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에 가을이 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 플레이스는 원주시 반계리 은행나무이다. 반계초등학교에서 북쪽 마을로 올라서면 웅장한 은행나무 숲이 보인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은행나무 5-6주가 모여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실제로는 한그루의 은행나무가 부피 성장을 해서 우람하고 장엄하게 숲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선 이 은행나무가 자리한 곳이 넓은 평지이고 주위에 다른 장애물이 없어 편안하게 성장해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이곳 반계리 은행나무에서 동북쪽 9.2km에는 고려 태조가 심혈을 기울인 흥법사터가 있다. 섬강을 따라서 남한강까지 오는 길목 중간에 쉼터 같은 곳이 반계리이다. 개경으로 가는 육로로 볼 때도 흥법사와 반계리은행나무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은 천년전의 고승은 누구일까? 이 지역을 자주 지나다닌 스님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사람은 바로 충담이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주인공인 진공대사 충담(忠湛, 869~940)은 신라 경명왕 때 활동했던 심희(審希)의 제자이다. 당나라 유학후 918년(태조 원년)에 귀국하였는데, 이후 921년(태조 4)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사(王師)에 임명되었다.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년(태조 5)에서 924년( 태조 7) 사이의 시기로 여겨진다. 그는 흥법사에 머물면서 원주 지역을 교화하는데 노력하였다. 충담은 940년(태조 23) 7월에 흥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담 진공대사는 원주에서 개경을 오가는 강물 교통을 자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9.2km 떨어진 반계리는 흥법사와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역사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이 땅의 많은 고승이 지팡이 설화를 남기며 사찰과 마을에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에 걸쳐 남아있다. 진공스님 역시 반계리를 자주 지나면서 마을 주민을 위하여 기념으로 은행나무를 심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고려 태조의 국사이자 흥법사 주지 충담이 심은 은행나무를 어느 누가 해칠 수 있겠는가? 천년이 넘은 반계리 은행나무는 많은 세월과 전란을 거쳐오면서도 그 웅장한 자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한국 최고의 은행나무 반열에 올라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워낙 알려진 용문사 경내에 있기에 그동안 최고의 은행나무로 인식되어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마을 근처 평지에 외롭게 서 있었던 까닭이다. 은행잎이 물드는 10월말부터 11월초 까지 전국의 사진 작가들이 몰려든다. 원주시에서 근래 주차장과 화장실을 만드는 등 방문객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덕분에 명소에 맞는 쾌적한 환경에서 은행나무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고승의 지팡이설화 등으로 출발한 노거수는 시간이 지나면 나무속의 큰뱀 이야기 등이 보태진다. 이런 전설은 나무를 지키는 안전장치이다. 이런 이야기 덕분에 함부러 해치는 사람이 없어 나무를 온전히 지킨다. 대만,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권 문화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지팡이 설화도 같은 맥락이다. 유명한 사람이 심은 나무이기에 잘 보존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와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사회적, 국민적 합의와 같은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은행나무는 양평 용문사에 있지만, 최근에는 반계리 은행나무가 더 많은 관심을 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직적 외형이지만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평적이고 나무의 전체 모습이 매우 웅장하고 장엄하다. 평지에 있어 어느 방향에서나 잘 관찰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원주시의 적극적인 지역 명소 발굴 덕분으로 천년 은행나무의 가치가 잘 살아나고 잇어 매우 기쁘다.
(충담 진공대사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사찰의 중심 조형물에 해당하는 석탑의 뒤편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탑비의 지대석은 방형이며 귀부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귀부는 다섯 개의 굵고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다. 선이 굵게 조각된 용두는 신체에 비해 다소 크게 만들어졌으며 벌리고 있는 입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코에서는 서기가 뻗어 나와 귀 방향으로 흐른다. 용두의 머리 정상 부분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져 있어 별도의 장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이 조식 되어 있다. 용두 양측의 귀갑문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귀갑의 중앙부에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고 비좌의 측면과 정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하부에는 비신 홈이 있으며 비신 홈 주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평면과 정면은 방형의 형태이나 운룡문의 자유로운 묘사로 인해 굴곡이 많다. 이수에는 총 아홉 마리의 용이 율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수 중앙에는 제액을 만들고 ‘진공대사’라 음각하였다. 제액 주변은 깊이 있는 운문으로 조각하였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작성하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탑비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탑비는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937년(태조 20)부터 적극적으로 승려의 탑비를 건립하였다. 태조의 재위 기간에 비문이 작성되거나 탑비가 건립된 사례는 대략 11건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최언위가 작성하였다. 하지만 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친제(親製)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신라 불교의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것을 태조가 보여주기 위해 진공대사탑비의 비문을 직접 작성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태조 왕건이 진공대사탑비를 친제한 이유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조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도를 갖고 있다. 태조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장소에 개태사를 창건하게 하고 940년 낙성법회 때 「개태사화엄법회소」를 직접 작성하였다. 태조가 개태사를 창건하고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세운 이유는 후백제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조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원의 신라 유민들에게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직접 선언하기 위해서 진공대사 탑비의 비문을 친제하고 역동성과 활력이 넘치는 진공대사탑비를 흥법사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 왕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작성한 탑비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명확하기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흥법사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신이 직접 작성한 탑비를 건립하였다. 흥법사는 강원도나 경상도 지역의 옛 신라 유민들이 육로를 통해 개경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되는 병목과 같은 교통의 요지이다. 특히 일반적인 탑비의 위치와 다르게 진공대사탑비가 사찰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흥법사를 방문하는 모든 행인이 이 탑비를 볼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진공대사탑비는 진공대사 충담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비인 동시에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조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