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입능가경 제2권
2. 집일체법품 ②[2]
[항상하고 부사의하다는 뜻]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항상하고 부사의한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의 제일의경계[第一義境]는 모든 외도가 말하는 항상하고 불가사의한 작자(作者:조물주)와 같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모든 외도의 작자는 항상하고 부사의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의 항상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자상(自相)의 인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자상의 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항상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나타내 보이겠느냐?
대혜여, 외도들이 말하는 항상하고 부사의함이 만약 자상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항상함이 있겠지만,
다만 작자(作者)를 원인의 상[因相]으로 하는 까닭에 항상하고 부사의함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혜여, 내가 제일의(第一義)가 항상하고 부사의하다는 것은 제일의의 인상(因相)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유무(有無)를 멀리 떠나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상이 있다.
제일의의 지혜는 그 인(因)이 되기 때문에 인이 있는 것이요,
유무를 떠났기 때문에 작자가 아니다.
허공ㆍ열반ㆍ적멸법과 같기 때문에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항상하고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외도의 논쟁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여, 여기서 항상하고 부사의하다고 설하는 것은 모든 여래가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진리이므로 보살은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또한 대혜여, 외도가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함은,
무상(無常)한 다른 모양을 인(因)으로 하여 항상하다는 것이고,
자상(自相)을 인으로 하지 않으므로 항상하다는 것이다.
대혜여, 외도의 항상하고 부사의하다 함은,
지은 바의 법[所作法]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데도 무상한 것과 비교하여서 항상하다고 아는 것이다.
나도 지은 바의 법이 있다가 없어지면 무상하다고 보나,
이로 인하여 항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외도는 이와 같은 인상(因相)을 항상 있고 부사의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상은 있는 것이 아니며 토끼 뿔과 같다.
항상하고 부사의하다는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며 단지 말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인(因)이 토끼뿔과 같아서 스스로의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내가 항상 있고 부사의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인상으로 삼고 밖의 법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무상을 인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는 이와 반대로 항상하고 부사의한 자인(自因)의 모양을 잘 알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하는 모양의 밖에 있으므로 마땅히 말할 바가 되지 못한다.
또한 대혜여, 모든 성문은 생사와 망상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나 생사와 열반의 차별상은 모두 망령된 분별로 있는 것이다.
실제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의 모든 근(根)과 경(境)이 멸함을 망령되게 미루어 짐작하여 열반이라 한다.
스스로 지혜의 경계를 깨달아 의지하는 바의 장식(藏識)이 바뀌어 대열반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3승이 있다고 말하고 오직 마음뿐 경계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혜여, 그 같은 사람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기 마음의 경계는 알지 못하고,
마음 밖의 경계를 가지고 항상 생사에 돌고 돌아 끊어지지 않는다.
[일체법은 생기지 않는다는 뜻]
또한 대혜여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여래께서 일체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자기 마음에서 보이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며, 유생(有生)과 무생(無生)을 떠났기 때문이다.
토끼ㆍ말 등의 뿔과 같이 어리석은 범부는 망령되게 집착한다.
오직 자기가 깨달은 바른 지혜로 행할 곳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두 가지 분별하는 경계는 아니다.
대혜여, 몸과 살림[資生], 기세간(器世間) 등 일체는 다 이 장식(藏識)의 그림자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두 가지 모양이 나타난 것이지만,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머물고 멸함의 두 견해 속에 떨어져 그 가운데서 허망되게 유무의 분별을 일으킨다.
대혜여, 그대는 이러한 뜻을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다섯 가지 종성]
또한 대혜여, 다섯 가지 종성(種性)이 있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말하자면 성문승의 종성ㆍ연각승의 종성ㆍ여래승의 종성ㆍ부정(不定)종성ㆍ무종성(無種性)이다.
대혜여, 어떻게 성문승의 종성을 아는가?
말하자면 만약 온ㆍ계ㆍ처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말하는 것을 듣고 알거나 증득하여 온 몸의 털을 세우고 마음에 닦고 익히기를 좋아하지만 연기의 모양[緣起相]을 관찰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반드시 알라.
이는 성문승의 종성이다.
그는 자기 승에서 깨달은 바를 보고 나서 5지(地)와 6지(地)에서 번뇌의 얽매임을 끊으나 번뇌의 습기를 끊지는 못한다.
나아가 부사의한 사(死)에 머물러 바로 사자후로 말하되,
나의 생(生)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을 이미 이루었으며, 지을 것[所作:三業의 所作]을 이미 갖추어서 뒤에 있을 것(몸)을 받지 아니하며,
인무아(人無我)를 닦고 익히고 나아가 열반(涅槃)을 얻었다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또한 이런 중생은 열반의 증득을 구하여 능히 나와 남ㆍ중생ㆍ양자(養者)ㆍ취자(取者)를 깨달아 알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말하고,
다시 말하기를 일체법은 작자(作者)로 인하여 있다고 보아 이것이 열반이라고 한다.
대혜여, 그들은 해탈이 없으니, 능히 법무아(法無我)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성문승과 외도의 종성이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낸다.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이런 나쁜 견해를 버려야 한다.
대혜여, 어떻게 연각승의 종성을 아는가?
말하자면 만약 연각승의 법을 듣고 온몸의 털을 세우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고 심란하고 시끄러운 인연을 떠나 물들어 집착함이 없고,
때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혹은 모으고 혹은 흩어지는 신통변화에 대하여 말함을 듣고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어서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으면 반드시 알라.
이는 연각승의 종성이니 그를 위하여 연각승의 법을 설해야 한다.
대혜여, 여래승의 종성이 깨닫는 법은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자성과 자성이 없는 법[自性無自性法],
몸 안으로 스스로 깨닫는 바른 지혜의 법[內身自證聖智法],
밖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광대한 법[外諸佛刹廣大法]이다.
대혜여, 만약 이 하나하나의 법과 자기 마음에 나타난 몸과 재물의 건립이 아뢰야식의 부사의한 경계가 일으킨 것이라고 말함을 듣고 놀라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 반드시 알라. 이것이 여래승의 종성이다.
대혜여, 부정(不定)의 종성이란,
말하자면 그 세 가지 법을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따라서 믿고 알아 순종하여 닦고 배울 것이다.
대혜여, 처음 다스리는 지위의 사람[初治地人]을 위하여 종성을 설해 그들이 그림자 없는 지위에 들어가게 하려고 이것을 일으켜 세워 만든 것이다.
대혜여, 그 삼매의 즐거움에 머무는 성문이 만약 능히 스스로 의지하는 식(識)을 깨달아 알아서 법무아(法無我)를 보고 번뇌의 습기를 맑게 하면 필경에는 마땅히 여래의 몸을 얻을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설하셨다.
수다원[預流]ㆍ사다함[一來]
아나함[不還果]ㆍ아라한(阿羅漢)
이들 모든 성인
그 마음 모두 미혹하여
내가 세운 3승(乘)과
1승(乘)과 승 아님은
어리석은 범부와 지혜 적은 이를 위하여
고요함을 즐기는 모든 성인이 말씀하신 것이니라.
제일의(第一義)의 법문
2취(取:能取ㆍ所取)를 멀리 여의고
경계 없는 데 머물거늘
어찌 3승을 세움이 있겠는가?
모든 선정과 4무량(無量)과
무색(無色)의 삼마제(三摩提)
나아가 멸수상정(滅受想定)은
오직 마음뿐 그 외는 얻을 수 없느니라.
[일천제]
또한 대혜여, 이 가운데 일천제(一闡提)는 무슨 까닭에 해탈 가운데서 즐거워함을 내지 않는가?
대혜여, 일체 선근을 버린 까닭이요,
시작 없는 때부터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체 선근을 버렸다 하는가?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계경(契經)ㆍ조복(調伏)ㆍ해탈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을 할 때 선근이 모두 끊어져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엇을 무시이래의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본래 서원의 방편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열반에 들어가기를 서원한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열반에 들지 아니하면 나는 끝내 열반에 들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도 또한 일천제의 무리에 머문다.
이것이 열반 종성의 모양[涅槃種性相]이 없는 것이다.”
대혜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는 어떤 이가 필경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저 보살 일천제는 일체법이 본래 열반임을 알아 필경에 열반에 들어가지 아니하나 선근을 버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근을 버린 일천제도 부처님 위신력으로 어느 때에 선근이 생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버린 때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보살 일천제는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