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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행경 제4권
7. 보리심반야바라밀다품(菩提心般若波羅蜜多品)
여래는 지혜롭고 어질어
일체 세간을 위하여
고통을 멀리 여의게끔 하나니
그러므로 반드시 반야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진여(眞如)와 세간(世間)
이 두 가지로 법을 설한다.
부처는 진여를 아는 까닭에
법을 설하는 것이 지혜가 된다.
세간의 범부(凡夫)는
두 가지 상응(相應)을 본다.
해(害)와 승해(勝害) 등이
곧 세간의 상응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본 뒤에
곧 지혜롭게 도니다.
지혜는 세간성(世間性)을 보나니
이것은 진여에 비유된다.
이 설법은 오고 감이 없고
지혜로운 자는 보지 않음이 없다.
색(色) 등도 매우 분명하여
곧 세간에 상응하는 일이다.
부정(不淨)한 것을 깨끗하게 하며
지혜로운 자는 이를 유리(有利)에 비유한다.
세간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세간성(世間性)이라 말한다.
진여를 보기 때문에
보는 것이 찰나에 머무른다.
세간의 행과 상응하니
이러한 행은 과실(過失)이 없다.
여인이 부정(不淨)함을 아는
세간의 모든 해로운 일과는 달리 구별된다.
부처님의 복을 허환(虛幻)이라 일컫는데
나로 하여금 어찌 믿으라 하는가?
유정이 만일 환(幻)의 경계[境]가 된다면
어찌 다시 생멸(生滅)하리오.
인(因)이 모이고 화합하여
곧 환연(幻緣)을 얻는다.
유정은 종자로부터 생기는데
어찌 진실이 있으리오.
허환(虛幻)의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본래 심성에 죄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평등심은 허환이며
죄와 복은 생기(生起)를 얻는다.
진언력(眞言力)과 등지(等持)는
환(幻)의 경계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다.
그 갖가지 환(幻)으로써
갖가지의 인업(因業)이 생긴다.
어찌 한 사람이
일체의 힘을 얻는다 할 것인가?
만일 진여에 머무르거나
또는 정계(淨戒)에 머무른다면
이와 같은 것을 곧 부처의 행이니
누가 보리행이라 하는가?
인연을 당연히 끊어 없애면
환화(幻化)는 얻을 수가 없다.
인연이 만일 끊어져 없어진다면
스스로 무생(無生)을 얻는다.
만일 의혹과 거짓에 머무르지 않으면
환의 경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의 경계가 만약 없어지면
일체는 얻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음은 즉 진여이니
마음의 본체가 나타나게 된다.
마음이 이와 같이 만일 분명하다면
허환(虛幻)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보겠는가?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니
세존(世尊)이 설하신 바와 같다.
칼날[劍刃]이 비록 날카롭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끊지는 못함과 같다.
자성(自性)도 이와 같아
다시 비유한다면 등잔 빛과 같으니
어둠을 깨뜨리고 이름을 얻더라도
스스로를 비춘다고는[自照]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수정과 같아
체(體)의 근원이 오직 맑고 투명하다.
푸름으로 인해 푸르게 되고
뭇 색을 따라 그림자가 나타난다.
푸름이 없는데 푸르게 나타남은
마음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과 같고
또 등잔 빛과 같다.
지혜로운 자는 이 말을 이해하리라.
지혜는 여기에서 열어 통한다.
아는 사람이 어찌 말하는 바가 있겠느냐?
열리더라도 열리지 않음이요
사람이 보는 바가 없음과 같다.
석녀(石女)는 의(義)를 만들지 않으며
이 의(義)는 둘이 아니다.
또 심식(心識)이 없음과 같다.
생각에 연함[緣念]은 소득이 없다.
생각하지 않아 따로 생겨나며[別生]
허망한 생각은 독과 같다.
이른바 인(因)이나 과(果)로
법을 위하여 스스로 설한다.
눈에 대한 약의 처방을 말하고
병(甁)을 보았으나 약이 없는 것은
보고 듣고 깨달아 알더라도
이것이 있는 것은 있음이 아닌 것과 같다.
생각으로 고뇌의 원인을 끊는다.
실제로 당연히 이렇다 생각한다.
아주 짧은 순간에 차별이 없으니
이 마음은 평등에 해당된다.
전(前)의 번뇌[塵]는 항상 사람을 미혹하게 하나니
그것을 깨달아 소유하지 않으면
마치 환(幻)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망심(妄心)을 스스로 본다.
번뇌[塵]에 머물러 윤회하는 것은
비유하면 공(空)에 의지함이 없는 것과 같다.
번뇌의 성품에 머무름 또한 이러하니
또한 아무 소득도 없다.
만일 불선(不善)을 갖추면
불선은 그대의 소득이다.
만일 마음에 취사(取捨)함이 있으면서
일체를 여래에게 베풀면
이와 같은 심의(心意)를 사용하여서는
어떠한 공덕이 있겠는가?
환(幻)의 경계 일체를 안다 하여도
번뇌를 어떻게 끊겠는가?
저 환(幻)의 삼독(三毒)을
멀리 여의고 짓지 않는다.
번뇌심을 알지만
그 지음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득견(得見)할 때,
공(空)은 뜻[意]은 있지만 힘은 없다.
번뇌의 성품이 다하지 않아
공과 서로 섞인다.
그는 배울 것이 없음[無所學]에 이르러
후에 곧 다함[盡]을 얻는다.
저 성품은 얻음이 없고
또다시 볼 수도 없다.
저 성품이 만일 머묾이 없다면
어찌 이 몸에 머물겠는가.
만일 성품[性]이 없다면
몸은 성품이 없음에 머무른다.
이 성품은 오고 감[去來]이 여여하여
수현[隨現]하는 데에 집착함이 없으니
겁수(劫樹)나 마니(摩尼)가
능히 뜻대로 원만할 수 있음과 같다.
부처의 변화도 또한 이러하여
마땅히 그 행원(行願)을 이룬다.
비유하면 숲에 주술법을 외울 때
주문이 이루어지면 나무가 말라 죽는 것과 같다.
비록 독(毒) 등에 오래 해침을 입었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소멸하여 제거한다.
보살의 수행도
여러 가지 사업(事業)을 한다.
보리행은 최승(最勝)으로
불수(佛樹)를 능히 성취하니,
그 평등의 행으로써
적정(寂靜)에 머무르게 한다.
또 부사의(不思議)를 만들어 공양하면
어떠한 과(果)를 얻겠는가?
저 행한 바의 인(因)을 따라
그 과를 얻는다.
공양 등은 진실의
과를 얻는다고 실로 일컬어진다.
어찌 법의 공함을 얻어
실로 해탈법을 얻을 것인가?
석가모니부처님의 도를 떠나지 않으면
당연히 보리를 얻게 된다.
그대여, 대승을 구하지 않고
어떤 법에서 원만을 구하는가?
이승(二乘)은 성취를 얻어도
그 성취는 원만하지 않다.
그는 지은 바로 인하여
대승을 두려워하리라.
다른 두려움을 두려워함은 진실이 아니고
이 두려움을 진실로 두려움이라 이름한다.
이 법요(法要)는
대승의 소론(所論)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 떠난 다른 법은
외도(外道)의 논임을 알라.
법은 곧 승(僧)의 근본이며
승은 법의 출리(出離)를 안다.
마음이 만일 집착하는 곳이 있으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
해탈심은 집착함이 없어
번뇌의 소멸을 얻는다.
번뇌의 업을 소멸시킴은
해탈력(解脫力)에 의한다.
애(愛)와 취(取)가 서로 연(緣)하지 않음으로
이로써 집지(執持)가 없게 된다.
애(愛)의 업(業)이 쇠약해지면
이는 어리석음에 애착함이 없다.
수(受)와 애(愛)가 서로 연(緣)하면
이 수(受)는 얻음이 있다.
안주(安住)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얻음을 처처(處處)라 이름한다.
만일 마음이 공하지 않으면
다시 얻음에 집착한다고 이름한다.
마음의 성품이 만약 공하다고 한다면
식(識)을 얻지 못함과 같나니,
마치 응(應)ㆍ정등각(正等覺)께서
설한 묘법(妙法)과 같다.
이는 곧 대승의 의미이고
대승은 평등을 행하니,
설법의 한때[一時]에
일체 과환(過患)을 깨닫는다.
일미(一味)의 평등은
모든 부처가 설하지 않음이 없다.
가섭대존자가
말을 알지 못한과 같다.
그대는 깨닫지 못했다 말하고
당연히 무언가 지어야 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탈력(解脫力)을 만약 두려워하면
윤회를 성취하리라.
저 고(苦)와 공(空)의 일에 미혹하여
이 과(果)를 얻는다.
공에 미혹한 그도 이와 같으니
법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이 공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의혹이 없게 된다.
어둠을 떠나서 번뇌를 알며
법으로 인해 공(空)을 안다.
속히 일체를 알고자 하여
그 말을 자세히 관찰한다.
만약 물질이 고(苦)를 낳는다면
이 고는 두려움이 생기게 한다.
저 고(苦)가 공(空)으로 인하여 만들어진다면
어찌 두려움이 생기겠는가?
만일 저 물질을 두려워하면
이는 곧 나의 소유[我所]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나의 소유가 없이
고통의 두려움을 어찌 얻으리오.
이빨ㆍ머리털ㆍ손발톱과
뼈ㆍ살ㆍ피ㆍ골수와
콧물ㆍ눈물ㆍ침ㆍ고름ㆍ점액[涎]과
기름[脂肪]ㆍ창자ㆍ위(胃)와
배변[便痢)ㆍ땀ㆍ더운 바람[熱風]과
아홉 구멍[九漏]과 육식(六識) 등
이와 같은 모든 법[諸法] 등은
일체가 무아(無我)이다.
지혜로 소리[聲]를 설하면
소리는 항상 일체를 받는다.
만약 소리가 지(智)를 여의었다 하면
그 여읨을 어찌 알겠는가?
만약 지(智)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지(智)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智)가 이미 결정되었다면
곧 지지(智智)에 가깝고
이 지는 소리를 받지 않으니
저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그 소리는 마음에 가깝고
색(色)을 아는 것이 이와 같다.
만일 색이 소리를 받는다면
색이 다시 무명을 받겠는가?
저 한 사람이 아버지이면서 자식인 것과 같아
사유해도 진실이 없나니,
마치 유정(有情)ㆍ진(塵)ㆍ소예(所翳)와 같아서
아버지도 없고 또한 자식도 없다.
소리와 색도 이와 같이
또한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라.
저 색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비유하면 즐거움이 잠시 화합한 것과 같다.
저 자성도 이와 같아
이것은 하나로 말한다.
나머지 색은 모두 실답지 않아
이를 색의 하품(下品)이라 한다.
저 일체 지심(智心)은
번뇌를 모두 청정(淸淨)하게 한다.
일각심(一覺心)을 사유하면
그것들은 없는 것과 같다.
애착이 만일 허망하여 진실되지 않는다면
어찌 견(見)에 머무르겠는가?
나[我]도 없고 마음도 없으니
이 마음은 화상(畫像)과 같다.
이 마음은 지(智)와 상응하고
청정하여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이와 같은 자심(自心)은
그를 짓되, 무엇을 짓는단 말인가?
어리석어 행함이 없으면
나는 헛됨을 짓는 것이다.
행이 있어 스스로 출리(出離)하면
악업(惡業)의 과(果)가 없다.
파괴의 업을 행한다면
선과(善果)를 어떻게 얻겠는가?
이 두 가지의 행과(行果)는
서로 파괴하고 성취한다.
이 말이 헛되지 않음을 알아
그 자신에게는 무사(無事)가 되며
인과가 정해져 상응하여
악견(惡見)이 나지 않음을 구하는 것이다.
이 행은 실제로 머무르니
짓는 자와 받는 자를 이제 설하리라.
과거와 미래의 마음엔
그[彼]와 내[我]가 생함이 없다.
이러한 마음이 생긴다면 나는 파괴되어
다시 생기(生起)하지 않는다.
마치 파초와 줄기와 같아
능히 승임(勝任)하는 바가 없으리라.
나의 마음이 생기는 것 또한 이러하여
여기에서 선(善)의 관찰을 얻는다.
유정이 만약 있지 않다면
이 행을 어떻게 행하겠는가?
이 행을 지금 만일 행한다면
어리석은 일(癡事)을 행하게 된다.
유정은 어떠한 실다움도 없으니
어리석음은 그 애사(愛事)에 비유한다.
만일 고뇌(苦惱)를 멸하려면
당연히 어리석은 일을 끊어야 한다.
아만(我慢)은 고통의 원인이 되며
어리석음은 이것을 증장시킨다.
사심(事心)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관공(觀空)을 최상으로 한다.
다리가 없고 정강이와 무릎도 없으며
허리도 없고 또 넓적다리도 없다.
팔이 없고 또 어깨가 없으며
배꼽이 없고 가슴과 등이 없으며
갈비[肋]가 없고 아울러 옆구리가 없으며
손이 없고 또 코가 없다.
목이 없고 머리가 없다.
쇄골[骨鎖] 등이 모두 이러하다.
일체 몸을 관(觀)하여
어떠한 곳[一處]에서도 행하지 않는다.
처처(處處)에서 행하니
어느 곳에 스스로 안주(安住)하겠는가?
이 몸과 손 등이
일체 처(處)에 모두 머무른다.
일신(一身)도 이와 같다.
손 등에 이르기까지
안도 없고 밖도 없는 몸이
어찌 홀로 몸과 손 등뿐이겠는가?
손(手) 등의 분별없이
어찌 또 있다 하리오.
이는 이미 어리석음이 없는 몸[無癡身],
오히려 의수(意手) 등을 말한다.
머무름을 다하니 수승(殊勝)에 가깝다.
관찰하는 자는 사람의 비유를 아나니
만일 저 인(因)이 화합하면
나무를 사람으로 보는 것과 같으리라.
만일 이와 같이 상(相)을 요지[了]한다면
저 몸은 이러한 견(見)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발가락을 버리면
손가락 또한 모두 버린다.
먼저 마디[節]의 합[合]을 관(觀)하고
후에 마디가 스스로 떠남을 본다.
이 몸의 파함[破]이 이미 다하여
분별의 견(見)에 머무른다.
분별하여 이 몸을 보면
얻음도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은 꿈속의 색을
지혜로운 자가 어찌 즐기겠는가?
시설[設施]되었더라도 만일 몸이 없으면
어찌 남녀 등이 있다 하겠는가?
만일 정말로 고통의 얻음을 즐거워한다면
이 사람이 어찌 해탈하지 못하겠는가?
이를 관찰함에 어찌 애락(愛樂)하여
번뇌가 깊어진다 하겠는가?
낙(樂)의 부실함은
집수(執受)함이 없는 것과 같다.
그대의 고(苦)는 또 어찌하여
그처럼 스스로 얻음이 없는가?
저 고통은 미세하게 있기는 하나
원래 미세하여 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세한 것이기 때문에
설하지 않고 다른 것을 기쁘게 한다.
성냄으로 인하여 고가 생겨나고
이미 생한 것은 멸한다.
만약 선정에서 본다면
생(生)을 스스로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미 알고
이와 같이 인과(因果)를 관(觀)한다.
선(禪)과 애(愛)가 상응하여
그 의심의 경지를 생한다.
선근(善根)의 이로운 바는
모두 어떤 사람을 위한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어떻게 화합하고
화합하여 무엇을 얻는가?
사람을 허공에 비유하면
비록 합하더라도 들어감이 없다.
들어가지 않으면 화합이라고 하지 않나니,
이것은 무분별행(無分別行)이다.
화합의 이름을 구하지 않고
만약 본다면 봄이 없으리라.
화합하여 저것을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을 얻는다고 이름할 것인가?
대상[物]이 있어도 화합하지 않으니
마치 인도하여 먼저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식은 상(相)이 없고
화합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법에 접촉함이 이와 같으니
무엇을 받아들여 생함을 얻을 것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소유하여
고통의 해를 입는가?
만약 받아들인 바를 얻지 않는다면
고통의 해를 깨닫지 못하리라.
이 지위에서 이를 본다.
무슨 애착이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지금 이 꿈을 꾸며 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허깨비[幻化]이다.
이미 그 촉성[觸性]을 본다면
그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또한 가능하다.
먼저 세계와 나중의 세계는
염염(念念)하여 받아들임이 없다.
만약 그 자신을 관한다면
받아들임도 또한 얻는 바가 없다.
받아들인 바가 이미 실하지 않다면
저것은 곧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해가 되겠는가?
색성(色性)이 스스로 머무르는 것은
근본이 없고, 중간도 없다.
안도 없으며 밖도 없는 색(色)은
다른 곳 또한 얻지 못한다.
몸이 만약 다른 곳이 없다면
합(合)도 없으며 분별도 없다.
유정의 자성(自性)은
적정(寂靜)하며 그 소유가 없다.
지혜로운 자가 만약 먼저 안다면
어찌 이에 집착할 것인가?
지혜로운 자는 슬기로우니
그의 생에 어찌 집착하겠는가?
이 지혜는 후에 얻어지는 것
그러면 그 지혜는 어떻게 얻는가?
이와 같은 일체법은
생함에도 불구하고 얻음이 없다.
이와 같이 법이 만약 없다면
이 법이 어찌 둘이겠는가?
저 나머지 법도 이와 같다면
유정은 모두 적정하다.
그 다른 마음은 의심스러우나
스스로 있지 않도다.
그 정함과 그 후유(後有)에
이 법은 피차가 없다.
자신의 마음을 사유하여
이 둘은 서로 머무른다.
바른 머무름을 얻음과 같이
일체의 지혜로운 자는 설한다.
만약 여러 지혜가 있는 자는
지지(智智)를 획득한다.
지혜로운 자는 이 지혜를 얻으며
그것은 지위가 없다.
지혜로운 자가 이 지혜를 얻는다면
얻어도 머무름이 없다.
무주(無住)는 즉 무생(無生)
이는 열반에서 설한다.
이 두 법은
이와 같이 지극히 머무르기 어렵다.
만일 법이 지(智)에 의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무슨 인(因)으로 있겠는가?
이 지(智)는 지(知)로 말미암으니
지자(知者)는 얻을 바가 없다.
두 법은 서로 연유하며
이 유정(有情)은 성품이 없다.
부모가 없으면 정히 자식도 없으니
자식을 낳고자 하지만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부모가 있기에 자식이 있듯
이 두 법도 또한 이러하다.
싹은 종자에서 생기는데
종자는 어디서 구하여 얻는가?
지(知)는 지혜에서 생기니
실로 어찌 행하지 못한다 하겠는가?
싹은 지혜의 종자에서 생겨나며
지(知)는 지혜(智)의 싹을 따라 있다.
만일 지(知)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지지(智智)를 얻으리오.
일체 사람의 인연은
그전에 모두 다하였다고 말한다.
인과(因果)가 생기(生起)하는 것은
한결같이 비유하면 연화(蓮花)와 같다.
인과는 어떤 연유로 만들어지는가?
모두 과거에 따라서 만들어진다.
이 과(果)는 무엇을 얻는다 하겠는가?
과거의 업력에 의한다.
세간은 자재에 의한다면
자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와 같이 후유(後有)를 얻어
그것들[彼彼]은 어떤 뒤섞임이라 이름한다.
이 것[事]은 그저[唯] 정해지지 않아
마음도 아니고, 현성(賢聖)도 아니다.
허물과 악함으로 선보(善報)가 없으니
어찌 자재(自在)를 얻으리오.
허공과 같이 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과거를 보지 못한다.
자재는 사의(思議)하지 않는다.
이 이치[理]는 마땅히 설하지 않을 것이다.
저 주인[主]이 어찌 최상이 되었다 하는가?
그것 또한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다.
선악의 각 자성(自性)에 대해
지혜로운 자는 한계가 없음[無邊]을 안다.
업(業)에 의해 고락(苦樂)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 등을 짓는가.
먼저, 인(因)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보는 누가 받는다 할 것인가?
어찌하여 항상 만들지 못하는가?
이에는 다른 견해가 없다.
그 지음[作]이 원래 다르지 않으니
어찌 각각[彼彼]의 견(見)을 얻겠는가?
만일 화합의 인(因)을 본다면
다시는 자재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화합에 주인이 없으면
저 법에도 곧 주인이 없다.
저 애(愛)는 스스로를 애착하지 않으니
이 애는 지음이 없다[無作].
얻을 것이 남에게 연유하니
어찌 자재를 짓는다 말하겠는가?
이른바 만일 항상 멸하지 않는다면,
이는 과거를 만들지 않는다.
애는 최상의 수(數)가 된다.
이른바 세간에 늘 항상(恒常)한다.
유정(有情)ㆍ진(塵)ㆍ암폐(闇蔽) 등은
악의 공덕에 머무른다.
이른바 이 설(說)은 최상이며
세간의 악을 설한다.
하나에 세 가지의 자성(自性)은
합해지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덕은 소유가 없다.
각각 세 가지의 덕이
비록 소리[聲]는 없다 하더라도
소리에는 환원(還遠)이 있다.
의(衣) 등과 같은 것은 무심(無心)하지만
이에 의해 쾌락이 생겨난다.
색(色)의 성품도 또한 이러하여
이를 관(觀)하여야 성품이 없다.
저들 쾌락의 원인[因]의
무유(無有)는 옷[衣] 등과 같다.
이러한 옷 등의 쾌락은
곧 성품의 쾌락이다.
저들 쾌락은
구원(久遠)함을 얻을 수 없고,
이것은 미세(微細)를 얻는다.
어찌 이것이 추세(麤細)라 하겠는가?
쾌락이 이와 같이 실(實)하니
사유를 어찌하여 받지 않겠는가?
거침[麤]을 떠나 미세(微細)를 얻으나
미세는 구원(久遠)하지 않다.
일체의 물질 또한 이러하니
구원(久遠)을 어찌하여 얻지 못하는가?
쾌락은 거칠지 않음을 얻고
쾌락은 항상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생하는 바가 없어
이 설(說)은 진실하지 않다.
그것은 진실의 덕에서 생하며
그것은 머물고자 함이 없음을 얻는다.
식(食)이 부정식(不淨食)이라면
인(因)에 과(果)가 있는 것이다.
값비싼 옷을 좋아하면서
도라(睹羅) 종자를 사는 것과 같다.
세간의 어리석음을 좋아하지 말고
저 진여의 지혜에 머무르라.
저 지혜는 세간에 있는데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
그것은 세간의 지식[量]과 동일하다.
만일 이것을 분명히 본다면,
세간은 지식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다.
이는 거짓말[妄言]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진여를 관(觀)하며
그것은 공(空)이어서 생함이 없다.
앎[知]의 성품의 접촉하지 않음,
이 성품은 집착이 없다.
이 성품은 진실로 실(實)하지 않기 때문에
실다운 성품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꿈에서 깨어나면
이러한 의심, 그것은 없게 된다.
만일 성품의 존재를 보았다면
곧 부실(不實)의 생자(生者)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 성(性)을 알아
인연하지 아니하면 곧 무소(無所)라 안다.
일체가 주인이 없이
인연 중에 안주(安住)한다.
이는 특별함이 없는 까닭에
머물지도 않으며 또한 가지도 않는다.
실로 만일 미혹하다면
도리어 세간의 승(勝)이 되니
인(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환(幻)을 좇아 화작(化作)된 것이다.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
요지(了知)함이 이와 같으니
만일 이렇게 분명히 안다면
곧 성품이 없음을 보리라.
어찌 가실(假實)을 안다 말하겠는가?
그림자 등과 같다.
성품이 스스로 있는 것[自有]이라 말한다면
이 인(因)은 무엇에 의해, 서는 것[立]인가?
만일 이것이 있지 않으면
이 인(因) 때문에 사용되지 못한다.
유무(有無)의 성(性)과 상(相)은
억백천에 인(因)한다.
그 지위[位]가 어찌 성품이라 말하겠으며
어찌 따로 성품을 얻겠는가?
저 성품이 무성(無性)일 때에
이 성품은 어느 때에 얻겠는가?
무성(無性)은 곧 무생(無生)이라
마땅히 그 성품의 행에 의존하게 된다.
성품은 과거의 성품이 없으며
성품에 의하여 생겨나지 않는다.
성품이 있지 않아 성품이 없으니
비유하면 환화(幻化)가 화합한 것과 같다.
일체 유무(有無)의 성(性)은
이와 같이 멸하지 않는다.
이 일체 세간은
이러한 까닭에 생멸하지 않으며,
행이 공(空)하고 실답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니
비유하면 꿈과 같고 파초(芭蕉)와 같다.
멸함과 멸하지 않음을 분별하면
일체는 얻을 수 없다.
성품이 공(空)함도 곧 이와 같으니
무엇을 얻고 무엇을 받겠는가?
실답지 않음이 항상 이와 같으니
그것들을 어찌 얻겠는가?
무엇을 고통스러워하고 무엇을 쾌락하며
무엇을 애착하며 무엇을 애착하지 않을 것인가?
저 애착은 어느 곳에 있는 애착인가?
요컨대 마땅히 자성(自性)을 알아야 한다.
세간도 또한 알아야 하나니,
무엇을 이름하여 무상이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무엇에 친숙하며
어떻게 나고[生], 무엇을 얻는가?
일체는 비유하면 허공과 같나니
이것을 받으나 모두 잃는다.
환희나 성냄은 상대되는 것이니
기쁨이나 투쟁이 원인이 된다.
성냄과 번뇌는 모든 삿된 행을 하니
일체를 파괴한다.
죄악은 스스로 애락(愛樂)하여
이에 악취(惡趣)의 이름을 얻는다.
죽어서 곧 악취(惡趣)에 떨어져서
고통을 얻고도 뉘우치지 못한다.
혹은 하늘을 왕래하며
생(生)마다 즐거움을 얻는 것은
수많은 죄의 벼랑에 버려지는 것이니
이른바 진실이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진(眞)은 무성(無性)이니
또한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며
장차 악(惡)을 말하여
끝이 없는[無邊] 고해(苦海)에 빠진다.
색력(色力) 및 수명을
그가 얻더라도 아주 적으며
쾌락을 획득할지라도
굶주림에 고통받는다.
수면과 재해에 헤매니
마치 허환(虛幻)이 화합한 것과 같다.
마땅히 그 허환을 다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하여도 얻기 어렵다면,
그가 배우더라도 무슨 짓는 바가 있겠는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끊어 없애겠는가?
그러한 모든 마사(魔事)들을
큰 죄의 낭떠러지라고 한다.
많은 정도(正道)에서
이기기 어려워 행하지 않으며,
또 찰나 중에
깨달음[覺悟]을 얻기 힘들다.
과거ㆍ미래의 고통이
번뇌의 바다를 마르게 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이 고통의 바다에서
나는 고통을 원망하여 떠나기를 구한다.
이와 같이 여기에 안주(安住)하여
만일 스스로 즐거이 머무르지 않는다면,
순간순간에
불에 들어가 목욕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를 보면
이러한 고통을 받는다.
늙음과 죽음에는 자재함이 없어
저 현행하는 인[行因]이 이와 같다.
저 악법이 오는 것으로부터
악을 받기 이전에 죽어버린다.
고통의 화열(火熱)은 이와 같으니
내가 어느 때 쉬겠는가?
스스로 쾌락을 만들고
복운(福雲)에 감기어
나는 무엇을 보고 알며
지혜와 공(空)을 설하겠는가?
구족된 지혜에 머리 숙이며
복덕에 깊이 머리 숙여 예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