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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집경 제3권
[모든 선근이 뛰어난 묘한 과보를 안다(3)]
[10일체처에 들어감]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모두에 들어감인가?
땅[地]에 모두 들어가고, 물[水]에 모두 들어가며, 불[火]에 모두 들어가고, 바람[風]에 모두 들어가며, 허공(虛空)에 모두 들어가고, 푸른빛[靑]에 모두 들어가며, 누런빛[黃]에 모두 들어가고, 붉은빛[赤]에 모두 들어가며, 흰빛[白]에 모두 들어가고, 식(識)에 모두 들어가는 것을 말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열 가지에 모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 보살이 만약 일체계(一切界)로써 일계(一界)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계가 일계에 들어가는데, 지계(地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계가 일계에 들어가는데, 수계(水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계가 일계에 들어가는데, 화계(火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계가 일계에 들어가는데, 풍계(風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계가 일계에 들어가는데 허공계(虛空界)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푸른빛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누런빛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붉은빛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흰빛에 들어감을 말하느니라.
만약 일체계에 들어가는 것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식(識)에 들어감을 말하느니라.
만약 모든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청ㆍ황ㆍ적ㆍ백ㆍ식으로써 일계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계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까닭으로일체에 들어가고자 하면 하나에 들어간다고 이름하느니라.
하나에 들어가고자 하면 곧 일체에 들어감을 이루니,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에 들어감이라고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일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10자재]
선남자여, 무엇이 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자재(自在)인가?
수명이 자재함ㆍ마음이 자재함ㆍ물질에 자재[物自在]함ㆍ업에 자재[業自在]함ㆍ태어남에 자재[生自在]함ㆍ뜻과 같이 자재[如意自在]함ㆍ믿음이 자재[信自在]함ㆍ원함이 자재[願自在]함ㆍ지혜에 자재[智自在]함ㆍ법에 자재[法自在]함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자재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상품의 감로(甘露) 얻음을 수명이 자재함이라 하고,
모두가 오직 한 마음임을 알면 마음이 자재함이라 하고,
손바닥에서 모든 보배를 꺼내고 또한 허공으로써 창고를 삼으면 물질에 자재함이라 하며,
모든 번뇌와 번뇌의 습기와 무명(無明)의 부림[使]을 멀리 여의면 업에 자재함이라 하고,
선정(禪定)과 해탈과 삼매와 삼마발제(三摩跋提)에서 뜻을 따라 윤회[廻轉]하면 태어남에 자재함이라 하며,
모든 행(行)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면 뜻과 같이 자재함이라 하고,
일체에 들어감 가운데서 자재하게 관(觀)함을 얻으면 믿음이 자재함이라 하며,
마음을 낼 때에 눈앞의 모든 일을 성취하면 원함이 자재함이라 하고,
모든 몸[身]ㆍ입[口]ㆍ뜻[意]의 업이 지혜로써 근본을 삼으면 지혜에 자재함이라 하며,
현재에 평등한 진여 법계(法界)의 실제를 얻고 지혜가 때가 없으면 법에 자재함이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수명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對治)하고,
마음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번뇌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며,
물질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빈궁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고,
업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악행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며,
태어남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악한 길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고,
뜻과 같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추구(追求)함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며,
믿음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법을 비방함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고,
원함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마음으로 번뇌[縛]를 생각함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며,
지혜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의심하고 비난함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고,
법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세간의 대중에 대한 두려움에 대치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살생의 죄악을 멀리 여의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성내거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이 수명이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즐거움을 받는 중생에게 걸림 없이 크게 사랑[大慈]하고, 괴로움을 받는 중생에게 걸림 없이 크게 슬퍼함[大悲]은 마음이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버리고 대보리(大菩提)에 회향하면, 이것은 물질에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모든 짓는 것의 업에 들어가 몸ㆍ입ㆍ뜻의 업(業)이 맑고 깨끗하면, 이것은 업에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보리심으로써 근본을 삼고 모든 선근(善根)과 열 가지 좋은 업의 길을 성취하면, 이것은 태어남에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모든 공양과 공경과 예배와 찬탄과 코끼리ㆍ말ㆍ수레를 중생에게 베풀면, 이것은 뜻과 같이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삼보를 믿는 가운데서 모든 중생을 교화하면, 이것은 믿음이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모든 중생과 함께 몸ㆍ입ㆍ뜻의 업이 맑고 깨끗하면, 이것은 원함이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공양과 공경과 음식과 탐심을 멀리 여의고 모든 중생에게 법식(法食)을 베풀면, 이것은 지혜에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평등하게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에게 법계가 평등함을 말하며 모든 중생에게 모든 부처님 여래는 법신(法身)이고 음식을 드시는 몸이 아닌 줄로 여기게 말하면,이것은 법에 자재하는 원인이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자재라고 하느니라.
[열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 10제]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변하지 않는 진리[諦]인가?
세제(世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ㆍ상제(相諦)ㆍ차별제(差別諦)ㆍ관제(觀諦)ㆍ사제(事諦)ㆍ생제(生諦)ㆍ진무생지제(盡無生智諦)ㆍ입도지제(入道智諦)ㆍ집여래지제(集如來智諦)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열 가지 제라고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세제는 한정이 있고 명수(名數)와 가지런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되 좁고 열등하여 넓지 못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세제라고 하느니라.
제일의제는 매우 깊은 공과 상응하는 법이니,
제한이나 가지런함이 없고 단절하지 못하는 곳이며,
다른 인연도 아니고 평등한 한 가지 상(相)이며 높고 낮음도 없고 어지럽거나 고요한 모양도 아니며 모든 법의 진여상(眞如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제일의제라고 하느니라.
상제란 번뇌에 다다른 사람의 고상(苦相)이며,
태어난 사람의 집상(集相)이며,
맑고 깨끗한 사람의 멸상(滅相)이며,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乘者]의 도상(道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상제라고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모든 법의 자성은 아상(我相)과 도를 증득했다는 상[證道相]과 증득을 지었다는 상[作證相]이 없음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상제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성이 정상(淨相)임을 알고,
자성이 상을 멀리 여읨을 알고, 자성이 공상(空相)임을 알고,
자성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상[不生不滅相]임을 알고
도를 증득했다는 상과 증득을 지었다는 상임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상제라고 하느니라.
차별제란 모든 법이 다 한 모양[一相]이나 다른 인연을 의지하여 차별되게 말하는 것이니라.
한 모양이란 공한 모양[空相]을 말하는 것이니, 저 공은 다른 차별에 의지하여 말하느니라.
또 모든 법은 모양도 없고[無相] 원도 없고[無願] 행함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니, 저 모든 차별은 모두 이 공한 모양이어서 모두 다 공함에 서로 어기지 않는 모양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차별제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관제인가?관이란 철저하게 관하는 것이니라.
자주 보고 사유하여 깨닫고 증득한 지견(知見)으로써 저 경계에 서로 위배되지 아니함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관제라고 하느니라.
사제는 일의 지혜를 말하느니라.
일이라는 것은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말하는데 저 음ㆍ계ㆍ입이 오직 이 인연이 일 없음과 수명 없음을 내는 것인 줄 아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알고서 도를 증득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사제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생제인가?
저 앎을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저 행을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저 도를 의지하여 번뇌를 끊어서,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 법을 얻고,
다시 모든 법을 증득하고 모든 여래의 뛰어나고 자재한 법을 얻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생제라고 하느니라.
진무생지제는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니 저 유위법은 없어지거나 없어지지 않거나 없어짐으로써 없어짐이 없느니라.
만약 없어져 없음이 있는 것이라면 곧 없어짐이 있는 없어짐이니 이런 까닭으로 없어짐은 없어짐이 아니며, 이런 까닭으로 없어짐은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진무생지제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입도지제인가?
무엇을 지(智)라 하며,
무엇을 도(道)라 하며,
무엇을 공덕의 모음이라 하며,
무엇을 지의 모음이라 하는가?
모든 법은 생멸하지 않음을 알고, 저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 들어가고 남으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입도지제라고 하느니라.
무엇이 여래의 지혜를 모은 제[集如來智諦]인가?
법운지(法雲地)를 말하는 것이니 여래지(如來地)의 중간이 여래의 지혜를 모은 제인데 자연스럽게 도를 얻고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면,
이것을 여래의 지혜를 모은 제라고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제라고 하느니라.
[아홉 가지 차례로 드는 삼마발제 , 9차제정]
선남자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아홉 가지 차례로 삼마발제(三摩拔提)에 드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욕(欲)과 모든 악(惡)이나 좋지 못한 법[不善法]을 여의고, 유각유관(有覺有觀)으로 태어난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고초선(初禪)에 들어가 실천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욕을 여의었다는 것은 초선에서 상대하는 애염법(愛染法)을 말하니, 저 법을 멀리 여의면 모든 욕을 여의었다고 하느니라.
모든 악이나 좋지 못한 법을 여의었다는 것은,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망어(妄語)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ㆍ탐(貪)ㆍ진(瞋)ㆍ사견(邪見)을 일으키니,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악이나 좋지 못한 법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저 법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초선이라고 하느니라.
유각(有覺)이란 것은 함께 깨달음을 말하느니라.
무엇이 깨달음인가?
어떠한 경계에 의지하여 초선에 수순함이니, 이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이 있느니라. 지각(知覺)과 사유(思惟)와 관(觀)과 집(集)과 정(定) 등을 말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각이라 하느니라.
무엇이 관(觀)인가?
곧 저 초선의 깨달음을 수순하여 행함이니, 사유나 관으로 욕과 정과 지각을 받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관이라 하느니라.
싫어하는 실천에 의지하여 저 유각유관을 함께해서 초선을 성취하며,
싫어하는 실천에 의지해서 저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음을 함께하여 초선을 성취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므로 초선에 들어가 실천한다고 하느니라.
실천이란 것은 수지하고 보호하고 생각함과 기쁘고 즐거움과 아는 것 따위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실천한다고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초선에 머물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서 욕심을 더하고 윗길로 하니 이런 까닭으로 선정에 들어서 무생법인을 구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더욱 뛰어난 무생법인을 얻으려는 욕구의 마음 때문에 저 초선에서 견고하지 않은 마음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저 초선을 버리고 제2선(第二禪)을 구하느니라.
이 보살은 저 초선의 유각유관의 마음을 여의며, 저 마음을 없애며, 저 마음을 여의며, 저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저 마음을 적정하게 하여 제2선에 들고 제2선에서 사유하는 실천을 성취하느니라.
이 보살이 저 각관을 여의고 안으로 깨끗하고, 마음을 한 곳에 처하게 하면 무각무관정(無覺無觀定)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을 내고 제2선의 실천에 들어가느니라.
안으로 깨끗하다는 것은 번뇌를 대치함을 말하는 것이니 저 제2선 법이니라.
보살이 적정하면 저 법이 맑고 깨끗하여 흐림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안으로 깨끗하다고 하느니라.
마음이 한 곳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저 초선에서 모든 각관을 없애는 것이니, 적정하여 한맛인 것이 큰 바다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모든 물이 큰 바다에 들어가면 다 동일한 맛이 되니, 이를 짠맛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제2선에 들어가 저 초선의 모든 각관이 없어지고 적정하여 한맛이 되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각도 없고 관도 없는 삼매를 얻었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저 삼매에 의지하여 기쁨을 내니 불ㆍ법ㆍ승 가운데서 기쁜 마음을 내며 저 기쁜 마음에 의지하여 모든 좋은 공덕이 자연히 만족하게 된다.
이 보살은 이 무생법인으로 뛰어난 광명이 더하고 높아져서 더욱 빛나고 밝으며, 더욱 뛰어나고 묘하며, 더욱 유연하여 윗길을 얻으려는 마음이 된다. 이 보살은 저 무생법인에 의지하여 윗길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저 제2선에 머물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다시 뛰어나고 위인 제3선의 실천을 구하느니라.
이 보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 저 기쁜 마음이 제3선을 막고 무생법인을 막는 줄 아니, 이런 까닭으로 보살은 기쁨의 실천을 여의고 생각함을 버리고 지혜의 몸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받느니라.
이 즐거움은 성인께서도 또한 말씀하셨고 버렸으며, 기쁨과 즐거움을 멀리 여의고 3선의 실천에 들어가느니라.
이 보살이 삼매의 즐거움을 얻고 저 기쁨을 싫어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내면 이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지니, 이것이 무상의 즐거움이며, 없어짐이 다한 법은 떳떳함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니며, 진실한 즐거움도 아니며, 구경락(究竟樂)도 아니니라. 이 보살이 이와 같음을 알고서 더욱더 저 무생법인을 얻어 욕심을 더하고 높게 하느니라.
이 보살이 저 무생법인에 의지하여 욕심을 더하고 높이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않느니라.
이 보살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멀리 여의고, 먼저 근심과 기쁨을 없애고, 괴롭지 않고 즐겁지 않음을 버리고, 생각이 맑고 깨끗하면 4선(禪)의 실천에 들어가느니라.
이 보살이 제4선의 삼마발제와 유연한 마음과 자재한 마음과 적정한 마음과 빛나고 밝은 마음과 정직한 마음을 얻으면, 저 모든 즐거운 일을 모든 중생에게 주느니라.
이 보살이 모든 중생과 더불어 눈앞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때에 곧 무생법인을 얻으면 광명이 눈앞에 나타나느니라.
이 보살은 저 무생법인을 얻어 광명이 눈앞에 나타남을 얻었으므로 실천함이 빠르게 되느니라.
이 보살은 저 4선의 뛰어나고 묘한 즐거움에서 즐겁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저 즐거움을 멀리 여의고 생각이 맑고 깨끗한 것도 버린 채 오직 눈앞에 나타남을 볼 뿐이니라.
이 보살은 모든 색상을 초월하고 모든 유대상(有對相)을 여의었고 여러 가지 상을 생각하지 않고 그지없는 허공을 알고 곧 그지없는 허공의 실천에 들어가느니라.
이 보살이 이같이 색을 관함에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느니라.
하나는 네 가지 요소[四大]요,
둘은 네 가지 요소에 의지하는 것이니라.
네 가지 요소란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을 말하며, 네 가지 요소에 의지하는 것이란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을 말하는데 이와 같이 넓게는 여덟 가지 색이 있느니라.
모든 색상을 여의면 저 색상은 없으니 색상을 여의었으므로 ‘모든 색상을 초월했다’고 말하거늘, 무슨 법을 따라 그 색상이 있겠는가?
저 법은 반드시 걸리는 상[礙相]이 있으니, 그러므로 모든 색상을 초월하면 모든 유대상과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 않은 여러 가지 다른 상을 없애느니라.
여러 가지 다른 상을 초월함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게 되며, 그러므로 오로지 허공의 모양[相]만을 보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알고 곧 그지없는 허공의 실천에 들어가니, 이것을 보살이 그지없는 허공에 들어가는 삼매[菩薩入無邊虛空處三昧]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허공은 그지없고 허공은 끝이 없으며허공은 단애[崖:斷崖]가 없으니 어떠한 법을 따라서도 그지없는 까닭으로 저 법엔 전제(前際)ㆍ중제(中際)ㆍ후제(後際)가 없다’라는 마음을 내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하면 전제ㆍ중제ㆍ후제가 없느니라.
이 보살이 이와 같은 삼매에 들면 곧 모든 중생에 대자심(大慈心)을 일으키고 곧 모든 법에서 평등한 지혜를 얻어 눈앞에 나타나 있고, 이 보살이 이때에 무생법인 가운데서 처음으로 뛰어나게 나아가는 광명이 눈앞에 나타남을 얻을 것이니라.
이 보살은 모든 그지없는 허공의 모양을 초월하여 눈앞에 나타난 그지없는 식과 상[無邊識相]을 알고 그지없는 식의 처소[無邊識處]의 실천에 들어가며,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이 그지없는 허공의 모양은 오직 식과 상[識想]으로 분별할 뿐이다’는 마음을 내느니라.
이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얻으면 모두가 오직 이 인식의 모양[識相]일 뿐인데 이 인식이 헤아릴 수 없고 그지없음을 아느니라.
이 보살이 이와 같은 삼매에 들어가 무생법인을 얻되 끝내 무생법인을 성취하지 않느니라.
이 보살은 모든 그지없는 인식의 모양인 처소를 초월해야 하느니라.
눈앞에 나타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알고 무소유한 무소처(無少處)의 실천에 들어가니 무소유라는 것은 저들이 가진 것이 없는 것을 말하느니라.
무엇이 가진 것인가?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어 분별하며 여러 가지로 분별하며 허망하게 분별함을 말하니, 모든 유위법은 다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좇아서 생기는 것이니라.
소유한 것이 없으므로 ‘무소유’라 말하며, 무소(無少)는 먼저 말한 바와 같으니라.
법 중에 소상(少相)ㆍ세상(細相)ㆍ미상(微相) 따위를 작은 모양이라고 하는데 저 작은 모양도 없기 때문에 ‘무소’라고 말하며,
저 모든 거칠거나 가는 모양[麁細相]을 초월했으므로 ‘무소유한 무소’라고 말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삼매에 머물면 더욱 뛰어난 무생법인을 얻고 광명이 눈앞에 나타나니라.
이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기 위해 저 무소유무소삼매(無所有無少三昧)를 즐기지 않으며,이 보살은 다시 더 위가 되는 삼매[增上三昧]를 구하여 뛰어난 욕심을 내느니라.
이 보살은 더욱더 위가 되는 삼매와 뛰어난 실천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이 무소유한 무소와 행과 모양은 또한 세밀한 모양이니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는 마음을 내느니라.
다음은 비상비비상(非相非非相)을 관하니, 어떠한 법이 비상비비상인가?
비상은 허공이며 비비상은 인연을 좇아서 생긴 것이니라.
보살은 이때에 비상비비상삼매가 눈앞에 나타남을 얻고 보살은 모든 무소유처의 소상(少相)을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삼매의 실천에 들어가느니라.
보살이 저곳에 머물면 이와 같이 ‘저 비상비비상처에는 즐거워할 것이 없다’는 마음을 내고 보살이 저곳을 멀리 여의니라.
보살이 저곳을 멀리 여의면 즉시에 모든 법이 생멸하지 않음이 눈앞에 나타나고, 이 보살은 모든 법이 생멸하지 않음을 알며 모든 법의 자성이 적멸함을 보느니라.
이 보살은 실천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지만 보살은 이때에 뛰어나고 한결 높은 맑고 깨끗한 것과 무생법인을 얻느니라.
이 보살이 여기서부터 위로는 자연스럽게 쉬지 않고 보살의 도를 얻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아홉 가지 차례로 삼마발제에 들었다고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