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바른 수행]
이 뒤의 경문에서는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와 같은 바른 수행으로 인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복을 획득하니
법을 바르게 수행 하는 이에게
이제 마땅히 업(業)의 작용을 설하리라.
‘이와 같이 바른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곧 글에서의 바른 수행을 밝힌 것이다.
게송으로 설하리라.
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고 연설하는 것이다.
‘글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은,
첫째는 받아 지니는 것이며,
둘째는 읽고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연설하는 것이다.
‘받아 지닌다’는 것은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며,
‘읽고 외운다’는 것은 많이 듣고 말함에 의지하는 것이니, 비록 완전히 지니진 못했어도 능히 독송하기 때문에 역시 많이 들어 섭수할 수 있다.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이라는 것은 곧 두루두루 그 뜻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뜻으로 증득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뜻으로 증득하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 자기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다른 이로부터’이며, 어떤 것이 ‘자기에게 미치는 것’인가?
법문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례대로 다른 이로부터 자신에게 미친 것을 증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두루 뜻을 증득함에 의거한 것이니, 이것은 문자와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것은 안으로 자신을 성숙시킨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도 성숙시키는 것이
일과 시간의 큰 성품을 따라서
그 복덕은 어느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게 된다.
여기에서 ‘받아 지닌다’고 한 것 등은 다만 안으로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有情)도 성숙하게 한다.
곧 이것은 다른 이를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설하여 이와 같은 복(福)의 양을 획득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복의 양(量)에 대한 차별을 밝힌 것이다.
“일과 시간의 큰 성품으로 말미암아 희망하는 복은 어느 복보다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몸을 버린 복덕은 이에 앞서 몸을 버린 복덕보다 더 우세하다.
일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있고, 시간이 크기 때문에 하루 내내 오히려 매우 많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보시를 행한다.
[행에 대한 업의 작용]
또 경에서
“많은 시간을 법에 대하여 바르게 수행하는 자에 대하여 업(業)의 작용을 이제 마땅히 설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저 행에 대한 업의 작용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른 경계에서의 성품이 아닌 유독 이 성품만이
능히 큰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성품이며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니
최상 경지의 원인을 증장(增長)시키기 때문이라네.
다만 이 바른 법만을 지니고
여기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큰 그릇을 성취하리니
모든 업장을 끊어 없애면
곧 지혜를 달통한 성품을 획득하리라.
세간의 미묘한 일들이 원만하고
이숙(異熟)에서는 매우 존귀하게 되리니
이 법을 잘 닦아 행하면
틀림없이 이러한 업(業)을 획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경에서 말한 “이루 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범부의 마음으로는 행할 바 경계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루 다 재고 헤아릴[稱量] 수 없다’고 한 것은 유독 이 성품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복이며, 성문(聲聞) 등은 함께 할 수 없는 성품임을 밝힌 것이다.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대승의 유정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곧 이 법문은 대승(大乘)만이 의지하는 대승의 가르침이므로 극상승(極上乘)과 대승만이 행할 수행이라 말하고, 또한 최승승(最勝乘)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열(下劣)의 승을 즐기는 이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듣기 어려운 성품을 가진 이는 들어도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사량(思量)하기 어려운 등등의 복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최상의 원인을 증장시키면 복의 종자도 증장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경문에 이르기를 ‘생각할 수도 없고 칭량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한량하지도 못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말함이니, 순서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어깨에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은 법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법을 지닐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보리(菩提)를 지닐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에는 향과 꽃을 공양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경전이 의지하고 있는 곳은 뛰어나고 미묘한 그릇을 성취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시당하고 욕(辱)을 당하기 때문에 마땅히 생겨나게 되는 악한 세계의 업은 장차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업장(業障)을 제거하여 맑힘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경을 받아 지녀 독송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욕을 당할 때에 이렇게 욕을 당하는 사람에게 복덕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서 먼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섬겼으므로 그때 얻은 복덕이 말법(末法)시대에 이 법문을 받아 지닌 이가 획득한 복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번역하는 모든 이들이 다 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범본(梵本) 중에 그 내용의 글자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로 통달한 성품을 밝힌 것으로서 많은 복덕의 자량(資糧)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졌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데까지는 그 과보(果報)가 불가사의함을 밝힌 것이다.
곧 이것은 위의 게송에서 말한
“세간의 미묘한 일 원만하여 과보(果報)가 지극히 존귀하리라”고 한 것으로서
세상을 보호하는 제석(帝釋)과 바라문(婆羅門) 등은 그가 증득한 원만한 공덕 때문에 모두 마땅히 섭수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광란(狂亂)’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마음을 광란하게 하는 요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수 없는 과보다’라고 말한 것은 여기에 많다[多]는 성품과 수승하다[勝]는 성품의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범부의 마음으로는 모두 헤아려 알 만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바른 법을 바르게 수행하면 문득 이와 같은 많은 덕에 편안히 머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른 행업(行業)으로 인한 과보의 공용(功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살행]
또 앞에 세 가지의 문답이 있었는데도 여기에서 거듭 물었으니,
그 뜻이 어떻게 다른가?
게송으로 대답하겠다.
각자 스스로 수행할 때에
장차 나는 보살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마음에 장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니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묘생(妙生)아, 실제로 아무런 법도 없는 것을 보살행이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만약 보살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면 왜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보살행을 행하셨는가?
이런 의혹을 끊어주기 위하여 수보리가
“실제로는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실 때에”라는 이와 같은 등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뒤에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기(授記)하셨으니
연등불의 처소에서 행한 것은 뛰어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보살의 그와 같은 수행이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은 아니다.
이 게송에 담긴 뜻은
“나는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수승하고 가장 으뜸가는 행인 보살행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또 “내가 옛날 수행할 때에 실제로 아무 법도 없었다.
만약 어떤 법이라도 있었다면 그 부처님의 처소에서 정각(正覺)을 증득하였을 것이며,
만일 정각을 증득하였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뒷날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또 어떤 이는
‘그는 수행할 때에 스스로 나는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보리(菩提)가 없다면 부처도 없을 터이니 그렇다면 곧 다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의심을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이런 의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경문에서
“묘생아,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곧 실제의 성품인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뒤바뀜이 없는 이치를 실제 성품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뜻을 진여라고 말한다.
[부상정등각을 증득했다는 것]
“묘생아,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증득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 되느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답하기를
“보리는 그의 수행과 같아서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게송에서 말했으니,
이 말은 옛날 보살이 수행할 때에 실제로 행한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다 그와 같다는 말이다.
‘법이 없었다면 정등보리도 증득하지 못했을 터이니 이는 도리어 무상정등보리는 실제로 없다고 말해야 되지 않는가?’라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 것이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해
“묘생아, 여래께서 증득한 정각의 법은 곧 실제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은 진여(眞如)의 진리이니, 그것은 곧 실제로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은 곧 모여서 이루어진 모습이지만, 저것은 물질 등의 모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모습이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은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고
이 법이 곧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모두가 유위(有爲)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물질과 소리 등의 모습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물질 등의 모습은 본래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니, 이로 말미암아
“저 모습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게송에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