장공 밑에 비록 무서운 장수가 많으나, 예의 없는 사람은 반드시 목숨이 위태로우리라.” 했다.
至七月朔日,莊公留祭足同世子忽守國,自統大兵望許城進發。齊魯二侯,已先在近城二十里下寨等候。三君相見敘禮,讓齊侯居中,魯侯居右,鄭伯居左。是日莊公大排筵席,以當接風。齊侯袖中出檄書一紙,書中數許男不共職貢之罪,今奉王命來討。魯鄭二君俱看過,一齊拱手曰:「必如此,師出方為有名。」約定來日庚辰,協力攻城,先遣人將討檄射進城去。
칠월 초하루 날, 정장공은 제족과 세자 홀을 본국에 남겨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대군을 거느리고 허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제나라와 노나라 군주들은 이미 허성 가까이 20리 되는 곳에 먼저 도착하여 진영을 세우고, 장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나라 군주들이 서로 만나 예를 행한 후 가운데 자리는 제희공에게 양보하고 오른쪽은 노은공이, 왼쪽은 정장공이 앉았다. 그날 장공은 잔치를 크게 열어 두 나라 군주를 대접했다. 제희공이 소매 속에서 격서 한 장을 꺼내었는데, 격서에는 허나라 군주가 주나라에 공물을 함께 바치지 않은 죄상을 열거하고, 이제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러 왔다고 했다. 노나라와 정나라의 군주들도 격서를 다 읽고, 일제히 두 손을 모아 말하기를, “마땅히 이래야 할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킬 명분이 섰습니다.” 하고, 다음날 경진(庚辰) 시에 일제히 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먼저 장수 한 사람을 시켜 격문을 화살에 매달아서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次早三營各各放砲起兵。那許本男爵,小小國都,城不高,池不深,被三國兵車,密密扎扎,圍得水洩不漏。城內好生驚怕。只因許莊公是個有道之君,素得民心,願為固守,所以急切未下。齊魯二君,原非主謀,不甚用力。到底是鄭將出力,人人奮勇,個個誇強。就中潁考叔,因公孫閼奪車一事,越要施逞手段。到第三日壬午,考叔在轈車上,將「蝥弧」大旗,挾於脅下,踴身一跳,早登許城。公孫閼眼明手快,見考叔先已登城,忌其有功,在人叢中認定考叔,颼的發一冷箭。也是考叔合當命盡,正中後心,從城上連旗倒跌下來。
다음 날 아침, 세 나라 군사들이 각각 자기들의 진영에서 포를 쏘며 공격을 시작했다. 저 허나라는 작위가 남작이라서 그 도성이 작고, 성이 높지 않으며, 해자도 깊지 않아서, 세 나라 전차와 군사들에 의해 겹겹이 포위되어 물샐틈도 없게 되었다. 허성의 성안 사람들이 매우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허장공(許莊公)은 도리가 있는 군주로 평소에 백성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허나라의 백성들이 굳게 지키기를 원하여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제희공과 노은공은 원래 주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을 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정나라 장수들만이 힘을 내고 사람마다 용기를 다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중에서 특히 영고숙은 공손 알과 수레를 두고 다투었던 관계로, 더욱더 공을 세우려고 했다. 허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임오(壬午) 시에, 영고숙이 망루 차에 올라가서 모호기를 뽑아 옆구리에 끼고, 몸을 솟구쳐 뛰어올라 허성의 성벽 위에 올라섰다. 공손 알은 밝은 눈과 재빠른 손으로, 영고숙이 이미 성벽 위에 오른 것을 보고 그 공을 꺼려서, 사람들 틈에서 영고숙을 확인하여 쉿 소리와 함께 화살 한 개를 날렸다. 심하구나, 영고숙이 등 뒤에 화살을 맞고 숨이 끊어지니, 성 위에서 모호기와 함께 거꾸로 떨어졌다.
瑕叔盈只道考叔為守城軍士所傷,一股憤氣,太陽中迸出火星,就地取過大旗,一踴而上,遶城一轉。大呼:「鄭君已登城矣!」眾軍士望見繡旗飄颺,認鄭伯真個登城,勇氣百倍,一齊上城。砍開城門,放齊魯之兵入來。隨後三君並入。許莊公易服雜於軍民中,逃奔衛國去了。齊侯出榜安民,將許國土地,讓與魯侯。魯隱公堅辭不受。齊僖公曰:「本謀出鄭,既魯侯不受,宜歸鄭國。」鄭莊公滿念貪許,因見齊魯二君交讓,只索佯推假遜。正在議論之際,傳報:「有許大夫百里引著一個小兒求見。」三君同聲喚入。百里哭倒在地,叩首乞哀,「願延太岳一線之祀。」
하숙영은 영고숙이 수비군의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태양 속에서 화성이 튀어나오는 듯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성 아래로 달려가 큰 기를 잡고 한번 용솟음쳐서 성벽으로 뛰어 올라가 성 위를 한 바퀴 돌면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정나라 군사가 이미 성 위에 올라왔다!” 했다. 여러 군사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호기를 보고, 정백이 이미 성에 오른 줄 알고 용기백배하여 일제히 성 위로 기어오른 후에 성문을 부수고, 제나라와 노나라 군사들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어서 3국의 군주들도 군사들의 뒤를 따라 입성했다. 허장공은 옷을 바꿔 입고 패잔병과 난민 중에 섞여서 위나라로 도망쳤다. 제희공이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허나라 땅을 노나라에 주려고 했다. 노은공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제희공이 말하기를, “이번의 싸움은 원래 정나라가 계획하여 주도했고 또한 노나라가 받지 않으니 허나라 땅은 정나라에 귀속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정장공은 마음속으로는 허나라 땅이 탐이 났지만, 제나라와 노나라의 군주가 서로 겸양하자 자기도 오로지 사양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문제로 의론하고 있을 때 보고가 올라오기를, “허나라 대부 백리(百里)가 어린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했다. 세 나라의 군주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러들이라고 했다. 백리가 들어와 땅에 엎드려 통곡한 후에 머릴 조아려 애걸하기를, “원컨대 태악(太岳)이래 전해 내려온 허나라의 종사(宗祀)를 이어지게 해주십시오.” 했다.
齊侯問:「小兒何人?」百里曰:「吾君無子,此君之弟名新臣。」齊魯二侯,各淒然有憐憫之意。鄭莊公見景生情,將計就計,就轉口曰:「寡人本迫於王命,從君討罪,若利其土地,非義舉也。今許君雖竄,其世祀不可滅絕。既其弟見在,且有許大夫可託,有君有臣,當以許歸之。」百里曰:「臣止為君亡國破,求保全六尺之孤耳!土地已屬君掌握,豈敢復望?」鄭莊公曰:「吾之復許,乃真心也。恐叔年幼,不任國事,寡人當遣人相助。」乃分許為二:其東偏,使百里奉新臣以居之;其西偏,使鄭大夫公孫獲居之。
제희공이 묻기를, “이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하니, 백리가 말하기를, “저희 허군께서는 자식이 없습니다. 이 아이는 허군의 어린 동생 신신(新臣)이라 합니다.” 했다. 제나라와 노나라 두 군주는 처연히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정장공도 이 광경을 보고 동정심이 마음속에서 일어났으나, 장차 계책으로 다른 계책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말을 바꾸어 이르기를, “과인이 원래 왕명을 쫓아 두 나라 군주의 뒤를 따라 허나라의 죄를 토벌하였는데, 만약 내가 그 땅을 탐하여 이를 추구한다면 이는 옳지 않는 일이다. 오늘 비록 허군이 도망가버렸으나, 그 사직을 위한 종사(宗祀)마저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그 동생이 여기 있으니 일단은 허나라 대부인 백리 그대에게 잠시 맡겨 다스리게 하면 군주가 있고 신하가 있으니, 마땅히 허나라를 돌려줄 수 있겠다.” 했다. 백리가 말하기를, “우리 허나라의 군주는 도망가고 나라는 망했습니다. 신은 단지 원하옵건대 어린 고아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할뿐입니다. 허나라 땅은 이미 군주에게 복속되었는데 어찌 감히 나라를 되찾으려 하겠습니까?” 하니, 정장공이 말하기를, “내가 허나라를 다시 돌려주려 함은 나의 진심이다. 다만 신신의 나이가 어려 나라의 일을 맡길 수가 없으니 과인이 마땅히 사람을 파견하여 돕도록 하겠다.” 했다. 이어서 정장공은 허나라를 두 지방으로 나누어 동쪽은 백리로 하여금 신신을 받들어 살게 하고, 서쪽은 정나라 대부 공손획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다.
名為助許,實是監守一般。齊魯二侯不知是計,以為處置妥當,稱善不已。百里同許叔拜謝了三君。三君亦各自歸國。髯翁有詩單道鄭莊公之詐。詩曰:「殘忍全無骨肉恩,區區許國有何親?二偏分處如監守,卻把虛名哄外人。」許莊公老死於衛。許叔在東偏受鄭制縛,直待鄭莊公薨後,公子忽突相爭數年,突入而復出,忽出而復入。那時鄭國擾亂,公孫獲病死,許叔方才與百里用計,乘機潛入許都,復整宗廟。此是後話。
겉으로는 허나라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허나라의 일반 정사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제나라와 노나라 군주들은 장공의 그 계책을 알지 못하고 그의 조치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백리가 신신과 같이 세 나라 군주들에게 절하여 감사하고 물러갔다. 세 나라 군주들도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염옹(髥翁)이 정장공의 속임수에 대해 비난하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잔인하기가 골육의 은혜도 모르는 사람인데, 구구한 허나라와 무슨 까닭으로 친하겠는가? 허나라를 두 개로 쪼개어 감시하고자 했으니, 허명만 앞세워 세상 사람에게 떠벌리려 하는가?” 했다. 한편 위나라로 도망친 허장공은 그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의 동생 허숙(許叔) 신신은 두 개로 나뉜 허나라의 동쪽 지방에서 정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정장공이 죽은 후에 공자 홀(忽)과 돌(突)이 수년간에 걸친 후계자 싸움을 했다. 돌(突)이 허나라에 들어왔다가 나가고, 홀(忽)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때 정나라는 어지러웠고, 공손획은 병들어 죽었다. 허숙 신신이 비로소 백리와 계책을 써서 기회를 타서 허도에 잠입하여 종묘를 다시 정돈하였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再說鄭莊公歸國,厚賞瑕叔盈,思念潁考叔不置。深恨射考叔之人,而不得其名。乃使從征之眾,每百人為卒,出豬一頭;二十五人為行,出犬雞各一隻,召巫史為文,以咒詛之。公孫閼暗暗匿笑。如此咒詛,三日將畢。鄭莊公親率諸大夫往觀。纔焚祝文,只見一人蓬首垢面,逕造鄭伯面前,跪哭而言曰:「臣考叔先登許城,何負於國?被奸臣子都挾爭車之仇,冷箭射死。臣已得請於上帝,許償臣命。蒙主君垂念,九泉懷德!」言訖,以手自探其喉;喉中噴血如注,登時氣絕。
한편, 정장공은 귀국하여 하숙영에게 큰상을 내리고, 영고숙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했다. 그리고 영고숙을 쏴 죽인 자에 대하여 한을 품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장공은 허나라에 출정했던 병사들을 시켜 백 명마다 돼지 한 마리씩과 25명으로 이루어진 한 행(行)마다 개와 닭을 각각 한 마리씩을 내놓게 한 다음, 무당을 불러 주문을 외워 저주하게 했다. 공손알은 마음속으로 몰래 웃었다. 이렇게 저주를 하고 3일이 끝나려 할 때, 정장공은 친히 여러 대부들을 거느리고 와서 보았다. 이윽고 축문을 때울 때 머리를 산발하고 때 묻은 얼굴을 한 사람이 정장공의 면전에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 영고숙은 허성에 먼저 올랐습니다. 어떻게 제가 정나라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수레를 두고 다투었던 간신 자도란 놈의 활을 맞고 죽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미 상제에게 청을 드려, 원수를 갚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주군께서 저를 이렇듯 생각해 주시니, 그 은혜 구천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했다. 말을 마치고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목을 더듬자, 목구멍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 내고는 곧이어 기절해서 쓰러졌다.
莊公認得此人是公孫閼,急使人救之,已呼喚不醒。原來公孫閼被潁考叔附魂索命,自訴於鄭伯之前。到此方知射考叔者,即閼也。鄭莊公嗟嘆不已。感考叔之靈,命於潁谷立廟祀之。今河南府登封縣,即潁谷故地,有潁大夫廟,又名純孝廟。洧川亦有之。隴西居士有詩譏莊公云:「爭車方罷復傷身,亂國全然不忌君。若使群臣知畏法,何須雞犬黷神明?」莊公又分遣二使,將禮幣往齊魯二國稱謝。齊國無話。單說所遣魯國使臣回來,繳上禮幣,原書不啟。莊公問其緣故。
정장공은 이 사람이 공손알임을 알고, 급히 사람을 시켜 구하려고 이름을 부르고 정신을 차리도록 하였으나 깨어나지 않았다. 원래 공손알의 몸에 영고숙의 혼이 달라붙어, 장공 앞에 와서 스스로 호소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영고숙을 쏘아 죽인 자가 공손 알임을 알았다. 정장공은 애통해 마지않으며 영고숙의 영령에 감동하여, 영곡(穎谷)에 사당을 지어 그를 제사지내게 했다.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이 영곡의 옛땅이며 영대부의 사당이 있고, 그 이름을 순효묘(純孝廟)라고 부르고 있다. 또 유천(洧川)에도 영고숙의 사당이 있다. 농서거사(隴西居士)가 시를 지어 장공을 비난하기를, “수레를 두고 다투더니 또다시 몸을 상하게 했으니, 어지러운 나라라 신하들이 군주를 꺼리지 않았다. 만약에 신하들이 법의 지엄함을 알게 했더라면, 구태여 닭과 개를 잡아 신명을 더럽힐 까닭이 있었겠는가?” 했다. 정장공은 또 두 사신에게 예물을 들려 제나라와 노나라에 보내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제나라에서는 말이 없었지만, 그런데 노나라에 간 사자는 국서와 예물을 그냥 가지고 돌아왔다. 장공이 그 연유를 물었다.
使者奏曰:「臣方入魯境,聞知魯侯被公子翬所弒,已立新君。國書不合,不敢輕投。」莊公曰:「魯侯謙讓寬柔,乃賢君也,何以見弒?」使者曰:「其故臣備聞之。魯先君惠公元妃早薨,寵妾仲子立為繼室,生子名軌,欲立為嗣。魯侯乃他妾之子也。惠公薨,群臣以魯侯年長,奉之為君。魯侯承父之志,每言:『國乃軌之國也,因其年幼,寡人暫時居攝耳。』子翬求為太宰之官。魯侯曰:『俟軌居君位,汝自求之。』
사자가 아뢰기를, “신이 바로 노나라 경계에 들어갔을 때, 노후가 공자휘에게 살해되어, 이미 새 군주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국서의 내용이 노나라의 정세에 맞지 않아서, 가볍게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노은공은 겸양의 덕이 있고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한 군주인데 무슨 까닭으로 시해되었단 말인가?” 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그 옛 신하가 자세히 들려주었는데, 노나라의 선군인 혜공(惠公)이 원비를 일찍 잃자, 총첩 중자(仲子)를 정비로 삼았습니다. 중자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궤(軌)라 했는데, 그를 세워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노은공은 다른 첩의 소생인데, 혜공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노은공이 나이가 많아서 군주로 받들었습니다. 노은공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매번 말하기를, ‘이 나라는 궤의 나라이다. 그가 나이가 어려서 과인은 잠시 섭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자 휘가 노은공에게 태재(太宰)의 자리를 요구하니, 노은공이 말하기를, ‘궤가 군주 자리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그에게 부탁하시오.’ 했습니다.
公子翬反疑魯侯有忌軌之心,密奏魯侯曰:『臣聞「利器入手,不可假人。」主公已嗣爵為君,國人悅服,千歲而後,便當傳之子孫。何得以居攝為名,起人非望?今軌年長,恐將來不利於主,臣請殺之,為主公除此隱懮何如?魯侯掩耳曰:『汝非痴狂,安得出此亂言!吾已使人於菟裘築下宮室,為養老計,不日當傳位於軌矣。』翬默然而退,自悔失言。誠恐魯侯將此一段話告軌,軌即位,必當治罪。夤夜往見軌,反說:『主公見汝年齒漸長,恐來爭位。今日召我入宮,密囑行害於汝。』
공자 휘는 도리어 노은공이 궤를 시기하는 마음이 있는 줄 알고, 노은공에게 은밀히 아뢰기를, ‘신은 듣기로 「좋은 물건이 손에 들어오면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미 군위를 계승하여, 나라 사람들이 즐거이 따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마땅히 자손에게 군주의 자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섭정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지금 궤의 나이가 장성하여 장래에 주공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니, 신은 청하옵건대 궤를 죽여 주공을 위해 보이지 않은 근심을 없애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노은공이 귀를 막으며 말하기를, ‘너는 미친놈이 아니냐? 어찌하여 이런 어지러운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미 사람을 시켜 토구(菟裘)에 궁실을 짓게 하여 노년을 보낼 계획을 삼았다. 머지않아 나는 노나라의 군위를 궤에게 전해 줄 것이다.’ 했다. 공자 휘가 말없이 물러 나와 자기의 실언을 후회했습니다. 공자 휘는 노은공이 장차 이 말을 궤에게 고하여, 궤가 즉위하면 반드시 죄를 추궁받게 될 것을 참으로 걱정했습니다. 공자 휘는 깊은 밤에 궤를 방문하여 거꾸로 말하기를, ‘주공께서 공자의 나이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보고 군위를 뺏길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군께서 나를 궁궐로 불러 은밀히 나에게 그대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했다.
軌懼而問計,翬曰:『他無仁,我無義。公子必欲免禍,非行大事不可。』軌曰:『彼為君已十一年矣,臣民信服。若大事不成,反受其殃。』翬曰:『吾已為公子定計矣。主公未立之先,曾與鄭君戰狐壤,被鄭所獲,囚於鄭大夫尹氏之家。尹氏素奉祀一神,名曰鐘巫。主公暗地祈禱,謀逃歸於魯國。卜卦得吉,乃將實情告於尹氏。那時尹氏正不得志於鄭,乃與主公共逃至魯。遂立鐘巫之廟於城外,每歲冬月,必親自往祭。今其時矣。祭則必館於寪大夫之家。吾預使勇士充作徒役,雜居左右,主公不疑。俟其睡熟刺之,一夫之力耳。』
궤가 겁을 먹고 계책을 묻자 공자 휘가 말하기를, ‘그가 어질지 못하니 우리는 의로움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공자가 화를 꼭 면하려고 한다면 대사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했다. 궤가 말하기를, ‘지금의 은공은 군위에 오른 지 이미 11년이고, 신하들과 백성들이 믿고 따르고 있어 만약 대사를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오.’ 하니, 공자 휘가 말하기를, ‘저는 이미 공자를 위하여 계획을 정했습니다. 주공께서는 군위에 오르기 전에 정나라와 호양(狐壤)에서 싸울 때 정나라의 포로가 되어, 대부 윤씨(尹氏)의 집에 감금된 적이 있었습니다. 윤씨는 종무(鍾巫)라는 귀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주공은 그 귀신에게 노나라에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땅에 엎드려 마음속으로 빌고 점을 친 결과, 점괘가 대길로 나와서 윤씨에게 그 사정을 고했습니다. 그때 윤씨는 이것을 정나라 군주에게 보고하지 않고 주공과 같이 노나라로 도망쳤습니다. 마침내 주공은 성밖에다 종무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매년 동짓달이 되면 반드시 친히 가서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지금 그때가 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반드시 위(寪)대부 집에서 묵을 것입니다. 제가 미리 용사들을 일꾼에 채워서 행렬 좌우에 섞어서 따르게 하면 주공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공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칼로 찌르면 한 사람의 힘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했다.
軌曰:『此計雖善,然惡名何以自解?』翬曰:『吾預囑勇士潛逃,歸罪於寪大夫,有何不可?』子軌下拜曰:『大事若成,當以太宰相屈。』子翬如計而行,果弒魯侯。今軌已嗣為君,翬為太宰,討寪氏以解罪。國人無不知之,但畏翬權勢,不敢言耳。」莊公乃問於群臣曰:「討魯與和魯,二者孰利?」祭仲曰:「魯鄭世好,不如和之。臣料魯國不日有使命至矣。」言未畢,魯使已及館驛。莊公使人先叩其來意。言:「新君即位,特來修先君之好,且約兩國君面會訂盟。」莊公厚禮其使,約定夏四月中,於越地相見,歃血立誓,永好無渝。自是魯鄭信使不絕。時周桓王之九年也。
궤가 말하기를, ‘그 계획이 비록 좋지만, 악명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소?’하니, 공자 휘가 말하기를, ‘제가 아무도 몰래 자객을 도망치게 미리 조치해 놓고, 그 죄를 위(寪)대부에게 덮어씌우면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했다. 공자 궤가 절하고 말하기를, ‘대사가 만약 이루어진다면 그대를 마땅히 태재로 삼아 서로 벗하며 지내겠소!’ 그리고 얼마 후 공자 휘는 모의한 대로 노은공을 시해했습니다. 지금 궤가 이미 군주의 자리를 이었고, 공자 휘를 태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위씨에게 은공을 시해한 죄를 덮어씌워 모두 죽였습니다. 노나라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공자 휘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정장공이 군신들에게 묻기를, “노나라를 토벌하는 것과 화의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정나라에 유리하겠는가?” 하니, 제중이 말하기를, “노나라와 정나라는 대를 이어 오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화의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노나라가 보낸 사신이 머지않아 당도할 것입니다.”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나라의 사신이 이미 역관에 들었다. 장공이 사람을 시켜 노나라의 사신에게 온 연유를 먼저 물어보게 했다. 노나라의 사신이 말하기를, “노나라에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여, 돌아가신 선군께서 맺은 우호관계를 다시 확인하고 또한 양국의 군주가 서로 만나 맺을 맹약에 대해 상의하기 위하여 왔습니다.”했다. 장공이 노나라의 사절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고, 그해 4월에 월(越) 땅에서 노나라의 신군과 서로 만나 희생의 피를 바르고 회맹의 의식을 행한 후에, 우호관계를 영원히 변치 말자고 맹세했다. 그 뒤로는 노나라와 정나라 사이에는 사절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이때가 주환왕(周桓王) 9년(기원전 710년)의 일이었다.
髯翁讀史至此,論公子翬兵權在手,伐鄭伐宋,專行無忌,逆端已見;及請殺弟軌,隱公亦謂其亂言矣。若暴明其罪,肆諸市朝,弟軌亦必感德。乃告以讓位,激成弒逆之惡,豈非優柔不斷,自取其禍!有詩嘆云:「跋扈將軍素橫行,履霜全不戒堅冰。菟裘空筑人難老,寪氏誰為抱不平。」又有詩譏鐘巫之祭無益。詩曰:「狐壤逃歸廟額題,年年設祭報神私。鐘巫靈感能相助,應起天雷擊子翬。」卻說宋穆公之子馮,自周平王末年奔鄭,至今尚在鄭國。忽一日傳言:「有宋使至鄭,迎公子馮回國,欲立為君。」莊公曰:「莫非宋君臣哄馮回去,欲行殺害?」祭仲曰:「且待接見使臣,自有國書。」
염옹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공자 휘가 노나라의 병권을 쥐자 정나라와 송나라를 쳐들어가 제멋대로 행하여 꺼림이 없었고, 그때 이미 반역의 기미를 드러났다. 더욱이 동생 궤를 죽이자고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공은 또한 그 어지러운 말을 지적하기만 했다. 만약에 그 죄를 폭로하고 밝혀서 시정과 조정에 널리 알렸으면, 동생 궤를 감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위를 한다고 말만 하다가, 마침내 시역의 악행을 불러들였으니 어찌 우유부단하여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또 염옹이 시를 지어 이 일을 한탄하기를, “오만무례한 장군이 제멋대로 날뛰었지만, 서리를 밟으면서도 굳게 얼음이 된다는 것을 경계하지 않았다. 토구에다 공연히 궁을 지었으나 그곳에서 늙지 못했으니. 위씨는 누구 때문에 원한을 품어야 하는가?” 했다. 또 귀신 종무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아무 소용 없었다는 것을 시로 비난하여 이르기를, “호양 땅에서 도망쳐 와서 사당을 짓고 현판을 달아, 해마다 제사를 지내어 귀신에게 사사로이 보답했다. 종무라는 귀신이 감응하여 능히 도왔다면, 마땅히 하늘이 공자 휘에게 벼락을 쳤으리라.” 했다. 한편, 송목공의 아들 공자 풍은 주평왕 말년에 정나라로 도망쳐 와서 아직 정나라에 있었다. 문득 어느 날 전하기를, “송나라에서 사신이 이르러 공자 풍(公子馮)을 맞이하여 돌아가서 군주로 세우고자 합니다.” 했다. 정장공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이 공자풍을 데려가려고 하는 목적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아닌가?” 하니, 제중이 말하기를, “우선 사신을 접견하고, 국서가 있으니 살펴보십시오.” 했다.
不知書中如何,且看下回分解。
국서가 어떤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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