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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권
2. 변본사품③
2.5. 18계의 제문분별(諸門分別)[1]
이와 같이 그 밖의 온ㆍ처ㆍ계도 모두 이러한 (5)온ㆍ(12)처ㆍ(18)계에 포섭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 유견(有見)ㆍ무견, 유대(有對)ㆍ무대, 선 등 3성(性) 분별
이제 마땅히 온ㆍ처ㆍ계 세 가지에 있어 유견(有見) 등의 갈래[門]에 관한 존재유형의 차별에 대해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니, ‘계’ 중에 근ㆍ경ㆍ식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온갖 갈래에 관한 존재유형은 이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바야흐로 18계에 근거하여 [유견 등에 대해] 분별하리라. 그렇게 함으로써 ‘온’과 ‘처’에서의 존재유형의 차별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유견(有見)이고, 몇 가지가 무견(無見)이며,
몇 가지가 유대(有對)이고, 몇 가지가 무대(無對)인가?
또한 몇 가지가 선(善)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26)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를테면 색 한 가지가 유견이고
10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며
이 중의 색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이고, 그 밖의 것은 세 가지(선ㆍ불선ㆍ무기)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에서 한 가지가 유견(有見)이니, 이른바 색계가 바로 그것이다.
어째서 이것을 설하여 ‘유견’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 같은 색은 결정코 견(見)과 함께 하기 때문에 ‘유견’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색은 눈[眼]과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반려와 함께하는 이를] ‘유반려(有伴侶)’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둘째, 이 같은 색은 드러내어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유견’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것은 저기에 있다는 식의 차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소연을 드러내는 심과 심소를] ‘유소연(有所緣)’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같은 색은 거울 등에 그 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유견’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리[聲]도 메아리 등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유견이 되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동시에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견의 특성이 이러하다고 설하였으므로 그 밖의 다른 ‘계’가 무견(無見)이라는 뜻은 이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이와 같이 유견과 무견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오로지 색온에 포섭되는 10계가 유대(有對)이다. ‘대’란 바로 장애[礙]의 뜻으로, 이것(10계)들은 그러한 장애성을 갖기 때문에 ‘유대’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경계와 소연과 장애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경계유대(境界有對)란 안 등의 근(根)과 심ㆍ심소 등 경계대상을 갖는 모든 법[有境法]을 말하는데, 이러한 법은 색 등의 경계대상과 만나 화합[和會]하는 것이어서 [그것에] 장애되기 때문에 ‘유대’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27)
소연유대(所緣有對)란 심ㆍ심소법을 말하는데, 이러한 법은 자신의 소연과 만나 화합하는 것이어서 [그것에] 장애되기 때문에 ‘유대’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28)
그렇다면 경계와 소연에는 다시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법(즉 색 등의 경계)에 대해 이것(즉 6근ㆍ6식과 심소)이 공능을 갖게 되면 그것은 이러한 법의 경계가 되었다고 설하니, 마치 어떤 사람이 그러한 것에 대해 뛰어난 공능을 가졌다면 ‘그것은 나의 경계가 되었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심ㆍ심소법의 경우 그러한 법에 집착하여 일어나므로 그러한 법은 심 등에 대해 소연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29) 따라서 만약 어떤 법이 소연유대가 되었다면 결정코 경계유대도 되는 것이니, 만약 심ㆍ심소법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경계대상을 취하는 공능도 결정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경계유대는 될지라도 소연유대는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5색근(色根)이 바로 그것이다. 즉 이것은 상응법(즉 심소법)이 아니어서 소연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안(眼) 등이 자신의 경계나 소연에서 일어날 때 ‘장애를 갖는 것[有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들은 그러한 경계와 소연을 초월한 다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여기서 ‘애(礙)’란 바로 화회(和會,nipāta,낙하의 뜻. 구역은 ‘到’) 즉 ‘만나 화합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 등의 법은 자신의 경계나 자신의 소연과 만나 화합하여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법은 오로지 그러한 것(경계와 소연)에서만 일어날 뿐 그것을 초월하여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장애를 갖는 것’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장애유대(障礙有對)란 적집될 수 있는 색[可集色]을 말하는데, 그러한 색 자체는 다른 [색이 있는] 곳에서는 장애되어 생겨나지 못하니, 이를테면 손과 돌 등이 서로를 장애하는 것과 같다.30) 혹은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다른 색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니, 극미로 이루어진 색[極微色]은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에 장애유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본송)서는 오로지 장애유대에 대해서만 분별하였기 때문에 다만 열 가지라고 말한 것이니, 장애의 뜻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말하자면 극미로 이루어진 열 가지의 유색계(有色界: 즉 5근과 5경)이니, 이것들은 오로지 유색(有色)이기 때문이다. 즉 법계는 유색과 무색에 모두 통하지만, 거기서의 색(즉 무표색)은 한결같이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열 가지만을 ‘유색’이라 이름한 것이니, 바로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열 가지 유색계를 설하여 ‘유대’라고 이름하였니,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다른 계를 설하여 ‘무대’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유색’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무표를 제외한 그 밖의 색온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곧 [시간적] 변이성과 [공간적] 점유성[變礙]을 색이라고 할 때, 이러한 변이성과 점유성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유색’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색이란 이를테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다는 말을 능히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이것(무표색을 제외한 열 가지 색)도 그러한 말의 뜻을 갖기 때문에 ‘유색’이라고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모든 색은 그 자체의 본질[自體]을 갖기 때문에 유색이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무표색을 제외한 열 가지 색법은] 칭설(稱說)하기가 쉽기 때문에 오로지 이러한 색법 자체에 대해서만 ‘유색’이라는 말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대와 무대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 설한 열 가지 유대 중에서 색(色)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無記)이니, 이를 무기라고 말한 것은 선이나 불선으로 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마땅히 찬탄하거나 비방해야 할 법으로서 흑(黑, 즉 불선)이나 백(白, 선)의 품류로 표기하여 설할 수 있는 것을 유기(有記)라 하고, 만약 이러한 두 가지 품류 중 어디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것으로서 그 본질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무기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10계는 선 등의 삼성(三性)과 통하니, 7심계(즉 6식과 의근)와 색계와 성계와 법계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선’이란 말하자면 악을 버리는 것으로, 이는 바로 악에 반대되는 뜻이다. 혹은 또한 선이란 지혜[慧]에 의해 섭수(攝受)되는 것을 말하니, 이를테면 제법으로서 지혜에 의해 섭수되는 것이나, 혹은 지혜를 섭수하는 법을 모두 선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혹은 또한 선이란 바로 길상(吉祥)의 뜻으로, 능히 상서로움을 초래하는 것이니, 마치 길상초(吉祥草)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불선의 뜻이다.
곧 색(色)과 성(聲)의 2계로서 선심에 의해 등기(等起)한 것을 일컬어 선이라 하고, 악심에 의해 등기한 것을 일컬어 불선이라 하며,31) 그 밖의 마음에 의해 등기한 것은 바로 무기이다.
또한 7심계로서 무탐(無貪) 등과 상응한 것을 일컬어 선이라고 하고, 탐 등과 상응한 것을 일컬어 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것을 일컬어 무기라고 한다.
법계에 포섭되는 [선ㆍ불선의] 품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무탐 등의 자성과, [이와] 상응한 것과, [이것에 의해] 등기한 것과, 택멸(擇滅)을 선이라고 이름한다.32)
혹은 탐 등의 자성과, [이와] 상응한 것과, [이것에 의해] 등기한 것을 불선이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2) 3계(界)의 계속(繫屬)관계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33)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계(繫)는 열여덟 가지이고
색계의 계는 열 네 가지이니
향ㆍ미와 두 식(識)을 제외한 것이며
무색계의 계는 뒤의 세 가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繫)’라고 함은 계속(繫屬) 즉 속박된다는 뜻으로, 욕계에 계박(繫縛)되는 것은 18계 모두이다.
색계에 계박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로서, 향경(香境)ㆍ미경(味境)과 함께 비식(鼻識)ㆍ설식(舌識)이 제외된다. 향경과 미경을 제외한 것은, 그것이 단식(段食)의 성질이기 때문으로,34) 단식에 대한 탐욕을 떠날 때 비로소 거기(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식과 설식을 제외한 것은 거기에는 그것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경계가 없이는 어떠한 식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마땅히 촉계 역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식(食)의 존재가 아닌 촉은 거기에 있을 수 있다. 즉 촉계는 그곳에서 식(食)의 작용을 성취하는 일은 없지만 그 밖의 다른 작용은 성취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소의신(즉 5근)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대종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온갖 소조색 역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색계와 동일하게 되거늘 어찌 색계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거기에서 촉은 외적 존재의 작용을 성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궁전이나 의복 등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곳에서는 비록 식(食)에 대한 욕망을 떠났을지라도 ‘촉’은 [‘식’과는 다른] 별도의 작용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향’과 ‘미’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35)
무색계에 계박되는 것에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 있을 뿐이니, 이른바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색계의 염오를 떠나야 그곳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색계에는 열 가지 색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소의와 소연[依緣]이 없기 때문에 5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이 무색계에 계박되는 것이다.
3계의 계(繫)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3) 유루ㆍ무루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의ㆍ법ㆍ의식계는 모두에 통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오로지 유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앞에서 [무색계에 계박되는 것이라고 설한] 의(意)와 법(法)과 의식(意識)의 세 가지는 유루와 무루 모두에 통하니, 이를테면 도제(道諦)와 세 가지 무위를 제외한 그 밖의 ‘의’ 등 세 가지는 모두 유루이며, 도제에 포섭되는 것과 세 가지 무위는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세 가지 모두 무루이다.36)
그리고 오로지 유루와 통하는 것은 나머지 15계로서, 도제와 무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4)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몇 가지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몇 가지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37)
게송으로 말하겠다.
5식(識)에만 심(尋)ㆍ사(伺)가 존재하고
뒤의 셋은 세 가지이며, 그 밖의 것에는 아무 것도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 등의 5식은 유심유사이니, ‘심(尋)’과 ‘사(伺)’와 더불어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5식신이 심ㆍ사와 더불어 항상 함께 상응하는 것은, 5식은 오로지 심ㆍ사가 수반되는 단계[地] 중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38) 즉 욕계와 색계 초정려 중에서 심(心)과, 심ㆍ사를 제외한 심소법은 어떠한 경우라도 심ㆍ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를 ‘뒤의 셋’이라고 말한 것으로, 각기 6근ㆍ6경ㆍ6식 중에 가장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경우와 모두 통한다. 즉 의계와 의식계, 그리고 심ㆍ사를 제외한 상응의 법계(상응법 중 심ㆍ사를 제외한 44심소)로서, 만약 욕계와 초정려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유심유사이고, 정려중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유사이다. 그리고 그 이상(즉 제2정려 이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무사이며, 법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비상응(非相應)의 법과 정려중간의 사(伺)도 역시 이와 같은 [무심무사이다].39) 왜냐하면 그 이상의 단계에는 심ㆍ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상응법이기 때문이며, 거기(중간정려)에는 ‘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 자체는 그 자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심(尋)의 경우 모든 때에 무심유사이니, [‘심’] 자체는 그 자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항상 ‘사’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伺)의 경우, 욕계와 초정려 중에서는 세 품류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으므로 마땅히 네 번째 품류(즉 無伺唯尋)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은 매우 희소하기 때문에 본송 중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40)
그 밖의 나머지 열 가지 색계에는 ‘심’과 ‘사’ 모두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심ㆍ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5식신(識身)의 무분별의 문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5식신이 유심유사라고 한다면 ‘심’은 바로 분별인데, 어떻게 그것을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인정하겠는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5식을 무분별이라고 설한 것은
계탁(計度)과 수념(隨念) 때문으로
그것은 의지(意地)의 산혜(散慧)와
의지의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분별에는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둘째는 계탁분별(計度分別)이며,
셋째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이다.
즉 5식신은 비록 자성분별을 가질지라도 나머지 두 가지 분별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다리가 한 개 밖에 없는 말[馬]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42) 그래서 비록 한 가지 분별만을 가질지라도 무분별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의식(意識)도 오로지 한 가지 종류의 분별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식은 세 가지 분별을 전체적으로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유분별(有分別)이라고 말한다.
즉 자성분별은 그 본질이 오로지 바로 심(尋)일 뿐으로, ‘심’에 대해서는 뒤(제10권)에 심소를 설하면서 응당 마땅히 분별 해석하게 되리라.
그 밖의 두 가지 분별은 순서대로 의지(意地)의 산란된 혜[散慧]와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43) 여기서 ‘산란’이란 선정과 구별되는 말로서, 의식과 상응하는 산란된 ‘혜’를 일컬어 계탁분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선정 중에서는 능히 경계대상을 헤아리고 판단[計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선정 중의 ‘혜’는 소연에 대해 이러이러하다고 능히 헤아리고 판단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선정과 구별하여 ‘산란’이라는 말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정의 상태이든 혹은 산란된 상태이든 의식과 상응하는 모든 염(念)을 일컬어 수념분별이라고 하니, 소연을 명기(明記,기억)하는 작용이 균등하기 때문이다.
5식이 비록 ‘혜’ㆍ‘염’과 상응하는 것일지라도 간택(簡擇,판단)하고 명기하는 작용이 미약하기 때문에 오로지 의식만을 취하여 [유분별이라고 하였지만], 대저 분별이라 함은 추구(推求)의 행상이기 때문에 심(尋)을 설하여 자성분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간택과 명기의 작용 또한 ‘심’에 근거하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44) 분별이라고 하는 말은 ‘혜’와 ‘염’과도 역시 통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작용(추구ㆍ간택ㆍ명기)의 차별이 모두 섭지(攝持)됨으로써 경계대상을 명료하게 나타내어 구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요별(인식)된 대상에 대해서는 간택의 작용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란 말은 상(想)과 통하지 않으며,
아직 인식되지 않은 대상의 경우 능히 새겨 지닐 수 없기 때문에 분별이라는 말은 승해(勝解)와 통하지 않는다.45)
나아가 만약 욕계나 초정려에 있는 경우로서 선정에 들지 않은 상태의 의식은 세 가지 분별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초정려에서 선정에 든 의식이나 그 이상의 산심(散心)에서는 각기 두 가지 분별이 일어나며,46) 상지(上地)의 의식으로서 선정에 든 상태와 5식신에는 각기 한 가지의 분별만이 일어날 뿐이다.47)
이와 같이 유심유사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5) 유소연(有所緣)ㆍ무소연, 유집수(有執受)ㆍ무집수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소연(有所緣)이고, 몇 가지가 무소연(無所緣)인가?
또한 몇 가지가 유집수(有執受)이고, 몇 가지가 무집수(無執受)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의 마음과 법계의 반은
유소연이고, 그 밖의 것은 무소연이며
앞의 여덟 가지 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무집수이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6식과 의계, 그리고 법계에 포섭되는 모든 심소법을 유소연이라고 이름하니, 소연을 갖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이 자식을 갖는 것과 같다. 소연과 소행(所行), 그리고 경계는 명칭의 의미가 다르다.48)
그 밖의 열 가지의 색계와 법처에 포섭되는 불상응법을 무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뜻에 준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실유인 극미의 화집(和集)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 화합(和合)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 여기서 ‘화합’이란 말은 적은 법(少法,즉 개별적인 법)에 별도로 근거한 것이 아니며, 가히 무분별식(無分別識,즉 전5식)에 의해 파악되는 경계와는 관계없이 성취되는 것으로,49) 다수의 법[多法]에 대해 일으키는 단일한 언어적 관념[增語]을 말한다. 즉 언설로서 일어나기 때문에 ‘화합’이라 이름한 것이지만, 5식은 그와 같은 언어적 관념을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화합은 5식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50)
이와 같이 유소연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아홉 가지는 무집수(無執受)이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일곱 가지 유소연(즉 7심계)과 법계의 전부 등 이러한 8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모두 무집수이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한다.
첫째는 모두 한 가지[總集]임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8계와 아울러 성계는 모두 무집수라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갈래임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어떤 다른 논사는 설하기를,
“근을 떠나지 않은 소리도 역시 유집수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밖의 9계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5색근과 색ㆍ향ㆍ미ㆍ촉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두 가지와 통한다는 것인가?
안(眼) 등의 5근으로서 현재세에 머무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며,
과거ㆍ미래세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51)
색ㆍ향ㆍ미ㆍ촉의 경우, 현재세에 머무는 것으로서 5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며,
과거ㆍ미래세에 머물거나 현재세에 머무는 것이면서도 근을 떠난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52)
그렇기 때문에 9계는 각기 두 가지와 통하는 것이다.
유집수의 특성은 무엇인가?
본론(아비달마) 중에 설하기를,
“자기의 신체에 포섭되는 것을 유집수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심ㆍ심소가 집착하여 자기의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즉 심ㆍ심소법이 함께 집지(執持) 포섭하여 의처(依處)로 삼게 되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니, [심ㆍ심소는 그러한 의처에] 손해와 이익을 끼치면서 일어나고, 다시 서로가 서로를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5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색 등은 마땅히 한결같이 무집수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심ㆍ심소법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근(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색 등으로서 만약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소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바로 심 등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과실은 없는 것이다.54)
이와 같이 유집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6) 대종과 소조, 극미 적집(積集)과 비적집 분별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대종성(大種性)이고, 몇 가지가 소조성(所造性)인가?
또한 몇 가지가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고, 몇 가지가 적집되지 않는 것[非積集]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계 중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 색은 소조성이며
법계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열 가지 색은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계는 두 가지와 통하니, 첫째는 대종(大種)이고, 둘째는 소조(所造)로서, 이 두 가지는 앞서 11촉으로 해석한 바와 같다.55)
오로지 대종이 촉계를 모두 포섭하는 것이 아니니, 각각의 『별처경(別處經)』에서 촉처 중에는 소조색도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56)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 색계는 오로지 소조성이니, 이를테면 5색근(色根)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가 그러하다. 그리고 법계 중 일부도 역시 오로지 소조성이다.
이것(법계 중 일부)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표색(無表色)을 말하니, 이는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소조성’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본송에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18계 중의] 어떠한 계(界)도 오로지 대종성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 밖의 7심계와, 무표색을 제외한 법계 일부는 두 가지 종류 모두가 아니라는 것은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이미 성취된 셈이다. 아울러 대종을 떠나 그 밖에 소조색이 별도로 존재하니, 각각의 『별처경(別處經)』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57)
이와 같이 [18계의] 대종성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5근과 5경의 열 가지 유색계(有色界)는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니, 이는 바로 극미를 본질로 하는 것이어서 취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8계는 적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본질이 극미가 아니어서 취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적집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7) 능절(能折)ㆍ소절(所折), 능소(能燒)ㆍ소소(所燒), 능칭(能稱)ㆍ소칭(所稱)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능히 쪼개는 것[能斫]이고, 몇 가지가 쪼개지는 것[所斫]인가?
몇 가지가 능히 태우는 것[能燒]이고, 몇 가지가 태워지는 것[所燒]인가?
몇 가지가 능히 재는 것[能稱]이고, 몇 가지가 재어지는 것[所稱]인가?58)
게송으로 말하겠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界)만이
능히 쪼개는 것이고, 아울러 쪼개지는 것이며
역시 태워지는 것이고, 능히 재는 것이나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쟁론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색ㆍ향ㆍ미ㆍ촉(4계)이 도끼와 장작 등을 성취하므로 이것을 일컬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이라고 한다.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결정적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는 ‘쪼개는 것’ 등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외적인 4계이며, 그 밖의 것은 그런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어지는 것은 모두 4계와 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모든 색취(色聚)는 서로를 핍박하며[相逼] 계속 생기하는 것으로, 다른 조건(이를테면 도끼)이 나누어 잘라 각각의 부분으로 하여금 계속 생기하게 하는 것을 ‘능히 쪼개는 것’ ‘쪼개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체의 [유위법은] 찰나성이기 때문에 이치상으로는 실로 능히 쪼개고 쪼개진다는 뜻이 없다.59)
이와 같은 ‘쪼개진다’는 뜻은 신근 등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온갖 색근(色根)은 다른 조건에 의해 나누어지고 잘라져 두 개가 되면 각각은 상속 생기하지 않게 되니, (4)지(支)가 몸을 떠나게 되면 ‘감관으로서의 기능[根]’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근 등은 또한 역시 ‘능히 쪼개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상(相)이 참으로 청정 미묘하기 때문으로, 마치 보배로운 구슬의 빛과도 같다.60) 이러한 등의 의미에서 [본송에서] ‘오로지’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어지는 것’이 오로지 외적인 4계(색ㆍ향ㆍ미ㆍ촉)에 해당되듯이 ‘태워지는 것[所燒]’과 ‘능히 재는 것[能稱]’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만을 ‘태워지는 것’이라 하고, ‘능히 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등의 색근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그 상이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역시 이 두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계(聲界)는 색 등의 경우처럼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어지더라도] 상속하며 함께 생기하는 것이 아니니, 끊어지는 것[間斷]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계에는 여섯 가지의 뜻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61)
‘능히 태우는 것[能燒]’과 ‘재어지는 것[所稱]’에는 이설(異說)의 쟁론이 있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도 역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적인 4계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오로지 화계(火界)만을 ‘능히 태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재어지는 것’은 오로지 무거움[重, 11촉 중의 하나]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8) 이숙생(異熟生)ㆍ소장양(所長養)ㆍ등류성(等流性)ㆍ유실사(有實事)ㆍ일 찰나(一刹那)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이숙생(異熟生)이고, 몇 가지가 소장양(所長養)이며, 몇 가지가 등류성(等流性)이고, 몇 가지가 유실사(有實事)이며, 몇 가지가 일 찰나(一刹那)인가?62)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물음에 대해 지금 마땅히 전체적으로 대답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5계는 이숙생ㆍ소장양이며
소리[聲]에는 이숙생이 없으며
여덟 가지 무애(無礙)는 등류성이며
역시 또한 이숙생의 존재도 있다.
나머지는 세 가지이고, 실(實)은 법계뿐이며
일 찰나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내적인 5계’란 말하자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계로서, 이는 이숙생과 아울러 소장양이지만 등류성에 대해서는 [논의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동류인(同類因)을 가지면 이는 바로 등류과(等流果)이기 때문에, 비록 안 등의 근이 등류성이라 할지라도 이숙생이나 소장양을 떠나 그 밖의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에 관한 논의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장양을 떠나 이숙생이 존재하며, 이숙생을 떠나 소장양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두 가지를 떠난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으니,63) [서로 차별되는] 다른 갈래를 분별하기 위해 [공통되는] 전체적인 논의를 그만두고 개별적인 사실만을 논의하려는 것이다.
‘숙(熟)’이란 성숙의 뜻으로, 원인을 떠나[離] [그것과는 다른 존재로] 성숙하기 때문에 ‘이숙(異熟)’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숙으로서 생겨났기 때문에 ‘이숙생’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바로 이숙인(異熟因)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이숙생’이라 이름하였다. 즉 중간의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 같이 설하게 된 것으로, 비유하자면 ‘우차(牛車)’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64) 혹은 조작되어진 업이 결과를 획득할 때에 이르게 되면 변이[異]하고 능히 성숙[熟]하기 때문에 ‘이숙’이라 이름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이숙생’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원인상에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고, 결과상에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6촉처(觸處)는 바로 지은 업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65)
음식과 자조(資助,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塗油나 洗浴)와 수면(睡眠)과 등지(等持) 등의 뛰어난 인연에 의해 증익(增益)된 것을 ‘소장양’이라고 이름한다. 즉 음식 등의 인연은 이숙 자체를 포섭하여 보호하는 것일 뿐 능히 증익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별도의 증익함이 있기 때문에 ‘소장양’이라고 이름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이 두 가지 중 장양의 상속이 항상 이숙의 상속을 능히 보호하고 유지시키니, 이는 마치 외곽(外廓)이 내성(內城)을 방호하는 것과 같다.66)
성계에는 이숙생이 없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뜻에 준하여 볼 때 등류성이나 소장양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까닭에서 성계는 이숙생이 아닌 것인가?
자주자주 단절되고서도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숙생의 색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으니, 이숙과는 욕락(欲樂)하는 바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소리는 욕망하는 바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이숙이 아니다.67)
[본송에서 말한] ‘여덟 가지 무애(無礙, 礙性 즉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는 것)’란 7심계와 법계로서, 여기에는 등류성과 이숙생이 존재한다. 즉 이숙생이 아닌 것으로서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생겨난 것을 등류성이라고 하며, 만약 이숙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면 이숙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나머지’란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인 색ㆍ향ㆍ미ㆍ촉을 말하는데, 그것들은 세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숙생이기도 하고, 소장양이기도 하며, 등류성이기도 하다.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다’라고 한 것에서, ‘실’이란 바로 견실(堅實)의 뜻이기 때문에 무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법계에 포섭된다. 그래서 오로지 법계만을 유실사(有實事)라고 이름한 것이다.
나아가 의(意)와 법과 의식을 일컬어 ‘뒤의 세 가지’라고 하였는데, 여섯의 세 가지(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가장 뒤에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러한 3계에만 일 찰나가 존재하니, 말하자면 첫 번째 무루지(無漏智)인 고법인품(苦法忍品)은 등류과가 아니기 때문에 ‘일 찰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바로 현행(現行)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역시 등류과가 아닌 것을 말한 것으로, 여타의 다른 유위법으로서 등류과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첫 번째 무루 5온의 찰나(즉 고법지인)만이 동류인 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그 밖의 유위법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세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비록 선행된 원인(즉 동류인)이 결여되었을지라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68) 그리고 여기서 ‘등무간연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함은 첫 번째 성도(聖道)와 그 품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며, 무량(無量)의 선법을 장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첫 번째 성도와 성상(性相)이 동등하기 때문이며, 이를 획득하기 위해 온갖 가행도(加行道)를 널리 닦았기 때문이다.
즉 바로 이와 같은 고법인(즉 무루혜의 심소)과 상응(相應)하는 마음을 일컬어 의계(意界)ㆍ의식계라고 하였으며, 그 밖의 구기(俱起)하는 법을 일컬어 법계라고 하였다.69)
이와 같이 이숙생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9) 득(得)ㆍ성취(成就) 분별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안계(眼界)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식(眼識)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또한 만약 안식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계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금 마땅히 간략하게 답변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안식계는 단독으로 획득되기도 하고
함께 획득되기도, 그렇지 않는 등의 경우가 있다.70)
논하여 말하겠다.
‘단독으로 획득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혹 안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니, [태생ㆍ난생ㆍ습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점차 안근을 획득할 때와,71) 그리고 무색계에서 몰(歿)하여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72) 혹은 안식으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계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니,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현기(現起)할 때와,73) 그리고 거기서 몰하여 하지(下地)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74)
‘함께 획득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안과 안식의 두 계로서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는 경우를 말하니,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욕계나 범세(梵世,즉 초정려)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75)
‘그렇지 않다’고 함은 두 가지가 모두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등’이라고 함은 아직 설하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실을 포섭한다는 뜻이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안계를 성취하면 안식계도 역시 성취하는가?’ [하는 등의 경우에 대해 말한 것이다].76)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77)
제1구는 말하자면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생기하지 않는 경우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아직 안근을 획득하지 않았거나, 획득하였어도 이미 상실한 경우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안근을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았거나 범세에 태어나거나 혹은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바로 일어날 때가 그러하다.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때가 그러하다.
이와 같이 안계와 색계, 안식계와 색계의 획득ㆍ성취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이치에 따라 그 예(例)에 대해서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뒤의 다섯 종류의 세 가지의 획득과 성취 및 상호관계, 그리고 사기(捨棄)와 불성취에 관해서는 『비바사론』의 방대한 글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지만, 말의 번잡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논술하지 않겠다.
이와 같이 획득과 성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0) 내(內)ㆍ외(外)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내적인 것(內,ādhyātmika)이고, 몇 가지가 외적인 것(外,bāhy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것은 12가지로서, 안계 등이며
색계 등의 6가지를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6근과 6식의 12가지를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며, 외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색 등의 6경을 말한다. 비록 실유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내적인 것’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78)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1) 동분(同分)ㆍ피동분(彼同分) 분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동분(同分,sabhāga)이고, 몇 가지가 피동분(彼同分,tat-sabhāg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다’라고 함은, 어떠한 법계도 오로지 동분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먼저 경(境)의 동분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경이 식에 대해 결정적으로 소연이 될 때 바야흐로 법계도 그러한 의식에 대해 결정코 소연이 되니, 이는 바로 불공법(不共法)이기 때문이다.
곧 식은 그러한 경계에 근거하여 이미 생겨났거나(과거) 생겨나거나(현재) 생겨날(미래) 법이 되는데, 이러한 [3세의] 식의 소연이 되는 경계를 설하여 동분이라고 이름한다.
이렇듯 의식은 능히 일체의 경계를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3세의 경계와 아울러 3세에 제약되지 않는 법[非世법,즉 무위법] 중의 어떠한 법계라도 과거[已]ㆍ현재[正]ㆍ미래[當]에 걸쳐 그것에 대한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두 찰나의 의식은 능히 일체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79)
이에 따라 법계를 항상 동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다’라고 함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17계는 모두 동분이 되기도 하고, 피동분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피동분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동분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안(眼) 등을 설하여 동분 혹은 피동분이라 할 것인가?
바야흐로 동분의 안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색계에 대해 이미(과거) 보았거나 지금(현재) 보고 있거나 당래(미래)에 볼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피동분의 안계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니, 이와 반대되는 것과 불생법(不生法)이 그것이다.80)
안계와 마찬가지로 이ㆍ비ㆍ설ㆍ신계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경계대상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동분이라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계의 동분에도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소연에 대해 이미 요별하였거나 지금 요별하고 있거나 당래에 요별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피동분의 의계에는 오로지 한 가지 종류만이 있을 따름이니, 불생법이 바로 그것이다.81)
색계의 동분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눈에 보인 것으로서 이미 보였거나 지금 보이고 있거나 당래에 보이고서 소멸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동분의 색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이것과 반대되는 것과 불생법이 그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마땅히 각기 자신의 근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을 동분이라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 등의 6식은 생겨난 것과 생겨나지 않은 것에 근거하여 두 가지 분(동분과 피동분)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의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런데 만약 안계가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동분이 되면,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동분이 된다.
반대로 이것이 만약 어떤 한 대상에 대해 피동분이 되면,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피동분이 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의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색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즉 [어떤 하나의 색은 그것을] 보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동분이 되지만, 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피동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안계의 동분과 피동분이 색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설하는 것인가?
많은 유정들은 다 같이 하나의 색을 함께 볼 수 있지만, 한 유정의 눈을 가지고서 두 유정이 보는 일은 없다. 성(聲)의 경우도 색계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것들은 바로 공동의 대상[共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는 내계(內界)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공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82) 그럼에도 세간에서는 가설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향을 냄새 맡고, 다 같이 이러한 미를 맛보며, 다 같이 이러한 촉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은 무엇인가?
‘분(分,bhāga)’이란 교섭(交涉)을 말한다. 즉 [근ㆍ경ㆍ식이] 다 같이 이러한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이라고 이름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교섭이라 한 것인가?
근ㆍ경ㆍ식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교섭하는 것을 말하니, 바로 전전(展轉)하며 서로 수순(隨順)한다는 뜻이다.
혹은 또한 ‘분’이란 바로 자신의 작용을 서로 교섭하는 것을 말하니, 그래서 앞서 “만약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면, 이를 동분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혹은 또한 ‘분’이란 바로 생겨난 촉[所生觸]을 말한다.83) 즉 [촉은] 근ㆍ경ㆍ식에 근거하고 그것이 교섭하여 낳아지기 때문에, 다 같이[同] 이와 같은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고 이름하였다. 곧 동분이란 다 같이 작용을 가지며, 다 같이 촉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이름하니, 동분은 아니지만 그러한[彼]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한 것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이것(피동분)과 그것(동분)은 동일하게 보는 것[同見]이며, 동등한 상[等相]이며, 동일한 처(處)이며, 동일한 계(界)이며, 서로의 근거[因]가 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相屬]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낳기[相引] 때문에 종류와 ‘분’이 동일하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