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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2권
1. 삼교치도편 ②[3]
[유생, 도교의 효용]
그 유생(儒生)이 황연(怳然)하게 깨달아서 대답할 바를 모르고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어찌 이와 같습니까? 어찌 이와 같습니까?
내가 들으니 『도덕경』의 두 편은 역대의 임금들이 종앙(宗仰)하였으며 특히 한나라 문제와 위나라 무제는 친히 스스로 닦아 행하였다 합니다.
『통현경(洞玄經)』에
‘오천의 글자는 도덕의 조종(祖宗)이어서 참 가운데의 참이다. 1만 번을 외우면 몸이 날아간다’고 합니다.
선학자(仙學者)들이 의논하기를
‘이로(李老)의 무위(無爲)의 바람을 펴면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고,
공자[孔丘]의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를 행하면 천하가 효자(孝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학문이 우수하고 견해가 원대하며 말이 흐르는 물과 같이 유창하니 간청합니다.
들은 것을 기술하여서 감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과 같게 해 주십시오.”
[통인, 도교는 세속의 가르침이다]
통인이 말하였다.
“학문은 옛 것을 스승으로 삼지 아니하면 세상에 길이 할 수 없다 하였으니 선대의 어진이와 선비들이 누군들 스승으로 인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숭상하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총지(總持)의 보살[開士]이라 합니다. 현재 다섯 가지의 탁한 세상에 나서 이에 네 가지 의지를 이었으니, 비록 섭복(鍱腹)의 기이한 재주가 있는 이라도 들으면 문득 혼을 잃고 뿔을 꺾어서 웅변(雄辯)하는 이라도 보면 곧 입술을 다물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다섯 대의 수레에 종합하였으며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장(藏)에 꾸려서 작작(綽綽)하게 여유가 있고 글의 내용과 수식이 서로 알맞게 갖추어져 볼 만합니다. 그래서 뜻이 서로 맞는 화려하게 수식한 말[蘭言]은 하늘에서 받았고 기민한 정신은 자연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높은 이름은 상경(上京)에서 발하고 아담한 격조(格調)는 하국(下國)에서 유행하였습니다. 등을 전함은 뜻에 있고 대들보와 기둥은 마음에 있소. 금(金)에 붙이는 업(業)이 이루어지고 법을 보호하는 공이 멀리 전파되기에 아름다운 소리가 만우(萬宇)에 떨쳤고 옥과 같은 여유는 6유(幽)에 뻗쳤습니다.
그러므로 노씨(老氏)의 종원(宗源)을 두루 자세히 연구하여서 그대를 위하여 스승이 되어 의논하겠습니다.”
이에 함께 기원(祇園)에 나가서 보살에게 정례(頂禮)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품은 것을 모두 진술하였다.
보살이 청하지 않은 마음을 운반하고 걸림이 없는 말을 놓아서 돌아보며 말하였다.
“찾아보니, 태고(太古) 때는 무위(無爲)여서 그들의 백성이 소박하여 인의(仁義)를 숭상하지 아니하고 위엄과 용모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의복은 6장(章)을 쓰지 않았으니, 음식인들 어찌 다섯 가지의 맛을 조절하였겠는가?
그런데 세상의 운수가 변혁으로 옮겨 가고 시절이 흘러 움직임으로부터 순수한 근원이 한 번 변함에 시끄러운 물결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미 서술하는 것을 결승(結繩)에서 잃었고 인하여 세상의 풍속을 서계(書契:나무에 새기던 문자)로써 비추었으며, 『팔삭(八索:古書의 이름)』이 이를 반연하여 지어지고 『구구(九丘)』가 이로부터 일어났다.
헌원(軒轅)씨가 정치를 하면서부터 순수한 풍속이 문득 숨고 자못 성색을 다투게 되었으니 겸하여 사냥함을 좋아했기 때문에, 미쳐서 드디어 은자 용성(容成)을 감동하게 하여서 오천문(五千文)을 짓게 하였다. 그것은 도덕의 순수함을 밝히고 무위의 다스림을 서술하여서 근원에 돌아오게 하고 순박한 데 돌아오게 하며 하나를 안고 자(雌)를 지키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다섯 가지의 색깔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의 음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의 맛이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어기게 하고
사냥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다.
왜냐하면 만 승(乘)의 임금이 몸으로써 천하를 가볍게 보니, 가볍게 여기면 신하를 잃고 조급하게 날뛰면 임금의 도리를 잃기 때문이다.
잘 가는 자는 수레바퀴의 자취가 없고
말을 잘 하는 자는 하자(瑕疵)가 없고
계획을 잘 하는 자는 책략을 쓰지 않고
잘 닫음은 자물쇠가 없고 잘 맺음은 노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림이 태(泰)라고 한다.
[심하다 함은 소리와 색에 탐음(貪淫)하는 것이다. 사치하다 함은 복식과 음식을 말하는 것이고, 태라 함은 궁실과 대사(臺榭)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버리고 중화(中和)에 처해서 무위를 행하면 천하가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결과가 있어도 자랑하지 말며,
결과가 있어도 뽐내지 말며,
결과가 있어도 교만하지 말며,
결과가 있어도 강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까닭을 상고하여 보면 다만 물정(物情)을 금지하여 억누른 것이니,
가까이는 세속의 가르침은 되지만 번뇌의 근본과 죽음의 뿌리는 끊지 못하였다.
찾아보니, 황제(皇帝)의 때에는 의상을 드리우고 궁실을 경영하고 소리를 숭상하고 색을 숭상하며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임금이 교만하고 사치하며 아래의 백성들이 노역(勞役)하였으니, 용성(容成)이 때를 인하여 이러한 요점을 기술한 것이다.
비록 공동산(崆峒山)에서 도를 물었다고 하나 어찌 짚신[躧]을 벗어 버리듯 하였겠는가?
정호(鼎湖)에서 가볍게 들려졌는데도 도리어 교산에서 장사지냈으며,
조용히 처하여서 초연(超然)하였다 함에 이르러선 아직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유생, 왜 세속의 교훈이라 비하하는가]
그 유생이 말하였다.
“대저 『오천문(五千文)』의 글은 도덕의 심오한 데를 더듬어서 옛 것을 순종하여 순박한데 돌아가는 태화(太和)를 이룸이니, 허하고 고요한 것을 귀하게 여겨 참을 지키고 지극한 말을 법도로 하여 근본을 높입니다.
그의 글은 넓고 넓어서 크고 원대하며 그의 가르침은 담박하여 부드럽고 약합니다.
이름과 이익을 버리고 홀대(忽待)하여 세상에서 숨고 성인의 지혜가 마음에 남아서 공을 이룹니다.
자기 몸에 있지 아니하여 만물의 그윽함을 연구하고 뜻이 성인의 풍화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고(班固)와 양웅(楊雄)은 자장(子長)의 여섯 가지의 경보다 먼저 하여서 유교의 우두머리에 관(冠)하였으며
숙피(叔皮)와 군산(君山)은 말이 간략하여 지키기 쉬우면서도 쓰임은 유교의 술수보다 더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말할 기회를 알고 도의 미묘함을 알았다 하겠으며 가히 1백 임금이 간행하지 못하였던 경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보살께서는 억눌러서 세속의 교훈이라 하여 세속의 전적과 같이 취급하여 되겠습니까?”
[보살, 할 것과 하지 않을 것]
보살이 말하였다.
“지혜가 큰 자는 벼랑 끝에서도 한가로이 거닐고 그릇이 적은 자는 뜬 마음에서도 쑥같이 날아간다 하였다.
내가 들으니 가히 할 만한 것을 가히 할 만한 세상에서 하면 천하가 함께 하니 이를 가히 할 일이라 하겠다.
이제 그대에게 가히 할 것과 가히 하지 않을 것을 밝혀 보겠다.
무릇 다섯 가지의 색에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이른바 탐음(貪淫)하여 색을 좋아함으로써 정기를 손상하여 눈밝음을 잃은 것이니, 이는 어찌 유마 거사가 말한 보는 색이 눈먼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섯 가지의 소리가 귀머거리가 되게 한다 함은 이른바 음란한 소리를 들으면 기운과 마음의 조화를 손상함이니 능히 소리 없는 음악은 듣지 못할 것이니, 어찌 유마 거사가 말한 듣는 것의 소리가 메아리와 같음이 아니겠는가?
다섯 가지의 맛이 어긋남을 이룬다 함은 이른바 사람이 다섯 가지의 맛을 즐기면 혀가 손해되어 싫어함이 난다 하였으니, 이는 어찌 유마 거사가 말한 먹는 것의 맛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얻기 어려운 재화(財貨)를 귀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도적을 그치게 함이니, 이는 어찌 수(受)가 떳떳함이 없음을 관함이 아니겠는가?
가히 욕심을 쉬어 스스로 고요함을 보지 못하니, 이는 어찌 고요한 것이 아니겠으며, 어찌 몸의 부정(不淨)을 관함이 아니겠는가?
번뇌를 버리어 마음이 비게 하고 정기와 피를 사랑하여 뼈를 강하게 하면 곧 이는 마음에 가히 비움이 있는 것이요, 뼈에 가히 강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운이 흩어지고 형체가 마른 것은 마음을 비움이 아니며 신(神)이 가고 체가 썩는 것은 뼈가 강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예봉(銳鋒)을 꺾는 것은 생각을 내보냄이요, 그의 분쟁을 푸는 것은 싸우려 함이 아니어서 다만 그의 총명을 억눌러서 그의 분쟁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니,
맑고 검소하게 스스로 지켜서 물건과 더불어 혐오당하지 아니함은 대개 선비로서의 뜻이지 달통한 사람의 큰 도량(度量)은 아닐 것이며,
그의 빛을 고루어서 사람을 어지럽히지 아니하고 그와 티끌을 같이 하여 스스로를 구별하지 아니함은 바로 이것이 물결을 드날리고 진흙을 파서 근심을 피하려는 것이니,
이는 능히 이익(利益)과 동사(同事)로써 중생을 교화함은 아니어서 이는 곧 유위(有爲)이고 사(事)는 유사(有事)여서 무위(無爲)와 무사(無事)는 아닌 것이다.
몸으로써 어울리고 물건들이 스스로 어울림을 알지 못하면 곧 어울림이 능히 어울리지 못함임을 알겠다.
형체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분별의 경계에서 바쁜 것은 예를 가히 알만 하겠다.”
[유생, 됴교와 불교의 차이에 관한 질문]
그 유생이 말하였다.
“『안광록(顔光祿)』에
‘도라 함은 선법(仙法)에서 흘러나왔고 부처님이라 함은 근본이 신교(神敎)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도라 함은 반드시 깊고 광활한 데 나가서 비령(飛靈)과 정단(精丹)과 석립(石粒)과 지정(芝精)을 벗합니다. 그러기에 회춘하여 늙음을 물리쳐서 기력을 늘립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 함은 반드시 부모와 처자를 사절하고 몸과 성품을 한가롭게 하며 정각(淨覺)을 스승으로 삼고 인연과 정명(正命)을 믿어서 하나의 무생(無生)으로 돌아와서 극히 성업(聖業)을 이룹니다.
지혜가 큰 밝음보다 멀고 뜻이 항하사(恒河沙)의 겁에 미치니 비록 길은 다르지만 한 가지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또한 무엇이 다르기에 혼자 가려 하겠습니까?
전번에 그들의 다름을 들었습니다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문을 보여주기를 청합니다. 이것은 한 가지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보살, 있음과 없음ㆍ같음과 다름]
보살이 깨우쳐서 말하였다.
“안씨(顔氏)는 한 가지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고 있다.
대저 도교의 체는 무명(無名)이고 무위(無爲)여서 하늘과 땅의 시초이고, 건(乾)과 곤(坤)은 유질(有質)이고 유위(有爲)여서 만물의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도교는 시초에 나오지 아니한 것이어서 물건이 없다가 이제 있는 데 의뢰하는 것이니,
이것은 문득 본래 없던 것이 이제 있었고 이미 있었던 것이 도로 없어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있고 없는 사이에 얽매이고 시초와 어머니[母]의 안에 생성된다 하겠다.
간청하건대, 내가 이를 말하겠다.
진제(眞諦)이기에 없다고 하니 무위는 하늘과 땅의 시초요,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니 유위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능히 생하기 때문에 세제가 되고 시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진제가 되는 것이다.
세제는 유라고 말하니 무가 아니고 유이며,
진제는 무라고 말하니 유가 아니어서 무인 것이오. 무가 아니면서 유이기에 유가 아니면서 유이고, 유가 아니면서 무이기에 무가 아니면서 무인 것이니,
무가 아니면서 유이기에 항상하다는 견해[常見]가 스스로 없어지고
유가 아닌 무이기에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문득 없어지는 것이다.
유가 아니면서 유일 적에 유도 아니고 유가 아님도 아니며, 무가 아니면서 무이기에 무도 아니고 무가 아님도 아니다.
그것이 유라고 말하는 자도 있고 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미 유가 아니라 말하며 유가 아니라고 이르는 것이 아니니,
이는 곧 집착하는 사람은 잃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패함이 있다.
그대가 다른 것이 다름이 됨을 알았지만 다름이 다른 까닭은 알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같음과 다름의 달라지는 까닭을 알겠으며,
다르고 같음의 달라짐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다름과 달라짐의 다른 까닭을 알겠으며,
다르고 다름의 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같고 같음의 달라짐을 알겠으며,
같고 같음의 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같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 한데서 달라짐을 알겠으며,
같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한 데서 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같지 아니함도 아니고 다르지 아니함도 아닌 데서 달라지는 까닭을 알겠으며,
같지 아니함도 아니고 다르지 아니함도 아닌 데서 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같지 아니함이 아니고 다르지 아니함이 아닌 데서 달라지는 까닭을 알겠으며,
같지 아니함의 아님이 아니고 다르지 아니함의 다름이 아닌 데서 다른 까닭을 알겠으며,
같지 아니함의 아니함이 아니고 다르지 아니함의 다름이 아닌 다름을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다르고 같으며 같고 달라서 다름이 없으면서 다르지 아니함의 다른 까닭을 알겠는가?
그러기에 여래의 설법은 항상 2제를 의지하여 자비를 일으키어 중생을 구제하고 희사(喜捨)를 행하여 사람을 제도하여서 중생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이 없으면서 중생을 성취하고 부처의 국토를 깨끗이 하겠다는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면서 부처의 국토를 깨끗이 하는 것이다.
비록 짓는 것이 있어도 실제로는 하는 것이 없나니, 그대가 이를 자세히 하여서 스스로 그릇됨이 없게 하여라.”
[유생, 당파에 관한 질문]
그 유생이 물었다.
“처음에는 세 가지의 가르침을 나열하며 각기 그의 미덕(美德)을 말하더니, 뒤에는 도교를 가져다가 유류(儒流)에 판단하여 들입니까?
태사공(太史公)의 바른 말을 버리고 반생(班生)의 바르지 못한 말을 따랐으니 군자는 당파(黨派)를 짓지 아니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합니까?”
[보살,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
보살이 깨우쳐 말하였다.
“소인(小人)들은 친한 이를 당(黨)으로 하고 군자는 이치를 당으로 한다.
그러니 이치도 맞고 일에 따르면 또한 당을 짓는다 하여 어찌 푸른 하늘에 부끄럽겠는가?
내가 들으니 세간의 법은 글자는 있으나 뜻이 없고 출세간의 법은 글자도 있고 뜻도 있다 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세간의 법은 거짓이어서 마치 노새의 젖과 같고,
출세간의 법은 진실하여서 마치 소젖과 같다 한다.
그런데 노새의 젖은 낙(酪)은 내지마는 소(酥)는 낼 수 없어서 설사 억지로 내더라도 도리어 오줌이 되니 그러한 까닭은 형세와 분(分)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소젖은 소락(酥酪)을 내고 나아가 제호(醍醐)까지 내어서 만들수록 점점 정밀하여져서 오직 향기롭고 오직 아름다워서 다섯 가지가 구족하고 여덟 가지의 맛이 달고 무르녹는다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를 상고하여 보니, 먼저 황로(黃老)를 들고 뒤에 6경(經)을 들었으며
『한서(漢書)』에는 먼저 6경을 들고 뒤에 황로를 들었다.
그들의 견해는 다른 듯하지만 이치에 나가서는 다르지 아니하여 각기 애호(愛好)함을 따랐으니 말을 다한 의론이라 할 수 없다.
또 반고(班固)가 이르기를
‘역(易)에는 예순네 가지의 괘(卦)가 있는데 도교는 겸괘(謙卦)만 들었다’ 하였으며
『예문지(藝文志)』에는 9류(流)를 판정하면서 도교는 한 유(流)에만 들어가 있었다.
공안국(孔安國)이 말하기를
‘3황(皇)이 행한 것을 큰 도라고 이르고, 5제(帝)가 행한 것을 상도(常道)라고 하여서 따로 다시 도교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받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제 그대에게 권하나니 가히 그 억단(臆斷)을 따르지 말고 스스로 그의 진실됨을 구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