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본업경 상권
3. 현성학관품[5]
5) 십관의 마음을 관하는 법
다시 다음에 십관(十觀)의 마음을 관하는 법이란,
[중도제일의제의 지혜에 머무르는 것]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의 지혜에 머무나니,
이른바 스무 가지의 환희심과 십무진(十無盡)의 서원을 가지고 법신(法身)으로 나 투어 시방세계의 불국토에 들어가 오신통(五神通)을 짓고 여환삼매(如幻三昧)에 들어가 불화(佛化)의 무량공덕을 지어 나타내면서도 삼계 범부의 시과(時果)를 받지 않느니라.
항상 일승위(一乘位)와 일심의 네 가지 진리[四諦]인 집(集)ㆍ고(苦)ㆍ도(道)ㆍ멸(滅)에 들어가 두 가지 법신으로 변화하여 바뀌는 것을 받아들여 수행하고 삼관(三觀)이 현전케 하고, 항상 그 마음을 닦아 백법명문(百法明門)에 들어가느니라.
이른바 십신(十信)의 일신(一信)에 열 가지가 있기 때문에 백법명문이며, 열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필경에는 번뇌를 받지 않는다.
마음 마음마다 적멸하여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금강해장법보]
불자여, 둘째는 금강해장법보(金剛海藏法寶)이니,
이른바 스스로 십선(十善)을 행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십선을 행하게 하며, 십선을 행하는 자를 찬탄하고 십선법을 찬탄하고 일천 개의 불국토를 나타내어 일체 중생을 교화하나니, 무상(無相)함을 달관하여 모두 성취했기 때문이니라.
[여환삼매에 드는 것]
불자여, 셋째는 여환삼매에 드는 것이니,
이른바 십이문선(十二門禪)이니라. 처음에는 각(覺)ㆍ관(觀)ㆍ희(喜)ㆍ낙(樂)ㆍ일심(一心)의 오지(五支)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默然心)을 정체(定體)로 하느니라.
희(喜)ㆍ낙(樂)ㆍ기(倚)ㆍ일심(一心)의 사지(四支)를 인이라 하고 다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定體)로 하느니라.
낙(樂)ㆍ호(護)ㆍ염(念)ㆍ지(智)ㆍ일심(一心)의 오지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불고(不苦)ㆍ불락(不樂)ㆍ호념(護念)ㆍ일심(一心)의 사지를 인하는데,
이 인(因)은 방편이라 이름하고 다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선(禪)은 지림(支林)이라 하고, 정(定)은 검섭(撿攝)이라 하는데,
겁을 지나도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하여 정이라고 하느니라.
사공정(四空定)과 함께 오지(五支)가 있는데, 체와 용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니, 방편도(方便道)도 마찬가지이니라.
지(支)라고 하는 것은, 상(想)ㆍ호(護)ㆍ정(正)ㆍ관(觀)ㆍ일심(一心)의 오지(五支)를 인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묵연심을 정체로 하느니라.
정(定)에서 사무량심을 내는 것을 사무량정(四無量定)이라고 하느니라.
성인은 범부의 법과 같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제력으로써 다시 이 법을 지나 무량정에 들어가나니, 백천불토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법보장을 행하는 것]
불자여, 넷째는 널리 법보장(法寶藏)을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신수심법(身受心法)과 정진(正進)과 여의족(如意足)ㆍ근(根)ㆍ역(力)ㆍ팔정도(八正道)ㆍ칠각지(七覺支)이니, 이것이 보살의 대행(大行)이니라.
억(億)의 법신을 나타내어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법계지관에 들어가는 것]
불자여, 다섯째는 법계지관(法界智觀)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른바 십육제(十六諦)이니라.
그것은 유제(有諦)ㆍ무제(無諦)ㆍ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ㆍ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ㆍ상제(相諦)ㆍ차별제(差別諦)ㆍ시성제(視成諦)ㆍ설제(說諦)ㆍ사제(事諦)ㆍ생기제(生起諦)ㆍ진무생제(盡無生諦)ㆍ입도제(入道諦)ㆍ여래지제(如來智諦)이니라.
오명론(五明論:內明ㆍ因明ㆍ聲明ㆍ醫方明ㆍ工巧明)과 일체법이 모두 일념의 마음속에 있어서 일시에 행하나니, 무량신(無量身)이 일체 불토를 나 투어 부처님의 법화(法化)를 받기 때문이니라.
[열 가지의 12인연]
불자여, 여섯째는 유법(有法)의 인연에 도달하기 때문에 지혜를 일으키나니,
이른바 열 가지의 십이인연이니라.
열 가지로 비추어 보면,
첫째는 아견(我見)의 십이인연, 둘째는 심위(心爲)의 십이인연, 셋째는 무명의 십이인연, 넷째는 상연유(相緣由)의 십이인연, 다섯째는 조성(助成)의 십이인연, 여섯째는 삼업의 십이인연, 일곱째는 삼세의 십이인연, 여덟째는 삼고(三苦)의 십이인연, 아홉째는 성공(性空)의 십이인연, 열째는 박생(縛生)의 십이인연이니라.
역(逆)과 순(順)으로 관하기 때문이며, 무량신을 나 투어 일체불토에 들어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라.
[무장무애지]
불자여, 일곱째는 과보를 다하는 무장무애지(無障無礙智)이니,
이른바 삼공(三空)의 지혜로써 삼계의 이습(二習)을 관하고 색심(色心)의 과보를 멸하여 남음이 없느니라.
일체행의 공덕(功德)ㆍ공용(功用)ㆍ조작(造作)이 이미 끝나고,
일체의 변통(變通)과 소위소작(所爲所作)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不一不二] 수행을 만족하여 계발하지 않음이 없고,
일체 공덕행의 공용을 개발하여 나아가 상지(上地)의 일체 공덕행까지 이미 다 닦고, 공용을 개발하여 또 일체 행의 근본을 모두 다 구족하느니라.
십도(十度)를 근본으로 삼나니, 그것은 시(施)ㆍ계(戒)ㆍ인(忍)ㆍ진(進)ㆍ정(定)ㆍ혜(慧)ㆍ원(願)ㆍ방편(方便)ㆍ통력(通力)ㆍ무상혜(無相慧)이니라.
십도행법(十度行法)의 공용이 이미 끝나고 함이 없고 지음이 없는[無爲無作] 법류(法流)의 물속에서 마음 마음이 적멸하나니,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에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니라.
[부사의무공용관]
불자여, 여덟째는 부사의무공용관(不思議無功用觀)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의 대혜(大慧)와 방편의 대용(大用)이니라. 색습(色習)이 없고 무명도 또한 다하여 백만 겁의 일[事]과 무량한 불토의 일이 이미 일념의 마음에서 일시에 행해지느니라.
부처님과 같은 모습이나, 일체 중생의 형상을 나타내고 일념의 마음속에서 일시에 다 행하나니, 공용이 없기 때문이니라.
[법제지에 들어가는 것]
불자여, 아홉째는 법제지(法際智)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사십변재(四十辯才)로 일체 공덕의 행을 다 성취하고 심습(心習)이 이미 멸하고 무명도 또한 없어지느니라. 일체 불장(佛藏)과 일체 변통장(變通藏)은 일심 속에서 이미 일시에 행해지면서 무량대천 세계 가운데서 부처 모양을 짓고 중생의 모양을 짓나니, 무량 중생을 교화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무애지관]
불자여, 열째는 무애지관(無碍智觀)이니, 이른바 무량한 법의 비[法雲雨]를 뿌려서 일체 중생에 미치고, 이습(二習)의 무명이 이미 다 멸하여 대직위(大職位)를 받느니라. 신통 변화가 무량함은 갖추어 말할 수 없이 부처님과 같이 나타내니, 무상(無相)의 용(用)이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이와 같이 일체 현인이 함께 이 문에 들어와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