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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석보리심론 제3권
7. 사마디(2)
[선정]
다음으로 이 중에서 차례로 저 모든 선정을 닦아야 한다.
만일 애욕을 여의고 희(喜)와 낙(樂)을 얻는다면, 내심(內心)이 청정하여 올바른 상응에 머물러서 심(尋)과 사(伺)가 있으니, 이것을 초선정(初禪定)이라 한다.
또한 다시 이 가운데 심(尋)은 없으나 사(伺)만이 있는 것을 중간선(中間禪)이라 한다.
초선의 경지에서 애욕을 이미 여의었다면 희와 낙을 얻고 내심이 청정하여 올바른 상응에 머무른다. 이것이 이선정(二禪定)이다.
이선의 경지에서 애착을 이미 여의었다면 즐거움[樂]과 평등함[捨]과 바로 앎[正知]을 얻어 올바른 상응에 머무른다. 이것이 삼선정(三禪定)이다.
삼선의 경지에서 애착을 이미 여의었다면 평등함과 기억함[念]이 상응한다. 이것이 사선정(四禪定)이다.
모든 무색정(無色定) 등의 행상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반연된 모습을 응하는 대로 분별해서 반연 속에서도 마음을 견고히 하게 한다. 이치대로 짓는 바를 지혜로써 관찰하면 지혜의 광명이 생겨나서 무명의 종자를 깨뜨리고 궁극적으로 단절할 수 있어서 올바르게 상응한다.
이와 다른 것은 모두 외도들이 닦는 것으로 바른 삼마지가 아니라서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올바르게 삼마지를 닦을 때 만약에 나라는 생각[我想]이 생기면 곧 되돌아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
이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을 그친 물[止水]과 같이 머물러서 삼마지에 들어가 관행(觀行)과 상응해야 한다.
『능가경』에서 설한 것을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바른 지혜의 관행[正慧觀行]은 오직 마음만이 고요히 머물러서 밖으로 분별이 없다.
만일 진여를 반연한 것에 머무르면 이 마음은 지나가야 하고,
마음이 만약 지나간 후면 그것에 상대할 장애가 없으며,
응당 지나가서 상대할 장애가 없는 가운데 만일 이 대승관(大乘觀)에 상응하여 머무르면, 그것은 깨달음을 발하지 않는 가장 수승한 적정이니,
곧 수승한 무아의 지혜이며 상대할 장애가 없는 관[無對礙觀]이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여실하게 관찰해서 마음 밖에 반드시 색법의 분별이 없으면, 이것이 곧 최상으로 상응하는 수승한 행이라는 것이다.
[식과 색]
만일 그렇다면 식(識)은 색과 어떤 다른 것이 있는가?
혹 다르지 않다면 식 또한 마땅히 상대할 장애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마치 꿈과 같은 상태[分位]에서는 보이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식 밖을 여실하게 자세히 관찰하면 극미량의 색이라도 취할 수 없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오직 식[唯識]뿐임이 성립하며 다시 그 밖에 일체의 뜻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마음을 고요히 머물면 밖으로 분별이 없는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는 중에 색법을 여의었기 때문에 얻는 바의 모습[相]이 있다. 그리고 얻게 되는 것은 필경 얻는 바가 없다.
[색과 무색]
그러므로 모든 색법에서 마땅히 무색(無色)을 관해야 한다.
저 오직 마음뿐이라면 실로 능히 취하는 것[能取]도 없고 또한 취해지는 것[所取]도 없으니, 이러한 두 가지 취하는 성품은 실로 얻을 수 없다.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곧 마음은 둘이 없고, 이와 같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 또한 두 모습이 없다.
진여의 소연(所緣) 속에서 이 마음은 또한 지나가며, 그 취한 모습[所取相] 또한 지나가서 둘은 상대할 장애가 없다.
이 둘이 없는 지혜 중에서 여실한 뜻[如實義]에 머무르면, 오직 마음뿐이라서 지나가고 나면 둘은 상대할 장애가 없으니, 이 지혜는 그 중에서 또한 마땅히 여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他性) 중 모든 유(有)의 생겨나는 성품이라도 얻을 수 없고, 응하는 대로 자세히 관찰하면 모든 중생의 성품 또한 화합하지 않는다.
혹 취하든 혹 버리든 둘은 참된 성품이 아니므로 모두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 사물의 성품은 모든 유(有)의 취착이다.
둘이 없는 지혜 속에서 모두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
상대할 장애가 없는 둘 없는 지혜 속에서 이와 같이 머문다면, 곧 일체의 법에 자성이 있지 않음을 여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능히 가장 높고 참된 성품에 들어가는 것이며, 분별이 없는 삼마지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 만일 상대할 장애가 없는 둘 없는 지혜 가운데에 상응하여 머무른다면, 이것은 곧 가장 높고 참된 성품 가운데에 머무르는 것이며, 이것이 대승의 안목[大乘見]이다.
이와 같이 또한 가장 높고 참된 성품을 보는 것이니, 가장 높고 참된 성품을 보기 때문에 곧 일체의 법에서 지혜의 눈으로 (空)을 관하고 지혜의 광명 가운데에서 모두를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경에서 설하기를,
“어떻게 승의제(勝義諦)를 보는가? 일체의 법은 무견(無見)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말한 바 무견이란 승의락(勝義樂)의 진실한 무견이지 세간의 맹인이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는 같지 않다. 그들은 반연(緣)이 빠졌기 때문에, 혹은 뜻을 짓지 않기 때문에 모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유(有)의 성품인 전도(顚倒)된 종자라서 모두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마치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나올 때에 되돌아서 다시 유(有)의 성품인 취착(取着)과 탐욕 등의 근본적인 번뇌더미들이 생기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유의 성품인 취착과 탐욕 등의 근본번뇌의 행상은 『성이제경(聖二諦經)』 등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한다면 분별이 없는 총지법문(總持法聞)에 들어가서 분별없는 법 가운데 색 등의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결정적인 지혜로 무색 가운데서 얻을 것이 없음[無所得]과 작의가 없음[無作意]을 관하는 것이 승의락이니, 무상정 등으로 모든 색들의 취착법 속에서 작의(作意)하여 여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앞에서 설한 것처럼 모든 색 등에서 작의하여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만약에 바른 지혜가 없다면 곧 의혹의 종자를 능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에 불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삿됨을 조복시켜서 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히 사념의 한 법을 여읠 수 있겠는가?
[지혜의 광명]
이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사마타의 모든 소연(所緣) 중에서 마음이 견고하게 머물러 이치대로 짓고 지혜로써 자세히 관찰하면, 지혜의 광명이 생겨나면서 밝음은 드러나고 어둠은 제거되며 지혜가 생하고 장애가 멸한다.
마치 사람의 두 눈이 양(量)에 따라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든 분위(分位)에서 밝게 비추는 것이 차이가 없으니, 지혜의 광명이 나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광명 속에서는 어둠의 성품이 있지 않다. 밝음과 어두움의 두 법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삼마지 중에서 어둠의 성품을 여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심일경상(心一境相)에 머물겠는가?
그러므로 만약에 삼마희다(三摩呬多) 중에서 여실하게 깨달아 알면, 능히 한결같이 바른 지혜에 수순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설한 것은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무색의 모습을 관하다]
다시 다음으로 삼마희다 속에서 마땅히 지혜로 모든 무색의 모습[無色相]을 관하면, 일체의 법에서 다 얻을 것이 없다.
저 온갖 상응하는 분위(分位)의 모습 중에는 나아갈 바도 없고 깨달음을 발할 것도 없다.
자기에서든 남에게서든 다 성품이 없음을 보면, 성품이 있다고 분별하는 희론의 모습 등 일체가 쉬어 멸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 모습 없는 성품[無相性]을 관하는 가운데서 상응함을 얻는다.
마음이 있는 분별[有心分別]은 모두 세울 수 없는지라 저 성품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혹 성품이 있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견해는 마땅히 그쳐야 한다.
이와 같이 그친 후에 만일 성품이 없다는 분별로 바꾼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설령 성품 있음이 삼시(三時)에 상응한다 하더라도 혜안(慧眼)으로 모습 없음과 얻을 것이 없음[無相無得]을 관한다.
또 어떻게 삿됨을 그치는가?
여실한 뜻[如實義]이란 성품이 있음과 성품이 없음을 마땅히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동일한 성품과 다른 성품 또한 분별할 수 없다.
이 가운데에서 만일 성품과 성품 없음의 두 분별을 여읜다면, 능히 모든 분별이 공(空)임을 비추어 통달할 것이라서 저 능히 비춤[能照]과 비추어지는 것[所照]의 성품 또한 있지 않으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분별 없는 상응을 얻는다.
이 중에 이와 같은 상응에 머무른다면, 곧 일체의 분별은 모두 능히 끊어져 멸할 것이다.
모든 번뇌의 장애와 지혜에 대한 장애도 또한 능히 끊어지는데, 저 번뇌장의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성품 중에서 성품 등 전도된 근본이 모두 제거된다.
[번뇌를 조복하다]
『성이제경(聖二諦經)』 등에서 설하였다.
“이와 같은 상응의 행 속에서 일체의 성품 등의 분별이 끊어진 후에 성품 등의 전도(顚倒)가 두루 다하여 무명의 자성과 번뇌장의 근본이 즉시 끊어지며, 그 근본이 끊어진 후에는 모든 번뇌의 장애도 다 능히 끊을 수 있다.”
또한 『성이제경』에서 설하였다.
“묘길상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능히 번뇌를 조복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번뇌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묘길상보살이 말하였다.
‘승의제 중에서는 필경 생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법의 생하지 않는 성품 가운데에서 세속의 모든 것은 실답지 않은 전도이다. 마땅히 일체의 성품 등에 일으킨 전도된 사유분별을 그쳐 쉬어야 한다.
만약에 저 사유분별을 그쳐 쉬지 않으면, 곧 아공상(我共相:我로 비롯하는 공상)이 있게 되는데, 아공상이 있으면 곧 모든 견해가 일어나 성립된다.
만약에 견해가 일어나 성립되면 곧 번뇌가 굴러간다.
만약 천자(天子)가 능히 승의제 중에서 일체의 법이 필경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곧 승의제의 열 가지 종류의 전도 없음을 갖추게 된다.
만일에 승의제 중에서 전도가 없으면 곧 분별이 없게 되고, 분별이 없으면 소멸의 상응[滅相應]을 얻게 되고, 소멸이 상응하면 아공상은 곧 얻을 수가 없고, 아공상이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저 견해들은 능히 일어나 성립될 수 없으며, 나아가 승의제 중에 열반의 견해 또한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으므로 무생(無生)의 행(行) 중에서 일체의 번뇌가 필경 조복된다. 천자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번뇌는 승의제의 장애 없는 지혜[無礙智] 중에서는 필경 공(空)이며, 필경 모습이 없으며[無相], 필경 성품이 없다[無性].
이와 같이 아는 자가 번뇌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천자여, 비유하자면 독사가 주술로 해로움을 입는 것처럼 저 번뇌의 종자 또한 마찬가지다.’
천자가 또한 물었다.
‘무엇이 번뇌의 종자입니까?’
묘길상이 천자에게 말하였다.
‘승의제의 필경 생함이 없는 성품 중에서 만약 일체의 법에 분별이 일어날 때라면, 이것이 곧 모든 번뇌의 종자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성품 등의 전도가 일어나며, 전도 중에서는 능히 비추어 통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에 끊는 법[所斷法] 중에서 일체의 전도를 모두 능히 끊는다면, 모든 지혜의 장애는 능히 바르게 결정되어서 다 제거되어 버린다. 지혜의 장애가 끊어지고 나면 상속의 성품은 없어진다.
비유하자면 햇빛이 비치면 구름들의 가림이 사라지면서 모든 곳을 밝게 비추어 장애가 없는 것처럼 저 지혜의 광명도 청정하고 밝게 비추는 것이다.
색이든 마음이든 일체의 자성도 또한 이와 같다.
모든 사물의 참된 성품은 결정코 상속이 없는 성품 중에서 상주하니, 진실하게 일체 사물의 성품의 여실한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사물의 성품을 어떻게 말로써 설하여 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승의(勝義)와 세속제(世俗諦) 가운데에서 여여하게 설한 바이니, 일체의 색상(色相)과 모든 사물의 성품을 여실하게 깨달아 안 후에 곧 일체지(一切智)를 얻는다.
이와 같이 설한 바의 장애를 끊는 뜻은 일체지의 가장 높고 수승한 도를 증득하는 것이니, 그것은 성문 등의 도가 아니다.
성문 등의 도로는 모든 전도를 능히 다 제거할 수 없고, 또한 다시 바르게 두 가지 장애를 끊을 수 없다.’”
[성문]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저 성문인은 따로 다른 원인을 일으켜서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있다.
그는 법을 보고서 열반을 취하여 스스로 부처를 얻었다고 하지만 능히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
대혜여, 이것은 해탈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성문인은 자신의 지혜로 증득한 것이 아직 참된 출리(出離:미망의 세계에서 벗어 나옴)가 아닌데도 출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다른 견해가 구르기 때문에 그가 지은 것은 이것과 상응하지 않으며 그가 행한 도는 참된 해탈이 아니다.
세존께서는 단지 일승(一乘)의 법을 설하셨을 뿐 성문 등의 도는 설하지 않았다.
저 성문인은 단지 온(蘊) 속에서 무아를 관찰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은 인무아(人無我)이다.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마땅히 삼계의 일체가 오직 식(識)뿐임을 관해야 한다.
만약에 식 밖에 어떤 뜻이 무아를 얻는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은 곧 둘이 없는 지혜의 무아 속에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성품[他性]으로써 들어갔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른 성품으로 들어갔다면, 그것은 곧 오직 식뿐인 성품[唯識性]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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