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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론 상권
5. 부혁의 말에 대한 답변(2)
다시 부혁의 말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정신(正信)이 대답하기를 『서(書)』에는
“선(善)을 보면 미치지 못하는 듯하고, 악(惡)을 보면 끓는 물을 만지듯 하라”고 하였는데,
태상(太上)의 귀한 덕도 이런 다음에야 세워지게 됩니다.
덕으로써 사람을 돌이키고, 말로써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인데,
부혁이 부덕(不德)하여 허물 많은 몸으로 하는 말마다 교화를 비난하고 대성을 모독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공자와 노자 같은 성인도 스스로 삼보를 찬양하여 도사를 시켜 승니에게 겸양하라 하였는데,
부혁이 공자와 노자를 전수받아 스승으로 삼으면서도, 어째서 스승의 가르침을 거역하여 성인을 욕보이려 듭니까?
부자(符子)도,
“노씨의 스승 이름이 석가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서(子書)』와 『모자(牟子)』 2권을 지어 불법을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내전천지경(內典天地經)』에는,
“부처님께서 삼성(三聖)을 보내어 저 동토를 교화케 하셨으니, 가섭보살을 저쪽에서는 노자라 부른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에는,
“부처님께서 세 사람의 제자를 보내셔서 진단을 교화하셨으니, 유동(儒童)보살을 저쪽에서는 공자라 부르고, 광정(光淨)보살을 저쪽에서는 안회(顔回)라 부르고, 마하가섭(摩訶迦葉)을 저쪽에서는 노자라 부른다”는 내목이 출전됩니다.
『전한서(前漢書)』에 따르면,
“효무제(孝武帝)가 원수(元狩) 연간에 곽거병(霍去病)을 시켜 흉노(匈奴)를 토벌케 하여 고란(皐蘭)을 지나 거연산(居延山)에 이르렀다. 곤야(昆耶)의 휴도왕(休屠王)이 5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였다. 그들에게서 크기가 1장이나 되는 금인을 획득하여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하였다.
무제가 이를 대신(大神)으로 여겨 향을 사르고 예배하면서, 아울러 서역을 개척하고자 장건(張騫)을 대하국(大夏國)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신독국(身毒國)이 있는데, 신독국은 일명 천축(天竺)이라고도 합니다’라고 하였기에,
부도(浮圖)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합니다.
『위서(魏書)』에서는,
“한나라 무제가 금인을 얻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단지 향을 사르고 예배하였을 뿐인데도, 이로부터 불교가 차츰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원년에 경헌(景憲)을 대월지국(大越氏國)에 보내어 부도경(浮圖經)을 읽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한 나라 당시에는 때때로 부도에 재계(齋戒)를 행하였다.
장제(章帝) 때에 이르러서 초왕(楚王) 영(英)이 부도(浮圖)를 좋아하여 재계하면서 누런 비단과 흰 비단 30필을 기증하여 속죄하였다.
나중에 초왕에게 조칙(詔勅)이 내렸는데,
‘초왕이 부도의 인사(仁祀)를 숭상하여 정갈하게 석 달 동안 재계하면서, 신에게 서약하였다니, 참으로 미덥구나’라고 하였다.
환제(桓帝)의 때에는 양해(襄楷)가
‘불타와 황노(黃老)를 주상에게 간언 올리니, 생명을 아껴서 살생을 멀리하고 욕심을 줄여서 무위를 숭상하십시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후한서』에는,
“효명제(孝明帝) 영평(永平) 3년에 주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목에 일월의 빛을 걸고 궁전으로 날아들어 왔기에 여러 신하에게 이를 물어 보자,
통인(通人) 부의(傅毅)가
‘신이 듣자 하니, 서역에 신이 있다는데,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답니다. 폐하께서 보신 것이 이것이 아닐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명제가 바로 낭중(郎中) 채음(蔡愔), 중랑장(中郎將) 진경(秦景), 박사 왕준(王遵) 등을 천축에 보내서 그 형상을 그려 오게 하였다. 이에 채음이 사문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동토로 돌아와 낙양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중국에 사문이 있게 된 시초이다”라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후한서』의 「교사지(郊祀志)」에는,
“불(佛)이란 한나라 말로 각(覺)인데, 군생(群生)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 가르침을 개괄하면, 선을 닦되 자비심을 위주로 하여 산 무리를 죽이지 않고 청정하게 노력하는 것이니, 그 정수가 바로 사문(沙門)이다. 이는 한나라 말로 식심(息心)인데, 삭발하고 속가를 떠나 정을 끊고 욕심을 씻어 내어 마침내 무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또 사람이 죽더라도 정신은 멸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몸을 받는다고 하는데, 선악을 행하면 내생에 모두 보응이 있다고 한다. 선을 행하고 도를 닦는 것을 귀히 여기기에, 그 정신을 수련하며, 수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생(無生)에 이르러 성불한다고 한다.
신장이 1장 6척인데다 황금색으로 정수리에 일월의 광채가 빛나면서 변화가 무상(無常)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어서, 만물에 화통하여 군생(群生)을 크게 제도하게 된다.
경서가 수천 권이나 되는데, 허무(虛無)를 종지로 삼되 정추(精麤)를 포괄하여 통괄하지 않음이 없다.
넓고 뛰어난 언행을 즐겨서 구하는 바를 일체(一體)의 안에 두며, 밝히는 바를 보고 듣는 바깥에 두고서 현미(玄微)로 돌이키기에 참으로 심오해서 헤아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이 생사가 보응하는 시말을 관하게 되면, 그만 아연해져서 낯빛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위서』에는,
“채음이 불상과 경전을 얻었는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과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이었다.
명제가 화공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모사하게 하여 청량대(淸涼臺)와 현절릉(顯節陵)에 안치하였고, 경문(經文)은 난대(蘭臺)의 석실(石室)에 봉안하였다.
채음이 귀환할 때에 백마에다 경전을 실고서 한나라로 왔으니, 이로 인해 백마사(白馬寺)가 낙양의 옹문(雍門) 서쪽에 세워졌다.
그 경전의 요지를 말로 다할 수는 없으나, 생생(生生)의 부류가 모두 행업(行業)에 기인하여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수도(修道)의 차제나 심행(心行)의 등급은 하나 둘이 아닌데, 모두 얕은 데를 연하여 깊은 데로 들어가서는 미묘(微妙)에 빗대어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순(仁順)을 쌓고 기욕(嗜欲)을 줄이는 것에 따르면서 허정(虛靜)을 익혀 통조(通照)를 이룬다는 것이나,
그 수행을 시작하는 마음은 불ㆍ법ㆍ승에 의지하여 삼귀의계(三歸依戒)를 받는 것이다. 삼귀의는 군자의 삼외(三畏)와 같다고 하겠다.
또 오계(五戒)가 있어서 살생ㆍ절도ㆍ음행ㆍ망어ㆍ음주를 끊게 되는데, 큰 뜻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과 같다고 하겠다. 이를 지키면 인간세상이나 천당의 좋은 곳에 태어나서 귀신과 축생 등의 여러 고통을 여의는데, 선악의 처소에도 대체로 6도(道)가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경계하고 몸을 바르게 하고 입으로 망어를 끊는 것을 총괄해서 모두 십선도(十善道)라 한다. 이같이만 할 수 있으면, 가까이는 천당의 과보를 얻고 멀리는 보리(菩提)를 얻게 된다.
부처는 사월 초파일 밤에 성모(聖母)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는데, 그 연대는 주나라 소왕(昭王)ㆍ노(魯) 나라 장공(莊公)의 시대에 해당한다. 형상이 남과 달라서 32상(相)이 있는데다, 하늘에서 서응이 내려 이에 응하는데, 여기에도 서른두 가지가 있다.
부처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향나무로 화장하여 영골(靈骨)을 나눴는데, 크기가 쌀알만 하고 색이 붉은 빛 도는 흰색인데다 내리쳐도 깨지지 않고 태워도 타지 않는다. 매번 광명을 발하면서 신비로운 영험이 있었다.
부처가 멸도한 뒤 1백16년 후에, 아육왕(阿育王)이 위신력으로 부처의 사리를 나누고 귀병(鬼兵)을 시켜 8만 4천 개의 탑을 이룩하였는데, 지금 낙양(洛陽)ㆍ팽성(彭城)ㆍ부풍(扶風)ㆍ촉군(蜀郡)ㆍ고장(姑藏)ㆍ임치(臨淄) 등에 모두 이 같은 탑이 있으니, 한결같이 신비롭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에는,
“명제가 바로 낭중 채음ㆍ중랑장 진경ㆍ박사 왕준 등의 18인을 사신으로 천축국에 보내자, 섭마등 스님 등과 함께 석가의 입상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우전왕(優塡王)의 네 번째 사(師)가 만든 것이다.
명제가 섭마등에게
‘법왕이 세상에 나오셨는데, 어째서 그 교화가 이곳에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묻자,
마등 스님이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은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백억 개 일월세계(日月世界)의 중심인지라, 삼세의 제불(諸佛)이 모두 여기서 출세하시기에, 하늘ㆍ용ㆍ귀신으로 원행력(願行力)이 있는 이는 물어 볼 것도 없이 모두 여기로 태어나 부처님의 바른 교화를 받고, 이에 감득(感得)하여 도를 깨닫는데, 다른 곳의 중생은 부처님께 감득할 만한 연(緣)이 없기에 부처님께서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가시지 않더라도 광명이 미친 곳에는 5백 년이거나 천 년이거나 천 년이 지나더라도, 모두 성인이 나타나 부처님의 성교(聲敎)를 전도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영평 14년 정월 초하루에는, 오악(五岳)의 여러 산의 도사들이 조례(朝禮)를 지내다가 서로 돌아보며,
“지금 지존(至尊)께서 우리의 도법(道法)을 버리고 멀리 오랑캐의 가르침을 구하시는데, 우리들이 지금 조례를 시작으로 각기 태상천존(太上天尊)이 제작한 경서를 가지고, 각자 힘닿는 대로 모두 표(表)를 올리자”고 말하면서,
이렇게 상주하였습니다.
“오악 열여덟 산관(山觀) 태상삼통(太上三洞)의 제자로써 저선신(褚善信)을 위시한 6백90인이 죽을죄를 각오하고 주상께 아룁니다.
신들이 듣자 하니, 태상(太上)은 무형(無形)이고 무명(無名)이고 무극(無極)이고 무상(無上)이시니, 바로 허무자연대도(虛無自然大道)의 원수(元首)이십니다. 스스로 조화에 따라 도덕이 생겨나기에 무상과 무위의 지존이시고, 자연의 아비이십니다. 상고시대에는 한결같이 받들어 백왕(百王)이 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도가 희황(羲皇)에 이르시고 덕이 요순(堯舜)을 지나쳐서 사해(四海)가 빛나고 팔표(八表)가 어짊에 귀순하기에, 신들도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근본을 버리시고 지엽을 따르시어 서역의 가르침을 구하시는데, 신들이 보건대 서역에서 섬기는 것은 오랑캐의 신인지라, 말조차 중국과 맞지 않기에, 다시 오랑캐 나라 사람을 청하여 그 말을 번역하여 한어(漢語)와 비슷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신들이 헤아리건대, 폐하께서 비록 이를 번역하시더라도 이는 대도(大道)가 아니기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신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함께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신들은 오악의 여러 산관의 도사들인지라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면서 경전에도 해박합니다. 원황(元皇) 이래로 태상경행(太上經行)을 모두 터득하였고, 태허(太虛)의 부주(符呪)에도 모두 통달하였으니, 혹 부록(附籙)을 삼켜 기(氣)를 먹기도 하고, 혹 방책(方策)을 써서 귀신을 부리기도 하며, 혹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타지 않고, 혹 물을 밟더라도 빠지지 않고, 혹 백일승천하기도 하고, 혹 형체를 땅에 감추기도 하는지라, 방약(方藥)과 법술(法術)에도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들이 비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첫째는 성상의 뜻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고,
둘째는 진위를 가리고자 함이고,
셋째는 대도로 돌이키고자 함이고,
넷째는 화하의 풍속을 잡스럽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신들이 만약 서로 비교해 보아 여의치 못하다면, 주상의 엄중한 판결에 맡길 터이나, 만약 신들이 서로 비교해 보아 이긴다면 헛된 것을 없애 주십시오.”
마침내 칙령이 내려져 상서령(尙書令) 송상인(宋庠引)이 장락궁(長樂宮)에 들어가
“이달 보름 백마사 남문 밖에 모이라”는 조칙을 전하였습니다.
이에 도사들이 단(壇) 세 개를 함께 설치하였는데, 단마다 별도로 24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남악(南岳)의 도사 저선신을 위시한 70인이 영보진문(靈寶眞文)ㆍ태상옥결(太上玉決:태상통현영보적서옥결경)ㆍ공동(崆峒)ㆍ영장(靈章)ㆍ승현(昇玄)ㆍ보허(步虛:통현영보옥경산보허경)ㆍ태상좌선인청문(太上左仙人請問)ㆍ자연오칭(自然五稱:태상무극대도자연진일오칭부상경)ㆍ제천내음(諸天內音:태상영보제천내음자연옥자) 등의 경 1백3권을 모았습니다.
화악(華岳)의 도사 유정념(劉正念)을 위시한 70인이 지혜정지(智慧定志:태상통현영보지혜정지통미경)ㆍ지혜상품계(智慧上品戒:태상통현영보지혜죄근상품대계경)ㆍ선인청문(仙人請問)ㆍ본행인연(本行因緣:고상옥황본행집경)ㆍ명진과(明眞科:대도통현영보장야지부구유오궤명진과) 따위의 경 62권을 모았습니다.
항악(恒岳)의 도사 환문도(桓文度)를 위시한 70인이 본업상품법과(本業上品法科)ㆍ죄복명진과(罪福明眞科)ㆍ재의(齋儀:태상황록재의)ㆍ태상통현진문(太上洞玄眞文) 등의 경 80권을 모았습니다.
대악(岱岳)의 도사 초득심(焦得心)을 위시한 70인이 제천령서도명(諸天靈書度命:제천영서도명묘경)ㆍ구천생신장(九天生神章:영보자연구천생신장경)ㆍ태상설극(太上說極:태상노군설상청정경)ㆍ태허자연(太虛自然:태상노군허무자연보기경)ㆍ멸도오련생시도(滅度五練生屍度:태상통현멸도오련생시묘경)ㆍ자연권의(自然券儀:통현영보자연권의) 등의 경 85권을 모았습니다.
숭악(嵩岳)의 도사 여혜통(呂慧通)을 위시한 1백40인이 태상안지상품(太上安志上品)ㆍ삼원품계(三元品誡:태상통현영보삼원품계공덕경중경)ㆍ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ㆍ신선본기내전(神仙本起內傳)ㆍ복어오아립성(服御五牙立成:통진태상청아시생경)ㆍ조석조례(朝夕朝禮) 등의 경 95권을 모았습니다.
곽산(霍山)ㆍ천목산(天目山)ㆍ오대산(五臺山)ㆍ백록산(白鹿山) 등 열여덟 산의 여러 산관의 도사들로 기문신(祁文信)을 위시한 2백70인이 태극진인부령보문(太極眞人敷靈寶文:태극진인부영보재계위의제경요결)ㆍ태상통현령보천문(太上洞玄靈寶天文) 및 오부경(五符經)ㆍ보허문(步虛文)ㆍ신선약법(神仙藥法:신선복이단석행약법)ㆍ시해품(尸解品)ㆍ상천부록칙금(上天符錄敕禁) 등의 경 85권을 모았으니, 모두 합쳐서 5백69권이었는데, 이를 서단(西壇)에 안치하였습니다.
다시 모성자(茅成子)ㆍ허성자(許成子)ㆍ열자(列子)ㆍ황자(黃子)ㆍ노자(老子)ㆍ장자(莊子)ㆍ혜자(惠子) 등 도합 27가(家) 제자(諸子)의 경서가 모두 2백35권이었는데, 중단(中壇)에 안치하고 찬식(饌食)ㆍ존사(奠祀)ㆍ백신(百神)을 동단(東壇)에 안치하였습니다. 마침내 명제가 칠보행전(七寶行殿)을 백마사 남문 바깥에 설치하고 서쪽으로 부처님의 사리 및 경전과 불상을 안치하였습니다.
보름간의 재를 마치자, 도사들이 자적(紫荻)과 전단(栴檀)과 침수향(沈水香)을 서단의 경교(經敎) 위에 쌓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고하였다.
“신들이 태상무극대도원시천존(太上無極大道元始天尊)과 중선(衆仙)의 백령(百靈)께 아뢰오니, 지금 오랑캐 나라의 신에게 화하의 주상이 현혹되어 삿된 것을 믿는지라, 정교가 실종되고 현풍(玄風)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신들이 삼가 삼오보강(三五步剛)의 법에 의지하여, 감히 경전을 단상에 놓아두고 불로써 시험하고자 하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적을 널리 펴서 진위를 가리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경선에 불을 붙였으나, 경전이 그만 불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사들이 경전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는데, 예전에 승천하였다는 이가 다시 승천하지 못하고, 예진에 몸을 감출 수 있었던 이가 다시 감추지 못하고, 예전에 불 속에 들어갔었다는 이가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예전에 금주(禁呪)에 능했다는 이가 귀신을 불러도 호응이 없었다.
예전에 갖가지 공능(功能)이 있었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징험(徵驗)이 없었기에, 마침내 여러 도사들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이 때 태부(太傅) 장연(張衍)이 저신(褚信)에게,
“그대들이 지금 시험해 보았어도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이는 허망한 것이기에, 마땅히 서역의 진법(眞法)을 따라야 하겠노라”고 말하자,
저신이 대답조차 못했는데, 남악의 도사 비숙재(費叔才)는 대중 앞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때마침 부처님의 사리에서 오색의 광명이 나투어 공중에서 도는데 마치 보개(寶蓋)처럼 대중을 둘러싸서 해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마등 법사는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기에, 자비의 어진 힘으로 몸을 솟구쳐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자유로이 서고 눕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웃으며 앉아 있었는데, 이때에 하늘에서 꽃비가 불전(佛殿)과 스님들 위로 내렸습니다.
다시 하늘에서 여러 가지 음악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였기에, 대중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모두들 신기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마침내 축법란 법사가 대중 사이에서 이같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여우는 사자와 짝하지 못하고
등잔은 일월처럼 빛나지 못하네.
연못에 바닷물을 담지 못하고
언덕은 숭악(嵩岳)처럼 드높지 못하네.
법운(法雲)이 세계에 드리우니
선법(善法)의 씨앗이 싹을 틔워
희유한 법을 드러내어
곳곳마다 군생(群生)을 교화하네.
이때 대중이 축법란 법사를 수백 겁으로 에워싸자, 법사가 다시 범음(梵音)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기에, 마침내 대중이 삼보를 기리고 법보와 승보를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법란 스님이 인도(人道)와 천도(天道) 및 지옥의 인연을 설하기도 하고, 소승의 아비담(阿毘曇)을 설하기도 하고, 대승의마하연(摩訶衍)을 설하기도 하고, 참회멸죄(懺悔滅罪)를 설하기도 하고, 출가의 공덕을 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사공(司空)이었던 양성후(陽城侯) 유선준(劉善峻) 등의 관리와 백성 및 부녀자가 발심하여 출가하였는데, 사악(四岳)의 여러 산관의 도사 여혜통을 위시한 6백20인이 출가하였고, 5품 이상의 관료 93인이 출가하였고, 9품 이상의 진원장군(鎭遠將軍) 강구아(姜苟兒) 등의 1백75인이 출가하였습니다.
또 경도(京都)의 시민이었던 장자상(張子尙) 등의 2백70인이 출가하였고, 명제의 후궁인 음부인(陰夫人) 왕첩호(王婕好) 등의 1백90인이 출가하였습니다. 경도의 부녀(婦女) 아반(阿潘) 등 1백 21인이 출가하였습니다.
열엿샛날에 명제가 문무대신 수백 명과 함께 출가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날마다 공양을 진설하고 밤마다 연등을 밝혀 갖가지 기악(伎樂)을 벌리되, 그믐날까지 행하였고, 법의(法衣)ㆍ정병(淨甁)ㆍ발우(鉢盂) 등을 모두에게 보시하기를 마치자 즉시 열 곳에 사원을 세웠으니, 성 바깥에 일곱 곳의 사찰, 성 안에 세 곳의 사찰을 두었습니다. 일곱 곳의 사찰에는 스님들이 머물렀고 세 곳의 사찰에는 비구니가 머물렀는데, 한나라의 불법이 이때부터 흥기하였습니다.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은 모두 5권입니다.
제1권 명제득몽구법품(明帝得夢求法品)
제2권 청법사입사공덕품(請法師立寺功德品)
제3권 여제도사비교도탈품(與諸道士比校度脫品)
제4권 명제대신칭양품(明帝大臣稱揚品)
제5권 광통유포품(廣通流布品)
『현통기(玄通記)』에 따르면,
“후한 환제(桓帝) 건화(建和) 3년 기축년(己丑年)에 사문 안청(安淸)이 있었는데, 안식국(安息國)의 왕세자였다.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뜻을 포교에 두었는데, 낙양에 와서 경전을 번역해내었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위서』에는,
“문제 황초(黃初) 3년 임인년(壬寅年)에 사문 담마가라(曇摩迦羅)가 있어, 허도(許都)로 와서 계율을 번역해내었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시중(侍中) 부의(傅毅)가 지은 『한법왕이기(漢法王異記)』에는,
“주나라 소왕 27년 정사년(丁巳年)에 부처님이 탄생하셨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오서(吳書)』에는,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 신유년(辛酉年)에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있었는데, 강거국(康居國) 대승상(大丞相)의 아들이었다. 오나라 땅에 와서 초옥을 짓고 불상을 안치하여 도를 행하였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이를 처음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신고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부처님께는 어떠한 영험이 있는가’라고 묻자,
승회가
‘부처님께서 신령스러운 자취를 거두신 지 이미 천여 년이 넘었으나, 사리를 남기셔서 헤아릴 수 없이 응현(應現)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만약 사리를 얻게 되면 마땅히 탑을 세우겠노라’고 대답하였다.
21일이 지나자 마침내 사리를 얻었는데 오색이 영롱하여 쪼개려 하면 더욱 단단해지고 태워도 타지 않으면서, 광명이 큰 연꽃처럼 일어나 궁궐을 환히 비추자, 오나라 임금이 기적에 감탄하면서 마침내 신심을 내었다. 이에 건초사(建初寺)를 지어 사람들이 득도 출가하게 되었다.
오나라 임금이 상서령(尙書令) 도경후(都卿侯) 감택(闞澤)에게
‘한나라 명제 이래로 몇 년이 지났는가’ 하고 묻자,
감택이
‘영평 10년에서 지금의 적오(赤烏) 4년까지가 1백75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불교가 한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는데, 어떠한 인연으로 이제야 강동(江東)에 이르렀는가’ 하고 말하자,
감택이
‘영평 14년에 오악의 도사가 마등 스님과 힘을 겨뤘으나, 도사들이 지게 되자, 남악의 도사 저선신과 비숙재 등이 스스로 목매어 죽었는데, 문도 제자들이 저들을 남악에 장사지내고 문도의 출가를 단속하였기에 유포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한나라 조정이 병란에 시달려 그칠 새가 없었기에,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야 창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다시
‘공구와 노자를 부처님께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하고 묻자,
감택이
‘신이 살펴보건대, 노나라의 공구는 재주가 특출나게 뛰어나고 성덕이 비할 데 없어서 세간에서는 부르기를 소왕(素王)이라 합니다. 경전을 제작하고 주나라의 도(道)를 기려서 후대까지 전하였으니, 사유(師儒)의 풍화(風化)가 고금에 빛납니다.
다시 일민(逸民)이 있으니, 허성자(許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 등과 같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도 모두 수신(修身)하여 자족하면서 산과 골짜기로 다니며 그 뜻을 마음껏 하는 것인데, 그 학(學)이 담박(淡泊)으로 귀착되고, 일마다 인륜과 장유(長幼)의 세절(世節)에 어긋나는지라, 이 또한 세상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풍화가 아닙니다.
한나라 경제(景帝)에 이르러서 황자(黃子)ㆍ노자(老子)의 의체(義體)가 특별하게 깊어지자, 자(子)라는 칭호를 경(經)으로 고치고 비로소 도학(道學)이 세워졌으며 조야에 칙령을 내려 이를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노자의 이가(二家)를 불법에 비길 수 없으니, 그 이유는 공자와 노자가 세운 가르침이란 하늘을 본받아 쓰임새를 정하는 것이라 하늘을 어기지 못하나, 제불이 세운 가르침은 하늘조차도 받들어 행하면서 감히 부처님께 거역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로 견주지 못함이 분명하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오나라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감택을 태자의 태부(太傅)로 삼았다”는 대목이 출전됩니다.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일찍이 궁궐의 서쪽에 부도를 허물려고 하자, 외국의 사문이 금쟁반에 물을 담아 대전(大殿) 앞에 놓아두고 사리를 물속에 집어넣자, 그만 오색의 광명이 일어났습니다. 명제가 기적에 감탄하며 대도(大都)의 동쪽에 넓은 집 백 칸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았습니다.
원위(元魏)의 태조 천흥(天興) 원년에 조칙을 내려,
“불법이 일어난 것은 그 연유가 오래이다. 이롭게 제도하는 공이 생사를 명조(冥助)하는데, 신령스러운 자취로 궤범(軌範)을 남겼기에 참으로 의지할 만하다”고 하면서,
경읍(京邑)에 궁사(宮舍)를 짓되 잘 꾸미도록 명하고 신도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이 해부터 5층 부도와 기사굴산(耆闍崛山) 및 수미산전(須彌山殿)을 지으면서 장엄하게 치장하게 된 것입니다. 별도로 강당과 선방 및 사문의 거처도 지었는데, 어느 하나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사적을 찾아보면 통유(通儒)마다 불법을 거론하면서 지극히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부혁의 삿된 소견은 대체 무엇에 연하기에 이리도 죄를 자초하는 것입니까?
위나라 세조(世祖)도 즉위하자, 태조와 태종의 업을 이어받아 매번 덕망 높은 사문을 초빙하여 함께 토론하였습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불상을 받쳐 들고 큰 거리를 행진하였는데, 세조가 친히 문루(門樓)에서 이를 참관하며 꽃을 뿌리고 예배하였습니다.
사문 혜시(慧始)는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혁연창(赫連昌)이 장안을 점거하였을 때, 혜사 스님이 칼을 맞았으나 몸에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50여 년간을 장좌불와(長坐不臥) 하였는데, 진흙탕을 밟아도 발에 티끌 하나 묻지 않고 도리어 발이 더욱 깨끗해졌기에, 세간에서는 ‘백각아련야(白脚阿練若)’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국왕이 스님을 존중하여 불법을 일으켰는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그 몸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위나라 태무제(太武帝) 때에, 최호(崔晧)가 사도(司徒)가 되었는데, 불법을 믿지 않았는지라 매번 무제에게 불법을 욕하곤 하였습니다. 개오(蓋吳)가 관중(關中)에서 난을 일으키자, 이때를 타서 최호가 진언을 올렸는데 이로 인해 불법이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도사의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가 최호와 힘들게 쟁론을 벌였으나 최호가 이를 따르지 않자,
마침내 구겸지가
“경(卿)은 금년에 멸문(滅門)의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에 태무제가 온몸에 종기가 나서 아픔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군신이 모여 의논하기를,
“최호가 망령되게 불상을 부쉈는데, 폐하의 병환이 필시 이에 연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최호는 나중에 주살(誅殺)되면서 다섯 가지 형벌을 고루 받았는데, 이처럼 악업을 쌓아 끝내 재앙을 입는 것이 어찌 불쌍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이처럼 원위(元魏)의 군주가 임한 것이 17제(帝) 1백79년간인데도, 오직 칠팔 년 동안만 불법이 황폐되었고, 그 나머지 때에는 모두 혁혁하게 빛난 것이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흥광(興光) 원년에는 다섯 곳의 큰 사찰마다 태조 이래로 다섯의 제왕이 불상 5구를 주조하였는데, 각각 크기가 1장 6척이었고 황금 25만 근을 사용하였습니다.
태화(太和) 원년에는 방산(方山)에서 태조가 성채를 경영했던 곳에 사원사(思遠寺)를 건립하였습니다.
정광(正光) 원년 세차(歲次) 경자년(庚子年) 7월에는 명제(明帝)가 조복(朝服)을 보태고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습니다.
같은 달 23일에는 승니와 도사와 여관(女官)을 청하여 대전(大殿) 앞에서 재를 마련하였는데, 재를 마치자, 명제가 시중(侍中) 유등(劉騰)에게 칙령을 내려 법사에게 도사와 함께 토론하여 제자의 의심을 풀어 주도록 청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청통관(淸通觀)의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의 법사 담모최(曇謨最)가 가장 논변에 능했었습니다.
명제가
“부처님과 노자는 시대가 서로 같은가” 하고 묻자,
강빈이
“노자가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로 화하였으니, 부처의 시대는 시자(侍子)를 담임하는지라, 동시대가 분명하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법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자,
강빈이
“『노자개천경(老子開天經)』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법사가
“노자는 주나라 무슨 왕 몇 년째에 태어났으며, 주나라의 무슨 왕 몇 년에 서쪽으로 들어갔는가” 하고 묻자,
강빈이
“주나라 정왕(定王)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을묘년(乙卯年)에 초나라 진군(陳郡)의 고현(苦縣) 여향(厲鄕)의 곡인리(曲仁里)에서 9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며, 주나라 간왕(簡王)이 즉위한 지 4년째 정축년(丁丑年)에 주나라의 수장사(守藏史)로 근무하다가 주나라 간왕이 즉위한 지 13년째 경술년(庚戌年)에 태사(太史)로 승진하였다.
주나라 경왕(敬王)이 즉위한 원년 경진년(庚辰年)에 나이 85세였는데, 주나라의 덕(德)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산관령(散關令) 윤희(尹喜)와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로 화현하였으니,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법사가
“그렇다면 부처님은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사월 초파일에 태어나셨고, 목왕 52년 2월 12일에 멸도하신 것이 되니, 열반하신 때를 계산해 보면 무려 3백40년이나 흘렀다.
바야흐로 경왕 3년째에 이르러 노자가 태어났다고 했는데, 나이가 85세가 되던 해가 경왕 원년에 다다른다면 대체로 4백25년이나 흘러서 윤희와 서쪽으로 숨은 것이 되니 이에 대해서는 햇수나 달수가 현격하게 다르며 말마다 같지 않으니, 어찌 거짓이 아닌가?”라고 반박했습니다.
강빈이
“만약 부처님이 태어난 것이 주나라 소왕 때인 것이 어떠한 글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고 묻자,
법사가
“『주서이기(周書異記)』에 나와 있는데, 『한법본내전』에는 그 글이 더욱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강빈이
“공자야말로 법을 제정한 성인인데, 당시에는 부처님에 대해 기록된 글이 없다”고 말하자,
법사가
“그대는 식견이 어찌 이리도 좁은가. 살펴 보되 넓고 깊지가 못하구나. 공자의 삼비십경(三備十經)이 있는데 말하자면 천ㆍ지ㆍ인을 말한다. 부처님에 대한 말도 이 가운데 완비되었다. 그대 스스로 잘 살펴보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강빈이
“공자는 성인인지라 말하지 않고도 아는데, 어떻게 점을 쳤겠는가?”라고 말하자,
법사가
“오직 부처님만이 중성(衆聖)의 왕(王)이시고 사생(四生)의 어른이신지라, 일체 중생의 과거와 미래 두 가지에 통달하시어 길하고 흥한 시말(始末)은 점을 치지 않고도 보신다.
다른 성인들이 안다 하나 그와 같은 이치가 없으니, 반드시 시(蓍)ㆍ구(龜)에 의지해야만 영괘(靈卦)로써 통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명제가 시중 상서령(尙書令) 원(元)을 보내어 칙령을 선포하여 도사에게 전하기를,
“강빈의 말에는 종지가 없도다. 빈에게 묻나니, 『개천경』 은 어디서 얻었으며, 누가 이를 말했는가” 하고 캐묻게 하였습니다.
즉시 중서시랑(中書侍郎) 위수(魏收)와 상서랑(尙書郎) 조형(祖瑩) 등을 보내어 그 경전을 가져다 살펴보게 하면서, 황제가 관리에게 이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태위(太尉) 단양왕(丹陽王) 숙종(蕭綜)과 대부(太傅) 이식(李寔)과 위위경(衛尉卿) 허백도(許伯桃)와 이부상서 형만(刑巒)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등의 1백70인이 정독을 마지고,
“노자는 5천문(千文)을 저술한 것뿐이라 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의논해 보니, 강빈의 죄는 대중을 현혹시킨 것에 해당하는지라, 황제께서 지금 강빈을 극형에 처하십시오”라고 상주했습니다.
그러나 삼장법사(三藏法師) 보리류지(菩提流支)가 간절하게 탄원하였기에, 그만 형을 중지하고 마읍(馬邑)으로 귀양 보냈었습니다.
흥광(興光) 이후에 경읍이나 사방의 여러 사찰에는 새로 지은 것이나 오래된 것을 막론하고 모두 6천4백78개소가 있었고, 승니는 7만7천2백58인이 있었는데, 심지어 응사조(鷹師曹)를 보덕사(報德寺)로 개수한 예도 있었습니다.
위나라의 천하가 선양(禪讓)되기까지를 고찰해 보면, 불경이 전해져 중국에서 편집된 것이 대체로 4백15부 도합 1천9백19권이고, 승니의 숫자를 대략 계산해보면 2백만 명에 이르고, 사찰은 3만여 곳이나 있었습니다.
이때 세상은 평화롭고 인민은 풍요로웠으며, 승니의 대중이 많았어도 계율을 어기는 이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영가(永嘉)에 남쪽으로 천도하여 진나라 세상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 상교가 동토에서 일어났으나 미처 성행하지는 못했는데, 명승(名僧)과 고덕(高德)이 출현하여 이로움은 더욱 늘었습니다. 당시의 임금들은 빛나고 칭찬받을 만했으며, 흉악한 무리들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