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무성품(成無性品)
3자성(自性)을 알아야 하나니
처음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이요
다음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요
최후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네.
3무성(無性)이 3자성(自性)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알아야 하나니
상무성(相無性)과 생무성(生無性)과
승의무성(勝義無性)으로 말미암네.
5사(事)에 해당한바 아님이니
이 밖에 또 있는 것 없네.
이름[名]이 뜻[義]에서 일어나며
둘이 번갈아 서로 객체가 되네.
이름 전에는 감각이 없으며
많은 이름과 고정함 아니며
뜻 있음ㆍ뜻 없음에서 일어남이
옳지 않은 뜻이 성립되네.
취하고 이름[名]을 세우기 때문이며
그 외는 곧 능히 취하지 못한다.
중생의 삿된 집착은
불어남과 같기에 뒤바뀜이 되네.
훈습으로 말미암아 의타(依他)가 생기고
그에 의하여 뒤바뀜이 생기고
그와 같이 서로 인연이 되어
이리저리 몸이 생기게 되네.
자성(自性)과 차별(差別)과
각오(覺悟) 있음과 수면(隨眠)과
가행(加行)과 명변계(名遍計)인데
또 다섯 가지 있다고 알아야 하리.
분별(分別)에는 여덟 가지가 있어서
능히 3사(事)를 내나니
분별의 자체가 3계(界)의
마음과 마음 법이라고 알아야 하리.
두 속박에 묶인 것을 말미암아
둘의 자성(自性)을 굳게 집착하나니
그러므로 두 속박을 해탈한다면
바로 얻음 없고 소견 없으리라.
가유(假有)는 의지한바 원인이 있네.
만일 다르면 두 가지가 무너지리니
잡염(雜染)은 얻을 수가 있으므로
의타기(依他起)가 있다고 알아야 하리.
모양과 거칠고 무거움으로 자체가 되어
그것이 번갈아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고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김의 체성 없다고 말하네.
결정적으로 있음과 없음 아니며
온갖 종류를 모두 긍정함이
가(假)와 실(實), 두 성질에 통하는데
세속에 의하여 있다고 말함이네.
아(我)와 법(法)의 작용 말함을
모두 세속이 된다고 이름하며
승의(勝義) 진리는 일곱 가지
진여(眞如)를 말함이라고 알아야 하리
원성실(圓成實)의 자성(自性)은
둘의 가장 수승한 지(智)의 내용으로
온갖 실없는 이론 없으며
하나와 다른 성질 멀리 떠났네.
청정함 그를 반연하는 바이며
항상함과 변함과 다름없으며
착함의 성질과 즐거움의 성질인
온갖 것을 모두 성취하였네.
원성실(圓成實)인 승의가 무성(無性)임은
실없는 이론과 아(我)가 없기 때문이다.
의타기(依他起)는 저 모양 없거니와
이 승의(勝義)야말로 무성(無性)이네.
3상(相)에 의해 5상(相)을
내세움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저것은 그 적응하는 대로
따로 따로 5업(業)이 있네.
법집(法執) 때문에 어리석은 이가
저 중생집(衆生執)을 일으키나니
저것을 제거하고 법성(法性)을 깨달으면
법성을 깨달으므로 아집(我執)이 끊어지네.
의타기는 처음 자성(自性)에 집착하므로
훈습 일으키면 잡염을 이루고
집착 없는 원성실(圓成實)에서
훈습 일으키면 청정을 이루네.
잡염(雜染)은 유루(有漏)인 성질이요
청정(淸淨)은 곧 무루(無漏)이니
그는 곧 전의(轉依)의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두 가지라고 알아야 하네.
진실(眞實)과 자체이며
고요함[寂靜]과 공덕(功德)이니
온갖 불가사의(不可思議)는
네 가지 도리로 말미암는다고 알아야 하리.
성문(聲聞)에 두 가지가 있으니
열반에 나아감과 보리에 나아감인데
그는 변화(變化)하는 몸에 의하여
위없는 정각(正覺)에 나아가네.
모든 성문의 전의(轉依)는
싫어하고 등져 닦음으로 얻음이요
보살의 전의는 방편수(方便修)와
둘 없는 지혜에 의지함이네.
생김과 사라짐에 머무르지 않기에
부처님 지혜만이 위가 없나니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며
불가사의이고 둘이 없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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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현양성교론송
현양성교론송_7. 성무성품(成無性品)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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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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