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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 제6권
4. 무방일품 ②
1
바른 생각을 언제나 일으키고
행이 깨끗하면 악이 쉽게 사라진다.
스스로 제어하여 법으로 수명을 누리고
죄를 짓지 않으면 명성이 높으리.
“바른 생각을 언제나 일으키고”란 무슨 뜻인가?
혹 어떤 수행자는 잡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은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동자(童子)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 인색한 마음이 있으면 곧 그 일을 이룰 수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한가지로 전념하면 어떤 원인들 이루지 못하리.”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마음으로만 선을 생각하고 몸으로는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을 언제나 일으키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행이 깨끗하면 악이 쉽게 사라진다”란 무슨 뜻인가?
신행(身行)이 깨끗하고 구행(口行)이 깨끗하며 의행(意行)이 깨끗한 것이다.
어떤 것을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전도(顚倒)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즉,
첫째는 무상(無常)을 유상(有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넷째는 무아(無我)를 유아(有我)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전도된 생각을 여의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이 깨끗하면 악이 쉽게 사라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몸이 맑고 시원하여서 타는 듯한 괴로움이 없는 것 역시 “악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제어하여 법으로 수명을 누리고”란 무슨 뜻인가?
제제제제제어한다는 것은 신(身)ㆍ구(口)ㆍ의(意)를 제어한다는 것이다. 법으로써 수명을 늘리는 것은 비법(非法)이 아니며, 법으로써 수명을 구하는 것도 비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제어하여 법으로 수명을 누리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를 짓지 않으면 명성이 높으리”란 무슨 뜻인가?
그 이름이 팔방(八方)의 끝에까지 들리고 큰 덕은 시방에 떨쳐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독실히 믿고 그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으면 명성이 높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마음을 다하여 방일하지 않고
능인(能仁)의 계율을 마음으로 익히면
마침내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없고
산란한 생각이 그치리라.
“마음을 다하여 방일하지 않고”란 무슨 뜻인가?
대개 행을 닦으려는 의욕이 너무 왕성한 사람은 계율을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옛날 부처님의 제자인 이십억이(二十億耳) 비구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훈계하였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용맹정진하기로는 내가 으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이 해탈을 하지 못해 무루법(無漏法)을 얻지 못하였다. 나의 조상과 부모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재물이 있지만, 나는 지금까지 도를 닦느라고 그것을 얻지 못하였다.
이 3법의(法衣)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세속의 법을 닦으면서 5락(樂)을 누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시하자. 무엇 때문에 계율을 닦고 정진하여서 스스로 괴로움을 초래하며 내가 원하는 과(果)도 얻지 못하는가?”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티없이 맑고 고요한 천이(天耳)로써 이십억이 비구가 집으로 돌아가서 세속의 행을 닦고 싶다고 한 말을 들으셨다. 곧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祇洹精舍)에서 몸을 감추시고 이십억이 비구에게로 가셔서 그에게 물으셨다.
“어떠하냐? 이십억이여, 너는 이러한 생각을 일으켜서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용맹정진하기로는 내가 으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여 무루법을 얻지 못하였다.
나의 조상과 부모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재물이 있지만 지금까지 도를 닦느라고 그것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3법의(法衣)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세속의 법을 닦으면서 5락(樂)을 누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시하자.
무엇 때문에 계율을 닦고 정진하여서 스스로 괴로움을 초래하며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너는 참으로 그렇게 말하였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너에게 세상 안의 이치에 대해 물을 것이니, 낱낱이 대답하여라.
이십억이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다루었다. 거문고는 노래와 잘 어울리고 노래는 거문고와 잘 어울려서 그 소리가 한가지라야 비로소 곡조를 이루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하냐? 이십억이여, 만일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거나 너무 헐거워도 곡조가 이루어지더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하냐? 이십억이여, 만일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지 않고 너무 헐겁지도 않을 때 곡조가 이루어지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비구도 너무 용맹정진하면 한편으로 게으름이 생기기 쉽다. 나태하여 부지런하지 않아도 또한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너무 부지런하지도 말고 역시 나태하지도 않게 중도(中道)를 취하여 도를 닦아야 비로소 그 과(果)를 얻을 것이다. 곧 유루심(有漏心)에서 문득 탈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그때에 이십억이 존자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다하여 생각하다가 문득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 까닭은 선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3법의를 입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것은, 위없는 법을 닦아서 유루(有漏)를 다하여 무루(無漏)를 이루고, 무여(無餘) 열반의 아라한 과(果)를 얻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방일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능인의 계율을 마음으로 익히면”이란 무슨 뜻인가?
능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계율이란, 2백50가지 위의(威儀)의 계율과 마음속의 계율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구절, 하나의 이치가 모두 계와 율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익힐 것은 익히고 버릴 것은 버리며 떠날 것은 떠나고 좇을 것은 좇아야 한다.
그러므로 “능인의 계율을 마음으로 익히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침내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없고”란 무슨 뜻인가?
대개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이 나태하여 위없는 도법을 닦지 않고, 몹시 세상 일에 집착하여서 세속을 떠나지 못하면, 그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생기는 것이다.
또 법을 어기고 계율을 깨뜨려도 근심과 걱정이 생긴다.
또 수행하는 사람이 남의 보시를 받고도 그것을 탐하여 만족할 줄 모르거나, 경전을 외우지도 않으며 좌선하지도 않고 도덕을 생각하지도 않거나, 또 남을 교화하지 않고 대중의 일을 돕지도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근심과 걱정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근심과 걱정이 없는가?
이른바 5근(根)이 선법(禪法)에 힘을 얻어서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으면 곧 경계를 넘어 한없는 경지에 이르고, 근심 없는 전당에 들어가서 아주 고요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없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산란한 생각이 그치리라”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번뇌가 영원히 그치고 사라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삶에 대한 집착이 없고 온갖 심한 고통을 끊었으므로, 5음으로 된 몸에 질병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을 잘 닦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근심 없는 전당에 이르게 되니, 마음을 한 가지로 하여 흩어짐이 없으면 언제나 선한 생각과 선한 인연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산란한 생각이 그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비루한 법을 가까이하지 말고
방일한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
삿된 소견의 뿌리를 심지 않으면
세상의 악이 자라지 않으리라.
“비루한 법을 가까이하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이 비루한 법인가?
모든 번뇌와 모든 악행과 모든 삿된 소견과 모든 전도된 소견을 말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러한 법들을 가까이하면 곧 온갖 악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이와 가까이하지 않고 상종하거나 더불어 이야기하지도 않으며, 같이 앉거나 일어나거나 다니지도 않고 항상 화재를 피하듯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비루한 법을 가까이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방일한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방일한 사람이 닦는 행은 미동만 하여도 화를 부른다. 즉, 나쁜 벗들과 짝을 짓고 열 가지 악행의 도움을 받으며, 실제로는 친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벗인 체하여서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속으로는 그를 해치고자 한다. 말은 달콤하고 곱지만 마음은 칼이나 창과 같다.
이와 같이 방일한 사람과는 항상 멀리 떨어져야 하며, 상종해서는 안 된다. 먼저는 달다가 뒤에 가서 쓴 것을 성인은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일한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삿된 소견의 뿌리를 심지 않으면”이란 무슨 뜻인가?
대개 삿된 소견 병이 되는 일은 한량이 없다.
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의 생도 없고 다음의 생도 없으며, 부모도 없고 아라한도 없을 것이다. 도를 얻은 체하는 자는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은 버리고 세속의 아름다운 말을 쫓아서 시를 짓기도 하며, 거짓으로 남의 허물을 꾸며 내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근본을 버리고 극단으로 치달아서 진실을 떠나 거짓에 사니, 그가 익히는 것은 모두 전도된 일뿐이다.
그들은 부처님도 벽지불(辟支佛)도, 아라한도, 아나함(阿那含)도, 사다함(斯陀含)도, 수다원(須陀洹)도 진실이 아니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6도(度)를 비방하여 행이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가장 큰 삿된 소견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진실을 진실이 아니라고 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그 신성한 입으로 친히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받들지 않아야 할 것을 받들기에 도리어 비방을 받는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스스로도 깊은 연못에 빠질 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깊은 연못에 빠지게 하므로 저 천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외도들의 기이한 부서(符書), 주술(呪術), 진압(鎭壓) 등을 배운 뒤에 좋은 날을 택하여 귀신을 부리고 도술로 허깨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삿된 술수이기 때문에 눈이 밝은 사람은 배우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뱀을 잡아먹으려고 곳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뱀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손으로 그 꼬리를 붙잡았는데, 뱀은 도리어 그 손을 물고 말았다. 독이 온몸에 퍼져서 그는 곧 죽고 말았다. 그가 노련하게 뱀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요즘의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인 것을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삿된 소견의 뿌리를 심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의 악이 자라지 않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세상에는 세 종류가 있다. 셋이란,
첫째는 중생세(衆生世)이고,
둘째는 음세(陰世)이며,
셋째는 삼계세(三界世)이다.
중생세란 무엇인가?
한 발, 두 발, 네 발 내지 많은 발을 가진 중생, 형체를 지닌 중생, 형체를 지니지 않은 중생, 생각이 있는 중생, 생각이 없는 중생, 생각이 있기도 하고 생각이 없기도 한 중생이니, 이것을 중생세라고 한다.
음세란 무엇인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5음[五盛陰]으로 된 요소와 무색계(無色界)의 4음(陰)으로 된 세계이니, 이것을 음세라 한다.
삼계세란 무엇인가?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에서 끝없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며, 다시 하나에서 일어나 삼천대천세계에 이르는 세계이니, 이것을 삼계세라고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삿된 소견을 익히면 곧 그 세계가 늘어나고, 온갖 더러움이 생길 것이며, 지옥과 아귀와 축생계를 늘어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삿된 소견의 뿌리를 심지 않으면, 그는 이 삼세(三世)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이 자라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바른 견해는 제일의 도이니
세속의 지혜는 미루어 알 수 없다.
백천의 생(生)을 지나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바른 소견은 제일의 도이니”란 무슨 뜻인가?
모든 삿된 소견의 근원을 분별하여서 그것을 영원히 버린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서서 전도된 소견을 연설하면서 바른 견해라고 말하더라도 그는 마음을 굳건히 잡고 있기 때문에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 하면 바른 견해는 막거나 무너뜨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마왕 파순(波旬)이나 환술사가 여러 가지 조화를 부려서 그를 위협하더라도 그 마음을 흔들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더욱 바른 견해를 닦아서 움직임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러한 것들은 세속의 소견일 뿐으로 제일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는 제일의 도이니, 세속의 지혜로는 미루어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백천의 생(生)을 지나더라도”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백천 생을 지나는 동안에 악취(惡趣)에 떨어졌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는 태어나는 곳마다 현성을 만나게 되므로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천의 생(生)을 지나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방일함을 닦아 익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친숙히 따른다.
선정에 들어 방일하지 않으면
마치 보물창고를 지키는 주인과 같다.
“방일함을 닦아 익히는 사람은”이란 무슨 뜻인가?
마음이 어떤 것에 집착하고 미혹되어서 바른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행은 옳다고 하고 남의 행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며, 버릇없이 구는 데 익숙하여서 항상 처음으로 돌아오니,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사람이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방일함을 닦아 익히는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친숙히 따른다”란 무슨 뜻인가?
마치 어리석은 어린애가 일의 진위(眞僞)나 흑백(黑白)을 분별하지 못하듯이 어느 것이 불이고 독사인지 알지 못해 잡아서는 안 될 것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정에 들어 방일하지 않으면”이란 무슨 뜻인가?
선정으로써 생각을 거두고 안팎으로 환하게 트여서 이레와 큰 이레[大七]를 지나는 동안에, 혹 좌선하다 졸릴 때는 선정의 공[禪鞠]과 법의 지팡이[法杖]로 마음을 단속하되, 때에 따라 하여서 선정의 법을 잃지 않는 것이다.
선정이란 어떤 것인가?
선정이란, 뜻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날로 나아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삼칠일인 21일 동안 아주 고요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어 큰 이레인 칠칠일, 즉 49일 동안을 정진하여서 산란심이 없으면 곧 선정을 얻는데, 만일 산란심이 생기면 차례대로 잃게 된다. 그러면 다시 하루에서 시작해 이레와 큰 이레까지 이른다.
혹 선정하다가 졸게 될 때에는, 구슬을 머리 위에 올려 놓거나 노끈으로 귀를 매달아 두면 졸릴 때 곧 깨게 된다.
선정의 공이란, 선사가 손에 공을 가지고 있다가 조는 사람이 있을 때 공으로 치면 공이 굴러가서 다시 다른 사람도 치게 된다. 그래서 모두 졸음을 깨게 되는 것이다.
법의 지팡이란, 또한 지팡이로써 깨우는 것으로 다른 사람도 깨워서 선정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에 들어 방일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보물창고를 지키는 주인과 같다”란 무슨 뜻인가?
저 좌선하는 비구가 선정을 지켜서 버리지 않을 때에 혹 마음이 어지러우면 곧 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보물창고를 지키는 주인도 이와 같아서 때때로 돌아보고 창고를 살펴본다. 그래서 7진(珍)과 온갖 보물과 갖가지 물건들과 소, 양, 하인, 재물, 종과 금, 은, 진보(珍寶), 차거(車渠), 마노(馬瑙)의 일종, 진주(眞珠), 호박(虎珀) 등을 때때로 돌아보고 살펴보아서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마치 보물창고를 지키는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
방일함을 닦아 익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친숙히 따른다.
선정에 들어 방일하지 않으면
온갖 번뇌를 없앨 수 있다.
“온갖 번뇌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수행자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야 한다.
‘유루(有漏)의 병에는 온갖 허물이 많다. 갖가지 번뇌가 흘러 나와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곳에 퍼져 있으니, 나도 이러한 허물 때문에 생사에 속박되고 속아서 열반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지금 방편으로써 기어코 그것을 버리리라.’
그래서 현재를 끝내서 미래를 생기지 않게 하며, 새 것을 짓지 않고 옛 것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7
탐하지도 말고 다투기를 좋아하지도 말며
욕락(欲樂)을 즐기지도 말라.
방일하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하면
큰 안락을 얻을 수 있으리라.
“탐하지도 말고 다투기를 좋아하지도 말며”란 무슨 뜻인가?
방일함에 익숙하지 않고 방일한 사람과 어울리지도 않으며 방일한 사람을 보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또 남에게도 권하여서 방일함을 버리게 하며 역시 가까이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탐하지도 말고 다투기를 좋아하지도 말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욕락을 즐기지도 말라”란 무슨 뜻인가?
삿된 것을 닦는 저 외도들은 욕락을 찬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락은 맑고 깨끗하여 티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것을 누려서 모든 감관을 만족시켜야 한다.
욕락을 누리더라도 죄는 없다. 어떤 이는 그것을 더러운 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깨끗한 것이다. 왜냐 하면 몸을 가진 모든 사람은 욕락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욕락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마땅히 꾸짖어 내쳐야 할 것인데 어찌 도리어 찬탄하는가?
무엇 때문인가?
애욕이 그 어미가 되어 욕락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락을 즐기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방일하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하면 큰 안락을 얻을 수 있으리라”란 무슨 뜻인가?
모든 번뇌를 완전히 벗어나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는 것이다. 국왕이나 대신, 장자, 거사들이 수억의 재산을 쌓아 두고 마음대로 즐기면서 끝없는 쾌락을 누린다고 하지만, 이것은 안락하지 않은 법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당장에는 즐겁더라도 뒤에 가서는 반드시 고통을 받을 것이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기약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위험한 것이다.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영원히 없앤 사람이라야 비로소 큰 안락을 얻을 것이니, 그 안락은 흔들림이 없고, 그는 네 가지 경계의 재난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밝음과 6신통으로써도 비록 신족(神足)이 있더라도 그 안락을 위험한 곳에 옮겨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큰 안락을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
항상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제어하면 번뇌가 없어지리라.
자만하면 마군이 틈을 엿보니
마치 사자가 사슴을 덮치듯 하리라.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번뇌를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는 의지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게송에서도 ‘항상 자만하지 않고’라고 말한 것이다.
4대(大)로 이루어진 이 몸을 아끼고 기르는 것은 마치 살무사와 더불어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비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하는데, 어찌 방일하여서 도의 싹을 영원히 잃으려고 하는가?
죽음의 길은 수도 없으며 괴로움은 많고 즐거움은 적은데, 어찌하여 그러한 가운데서 번뇌를 일으키겠는가?
또한 생사는 불꽃처럼 타 피할 곳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러한 가운데서 방일하겠는가?”
그러므로 “항상 자만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스스로를 제어하면 번뇌가 없어지리라”란 무슨 뜻인가?
너희들은 비록 수다원의 과(果)와 사다함의 과를 얻었지만, 아직 온갖 번뇌와 애욕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록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세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탐욕을 없애지 못하였기에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 오히려 매우 두려운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무엇인가?
마군이 바로 그것이다.
마왕 파순(波旬)은 밤낮으로 사람들의 잘못과 세상일의 방일함을 엿보고 살피다가 잘못이 있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타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자만하면 마군이 틈을 엿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사자가 사슴을 덮치듯 하리라”란 무슨 뜻인가?
어미 사슴이 처음으로 새끼를 낳았을 때 새끼는 어디든지 어미를 쫓아다닌다. 어미도 새끼가 사랑스러워 멀리 떨어져 있지 못한다. 때마침 어미 사슴이 새끼와 떨어져 있지 못하는 것을 잘 아는 짐승의 왕 사자가 달려들게 되면, 어미와 새끼는 한꺼번에 죽는다. 왜 그렇게 되는가? 어미 사슴이 새끼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자가 그 틈을 엿본 것이니, 애욕을 없애지 못한 사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절한 교훈을 들은 뒤에는 애욕을 싫어하여서 모든 법을 요술이나 허깨비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고요히 생각하면서 뜻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애욕이 완전히 없어져서 다시는 번뇌에 물들지 않을 것이며, 애욕이 없어지면 아나함(阿那含)의 과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곧 다시 앞으로 나아가되, 도중에 후회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여서 괴로움의 근본을 살피고 온갖 속박과 집착을 없애면 끝내는 누진통(漏盡通)을 얻어서 아라한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항상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제어하면 번뇌가 없어지리라.
자만하면 마군이 틈을 엿보니
마치 사자가 사슴을 덮치듯 하리라.
9
방일함에는 네 가지 나쁜 일이 있다.
남의 부인을 범했을 때에는
위험하고 이롭지 않으며
셋째는 꾸짖음이고, 넷째는 요망함이다.
“방일함에는 네 가지 나쁜 일이 있다”란 무슨 뜻인가?
애욕에 집착하는 사람은 머무는 곳에서 언제나 기뻐하며 짐승의 행동을 본받아서 금과옥조로 삼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더러운 것이고, 공덕을 얻지 못하는 것이며, 누워서는 편안하지 못하고, 남의 욕설을 듣기에 좋은 것으로 관찰한다. 곧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네 가지 나쁜 일이다.
“남의 부인을 범했을 때에는”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온갖 죄악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즉, 지금의 몸이나 다음 생의 몸에 있어서도 그럴 것이며, 현세에서는 남의 미움을 받는다. 그렇다면 현세에서 어떤 남의 미움을 받는가? 이른바 남의 미움이란, 혹은 왕의 법에 의해 구속을 당하기도 하고, 그 남편에게 붙잡히기도 하며, 혹은 감옥에 갇혀서 온갖 매질과 심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니, 그 고통은 한량이 없어서 몸이 부서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검수(劍樹)지옥에 난다.
그때에 죄인은 검수(劍樹) 위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게 된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치 천녀와도 같을 것이다. 그는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을 통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칼나무 가지가 밑으로 구부러져서 그 몸을 찌를 것이니,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을 통하려고 하지만 통할 수가 없다.
그때에 갑자기 여러 아름다운 여자들이 땅에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는 다시 땅에 있는 여자들을 보고 몹시 기뻐하면서 나무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려고 하면, 이번에는 칼나무 가지가 위로 치켜 올라서 그 몸을 빈틈없이 찌를 것이니, 살은 없어지고 뼈만 남게 될 것이다. 그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죽으려고 하지만 죽지 못한다. 죄의 과보가 끝나지 않아서 그 뼈에서 다시 살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은 다 음행을 탐하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이렇게 수천억만 년을 지내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지만 죽지도 못하니, 반드시 그 죄가 다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음행을 탐하는 사람이 지옥에 들어가는 일은 이와 같다.
또 음행을 탐하는 사람은 축생의 세계에도 떨어진다. 어떤 사람은 때에 따라 음욕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때도 없이 음욕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에 따라 음욕이 일어나는 중생들은 비록 음행을 범하지만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고, 음탕한 생각이 적어서 그렇게 간절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음욕이 때도 없이 일어나는 중생들은 세상 일에 음탕한 생각이 너무 많아서 남의 여자를 범한다. 그래서 비록 축생으로 나더라도 정욕이 너무나 강하다. 이 때문에 때도 없이 음욕이 일어나는 것이니, 그들이 축생으로 태어나 받는 죄는 이와 같다.
또 음행을 탐하는 중생은 아귀의 세계에도 떨어진다. 그들은 음탕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데 심지어 아수라[阿須倫]와 천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도 모두 음행을 탐하기 때문이다. 남의 아내를 범하여 아귀로 태어난 중생도 이러한 죄를 받는다.
음행을 탐하여 인간 세계에 태어난 사람은 자기 아내와 음행을 행하여도 절도가 없으며, 방탕하고 자만하여서 그칠 수가 없다. 혹은 강제로 범하여 법을 어기기도 하고, 음란하여서 존귀한 이나 비천한 이를 가리지 않으며, 친척까지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남근(男根)이 없거나 두 가지 근을 겸하기도 하며, 혹은 모양이 없기도 하고, 한 가지 모양이 있더라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음탕한 무리들은 모두 음행을 범할 때에 그 고하(高下)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행을 탐하는 중생이 하늘에 태어나면, 다섯 가지 재난이 따르는 변을 당하게 된다.
가령 천왕의 딸이 다른 이와 즐기는 것을 보고는 천자는 근심스럽고 슬퍼서 마치 불에 타는 것만 같아,
‘나도 음행을 행하였지만 저 왕녀도 나에게서 떠났구나’라고 생각하며,
질투의 마음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끝내는 나쁜 생각을 가지게 되니, 이 때문에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진다.
이것은 이롭지 않은 행으로 말미암아 5도(道)에 태어나게 되는 것으로서 그 몸을 따라 고통을 받는데, 그 죄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위험하고 이롭지 않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는 꾸짖음이고, 넷째는 요망함이다”란 무슨 뜻인가?
음탕한 사람은 항상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범한 음탕한 죄가 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욕설을 좋아하며,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業)을 두루 갖추게 된다.
혹 어떤 음탕한 사람은 안면이 없는 여자를 범하려고 하다가 여인의 꾸짖음을 듣기도 하며, 혹은 안면이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다가 그 남편에게 들켜서 남편의 꾸짖음을 듣기도 한다.
그러므로 “셋째는 꾸짖음, 넷째는 지옥”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지옥에서는 죄인을 다루는 법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넷째는 지옥”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이롭지 못한 행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니
두렵고 두려워 즐거움은 적다.
왕의 법으로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니
남의 아내에 대한 욕심을 버려라.
“이롭지 못한 행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니”란 무슨 뜻인가?
이롭지 못한 행을 한 이는 아귀나 축생이나 지옥 따위의 악도에 태어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두렵고 두려워 즐거움은 적다”란 무슨 뜻인가?
이제 그 사실을 말하리라.
옛날 아육왕(阿育王)의 아우 선용(善容)이 사냥을 하기 위해 성을 나갔다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범지들이 신선이 되기 위해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정신과 몸을 괴롭히면서 범(梵)의 복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나뭇잎을 먹고 사는데,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사람은 하루에 한 잎씩을 먹고, 몸이 약한 사람은 하루에 일곱 잎을 먹었다. 어떤 이는 하루에 여섯 잎, 다섯 잎, 네 잎, 세 잎, 두 잎 혹은 한 잎씩을 먹기도 하였다.
일곱 잎을 먹는 사람은 일곱 홉의 물을 먹었고, 여섯 잎을 먹는 사람은 여섯 홉의 물을 먹었으며, 다섯 홉, 네 홉, 세 홉, 두 홉, 한 홉의 물을 먹는 것도 이와 같았다. 그리고 물을 얻을 수 없으면 바람을 마셨는데, 일곱 번, 여섯 번, 다섯 번, 네 번, 세 번, 두 번, 한 번을 마시는 것도 이와 같았다.
또 어떤 범지는 가시덤불에 누워서 몸을 찔리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잿더미에, 어떤 이는 돌 위에, 어떤 이는 나무 막대기 위에 누워 있기도 하였다.
선용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여기서 도를 닦을 때 가장 큰 근심은 무엇이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왕자님, 저희들이 여기서 도를 닦을 때 다른 근심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 사슴들이 여기 와서 쌍쌍이 교미하는 것을 보면, 저희들도 정욕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왕자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범지들은 그 몸을 괴롭히되, 햇볕에 몸을 태우거나 불에 몸을 구워서 그 목숨이 위태롭기가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한데도 음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구나. 그런데 사문(沙門)인 저 석씨(釋氏)의 아들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자리에 앉아서 좋은 옷을 입으며 향을 피우고 꽃으로 장식하는데, 어떻게 음탕한 뜻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육왕은 아우가 비난하는 말을 듣고 곧 걱정하였다.
‘나는 하나뿐인 저 아우와 함께 복을 누리려고 하였는데, 아우는 도리어 그릇된 생각만을 하는구나.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든 저 나쁜 생각을 버리게 하리라. 만일 아우가 그 과보를 받으면 내게도 그 죄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곧 궁중으로 들어가 여러 시녀에게 명령하였다.
“너희들은 각자 몸을 단정히 꾸미고 저 선용 왕자에게로 가서 함께 즐기도록 해라.”
그런 다음 그는 미리 대신들에게 명령하였다.
“내게 어떤 계획이 있다.
만일 내가 그대들에게,
‘저 선용 왕자를 죽여라.’라고 명령하거든,
그대들은 모두,
‘이레만 기다려 주시면 그때 가서 왕의 명령대로 왕자를 죽이겠습니다.’라고 내게 간청하도록 해라.”
그래서 여러 시녀들은 곧 왕자에게로 가서 함께 즐겁게 놀았다. 얼마 있다가 왕은 몸소 그 아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왜 너는 나의 시녀와 처첩들을 데리고 네 멋대로 즐기느냐?”
그리고 잔뜩 화가 나서 바퀴를 공중에 집어던진 다음 대신들을 불러 명령하였다.
“그대들은 알겠는가? 나는 아직 늙지 않았고, 또 우리의 국경을 쳐들어 오는 외부의 강한 적도 없다. 나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옛날 현인들의 속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즉, ‘대개 사람이 복이 있으면 천하가 조복하지만, 복이 다하고 덕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도 배반한다’는 것이다.
내 눈으로 보건대, 아직 그런 변고는 없다. 그런데 내 아우 선용은 내 시녀와 처첩들을 꾀어서 방자하게도 마음껏 즐기다가 이렇게 일이 탄로나고 말았다. 이러고서야 내 체면이 어찌 서겠는가? 너희들은 왕자를 거리로 데리고 나가서 죽여라.”
신하들은 간청하였다.
“대왕이시여, 저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지금 대왕께서는 아우라고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또 아들도 없어서 뒤를 이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레를 기다려 주시면 대왕의 명령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왕은 말없이 신하들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너그러운 척하며 대신들에게 명령하였다.
“지금 왕자에게 내 복장을 입히고 천관(天冠)을 씌워서 그 위용(威容)이 나와 다르지 않게 한 다음 나의 궁에 들어가서 풍악을 울리며 더불어 즐기게 하라.”
그리고 다시 한 대신에게 명령하였다.
“그대는 지금부터 갑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빼어 들고서 저 선용 왕자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라.
‘왕자님, 아시겠습니까? 지금부터 이레를 기약하고 그때가 될 때까지 마음껏 즐기십시오. 지금 즐기지 않고 죽은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루가 지난 뒤에 그 대신은 다시 왕자에게 가서 말하였다.
“앞으로 엿새가 남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엿새가 되었다. 그 대신은 왕자에게 가서 말하였다.
“왕자님은 아십시오. 엿새가 지나 오직 내일이 오면 죽게 될 것입니다. 부디 마음껏 즐기십시오.”
이레가 되자 왕은 대신을 보내어서 왕자를 불러 물었다.
“어떠하냐? 왕자는 이레 동안 마음껏 즐겼는가?”
아우는 대답하였다.
“대왕께서는 들으십시오. 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왕은 다시 물었다.
“내 옷을 입고 내 궁전에 들어가서 시녀들과 즐기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였는데, 왜 눈 앞에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다.’라고 속이는가?”
아우는 아뢰었다.
“장차 죽을 사람은 명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무슨 경황으로 5락(樂)에 집착하고 옷 따위에 마음을 두겠습니까?”
왕은 말하였다.
“아아, 어리석어서 이제야 깨달았구나. 지금 네 한 몸에는 근심 걱정이 한량없구나. 그러나 그 한 몸도 숨 한 번 돌릴 틈 없이 죽고 만다.
하물며 사문인 저 석씨의 아들이 삼세를 걱정하여서,
‘한 몸이 죽으면 또 한 몸을 받으니, 억백천 동안 몸에 괴로움을 받는다.’라고 함이겠는가?
그는 이런 고통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태웠다.
또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혹 지옥에서 나와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남의 심부름꾼이 되며, 혹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먹고 사는 것이 곤궁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고난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제도할 수 있는 위없는 법을 구하였던 것이니, 만일 그가 정진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여러 겁(劫)의 고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때에 왕자는 앞으로 나아가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생ㆍ노ㆍ병ㆍ사는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이며, 중생들은 근심, 걱정, 괴로움, 번민 속에 쉼없이 유전합니다. 대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도를 닦되 삼가 범행(梵行)을 잘 닦겠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좋을 대로 하여라.”
그는 곧 왕에게 하직하고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도를 닦아서 수다원의 과(果)와 아라한의 과를 차례로 얻었으며, 6신통이 맑게 트여서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두렵고 두려워 즐거움은 적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왕의 법으로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니”란 무슨 뜻인가?
그가 가진 재산을 모두 나라에 몰수당하기도 하고, 머리를 깎이기도 하며, 매를 맞기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하여서 그 고통은 한량이 없는 것이다.
혹은 감옥에 갇혀서 여러 해 동안 나오지 못하고, 온몸을 똘똘 말린 채 날마다 매를 맞으니, 그 상처와 고름과 피의 더러운 냄새 때문에 가까이할 수가 없다. 또한 파리가 빨고 벌레가 물어도 피할 곳이 없고, 대소변 위에 누워 있으면서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않는다. 이것은 다 음탕함의 더러운 행으로 인한 것이다.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니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