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 민병도(1953∼ )
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게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
사랑에 답함
― 나태주(羅泰柱‧1945∼ )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리필
― 이상국(‧1946∼ )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 벗을 그리며 – 지훈에게
― 박남수((朴南秀‧1918∼1994)
나는 회현동에 있고
당신은 마석에 있습니다.
우리는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성북동에 살고 있었고
나는 명륜동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이승에 있고
당신은 저승에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의 학생이었고
당신은 서울에서 역시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에도
우리는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어린 날의 사랑
― 윤제림(1960∼ )
1
벽에다 못을 칠 때 얘긴데요. 만일에 벽이 못더러 "넌 죽어도 싫다" 그러면 못이 그 자리에 들어가 박힐 수 있을까요? 또, 벽에서 못을 뽑을 때 얘긴데요. 만일에 벽이 못더러 "난 널 죽어도 못 놔 주겠다" 그러면 못이 나올까요?
2
저 어린 꽃망울들 좀 보세요, 조것들
솜털 보송보송한 이마에 분들을 바르고
아휴! 조것들이 어디 있었을까요,
어떻게 나왔을까요?
대관절 무슨 힘으로 저렇게
푸른 하늘 향해
솟구쳤을까요?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 유하(1963∼ )
붉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문득
그대 이름을 불러볼 때
단숨에 몰려오는, 생애 첫 가을
햇살의 길을 따라 참새가 날아오고
바람은 한짐 푸른 하늘을
내 눈 속에 부려놓는다
마음 닿는 곳이 반딧불일지라도
그대 단 한 번 눈길 속에
한세상이 피고 지는구나
나, 이 순간, 살아 있다
나, 지금 세상과 한없는 한몸으로 서 있다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먼 곳의 새가 나를 통과한다
바람이 내 운명의 전부를 통과해낸다
여전히 여전한 여자
― 천양희(千良姬‧1942∼ )
마음〔心〕 아닌〔非〕 것이 슬픔〔悲〕이라 하겠는지요
부러진 마음이 곡절이겠는지요
낮이 기울면 서쪽 그늘이 깊어진다 하겠는지요
깊은 것이 수심이겠는지요
희망 없는 반복이 여자의 일이라 하겠는지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하겠는지요
별을 하늘에 박힌 못이라 생각한 날이 여자에게는 많겠는지요
사랑을 밀어가기 위해 여자는 더 아파야 하겠는지요
여자는 여자가 무서워져 냉정하겠는지요
여성(女星)은 시성(詩星)이 될 수 없어
저물면서 여전히
여전한 여자이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