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제법보최상의론 하권
[진여의 성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차별된 분별은 번뇌의 그물이 되어, 청정한 성품을 막지만,
진여는 모습이 없고, 모든 연하는 바를 떠나 자성이 청정하고 큰 광명이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불ㆍ세존은 본래 진여의 성품이다.
이것을 불보(佛寶)라 한다.
청정한 인으로써 청정한 법을 보이고, 바른 이해를 열어 생하고, 자성을 맡아 지닌다.
이것을 법보(法寶)라 한다.
진실한 도를 가리켜 자체가 상응한다.
이것을 승보(僧寶)라 한다.
이와 같은 삼보는 모두 무위의 모습[無爲相]이다.
온(蘊) 등의 법이 아니며, 모으는 것도 없고, 가지는 것도 없다[無所有]. 유의 모습도 있지 않고, 분별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불ㆍ세존은 승의제(勝義諦)에 머무르시며, 여실한 도(道)로부터 여실하게 오시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이름한다.
여실하게 무아(無我) 등의 법을 헤아려 알기 때문에 모든 색(色)의 모습과 공덕의 법을 나타내고, 처음 발하는 마음[初發心]으로부터 모든 수승한 행을 닦아서, 불퇴전(不退轉)을 얻는다.
나아가 최후의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이르러 등정각(等正覺)을 이룬다.
이것을 인으로 하여, 무구진여(無垢眞如)로부터 모든 부처님 몸[佛身]을 나타낸다.
이렇게 나타나는 몸 이것은 방편으로 생하여, 모든 법을 널리 설하지만 설한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성품이 없고,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식심(識心)이 청정하여, 이 식은 곧 모든 짓는 바 일[事] 또한 이와 같이 나타난다.
비록 나타날지라도 취하는 것이 없어서 또한 설함이 없다.
승의제로서 취할 수 없고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취함이 없으며 설함이 없다.
성품의 본체가 스스로 진실하여 또한 설할 수 없다. 설할 수 없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분별의 성품이 없는 것이 승의제이다. 승의제 가운데 일[事]의 분별에 따라서 모든 법의 소리를 가진다.
이러 이러한 모든 법을 설하여, 그 각각의 법들을 설하는 모습이 없다고 한다.
모든 법과 법의 성품은 모두 평등하며, 모든 법은 무아이며 또한 자성이 없다.
성품이 있음과 성품이 없음의 그 각각의 자성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나서, 취할 수 없고 또한 설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있다거나 없다는 말의 뜻은 심히 깊고 깊어서 모습을 떠나서 설한다.
모든 법은 증명할 모습이 없다.
이것을 정등각이라 한다.
모든 법은 설하는 모습을 떠났다.
이것을 진실한 말씀이라 한다.
생함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음이 모든 법의 깊고 깊은 뜻이다.
각각의 모든 경계는 무아이며 전전함이 없고, 밖의 법[外法]은 전전할 수 없고 취할 수도 없다.
보시ㆍ지계 등의 모든 법은 비록 설할지라도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에서 취할 바의 모습이 없어, 곧 집착하는 바가 없다.
이 가운데 또한 따로 작용이 없어, 설사 일을 짓는 바가 있을지라도 또한 공이라고 한다.
작용이 공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행상이 없다.
실재하는 행상이 없는 가운데에 법은 증가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만일 모든 법을 허망하게 분별하면, 마땅히 그 마음이 모습을 집착하는 가운데 전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번뇌의 성품에 집착하여 그는 해탈하지 못한다.
만약에 그러한 허망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모든 지은 일은 모두가 적정하다.
그는 능히 여실하게 해탈을 얻을 것이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성품[心性]이 항상 적정하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연으로부터 생하며, 비록 생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공이라고 한다.
마땅히 자법(自法)을 관하여 유의 모습이 있지 않다고 해야 한다.
정등정각은 이와 같이 설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임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자신의 성품도 없고 다른 성품도 없다.
조그마한 법이라도 모습을 취하여 얻을 수 없다.
처음과 같이 또한 뒤도 같으며, 처음과 뒤가 상응한다.
그리하여 그 진여의 성품의 광명이 비춘다.
만일 능히 그 진여의 성품이 비추어 통하면, 모든 법은 연생(緣生)으로 나타나서 장애가 없다.
허깨비와 같이, 생한 것 또한 이와 같다고 설한다.
이것이 널리 펼치신 대승이 탄생한 내용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법이 혹 생하거나 혹 멸하는 것은, 찾아 구하고 자세히 관찰하는 도리[尋伺道]로는 능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의 뜻의 끝을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그 진실한 성품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전에 취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다.
지혜로운 자는 여실하게 모든 언설을 떠난다.
그 분별하는 마음을 그물이라고 하는데,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곧 해탈을 얻는다.
그 해탈의 마음은 공과 같이 평등하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은 심히 깊은 법이다.
만일 이 중에서 여실하게 믿어 이해[信解]하는 크게 지혜로운 자가 되면 그 신해의 마음이 삼계 등과 더불어 있다.
이러한 마음의 청정함은 모든 티끌과 더러움을 떠나고, 또한 능히 일체의 물듦과 집착을 멀리 떠난다.
곧 모든 법에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으며, 일체의 집착과 어리석음을 모두 다 멀리 떠나서 능히 열 가지 종류의 자재함을 획득한다.
그는 자신의 법에서 참된 성품을 깨달아 요달하고 자성이 없는 가운데에서 또한 머무는 바가 없다.
모든 법에서 여실하게 믿어 이해하며, 믿어 이해하는 바와 같이 여실하게 머문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두루 미쳐서 빠짐이 없는 것과 같다.
그 일체의 법이 원만하게 출생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이 법은 평등하여 일체에 널리 미친다.
여기에서 법은 오거나 가는 것이 없으며, 오고 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이 현전한다.
이러한 뜻을 아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달하여, 일체의 법을 생함에 모두 집착하는 바가 없다.
이것과 달리 또 따로 법이 있지 않다.
이것이 대승 제법(諸法)의 중요한 도리로서 가장 높고 심히 깊어 여실하게 전전한다.
식심(識心)이 맑은 까닭에 일체에 집착이 없으며, 일체의 법과 더불어 이치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집착하는 마음이 다한 곳에 법이 있다.
그 법은 심히 깊어 지혜로 관하는 바도 아니며, 깨달아 아는 바도 아니어서, 있고 없고의 두 곳을 동시에 세울 수 없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능히 증득하는 자도 없고, 증득하는 곳도 없어서 보리의 법 가운데에 안립할 바가 없다.
만일 능히 여실하게 스스로 부처님의 경지를 증득하면, 일체법과 더불어 스스로 상응하여, 모든 법은 원인도 없고 또한 지은 바도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사유하고 분별하여, 만약에 원인이 없음에 집착하면 또한 다시 모든 복된 일을 모을 수가 없으며, 물든 마음을 일으켜서 악취(惡趣)의 과보를 초감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이 심히 깊고 미묘한 법 가운데에 여실하게 신해하여 존중하고 공경하여, 곧 한량없는 최상의 복의 더미를 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진실로 대승을 닦는 자라고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도리를 깨달아 요달하면,
이것이 여실한 도이며 집착 없는 도이고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것이니, 능히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라고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한다.
지혜가 없이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들은 그 집착하는 마음들을 능히 버리지 못하므로 이 깊고 깊은 법을 설하지 못한다.
만약에 설한다 할지라도 이치에 상응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칭찬하는 최상의 법은
처음도 중간도 뒤도 이치에 잘 상응한다네.
최상의 진실한 구절을 전체 거두어들이니
심히 깊고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네.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모아
널리 일체 중생계에 베풀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