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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 상권
6.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실천해야 할 네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처음에는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을 배워서 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
산란함이 없어지고 나서도 보리의 마음이 산란한 까닭에 6바라밀의 행으로 생각을 다잡는다.
번뇌의 인연에 대하여 해설했으며, 보살은 처음 낸 보리의 마음으로 6바라밀의 행을 유지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때에 성자(聖者) 사리불(舍利弗)이 성자 부루나(富婁那)에게 말하였다.
“또한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맨 먼저 단바라밀(檀波羅密)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탐하고 아끼는 세상의 업(業)은 시작이 없는 오랜 옛날부터 익혀 온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것을 버릴 때엔 아끼는 마음도 곧 버리게 되며, 그 인연으로 보리심을 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보리심이 발하면 곧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게 될 것이요,
점점 자라고 커져서 성취하면 곧 2승(乘)을 점점 멀리 여의게 됩니다.
만약 2승을 점점 멀리 여의면 곧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나아가게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비가 올 때 비가 내리는 곳에 병을 놓아두면
이 병에 제일 먼저 들어간 빗방울과 제일 나중에 들어간 빗방울, 그 두 방울만이 인연이 되어 병이 가득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들어간 빗방울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점점 들어가서 병이 가득 차는 것과 같습니다.
부루나여, 보살의 수행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반드시 처음 보리심을 낸 까닭만으로 불도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최후에 보리수 아래에서만 불도를 성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것과 나아가 최후와 그 중간에서 보살이 점점 불도를 증득하고,
여러 가지 선행(善行)을 일으켜 3아승기(阿僧祇) 동안 수행하여 부처님의 도를 이익이 되게 돕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인자(仁者)이신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산란한 마음에 물드는 일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때에 성자 부루나가 성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수행하는 보살은 어떻게 마음을 거두어야 산란함이 없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삿된 행과 나쁜 견해를 내어도 장차 좋은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지금 저지른 나쁜 행도 반드시 보리에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삿된 견해를 위하여 세간의 생사를 끊지 않나니,
이 때문에 내 몸은 세간에서 바꾸고 변하여 방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 마음에 산란함이 없습니다.”
그때에 부루나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약 보살의 보리심이 산란하면 어떤 모양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이 마음이 산란한 것은 성문승과 연각승의 사람들이 그 도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승(乘:성문승ㆍ연각승)의 도과(道果:불도의 과위)를 구하면 곧 이것이 산란한 마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2승의 도행(道行)은 보리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견해도 오히려 산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3독(毒)의 견해가 불도를 돕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바꾸어가면서 보리를 이익되게 하나니,
이러한 견해 때문에 세간에 태어나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합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번뇌를 돕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부루나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을 섭념(攝念)하는 까닭에 선(善)을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곧 산란함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또 성문과 벽지불의 섭념에 상응하면 보살도 또한 산란해집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섭념하지 못하고 나고 죽음을 끊지 못한다면 도를 돕는 까닭에 산란한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다잡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세간에 있으면서도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생각을 거두어 계속 이어가면서 세간에 태어남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태어나고 나면 곧 단바라밀(檀波羅蜜)ㆍ지계(持戒)바라밀ㆍ인욕(忍辱)바라밀ㆍ정진(精進)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지혜(智慧)바라밀을 받아 이와 같이 닦고 배우는데, 이와 같이 생각을 거두는 것이 세간의 나고 죽음의 길을 돕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주고 배우며, 나아가 부처님이 될 때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부루나여,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번뇌를 싫어하거나 여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번뇌를 알고 분별하여 ‘이들 번뇌는 나의 몸을 이롭게 하고 내가 부처를 성취하는 것을 돕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번뇌에 모양이 있다면 최상의 미묘한 공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번뇌를 위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보살은 항상 번뇌를 보호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지혜로써 번뇌의 원인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쓰기 때문에 삼계의 얽매임에 간섭 받지 않고 나로 하여금 6바라밀을 증장시켜 원만하게 하여 빨리 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증장하면 나는 곧 세간의 나고 죽고 하는 얽매임에서 해탈하여 관만(寬慢)을 얻습니다.
부루나여,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비유하면 수레에 무거운 물건을 실은 것과 같으니,
수레가 무거우면 그 때문에 수레의 굴대가 점점 닳아서 수레에 실은 물건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면 그 굴대는 할 일을 다 끝내고 곧 끊어집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번뇌를 인연하는 까닭에 삼계에는 생사가 있나니,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번뇌 때문에 계속 세간에 태어나지만 6바라밀이 곧 증장하고 원만함을 얻습니다.
만약 6바라밀이 점점 원만함을 얻으면, 곧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만약 나고 죽음의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면, 곧 결정적으로 부처님의 지위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 앉고 나면 곧 살바야(薩婆若)의 지혜가 일어나고 앞뒤의 번뇌는 장차 끊어져 없어지고 다시는 이러한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보살이 이미 정각을 성취하고 나면 번뇌는 다시 인연할 것이 없나니,
비유하면 수레의 굴대가 무거운 짐을 싣고 성에 들어가서 일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이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 나면 또한 이와 같아서 번뇌가 일을 분별하는 것을 다시는 인연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중간에 번뇌를 끊지 않습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비록 성냄이나 꾸지람을 당해도 도리어 빌어 구하는 것을 좇아서 모두 도를 돕는 좋은 인연으로 삼나니, 보리심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羅漢)의 마음을 거둔다면 그 지혜도 또한 이러하나니, 수행하는 보살은 불도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한의 행문(行門)이 없었다면 여래는 무엇을 따라 그 법을 만들어서 나한의 도과(道果)를 닦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법을 만들어 닦게 하는 까닭에 불도(佛道)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마하반야(摩訶般若)에서 가타(伽他:게송)로 말씀하셨으니,
비유하면 세간에서 나무에 싹이 없으면 나무의 몸통이 없으며,
또한 나무의 몸통이 없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엇을 근거하여 무성해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중생들에게 만약 보리의 씨앗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셨다면 성문은 무엇으로부터 생겼겠습니까?
비유하면 등을 밝히는 데는 심지의 힘을 필요로 하지만, 이 심지는 맨 처음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서만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는 것도 아니고, 맨 마지막의 불꽃을 원인으로 하여 다 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앞과 뒤와 중간의 불꽃들이 서로 이어져서 심지가 다 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보리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 발심만을 인연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며, 또한 최후의 발심만을 인연한 것도 아닙니다.
앞과 뒤와 중간의 마음이 서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까닭에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찰나(刹那刹那:아주 짧은 시간)가 보리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불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보시(布施)하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수자상(受者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에 구하는 바도 없고 탐하고 아끼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시하면 비록 조금만 보시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시를 하는 것과 같나니, 곧 수행하는 보살이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언제나 여래의 원만한 위신력(威神力)을 생각하고 거룩한 덕을 드러내어 드날리면, 곧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행(戒行)입니다.
만약 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상(戒相)이 점점 이지러지면 곧 계를 망가뜨리게 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이 세간의 법을 수순하는 까닭에 비록 오욕(五欲)을 받지만 마음으로는 3귀의(歸依)를 생각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나는 정각을 성취하고 중생을 구원하기를 서원합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곧 이미 지계바라밀행에 머문 것입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써 마음으로 계를 범하지도 않고 계를 범했다고 이름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억 겁 동안 비록 열 가지 좋은 계행을 지녔다고 해도 만약 성문(聲聞)의 아라한과(阿羅漢果)만 좋아한다면,
이것은 곧 남을 얕보며 계를 범하고 대승(大乘)을 망가뜨리는 것이니,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지계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넓고 큰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들이 감옥에 갇혔거나, 목에 칼을 차고 있거나, 발에 칼을 채운 채 있거나, 손과 발에 고랑을 차고 있거나, 형틀에 묶였거나, 용수를 썼거나, 채찍질을 당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손과 발과 코와 귀를 잘리거나, 몸이 분리되는 것을 보면,
그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저들을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받아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다 안락함을 얻게 하겠노라.
만약 나를 고달프게 하면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잘 참으며 마음으로 나쁘게 대함이 없으리라’라고 하나니,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이 행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비로운 인욕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성숙시키기를 좋아하며,
청정한 부처님의 세계에서 고행하거나 핍박하거나 번거롭게 실천하면서도 피로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를 원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정진바라밀행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 수행하는 보살은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으로 오욕에 얽매여 있지만,
성문과 아라한의 도과(道果)를 좋아하지 않고 보리에 전념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항상 선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비유하면 상인(商人)이 큰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선박을 수리하지 않고 타고 가면, 상인과 재물이 모두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미리 배를 수리하여 튼튼하게 하였다면, 상인과 재물을 목적지[彼岸]까지 잘 운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하는 보살도 비록 도에 대한 마음이 있으나 견고한 지혜가 없으면 오래지 않아 보리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바라밀로써 보리를 성취하고, 결함이 없이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찰나 일념 간에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나니,
이것이 곧 수행하는 보살이 한량없이 많은 2승(乘)들의 공덕을 초월하는 지혜바라밀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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