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학입문 상권
제18장 육묘문六妙門
육묘六妙란
첫째 수數,
둘째 수隨,
셋째 지止,
넷째 관觀,
다섯째 환還,
여섯째 정淨이다.
왜 묘문妙門이라 하는가?
이 여섯 가지 법을 통해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묘문이라 한다.
앞의 세 가지는 선정법이고
뒤의 세 가지는 지혜법이며,
유루이면서 무루라는 뜻이 여기에 있다.
수행하여 깨닫는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모든 선이 다 육묘문六妙門에 속하나 지금은 단지 순서대로 생기는 양상만을 취해 도에 들어가는 바른 요체로서 육묘문을 밝히겠다.
첫째, 수數란 호흡을 세는 법에 따라 닦아 익히는 것이다.
호흡을 세는 법이 이루어져 호흡이 허공이 엉긴 듯하게 되면 마음의 모습이 점점 미세해지면서 호흡을 세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이때 세는 법을 버리고 수隨를 닦는다.
둘째, 수隨란 호흡을 따르는 법에 의거하여 닦아 익히는 것이다.
마음과 호흡이 서로를 의지해 뜻과 생각이 즐거워지면 호흡을 따르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이때에는 호흡을 따르는 법을 버리고 지를 닦는다.
셋째는 지止이다.
지에는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제심지법을 이용해 대상에 대한 모든 생각을 그친다.
[첫째는 계연지繫緣止, 둘째는 제심지制心止, 셋째는 체진지體眞止이다. 방편문 중 제35장에 나온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선정에 들어간다. 이 선정법으로 마음을 지속시키면 저절로 동요함이 없게 되는데, 이때는 관법을 닦아야만 한다.
넷째는 관觀이다.
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혜행관慧行觀이니 참된 지혜를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득해관得解觀이니 즉 가상관假想觀이며,
셋째는 실관實觀으로서 현상 그대로 관하는 것이다.
혜행관과 득해관은 사제四諦ㆍ십이인연十二因緣ㆍ구상九想ㆍ배사背捨 등에 설명이 있고,
실관은 관식법觀息法에 있다.
마땅히 세 가지 관법에 따라 닦아 익혀야만 한다.
다섯째는 환還이다.
관법이 이루어져 관하는 생각이 움직이게 되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관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가?
마음으로부터 생겨났다면 마음과 관이 다른 것이 된다.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앞에서 호흡을 세는 법ㆍ호흡을 따르는 법ㆍ그치는 법을 닦을 때는 왜 관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그러면 곧
“관하는 마음은 본래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있지 않고, 있지 않으므로 곧 공이며, 공이므로 별도의 관하는 마음도 없다. 이미 관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관할 대상이 있겠는가?”라고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대상과 앎이 함께 없어지고 마음과 지혜가 개발되니,
이것이 ‘근본으로 되돌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返本還源)’이다.
여섯째는 정淨이다.
근원으로 돌이키는 법이 이루어졌으면 깨끗이 하는 법을 닦아야 한다.
색의 깨끗함을 알기 때문에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망상의 더러움을 쉬고, 분별의 더러움을 쉬고, ‘나’에 집착하는 더러움을 쉬면 주체와 객체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활연히 마음과 지혜가 상응하여 걸림 없는 방편이 저절로 개발되고 바른 삼매에 들어 마음에 의지함이 없게 되며, 나아가 무루의 지혜가 발생해 삼계의 더러움이 다하게 된다. 따라서 깨끗함이라고 한다.
또한 중생이 공함을 관하므로 ‘관’이라고 하고,
실제법의 공함을 관하므로 ‘환’이라 하며,
평등공을 관하므로 ‘정’이라고 한다.
또한 공삼매空三昧와 상응하므로 ‘관’이라 하고,
무상삼매無相三昧와 상응하므로 ‘환’이라 하며,
무작삼매無作三昧와 상응하므로 ‘정’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외관外觀을 ‘관’이라 하고,
모든 내관內觀을 ‘환’이라 하며,
모든 내관도 외관도 아닌 것을 ‘정’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이 가假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관을 ‘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관을 ‘환’이라 하며,
공과 가를 한마음으로 관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도에 들어가는 초입에 먼저 육묘문으로 근본을 삼으셨다.
그러므로 보살이 육묘문에 잘 들어가면 모든 불법을 갖출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제19장 십육특승十六特勝
십육특승十六特勝이란
첫째 숨이 들어오는 모습을 아는 것,
둘째 숨이 나가는 모습을 아는 것,
셋째 호흡이 길고 짧음을 아는 것,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하지 않는 것,
여섯째 기쁨을 느끼는 것,
일곱째 즐거움을 느끼는 것,
여덟째 여러 마음작용을 느끼는 것,
아홉째 기쁜 마음을 짓는 것,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
열한째 마음이 해탈하는 것,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
열셋째 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
열넷째 욕망을 관하는 것,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 열
여섯째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외도들도 사선과 사공처정을 얻었으나 대치對治하는 관행이 없었기 때문에 생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래께서는 처음 사제四諦를 설했을 때 혹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다시 구상ㆍ배사 등의 부정관법을 설하여 그것을 대치했다.
부정관을 수행하는 자가 탐욕은 제거했지만 간혹 싫어하는 마음이 지나쳐 무루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자 부처님께선 곧 부정관을 버리고 이 특승법을 닦게 하셨다. 이 법에는 정定도 있고 관觀도 있어서 모든 선禪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들숨을 관하는 법은 숨의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둘째, 날숨을 관하는 법이란 코끝에 이르러 멈출 때까지 관하는 것이다.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관하는 법이란 몸이 불안하고 마음이 산란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짧고,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이 길다.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진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기도가 막히지 않아 호흡이 몸에 두루 충만한 것이다.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란, 상想과 수受가 마음의 작용이고, 각覺과 관觀이 입의 작용이며, 날숨과 들숨은 몸의 작용이 된다는 것이다.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고 나면 그 감각이 거친 생각을 일으킬 것이 우려된다. 따라서 모든 거친 생각을 제거하므로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앤다고 한다.
여섯째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일곱째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미미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어도 그것이 온몸에 가득 퍼지고, 몸과 마음이 가득 차고 나면 안으로 마음에 희열이 있게 된다. 따라서 즐거움이라고 한다.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이란, 이미 마음속에 즐거움을 느꼈다면 반드시 마음의 즐거운 경계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마음의 작용이 따라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낀다고 한다.
아홉째, 기쁜 마음을 짓는 것이란,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게 되었어도 지혜로 이해하는 작용이 없으면 가라앉은 마음에 반드시 덮이고 만다. 따라서 기쁨으로 그 마음을 일으켜 가라앉지 않게 하므로 기쁨을 일으킨다고 한다.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란, 기뻐하는 마음이 정상보다 지나치게 일어나 산란해지면 그것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고, 온갖 연으로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따라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뜨거나 산란하지 않고 고르고 평등하여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라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이란, 이미 자재함을 얻어 가라앉거나 들뜨는 일이 없게 되었으므로 ‘모든 법은 무상하여 찰나찰나 생멸하니 즐거워할 것도 없다’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열셋째, 흩어져 무너짐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열넷째, 욕망에서 벗어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몸은 오직 고통의 근본일 뿐이므로 마음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벗어난다고 한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이란, 이 마음은 머물다 사라지고 갖가지 허물과 근심이 많으므로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이란 ‘이러한 모든 법이 다 허물과 근심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림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열여섯 가지 법은 반드시 여러 단계 선의 여덟 가지 관법과 서로 관련지어 차례로 대치해야 한다.
왜 그런가?
첫째와 둘째 호흡이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을 세는 법을 대치하고,
셋째 호흡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고,
넷째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은 미도지정을 대치하고,
다섯째 모든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은 초선의 각지覺支를 대치하고,
여섯째 기쁨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일곱째 마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낙지樂支를 대치하고,
여덟째 온갖 마음의 작용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一心支를 대치하고,
아홉째 기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內淨支와 희지喜支를 대치하고,
열째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하고,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하고,
열두째 무상을 관함은 제4선인 부동정不動定을 대치하고,
열셋째 흩어져 버림을 관함은 공처정을 대치하고,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하고,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불용처정을 대치하고,
열여섯째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 호흡의 드나듦을 아는 것은 호흡 세는 법을 대치할 수 있다.
수행자가 호흡을 조절하여 그것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다면 한마음이 호흡을 의지하며 따르기에 숨을 들이쉴 때 그 숨이 코에서 배꼽까지 이르는 것을 알고, 숨을 내쉴 때 그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한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며 의지해 따르고 산란함이 없게 된다.
다시 호흡의 거칠고 미세하고 가볍고 무겁고 껄끄럽고 매끄럽고 차갑고 따뜻한 상태를 안다.
저 호흡을 세는 법은 그저 어두운 마음으로 호흡을 세기만 하고 관하는 행법이 없으므로 애착ㆍ아견ㆍ자만 등의 허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지금 호흡을 따를 때에는 곧 이 호흡이 무상함을 알게 된다.
목숨(命)은 호흡에 의지하므로 호흡을 목숨으로 삼는다.
한번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목숨 또한 따라서 떠나는 것이다.
호흡이 이미 무상하고 목숨 또한 견고하지 않으므로 애착ㆍ아견ㆍ자만 등이 저절로 생기지 않게 된다.
또 수행자가 한마음으로 호흡에 의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고서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애착이기도 하다(亦愛)’고 하며,
무상을 깨닫기 때문에 ‘다스림이기도 하다(亦策)’고 한다.
선정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루이기도 하다(亦有漏)’고 하고,
관행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기도 하다(亦無漏)’고 한다.
또한 호흡을 셀 때에는 어둡고 우매한 마음으로 세기 때문에 비추어 깨닫는 바가 없다. 따라서 선정을 증득할 때에도 마음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호흡을 따르는 법은 곧 밝은 마음으로 호흡을 관조하는 것이므로 선정을 증득할 때 마음의 눈이 밝게 열려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고 애착ㆍ아견ㆍ자만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흡을 세는 법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이다.
셋째, 호흡의 장단을 아는 것은 욕계정을 대치하는 것이다.
욕계정에 들었을 때에는 선정의 마음이 밝고 깨끗하나 도무지 호흡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선정에서는 들어오는 숨이 긴 것과 나가는 숨이 짧은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안에 고요하게 자리해 숨이 마음을 따라 들어오므로 들이쉬면 곧 긴 것을 알고, 마음이 밖을 반연하지 않으므로 내쉬면 곧 짧은 것을 안다.
또한 마음이 세밀하면 호흡도 세밀해지고 호흡이 세밀하면 숨을 들이쉴 때 코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느리며 길어진다. 숨을 내쉴 때도 배꼽에서 코에까지 이르는 것이 미세하고 길어진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면 곧 숨이 들고 나는 것이 아주 급하고 짧아진다.
또한 호흡이 짧기 때문에 마음이 세밀하다는 것을 알고
호흡이 길기 때문에 마음이 거칠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더욱 고요해졌다면 내쉬는 숨은 배꼽에서 시작해 가슴에 이르러 끝나고, 들이쉬는 숨은 코로부터 목구멍에 이르러 끝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은 것이다.
마음이 거칠면 (내쉬는) 숨이 배꼽에서 코에 이르는 것을 느끼며 그 길은 멀고도 길다. 이것은 곧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호흡이 긴 것이다.
또한 (호흡이) 짧은 가운데 길다고 느끼면 곧 선정이 세밀한 것이고,
(호흡이) 긴 가운데 짧다고 느끼면 선정이 거친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이 코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러 끝날 경우에는 행로는 비록 짧지만 그 움직임은 미세하고 느려서 오랜 시간이 걸려야 배꼽에 다다른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짧지만 시간이 길게 걸리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거칠면 코에서 배꼽에 이르는 길이 비록 멀지만 그 움직임이 거칠어 금방 되돌아 나온다. 이것은 지나간 거리는 길지만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할 때 곧 무상함을 알게 되고, 마음의 생멸이 일정치 않은 것을 말미암아 능히 욕계정을 깨트리게 된다.
넷째, 호흡이 온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알아 미도지정을 대치한다.
근본선의 미도지정에서는 몸의 모습이 허공처럼 없어지는 것만 느낄 뿐, 몸과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특승에서는 미도지정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 없어진 듯이 선정에 들어가서 구름이나 그림자처럼 몸이 점점 나타남을 느낀다.
또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온몸의 털구멍까지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닫고, 숨이 들이쉬어도 쌓이지 않고 내쉬어도 흩어짐이 없이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또 몸은 공空이고 가假로서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생멸하며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 가지가 화합해 선정이 생기지만 세 가지가 이미 공하므로 선정은 의지할 곳이 없다.
공을 아는 것 또한 공해 선정 가운데서 집착하지 않으면 곧 근본 미도지정을 타파하니, 애착하고 가책한다는 뜻이 이미 그 가운데 있다.
다섯째,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하는 것은 초선정의 각지覺支와 관지觀支를 대치한다.
수행자가 호흡이 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깨달아 초선을 일으키게 되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냄새나고 더러우며 혐오스러운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보게 된다.
이때 서른여섯 가지 물질은 모두 사대四大로 말미암아 존재하기에 하나하나가 다 아我가 아니고 하나하나가 다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곧 욕계의 몸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욕계의 몸에서 색계의 사대를 구한다면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만약 (색계의 사대가) 없다면 어떻게 색계의 촉감을 느끼며, 만약 있다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끝내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초선의 몸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의 모든 작용을 제거한다고 할 때의) ‘작용(行)’이란 곧 관지觀支이다. 몸이 제거되면 작용 또한 따라서 멸한다.
여섯째, 기쁨을 느끼고, 일곱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초선의 희지와 낙지를 대치한다.
이 선정은 곧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도 그 성품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집착하지도 않아 어떤 허물과 죄도 없다.
그러므로 느낀다(受)고 한다.
여덟째,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은 초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각 등의 사지를 움직이는 작용(動行)이라 하고,
일심지를 움직이지 않는 작용(不動行)이라 한다.
근본선에서 일심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에 애착이 생기지만, 이 선정에서는 이 일심이 헛되고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곧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바르게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홉째,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 것은 제2선의 내정지와 희지를 대치한다.
제2선의 희지는 지혜로 비추어 깨닫는 작용이 없으나 지금 여기에서는 이 기쁨을 관찰하여 곧 헛된 것임을 알고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으로 기쁨을 짓는다고 한다.
열째, 마음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제2선의 일심지를 대치한다.
앞에서 마음으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바르기는 하지만 동요되는 허물이 없지 않다. 따라서 기쁨의 성품이 끝내 공적함을 돌이켜 관찰한다. 그러면 선정심이 산란하지 않고 기쁨을 따라 동요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열한째, 마음이 해탈에 머무는 것은 제3선의 낙지를 대치한다.
제3선에는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이 있어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애착을 일으켜 그것에 묶여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제 관하는 지혜로써 분석하여 타파하면, 온몸에 두루 퍼지는 즐거움을 증득할 때
“이 즐거움은 인연으로 생겨났으므로 공하고 자성이 없으며 헛되고 진실하지 못하다.”고 안다.
이렇게 즐거움을 관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자재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해탈한다고 한다.
열두째, 무상을 관하는 것은 제4선인 부동정을 대치한다.
제4선을 부동정이라 하는데, 범부가 이를 얻으면 대부분 이것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내어 애착하고 취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제 이 선정도 세 가지 모습으로 변천하는 것임을 관하여, 이것이 파괴되며 불안한 모습임을 안다.
그러므로 무상을 관찰한다고 한다.
열셋째,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은 공처정을 대치한다.
나가서 흩어진다는 것은 색을 벗어나서 마음이 허공을 의지해 소멸하고 흩어져 자재함으로써 색법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서 흩어진다고 한다.
범부는 이 선정을 얻을 때 이것이 진실한 공이며 안온함이라 여겨 마음에 집착을 일으킨다.
지금 ‘나가서 흩어짐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처음 허공처정에 들어갔을 때 곧바로
“사온이 화합해 있을 뿐 실제로는 자성이 없어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곧 마음은 세 가지 모습으로 변천하는 것이다.
또 공은 앎이 없는 법이니, 마음이나 공에서 얻을 곳이 없다. 따라서 마음에 애착이 없다.
이를 나가서 흩어짐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열넷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을 관하는 것은 식처정을 대치한다.
무릇 애착이 있으면 모두 욕망이라 한다. 식처정에서는 바깥 법을 여의고 안의 법을 반연하며 공을 여의고 식을 반연하지만 역시 욕망에 대한 집착임을 면치 못한다.
지금 이 선정에서는 이를 능히 관하여 타파한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무소유처정을 대치한다.
불용처정은 무위법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마음이 무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범부가 이를 얻으면 버릴 수가 없다.
지금 “멸함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선정을 얻었을 때 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식이 비록 적긴 하지만 역시 수ㆍ상ㆍ행ㆍ식의 사온이 화합한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니 물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열여섯째,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정을 대치한다.
초선으로부터 각 단계의 선정에서 두루 버리긴 했지만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러 유와 무를 모두 버리니, 이것은 버림 가운데서도 가장 지극한 것이다. 범부가 이를 얻으면 열반이라 여겨 버리지를 못한다.
지금 이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그 법 역시 무상ㆍ고ㆍ공ㆍ무아로서 진정한 열반이 아니라고 관할 수 있다.
따라서 포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고 한다.
근기가 날카로운 이라면 꼭 열여섯 가지를 다 닦을 필요는 없다. 즉 호흡을 따르는 법에서도 무상을 잘 깨달아 곧장 큰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두세 가지를 얻기도 하고 네다섯 가지를 얻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의 근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특승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