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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회귀선
(Tropic of Cancer)
작가와 작품⦁⦁⦁
헨리 밀러(Miller Henry 1891~1980)
헨리 밀러는 이야기를 꾸며 내는 일에는 처녀 무관심한 소설가이다. 북회귀선(1 9 3 4 )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은 스스로의 경험과 사색, 몽상과 망상 에서 일부를 떼어낸 조각들을 생각나는 대로 한 권의 책 속에 담은 듯한 작품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뭔가 혼동되고, 하지만 의미가 있는 듯하고 뜨거운 외침 소리와 같은 것을 앞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은 태어나 자란 뉴욕을 뒤로하고 버스 차장이나 무덤을 파는 인부 등 여러 임시 고용 일을 하며 서부를 방랑한 끝에 1930년대의 몇 년간을 보낸 파리에서의 생활을 충실하게 기록한 글이다. 저자는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파리에 오고 나서 이제 세 번째 가을이다. 나는 돈이 없다. 희망도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반년 전에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는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건 매도이며 큰 모욕이며 신, 인간, 운명, 시간, 사랑 아름다움, 뭐라도 좋다... 어쨌든 그런 것들을 걷어차고 거부하는 것이다. 난 당신을 위해 노래하려고 한다. 조금은 박자가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노래할 생각이다. 제군이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시간에 난 노래한다.
강은 여전히 물의 양을 늘리며 빛의 줄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처럼 어둡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빠른 흐름을 보면 내 내부로 밀려드는 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큰 흥분이 나를 들뜨게 해서, 결코 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속 깊은 희망을 굳히게 만든다. 파리에 봄이 오면 이 세상의 가장 비천한 생물조차도 천국에 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이처럼 파리를 느끼기 위해 부자일 필요는 없다. 시민일 필요조차 없다. 파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전에 이 땅을 으스대며 걸었던 가장 더러운 엄청난 숫자의 거지들은 정말로 고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파리 사람을 다른 여러 대도시의 시민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뉴욕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뉴욕은 부자들조차도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게 한다. 뉴욕은 차갑고 번쩍거리고 심술궂다. 건물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원자적인 착란이다. 끊임없이 끓고 있지만 그것은 시험관 속에서 일어난 일과 다르지 않다. 누구도 그게 어떤 일인지 잘 모른다.
내가 태어난 도시, 휘트먼이 부른 맨해튼에 대해 생각할 때면 맹목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내장을 다 태운다. 뉴욕! 저 흰 감옥, 도시 전체가 허무 위에 ㅅㅔ워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하다. 절대적인 무의미이다.
“인생은 사람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데에 있다”라고 에머슨은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 인생은 커다란 내장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난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한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먹는 것에 관한 꿈을 꾼다.
하지만 난 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맞벌이하느라 부부가 함께 무자위(낮은 곳의 물을 높은 지대의 논이나 밭으로 자아올리는 농기구)를 밟아야 하는 그런 일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난 유럽의 빈민이 되는 걸 택하겠다. 난 충분히 가난하다. 단순히 한 남자라는 것밖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1시 반에 난 약속대로 반 노르덴을 방문했다.
그는 편안히 침대 속에서 자고 있었다. 늘 그렇듯 지쳐서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욕하거나 일과 인생을 저주하면서 눈을 뜬다. 정말 지루하고, 실망스럽고,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걸 억울해하며 눈을 뜨는 것이었다.
나는 창문 곁에 앉아 고작 그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게 꽤 귀찮은 일이다. 아침이 되면 그는 늘 꿈에 잠긴다. 몽상하는 것은 대개 ‘여자 엉덩이’에 관해서다.
“어이.” 그는 말한다. “내가 말이야, 얼마 전에 남의 마누라를 빼앗았는데, 그 여자가 반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다고 털어놓았어. 그런 걸 생각할 수 있겠어? 거참 굉장하더라구! 아무튼 대단했어. 찢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신음하며 헐떡이는 거야. 근데 그 여자 뭐라고 말했을 거 가아? ‘날 사랑해?’라고 묻는 거였어. 난 그 여자 이름조차 모르는데. 난 솔직히 여자가 싫어졌어. 하루 종일 새로운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짓도 이젠 진절머리가 나. 너도 알고 있듯이 이상하게도 난 연애가 되질 않아. 너무 에고이스트라는 얘기겠지. 여자는 내게 단순하게 꿈꾸는 힘을 빌려 줄 뿐이라구. 그뿐이야.”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반 노르덴의 사고는 어느새 그의 영원한 관심거리인 여자로 돌아와 있었다.
“요 얼마 전 밤에 그 여자의 다리를 벌리고 회중전등으로 비춰 보았어. 그때의 내 모습을 네게도 보여 주고 싶었지……. 바로 희극이야.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다 잊어버릴 만큼 거기에 열중해 있었어. 지금까지 그렇게 진지하게 여자의 거기를 들여다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거기에 흥미를 잃게 되더라구. 결국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야. 사실 여자는 다들 거기서 거기잖아. 옷을 입고 있을 때의 여자를 보면 여러 가지를 상상하지. 누구나 개성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양다리 사이에 찢어진 곳이 있을 뿐이지. 내가 거기를 들여다보는 짓을 못 견디게 좋아했던 것도 그게 절대로 무의미하기 때문이야. 성을 신비하다거나 어떻다거나 생각하지만 나는 거기서 ‘무(無)’를 발견한 거지. 단순한 여백이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정말 아무것도 없어.”
딱 일주일 동안 멍청이 상사 녀석의 비위를 맞추고 나서 겨우 일자리가 생겼다.
처음 얼마 동안은 푸념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나머지 생을 자위행위를 하며 보내도 되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여러 재앙에 구두점을 찍는 일이었다. 내가 교정을 하는 여러 참사는 내게 이상한 치료 효과를 가져왔다. 완전한 면역상태, 마법에 걸린 존재, 맹독균이 한창일 때 생명을 완전하게 보장받은 상태를 상상해 보시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지진, 폭발, 폭동, 기근, 충돌, 전쟁, 혁명조차도……. 나는 온갖 병과 재해. 비애와 비참함에 대해 예방접종을 맞았다. 그거야 말로 완전하고 견고한 인생의 극한점이었다. 좁아 터진 구석 자리에 앉아, 내 손을 통해 매일매일 발생하는 세계의 모든 독이 통과해 갔다. 손톱조차 독에 물들지 않았다. 난 완전이 면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악취는 나지 않고 단지 가열된 납 냄새가 날 뿐이었다. 세계가 파열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여전히 이 자리에서 세미콜론을 찍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잔업수당까지 받는 일도 있었다.
동료들은 내가 이렇게 만족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시종 중얼중얼 불평을 했다. 그들은 야심을 품고 있었고 프라이드나 울분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다. 훌륭한 교정 담당자는 야심도 없고 프라이드나 울분도 없다. 훌륭한 교정 담당자는 어느 정도 전지전능한 신과 비슷하다.
교정 담당 최대의 액운은 직책을 잃게 될 위협이다. 말똥을 긁어모으는 일이 직업인 마구간 사람들에게 최대의 공포는 말이 없는 세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평생 말똥 청소로 세월을 보내다니 얼마나 싫을까, 라고 그에게 말한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생활을 그 일에 걸고 있고, 그의 행복도 그 속에 있다면 인간은 똥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가끔은 아내 모나로부터 다음 배로 도착한다는 전보가 올 때가 있다. 항상 전보에는 ‘이사이후미’라고 적혀 있었다. 이 상태가 이미 9개월간이나 계속되지만 도착하는 여객선의 승객 명부에서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심부름하는 아이가 은쟁반에 편지를 담아 가져온 적도 없다. 만일 그녀가 찾아온다면 화장실 바로 옆의 구석방에서 나를 찾을 수 있겠지. 그러고는 단숨에 이 자리는 위생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 유럽에 대해 미국 여자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들은 근대적인 수도 시설 없는 천국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야근한 다음 날, 별로 해야 할 일도 없고 해서 동물원에 갔다. 화려한 페리칸, 얼빠진 눈빛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반점 모양의 날개를 가진 공작,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식사하러 들렀던 카페에서 임신한 여자가 그 큰 배를 하고서도 내 마음을 끌려고 애썼다.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한두 시간 같이 있고 싶은 거겠지. 임신한 여자가 꼬드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유혹에 따랐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계통의 시설에 보내 버리고 다시 이 장사로 돌아올 거예요”라고 여자가 말했다. 내가 점점 흥을 잃어 가는 걸 알아채고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에 갖다 댔다. 배 속에서 꼼지락 꼼지락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이 내 식욕을 앗아가 버렸다.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그들이 치워 버린 것은 7월 4일에 생긴 일이다. 바다 건너에서 찾아온 높은 양반들 중 한 사람이 경비 절약을 결정한 것이다. 교정 담당이라든가 의지할 곳 없이 가련한 타이피스트를 줄이면 그의 왕복 여비와 호화로운 호텔의 체제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실업자가 되면 어찌할 생각인가?”
이것은 끊임없이 내 귀 안에서 울리고 있던 문구였다. 자, 드디어 닥쳤다. 빌어먹을! 다시 마을을 걸어 다니며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무렵의 나는 몽파르나스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얼마 동안은 아직 신문사에서 일하는 척할 수 있다. 그렇게 해 두면 아침 식사나 저녁 식사를 얻어먹는 일이 조금은 안 힘들겠지. 어쨌든 굶어 죽는 건 딱 질색이다.
이 시기에 나는 꽤 많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여 글을 썼다. 어떤 넓은 사창가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선전 팸플릿을 써 주고 얼마 안 되는 대가를 받았다. 즉, 샴페인 한 병과 이집트 풍의 방에서 창부의 무료 서비스를 받았다.
필모어는 뉴욕 시의 지도를 벽에 붙였다. 우리는 밤새도록 파리와 뉴욕의 공죄론(功罪論)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때마다 늘 우리의 대화 속에 좋든 싫든 휘트먼이라는 인물이 끼어들었다. 휘트먼 속에서 미국의 광경, 과거와 미래, 탄생과 종언의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휘트먼은 미국에 존재하는 가치 있는 모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휘트먼이야말로 ‘육체와 영혼의 시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아직까지도 전부터 유럽이 가진 적 없는 것, 자유롭고 건강한 정신, 이것을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그것이 휘트먼에게는 있다. 괴테는 휘트먼의 가까이까지는 갔다. 그러나 괴테도 역시 안을 채워 넣고 겉에 입혀 놓은 셔츠에 지나지 않는다.
괴테는 존경해야 할 시민이자 현학자이며 지루한 남자이다. 괴테의 태연자약하며 서두르지 않는 태도는 졸린 듯한 독일 부르주아 계급의 치매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괴테는 무언가의 종말이며, 휘트먼은 창시이다.
여자들은 알몸이 되었다. 갑자기 내 눈앞에 털이 많고 검고 갈라진 부분이 나타났다. 그 어둡고 꿰매지지 않은 상처를 흘낏 보니 내 뇌 속의 깊은 도랑이 삐끔히 입을 열었다. 세상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갈라진 틈을 들여다보자, 방정식 기호가 보인다. 균형 잡힌 세상, 제로까지 감소하고 전혀 나머지가 없는 세상. 반 노르덴이 그 위에서 회중전등을 휘둘러 만들어진 제로가 아니다. 아라비아숫자인 제로, 무한대로 수학적 세계가 튀어나오는 기호다. 별을 계산하는 지점이다. 그 갈라진 곳 안으로, 내 온몸을 눈두덩이까지도 꽂아 넣고 싶다.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필모어가 조용히 말했다. “난 뭔가 일을 하고 싶어. 카페에 죽치고 앉아 진종일 수다나 떨고 있는 건 이제 질렸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를 하더라도 하는 게 더 나아. 우리가 아무리 프랑스인을 찬미한다 해도 저가 자신을 개조할 수는 없어. 난 여기 사람이 아니야. 프랑스는 이제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바꾸면 바꿔지는 것이다. 같은 이 남자가 1년 전에는 고릴라처럼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아, 얼마나 멋진 날인가!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 얼마나 멋진 국민인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가 프랑스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술과 여자와 지갑의 돈과 자유를 의미한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천막 지붕이 바람에 날려가 버려, 드러난 하늘을 구석까지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서커스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나 있는 단순한 빈 터, 그것도 누추한 빈 터였다.
“난 내 나라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영어가 듣고 싶어.” 눈물이 줄줄 그치지 않고 그의 얼굴을 흘러내렸다. 하다못해 평생에 한번이라도 철저하게도 철저하게 겁쟁이가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택시를 타고 은행에 가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 어머니가 보내준 돈을 전부 꺼내서 그걸로 영국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자. 그리고 오늘 오후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가는 거야. 런던에서 미국행 첫 배를 타는 거야. 그렇게 하면 지넷이 뒤쫓아 올 걱정도 없어.”
그는 헤어지면서 지넷에게 건네주길 바란다며 두꺼운 지폐 뭉치를 내게 건넸다. 2,800프랑이나 됐다.
바로 그때 택시가 멈춰 서고, 한 여자가 새하얀 개를 안고 내려섰다. 그녀의 실크 옷에 개가 오줌을 싸고 있었다. 나도 저 개만 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며 택시 기사에게 신호를 보냐 차를 잡아타고 “부르고뉴 숲에 들어가 그곳을 돌면서 달려주세요”라고 말했다. 롱 보완을 지나치면서, 내려서 소변을 보려고 운전수에게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했다. 소변을 보는 동안 택시를 기다리게 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래서 얼마나 낭비를 했느냐고? 별것 아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라면 택시 두 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르고뉴 숲에 들어가자 돈 많은 여자들은 모두 모여들어 고급 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롤스로이스가 얼마나 쾌적하게 달리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이 어떤 롤스로이스보다도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다. 어떤가, 멋있지 않은가! 주머니에 돈을 넣고 30분 동안 술 위한 해군 병사처럼 마구 쓰는 건!
나는 운전수에게 센 강으로 가 달라고 했다. 물은 파란 거울 같았다.
순간, 지넷이 그 야수 같은 모습으로 방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필모어는 잠시 후면 배를 타겠지…….
가고 싶으면 나도 얼마든지 미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미국에 가고 싶니?’ 대답이 없었다. 내 생각은 흔들리며 나아갔다. 바
다 쪽으로. 마지막으로 뒤돌아 바라보았을 때, 쏟아지는 눈 속에 사라진 높이 솟은 마천루의 빌딩 저편에 여자의 그것이 지금 다시 망령처럼 쑥 떠올랐다. 그리고 온 시가지에 펼쳐져 가는 것이 보였다. 멍해진 채로 마누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센 강은 너무 조용히 흐른다. 그래서 그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이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조용히, 마치 대동맥이 인간의 육체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움이 내게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 나는 왠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라도 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편집자의 한마디
이 작품은 어디서부터 읽기 시작해도 되는 소설이며, 아무 곳이나 펼쳐도 생각지 못한 시 구절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세상은 점점 곤충학자의 꿈과 닮아 간다. 지구는 궤도 밖에서 회전하고, 축은 이동하여, 북쪽에서 거대한 칼의 청동색을 띤 눈보라가 되어 눈은 마구 쏟아진다. 새로운 빙하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삼각주는 쨍쨍 말라 가고 강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다. 새로운 새벽, 야금(冶金)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세상의 형태는 흐릿해져 간다. 햇빛은 찍어진 직장(直腸)처럼 출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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