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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진론 하권
[중도: 무색ㆍ무주ㆍ무원ㆍ무요별ㆍ무표시]
이미 능히 이와 같이 두 치우친 견해를 멀리 여의면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생장(生長)한다. 두 치우친 견해를 떠나면 중도(中道)의 이치이다.
위에서 말한 두 종류의 비량(比量)에 의하여 유위와 무위는 색(色)들이 없기 때문에 무색(無色)이라 이름한다. 무색이기 때문이고, 또한 유(有)ㆍ무(無) 등의 모든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 유ㆍ무의 법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상(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옳다고 말했고 이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지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성(無性)이기에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를 다 성취하지 않는다. 머물며 지탱하는 것이 있지 않은 것을 무주(無住)라 이름한다.
만약 유위상 흑은 무위상, 분별의 대상 혹은 분별의 대상이 아닌 것도, 흑은 분별의 주체도 분별의 주체가 아닌 이들의 형상은 각혜(覺慧)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현(無現)이라 이름한다.
일체의 유상무상(有相無相)을 멀리 여의고 이 경계의 식(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에 무요별(無了別)이라 이름한다.
무색(無色)이고, 형태와 질량이 없고, 방위나 표시 등이 다 있지 않기 때문에 무표시이라 이름한다.
세존께서 가섭파(迦葉波)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주(常住)는 첫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며, 무상(無常)은 두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다.
이 둘 중에 무색ㆍ무시(無示)ㆍ무주ㆍ무현을 요별하는 것이 없고 표식이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이것을 곧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한 것이라 이름한다. 진실로 일체의 법성을 현찰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유위는 첫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고 무위는 치우친 두 번째 견해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부처님께서 가섭파에게 고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명(明)과 무명(無明)은 두 가지 다 있지 않고 두 차별이 없는 여기의 정지(正智)를 곧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무이(無二)]
이미 이와 같이 두 치우진 견해를 멀리 잘 여의었다면 능히 무이(無二)의 상(想) 위에 안주하여 생기하는 바의 분별에는 ‘두 상(想)’이 없다.
또한 능히 장애를 요지하여 출세간의 무분별지혜[無分別慧]로써 적정에 안주하여 설한 원인과 같은 것을 빨리 영원히 단멸한다. 그것을 영원히 단멸하였기 때문에 곧 그와 같은 분별은 없다.
[승의정려]
말과 뜻이라는 두 말이 함께 다 끊겨 무동(無動)ㆍ무현(無現)ㆍ무상(無相)을 증득하여 모든 희론을 떠나,
모든 법의 실성(實性)은 그 소연(所緣)에 대해 무동임을 증득하여,
자상의 미묘한 지혜를 상속하여 비록 전도 없는 공관을 꾸준히 수습해도 공성을 끝내 증득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승의정려(勝義靜慮)라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정려를 닦아도 그러나 색(色)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신분별(身分別)에 집착하고 안주(安住)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허공ㆍ해ㆍ달ㆍ별자리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제석(帝釋)ㆍ범왕(梵王)ㆍ세주(世主)에 의타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이 세상ㆍ저 세상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교만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머물며 정려를 닦는다.
아견(我見)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정(有情)ㆍ명자(命者)ㆍ양육(養育)ㆍ사대부(士大夫)ㆍ보특가라(補特伽羅) 및 의생마납바(意生摩納婆)의 견해에 의지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단상(斷常)ㆍ유무(有無)의 견해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번뇌를 다 없애는 것으로서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가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결과를 증득하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궁극에는 출생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전도됨이 없는 공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정려를 닦아도 그러나 공성(空性)을 증득하려고 정려를 닦지 않는다.
[분별과 무분별]
상응(相應) 논사가 집착하여 반드시 있다고 집착하여 말한다.
“일체의 집착의 대상과 집착의 주체에 관한 분별을 더 멀리 여의면 이것은 출세간의 무분별지혜이다. 곧 거기에서 바로 견실한 상(想)을 일으켜 꾸준히 닦아 익힌다.”
다른 어떤 사람이 이것에 대해 바르게 자세히 관찰하여 말한다.
“이와 같이 지혜가 발생할 때, 비록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분별이 없어도 그러나 무상(無相)의 경계에 따라 상(相)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성분별을 좆기 때문에, 이것은 유위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현량(現量)의 분별에 관한 깨달음이 같기에 무분별지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계탁의 상을 여의고 말을 여읜 진여승의를 계탁한 것이다. 이것은 소연이기 때문에, 그 밖의 소연과 같이 승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곧 이 이유로 인하여 모두 가장 수승한 뜻은 아니다.
여러 경에 말씀하시길
“무엇을 여기서 승의제라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거기에서 지혜도 또한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만수실리여, 지혜의 눈이란 장차 무엇을 관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답하여 말하길
“만약 조금이라도 관하는 것이 있다면 곧 지혜의 눈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지혜는 무분별이기 때문에 유위를 관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무위를 관할 수 없다. 모든 무위는 이 지혜의 눈과 상응하는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치와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도 마땅히 이 고착된 집착을 단절해야 한다.
다시 자세히 관찰하여 말하길
“승의제에서 이와 같은 출세간의 무분별지도 실유가 아니다. 연(緣)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허깨비 사대부와 같다. 방해ㆍ어려움ㆍ과실이 있기에 이치대로 관하여 장차 바로 제거하라. 다시 정근(精勤)하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지 않겠다.
이러한 집착을 이미 멸제(滅除)했다면 상응하는 지혜는 무상(無相)의 경성(境性)에 대해 또한 행해(行解)가 없고 인연(因緣)이 없기 때문에 그밖에 지혜는 발생하지 않는다.
행해가 없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진실행해(眞實行解)라 이름한다”고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이름하여 진실행해라 이름하는가?
이른바 일체 법에 대해 모두 행해(行解)가 없으면 곧 진실행해라고 한다.”
또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래의 보리(菩提)를 모두 현관(現觀)할 수 없다.’
또 묻는다.
‘만수실리여, 모든 진리를 보는 자는 장차 무엇을 보는가?’
답한다.
‘적은 법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무릇 보이는 것이 있다면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보이는 것이 없다면 내지 진리를 보는 것[見諦]이라고 이름한다.’
또 묻는다.
‘어떻게 정려(精麗)하여 마땅히 현관(現觀)을 닦아야 하는가?’
답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법에 사유분별하는 것이 있지 않음을 안다면 이와 같이 정근하여 마땅히 현관을 닦아야 한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이미 현관을 증득하는가?’
답한다.
‘만약 능히 일체법은 다 평등성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답한다.
‘만약 일체의 법은 모두 평등성(平等性)임을 관찰한다.’
다시 묻는다.
‘일체법의 평등성을 보는 것이 있는가?’
답한다.
‘보는 것의 평등성은 없다. 만약 보이는 것이 있다면 이는 곧 불평등의 봄을 이룬다.’”
진실행해(眞實行解)와 견제(見諦)와 현관(現觀)이란 모두 동일한 뜻이다.
관행을 닦는 자가 지금 심(心)ㆍ의(意)ㆍ식(識)ㆍ지(智)의 작음을 하지 않는 것을 정행무분별지혜(正行無分別智慧)라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행하여 작용하는 것이 없으면 곧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등각(正等覺)의 진실한 수기를 얻는다.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세존이여, 보살은 어떻게 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수행하여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진실한 수기를 얻습니까?
범지(梵志)여, 보살이 만약 이때 생을 행하지 않고, 소멸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고, 불선을 행하지 않고,
세간을 행하지 않고, 출세간을 행하지 않고,
유루(有漏)를 행하지 않고, 무루를 행하지 않고,
유죄(有罪)를 행하지 않고, 무죄를 행하지 않고,
유위를 행하지 않고, 무위를 행하지 않고,
상응(相應) 및 불상응을 행하지 않고, 단멸(斷滅) 및 부단멸(不斷滅)을 행하지 않고,
생사 및 열반을 행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깨닫는 등의 행을 하지 않고, 보시 및 버림[棄捨]을 행하지 않는다.
계 및 율의(律儀)를 행하지 않고 인욕을 행하지 않고 정진을 행하지 않고 정려(靜慮)를 행하지 않고 등지(等持)를 행하지 않고 혜(慧)를 행하지 않고 해(解)를 행하지 않고, 지혜를 행하지 않고, 증득을 행하지 않고,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해도 행하는 것이 없다면 무상정등보리에서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진실한 수기(授記)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의 작용을 성침묵(聖黙緣)이라 이름한다.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실하게 개시(開示)하는 것을 설법이라 이름한다.
다시 이 법에 대해 몸으로써 증득해도 몸을 떠나 법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또한 법을 떠나서 몸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른바 무이(無二)도 무이가 아님을 관찰한다.
그와 같이 관찰할 때에 관찰현량(觀察現量)의 지견(智見)에 떨어지지 않는다.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성스런 침묵이라 이름한다.”
이 이치와 가르침으로 인하여 자세히 관찰할 때는 일체의 유위ㆍ무위와 자성은 능히 마음이나 지혜나 분별이나 무분별의 경계를 자성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알았다면 지혜[明慧]의 햇빛이 능히 일체 어리석음의 암흑을 제거할 것이다.
[지혜]
모든 마음과 지혜의 경계 가 현현해도
지혜로운 자는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무분별을 행하여
행하는 것 없이 행하게 되네.
여기에 능히 모든 행의 종자가 모이고 또한 모든 행의 종자(種子)가 되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다.
능히 뛰어난 덕(德)을 지니고 흑은 저 지닌 것이 흐르거나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혜라 이름한다.
마음과 지혜가 작용하는 것을 심혜(心慧)의 경계라 이름한다. 경지가 작용하는 것을 ‘차별’이라 이름한다.
마음의 경계는 곧 유위와 무위에 있는 모든 형상이고, 지혜의 경계는 곧 유위와 무위에 있는 공성이다.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무상(無相)에서는 분별혜(分別慧)가 끝내 전변(轉變)하지 않는다.”
‘현(現)’이란 이른바 현현한다는 것이다. 곧 마음과 지혜가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계의 속성과 형상이 현현한다는 뜻이다.
‘모든’이란 이른바 지(地) 등을 말하며 그 한 부류마다 총상 및 별상이 있다.
이와 같이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그 한 부류마다 총상 및 별상이 따른다.
이와 같이 염주(念住) 및 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도지(道支)ㆍ바라밀다(波羅蜜多)ㆍ일체의 신통(神通)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ㆍ불공불법(不共佛法), 모든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 예류(預流)ㆍ일래(一來) 및 불환(不還)이나 혹은 아라한(阿羅漢)이 가진 도과(道果)도 그 같은 부류에 따라 총상 및 별상이 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일체지지(一切智智)에까지 이른다.
일체법에 대해 능히 바르게 알며 전도성이 없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라고 이름한다.
‘인하여’[由]란 이른바 사상(捨相)의 인연을 말한다.
‘취착하지 않고’란 집착이 없고 견해가 없는 것이다. 즉, 이것은 각혜로써 계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취착하지 않고’라는 이유는 무엇을 증득하는 것인가?
지혜가 무분별(無分別)을 행하여 행하는 것이 없이 행하는 것이, 곧 무분별지이다.
다시 영원히 일체의 분별을 여읜 각혜(覺慧)의 증익(增益)을 가설(假設)하여 ‘지혜’라고 이름하고,
영상(影像)이 없고 상(相)이 없고 언어가 없어 경계(境界)의 생기의 형상과 자성분별 또한 있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이름한다.
머무는 자가 비록 없어도 다른 상태에 대해 가명(假名)을 건립이라 이름한다.
‘등불이 소멸한다’ ‘아라한(阿羅漢)이 사멸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각혜가 증익할 때 세속의 언설에 의하여 이 상속(相續)에 대해 무분별이라 이름한다.
분별지(分別智)를 유분별(有分別)이라 이름하는 것처럼. 여기서 의(意)가 지혜를 취해도 발생의 작용이 없는 것을 ‘행(行)’이라 이름한다.
이 지혜가 자타(自他)의 법성(法性)을 행할 때 일체종(一切種)의 형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는 주체라 이름하지 않는다.
즉, 보는 주체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진실한 봄이라 이름한다. 증득의 대상과 같기 때문이다. 보는 대상이 아닌 것이 없는 대상의 형상을 만들고 혹은 분별 혹은 무분별로서 진실한 봄을 이른다고 할 수 없다.
진여가 만약 보는 대상의 속설이라면 마땅히 진여가 가히 볼 수 없는 속성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세속제에 의탁하여 평등의 견해가 있는 것을 진실한 봄이라 이름해도 마땅히 모든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해(解)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햇빛과 불꽃과 물과 같이. 일체의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만약 볼 수 있는 속성이라면 볼 수 있는 형상을 취하여 진실한 봄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볼 수 없다면 마땅히 진여를 증견(證見)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어찌 평등하다고 이름하는가?
또 지혜는 유위이며 진여는 무위의 속성이다. 평등하지 않다. 만약 본다면 마땅히 불평등의 견해를 이룬다.
또 모든 법성은 모두 보는 주체가 아니다. 보는 대상도 또한 마땅히 그러하다. 모두 무생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지 않는 것을 가설하여 본다고 하나 불평등은 아니다.
또 일찰나에 일체법을 증명하여 모두 현관(現觀)이 없는 것을 진실한 현이라 이름한다.
마땅히 ‘자체를 오히려 비춘다는 힐난을 이루기 때문에 지혜는 응당 지혜의 진실한 속성을 증득할 수 없다”고 힐난해서는 안 된다.
두 종(種)은 다 볼 수 있는 경성(境性)은 아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다 증득해서는 안 된다. 만약 승의에서 대상의 모습과 비슷한 지혜는 본성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현관(現觀)이 없고 증득(證得)도 없다.
계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마땅히 현관(現觀)으로써 증득해서는 안 된다. 여래의 실체를 관하면 이것은 무위(無爲)로서 일체의 눈이 작용하는 바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범지여, 여래께서 보리의 자리에 안주하실 때 일체의 법은 다 무소득임을 증득하고 일체 허망전도에서 일어난 번뇌를 영원히 단멸한다.”
이러한 경에 모두 다 따른다.
다시 부수적인 논의는 그치고 정론(正論)을 변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