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3년 10월 6일(금) 13시(사전예약), 서삼릉 효릉, 태실 탐방은 사전예약을 한 후에 관람을 할 수 있다.
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서삼릉은 희릉,효릉,예릉의 3기의 능이 있는 능역을 말한다.
희릉禧陵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고
효릉孝陵 :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 (효릉은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예릉睿陵 : 철종과 철인황후 김씨의 능이다.
태실 : 왕실에서 왕,왕비.대군,왕세자,왕세손,왕손,공주,옹주 등이 태어날 때의 태를 봉안하는 곳. 전국 명산에 등에 퍼져 있던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거의 모두 이곳 으로 이봉되었다.
찾아가는길 : 3호선 원흥역7번출구 ㅡ> 43번 마을 버스탑승(30분~1시간 주기)ㅡ>서삼릉 종.마목장 하차 ㅡ> 태실,효릉까지 1.3Km 15분 도보
버스에서 내리면 태실과 효릉은 태실이라고 쓰인 방향으로 도보 15분 정도 이고, 희릉과 예릉은 고양 서삼릉이라고 쓰인 방향으로 5~6분 내려가면 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너른마당이란 음식점이 보인다. 지난8월 서삼릉(희릉,예릉)을 다녀 오면서 점심식사를 여기서 하였다. 한옥이라 특별한 분위기지만 음식은 맛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분위기상 한번 들러 보시길~
태실 방향으로 걷다보면 표고버섯 판매장이 나온다.
태실 거의 다와서 서삼릉 보리밥집이 있다
10,000원짜리 보리밥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정문 맞은편에 펫놀이터가 있는데 차를 가지고 오면 여기에 주차해도 된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근처 빈 공간에 주차하여도 무방한 것 같다.
정문
효릉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탐방객들은 소독을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인근에 젖소계량사업소가 있어 오염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소독을 하고 들어서면 효릉으로 가는 길이나오는데 이 길도 젖소계량사업소(농협) 땅이고 멀리 보이는 황토색 언덕도 농협 땅입니다. 효릉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어 농협과 계약을 맺고 이 길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드디어 효릉이 나타납니다. 조선왕 중에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입니다(8~9개월)
54기의 태실군입니다. 태항아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는 비석만 세워져 있다함. 조선왕의 태항아리는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으로 모두 가져가고 현재 한국에는 조선의 왕중에는 유일하게 영조의 태항아리만 있다고합니다.
경빈 김씨(헌종의 후궁) 묘 헌종과 두사람의 러브스토리 재밌네요.
헌종의 첫번째 왕비가 16세에 세상을 떠나자 후사를 위해 새로운 왕비 효정왕후를 들였는데 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자 헌종은 본래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을 후궁으로 들입니다. 그녀가 바로 경빈 김씨.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 낙선재 옆 석복헌이라는 건물을 짓고 그 곳에서 경빈 김씨를 머물게 했지요.
곧 드라마로 나온다고 합니다. 얼마전 촬영 다하고 갔답니다. 드라마 나오면 꼭 보시기를~
의빈 창녕 성씨(정조의 후궁) 정조가 사랑한 여인 두사람의 슬픈 러브스토리도 재밌습니다. 비석 뒤에는 정조가 직접 어제를 썼다고 합니다.의빈 성씨는 정조의 승은을 두번이나 거절합니다. 그러나 끝내 정조 임금의 후궁이 되었고,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습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문효세자입니다. 그러나 1786년 (정조 10) 5월 11일 5세의 어린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합니다. 그 해 9월14일 의빈 성씨도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뱃속에 9개월 된 아이를 밴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정조는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제사 때마다 제문을 손수 졌습니다. 그 중 최고의 백미가 의빈 성씨를 무덤에 묻을 때 바친 '어제의빈치제제문 입니다.
어제의빈치제제문(御製宜嬪致祭祭文)
건륭 51년 병오 11월 신미 초칠일 정축에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제를 지내 말한다.
아아, 나는 오히려 빈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노라
상변(사람의 죽음)이 참혹하고 인정에 고통스러운 것은 문효의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으나 필히 마음을 넓게 가지고 슬픔을 다스렸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니 평소에 웃고 이야기하며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아 담연히 잊은 듯했다. 그런데 오히려 빈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노라
아아, 빈은 문효의 어미이고 빈의 뱃속의 아이는 문효의 동기이다.
문효는 볼 수 없으나 그 친애하고 사모하는 것은 어미에게서 구하고, 그 비슷하게 닮은 것은 동기를 기다렸다. 고통스럽고 참혹하여도 마음을 넓게 가진 것이 이 때문이요, 슬픔을 다스린 것이 이 때문이다.
이제 빈이 이미 죽고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으니 문효의 자취와 여운은 마침내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장차 어디에서 구하며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고통스럽고 참혹한데 또한 무엇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넓게 가지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다스리겠는가.
나는 빈이 죽은 뒤로 비로소 문효의 종적이 날로 멀어지는 것을 깨달으며, 날로 멀어지나 날로 더욱 잊지 못함을 슬퍼한다. 이에 지금의 슬픔이 예전의 슬픔보다 더 심하니 그 슬픈 까닭이 어찌 다만 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겠는가?
아아, 빈첩으로서 도리를 알았으니 어질다 할 만하고 영귀하면서도 삼가고 절약하니 복록을 받을 만했거늘 문효를 여의고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 뱃속의 아이와 함께 돌아가 스러지니 빈의 운명이 또한 슬프기가 심하다.
이제 빈을 보내 문효의 곁에 장사하리니 이는 진실로 빈의 소원이다.
현실(무덤 속의 방)이 매우 가까워 영혼의 기운이 흘러 통하리니 끝없는 이별의 한이 영원히 위로가 될 것이나,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음을 (그대도) 마땅히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今將送嬪于文孝之側而葬之 此固嬪之願耳 玄隧密邇 魂氣流通 終天泣訣之恨 永以爲慰 而亦當哀予之不能忘哀也 其然乎不然乎)
아아! 슬프도다! 흠향하라!
회묘(성종의 왕비이며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의 묘) : 특이한 점은 묘이나 릉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다만 홍살문,정자각 강(언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