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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3권
4. 십론[2]
4.6. 유중음품(有中陰品)
[논자의 말] 어떤 사람은 중음(中陰)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중음이 없다고 한다.
[문] 어떤 인연으로 있다고 하고 어떤 인연으로 없다고 하는가?
[답] 중음이 있다 함은,
부처님이 아수라야나경(阿輸羅耶那經)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부모가 교합하면 그때에 중생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그 안에 의지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중음이 있는 줄을 알게 된다.
또 화차경(和蹉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중생이 이 몸을 버린 뒤에 아직 마음이 태어날 몸을 받기 전이면 그 동안은 애욕이 인연이 되는 시기라고 나는 말한다. 그것을 중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또 일곱 가지 착한 사람 중에는 중유(中有)에서 죽는 이가 있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뒤섞이게 업을 일으켜 뒤섞이게 몸을 받아 뒤섞이게 세간에 가 나므로 중음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경전 중에서 4유(有)를 말씀하셨으니, 본유(本有)와 사유(死有)와 중유(中有)와 생유(生有)이다.
또 유(有)를 설명하였으니,
“5도유(道有)와 업유(業有)와 중유”이다. 또
“염왕(閻王)은 중음의 죄인을 호통을 쳐서 뒤바뀌어 떨어지게 한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은 중음으로 인하여 중생의 전생 일을 아시고서
“이 중생은 이 곳에 가 나고, 저 중생은 저 곳에 가 난다”고 말씀하셨다.
또 경전 중에
“하늘 눈(天眼)으로 모든 중생의 죽을 때와 태어날 때를 본다”고 하였으며, 또
“중생이 음(陰)에 얽매이기 때문에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간다”고 하였다.
또 세상 사람도 역시 중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말하기를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아주 적은 네 가지 요소[四大]가 있어서 이 음(陰)으로부터 떠나간다”고 한다.
또 만일 중음이 있다면 후세가 있을 것이요, 만일 중음이 없다면 이 몸을 버린 다음에 아직 내생 몸을 받기 전의 그 중간에 끊어져 버려야 된다. 그러므로 중음이 있는 줄을 알 것이다.
4.7. 무중음품(無中陰品)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음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아수라야경의 말씀을 들어서 중음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그가 성인이어서 바로 누구인데 어디로부터 오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중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있다면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하는가?
그대는 화차경의 말씀을 들어서 말하지마는 그 일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그 경전 중에는 물음도 다르고, 대답도 다르기 때문이니,
이 화차 범지(梵志)의 생각하는 몸도 다르고 신아도 다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중음 중에 다섯 가지 쌓임이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또 그대의 말에 “중유(中有)로서 죽는 이가 있다”고 하나
그 사람은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의 중간에서 몸을 받아 그 안에서 죽기 때문에 중음으로 죽는다고 말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마치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만일에 사람이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고 어느 곳에 태어나서 어느 곳에 있다고 함과 같기 때문에 그 뜻은 다를 것이 없다.
또 그대의 말에 “뒤섞이게 몸을 받아 뒤섞이게 세간에 난다”고 하나,
만일 몸을 받는다고 말하면 세간에 난다고 말하는 것과 그 뜻이 다르지 않다.
또 그대는 “4유와 7유”를 말하나
그 경전이 옳지 못하다. 법 모양에 맞지 아니한 까닭이다.
또 그대는 “염왕이 꾸짖는다” 것을 말하나,
이것은 생유에 있는 일이요, 중유에서가 아니다.
또 그대의 말에 “부처님은 중음으로 인하여 전생의 일을 안다”고 하나, 그 일이 옳지 못하다.
거룩한 지혜의 힘으로 그러는 것이요, 비록 상속(相續)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또한 능히 기억으로 아신다.
또 그대의 말에 “하늘눈으로 죽을 때와 태어날 때를 본다”고 하나,
바로 태어나려 할 때를 날 때라 하고 죽으려 할 때를 죽을 때라 하는 것이어서 중음에서가 아니다.
또 그대의 말에 “중생은 음(陰)에 얽매어서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른다”고 하나,
후세가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그와 같이 말함이언정 중음이 있음을 밝힌 것은 아니다.
또 그대의 말에 “죽을 때에는 미미한 네 가지 요소가 있으면서 떠나간다”고 하나,
세상 사람의 소견이라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논의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또 그대의 말에 “만일 중음이 없으면 중간은 응당 끊어져야 한다”고 하나,
업의 힘(業力) 때문에 이 사람은 여기에 태어나고 저 사람은 저기에 태어나는 것은 마치 과거와 미래가 상속되지 않지마는 능히 기억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중음은 있지 아니하다.
또 전생을 아는 지혜안에서는 “이 사람은 여기서 죽어서 저기에 나는 것을 안다”고 말했으나,
중음 가운데 머무른다고는 말하지 아니했다.
또 부처님은 3종류의 업인 이승에서 받는 과보(現報)와 내생에 받을 과보(生報)와 그 다음 어느 세상에서나 받을 과보(後報)의 법을 말씀하셨으나, 중음의 과보 받을 업이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만일 중음에도 닿임이 있다면 곧 생유(生有)라 할 것이요,
만일 능히 닿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닿임이 없는 것이라 닿임이 없기 때문에 느낌들도 역시 없으리니, 그와 같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또 만일 중생이 중음의 형체를 받으면 곧 몸을 받은 것이 된다.
경전 중의 말씀에
“사람이 만일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으면 나는 말하기를 태어났다 하리라”고 함과 같다.
만일 몸을 받지 않았다면 중음은 없다.
또 만일 중음에서 물러섰으면 곧 몸을 받았다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먼저 태어났다가 뒤에 물러나기 때문이니, 만일 물러남이 없었다면 그는 곧 항상(恒常)하기 때문이다.
또 업의 힘 때문에 태어난다면 중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만일 중음이 업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그는 바로 생유이니, 마치 업의 인연으로 태어난다고 말함과 같다.
만일 업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인가?
빨리 대답하라.
[답] 나는 생유의 차별로써 중음이라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위와 같은 허물이 없다.
이 사람은 비록 중음에 난다하더라도 역시 생유와는 다르다.
식(識)으로 하여금 가라라(迦羅羅=처음으로 母胎에 든 일주일 동안)속에도 중음이라고 한달하게 하는지라다.
[힐난] 업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분간하여 중음이라고 말하는가?
또 마음은 이르는 바가 없이 업의 인연 때문에 여기로부터 사라져서 거기에 나는 것이다.
또 현재에 보건대, 마음은 상속하여 나지 않는 것은 마치 사람이 발을 찌르면 머릿속에서 아픔을 깨달음과 같다.
이 말 가운데 있는 식(識)은 인연이 있어서 머릿속에 전달한 것이 아니요, 가깝고 먼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하여 중음이 있다고 헤아리지 않아야 한다.
4.8. 차제품(次第品)
[논자의 말] 어떤 사람은 네 가지 진리를 차례로 본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꺼번에 본다고 한다.
[문] 어떤 인연으로 차례로 본다 하고 어떤 인연으로 일시에 다 본다고 하는가?
[답] 차례로 본다 함은 경전의 말씀에
“만일 사람이 세간에서 쌓임(集)을 보면 곧 없다는 소견이 사라지고 세간에서 사라짐(滅)을 보면 곧 있다는 소견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쌓임과 사라짐은 두 가지 모양이 각기 다른 줄 알 것이다.
또 만일 사람이 온갖 쌓임의 모양은 다 사라짐의 모양인 줄 알면, 바로 번뇌를 여의고 법의 눈이 깨끗함(法眼淨)을 얻었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영리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 점차로 모든 악행을 버리는 것은 마치 금을 다루는 공장이가 쇠붙이에 슬은 녹을 떨어버림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누진경(漏盡經)에서 말하기를
“능히 알고 보는 이면 샘[漏]이 다하게 되나니, 수행하는 이가 나날이 다하여 가는 줄을 자기는 잘 알지 못하여도 항상 닦아 익히기 때문에 모든 샘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이치(諦) 중에서는 눈[眼]과 지혜[智]와 밝음[明]과 슬기[慧]를 낸다”고 하셨다.
욕심 세계의 괴로움의 진리 중에 둘이오,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에도 두 가지이며, 쌓임[集] 등에도 역시 그렇다.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시되,
“점차로 진리를 보는 것은 마치 사람이 사닥다리를 오르려면 차례차례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러한 경전들을 보아서도 네 가지 진리를 일시에 얻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또 모든 번뇌는 네 가지 진리 중에서 네 가지 삿된 행을 한다. 이른바 고제(苦諦)가 없고 집제(集諦)가 없고 멸제(滅諦)가 없고 도제(道諦)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샘이 없는 지혜에도 또한 네 가지의 바른 행이 차례로 있게 된다.
또 수행하는 이는 결정코 마음에서
“이것은 고통이다 이것은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은 고통의 사라짐이다. 이것은 고통이 사라지는 도이다”라고 분별해야 하리니,
하나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이와 같이 결정코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차례로 아는 것이요 한꺼번에 아는 것이 아니다.
4.9. 일시품(一時品)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네 가지 진리는 한꺼번에 보는 것이요, 차례로 보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그대가 “세간에서 쌓임을 보면 곧 없다는 소견이 사라지고 세간에서 사라짐을 보면 곧 있다는 소견이 없어진다”고 말하나
곧 자기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응당 16심(心)과 12행(行)으로 도를 얻을 수 없으리라.
또 그대의 말에 “온갖 쌓임의 모양이 다 사라짐의 모양인 줄 알면, 법의 눈을 얻는다”고 하나,
만일 그렇다면 당연히 두 가지 마음으로 도를 얻어야 되린,
첫째는 쌓임의 마음이요,
둘째는 사라짐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또 그대의 말에 “영리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점차로 악행을 버린다”고 하면,
역시 16심만으로 되지 아니하리라.
또 그대의 말에 “누진경에서 물질들을 알면 샘이 다하게 된다”고 하셨다고 하나,
그렇다면 으레 한량없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16심 뿐이 아니리라.
또 그대의 말에 “눈과 지혜와 밝음과 슬기”라고 하나,
부처님은 스스로가
“네 가지 진리 중에서 눈과 지혜와 밝음과 슬기를 얻는다”고 말씀하셨고,
차례로 16심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그대의 말에 부처님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기를 “점차로 진리를 보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사닥다리에 오르려면 차례로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나,
나는 이 경전을 배우지 아니하였거니와 설사 있다 하여도 당연히 버려야 하리니, 법 모양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말에 “네 가지 삿된 행”이라 하나
다섯 가지 쌓임에서도 삿된 행이어야 하며, 삿되게 행한 바에 따라 다 지혜를 내어야 하리니, 그렇다면 다만 16심만으로 도를 얻지 않아야 된다.
또 그대의 말에 “결정코 분별해야 한다”고 하나,
물질들 중에서도 분별하여야 하리니, 그러므로 16심만이 있지 않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여러 가지 진리일 수가 없고 오직 한 가지의 진리가 있을 뿐이며,
이를테면 괴로움의 사라짐을 보면 처음으로 도를 얻었다고 하나니, 법률들의 모든 인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는 난법[煖法] 등으로부터 점차로 진리를 보고 진리(諦)를 없애서 맨 마지막에 사라짐의 진리를 본다.
그러므로 도를 얻었다고 한다.
4.10. 퇴품(退品)
[논자의 말] 어떤 사람은 아라한이 물러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물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물러난다고 하고 무슨 인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 물러난다 함은 경전 가운데서
“시해탈(時解脫)의 아라한은 다섯 가지 인연 때문에 물러나나니, 일하기를 좋아하거나, 외고 읽기를 좋아하거나, 일을 판단하기를 좋아하거나 멀리 다니기를 좋아하거나 오랫동안 앓거나 하는 등이다”라고 함과 같다.
또 경전에서 두 종류의 아라한을 말씀하셨으니 물러나는 모양과 물러나지 않는 모양이 그것이다.
또 경전 가운데서 말씀하기를
“만일 아무 비구가 해탈문에서 물러났다고 하면 곧 읊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경전 가운데서 몸을 관찰하기를
“마치 병(甁)과 같이 하고 뜻을 막기를 마치 성(城)과 같이 하면 지혜는 마군과 싸우되 지키고 이기어 무너짐이 없으리니라”고 하셨으니
만일 물러남이 없다면 지키거나 승리할 필요조차 없다.
또 두 가지 지혜가 있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이다.
만일 진지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면 무생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우타야(優陀耶)가 생각을 끊는 선정[滅盡定]을 얻기 어려웠다는 이로서 바로 그것이 물러남의 원인이며, 그 사람은 물러나기는 했으나 역시 형상 세계에 가 났다.
이러한 일들로써도 물러남이 있는 줄 알아야 된다.
4.11. 불퇴품(不退品)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룩한 도에는 물러나지 않고 다만 선정에서만 물러날 뿐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일 그렇다면 두 종류의 아라한은 없고 다만 물러나는 모양만 있을 뿐이니, 모든 아라한은 선정 중에서 다 물러남이 있기 때문이다.
[답] 선정 중의 자재한 힘에서 물러나는 것인데 모든 아라한이 다 자재한 힘을 얻는 것은 아니다.
[문] 그렇지 않다. 구제(劬提) 비구는 칼을 가지고 자살하였다.
만일 선정에서만 물러났다면 자살하지 아니하였으리니, 불법 중에서는 해탈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선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답] 그 사람은 이 선정에 의지하여 장차 아라한의 도를 얻을 것인데 이 선정을 잃었기 때문에 샘 없음을 잃었지마는 샘 없음에는 물러남이 있지 아니하다.
왜 그런가 하면 게송에서 말씀함과 같다.
옛것을 끝마치고 새 것 아니 지오면
모든 존재(有)안에서 다 싫증이 나며,
모든 번뇌 사라지고 다시 난 것[生相] 없으면
이 씩씩한 사람들은 등불 꺼짐 같으리.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비유하면, 돌로 된 산은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듯이 용건한 사람도 그와 같아서 헐뜯거나 칭찬에 기울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 경전에서 말하기를
“애욕은 애욕들을 낳는다” 하셨다.
이 아라한은 애욕의 근본을 영구히 뽑았거니 번뇌가 어디서 생기겠는가?
또 말씀하기를,
“이른바 성인(聖人)이라 함은 마침내 치우친 소견을 다하고 할 일을 다 마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인은 흩어 없애고 모으지 않으며 찢어 쪼개고 조립하지 않는다”고 한 것 등이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무명의 인연은 탐욕과 진심과 우치를 일으킨다” 하였으니,
아라한의 무명은 영원히 끊어졌거니 어떻게 번뇌를 내겠는가?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만일 모든 배우는 사람으로서 열반의 길을 구하면 나는 그 사람은 방일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리니,
“만일 번뇌가 다하면 다시는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물러나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슬기로운 이는 생각(思惟)를 잘하고 말을 잘하고 몸을 잘 지녀서 하는 일에 실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구는 방일하지 않기를 바라다가 방일하는 잘못을 보면, 바로 그것이 물러나지 않음이요, 열반에 친근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사슴은 들에서 살고 새는 허공에 의지하며, 법은 분별에 돌아가고 참된 사람은 고요함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인연은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니, 탐욕이 끊어지지 아니함과 바라는 바가 앞에 나타남과 그 안에서 삿된 생각을 내는 것이다.
이 아라한은 탐욕이 이미 끊어졌고 비록 욕망하는 바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삿된 생각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한다.
또 말하기를,
“비구는 삿되게 모든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이 아라한은 삿된 관찰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만일 거룩한 지혜로써 알고 나면 물러남이 없는 것이 마치 수다원(須陀洹)이 과위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아라한은 3수(受)의 생상(生相)과 멸상(滅相)과 미과출상(味過出相)을 잘 알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구가 계행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 일을 성취하면, 다시는 물러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또 아라한은 이미 생긴 번뇌를 끊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게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진실하게 소행하는 성인은 끝내 물러나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아라한은 이미 네 가지 진리를 증득하여 모든 샘이 다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수행한 이[實行者]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7각(覺)은 물러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아라한은 7각이 두루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아라한은 무너지지 않는 해탈을 증득하였으므로 물러나지 않는다.
또 아라한은 불법 중에서 견고한 이익을 얻었으니 이른바 무너지지 않는 해탈이다.
또 사람이 손이 잘리면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간에 항상 손이 잘렸다고 하는 것처럼,
아라한도 또한 그러하여서 번뇌를 끊은 다음에는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간에 항상 끊어졌다고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믿음 등의 근기가 영리한 이를 아라한이라 하며, 근기가 영리한 이는 끝내 물러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 아라한은 위없는 욕망 끊은 법[斷愛法] 중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어서 끝까지 다 끊었다.
또 마치 불은 아직 타지 아니한 곳을 태우고 다 태운 다음에는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처럼
비구도 그와 같아서 이미 열한 가지 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끝내 물러나지 아니한다.
[문] 두 가지의 아라한이 있는데, 그대가 인용한 경전은 물러나지 아니한 것만을 설명하는구나.
[답] 이것은 바로 총상(總相)의 설명이다.
모든 배우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아니해야 하나, 아라한은 잘못될 것이 없다 하면 이는 별상(別相)의 설명이다.
물러나지 않는 모양을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가 만일 도로 생기면
훌륭하다고 이름하지 못하며
훌륭하면서도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참된 훌륭함이라 한다.
만일 아라한이 도로 번뇌를 낸다면 훌륭하다고 하지 못한다.
또 아라한은 생(生)이 이미 다하였기 때문에 다시는 몸을 받지 아니한다.
그대의 경전에는 비록 아라한은 법에서 물러났다가 도로 얻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하나
만일 그렇다면 역시 법에서 으레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비구로서 모든 상(相)을 나지 않게 할 수 있으면 아라한이라 한다.
그러므로 물러나지 아니한다.
4.12. 심성품(心性品)
[논자의 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심성은 본래 깨끗하나 객진(客塵)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 하고
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문] 무슨 인연으로 본래 깨끗하다 하고, 무슨 인연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함은 마음이 본래 깨끗한 것이요, 객진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번뇌와 마음은 항상 상응하면서 생기는 것이요, 그것이 객상(客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세 가지 마음인 착함(善)과 착하지 못함(不善), 무기(無記)가 있다.
착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은 더럽지 아니하고, 착하지 못한 마음은 스스로 깨끗하지 못한 것이나, 객진 때문은 아니다.
또 이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져서 번뇌를 기다리지 아니하며, 만일 번뇌와 함께 생긴다면 또 손[客]이라고는 이름하지 못한다.
[문] 마음이란 다만 물질들을 감각하는 것을 이름할 뿐이다.
그러한 뒤에 모양을 취하고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번뇌를 내면서 마음과 함께 더러움을 짓는다. 그러므로 본래는 깨끗하다고 말한다.
[답] 그렇지 않다.
이 마음은 마음일 때는 이미 사라져 없다.
때문에 아직 더러운 모습이 있을 수 없다.
마음일 때는 이미 사라진 뒤거늘, 때(垢)가 어디에 물들겠는가?
[문] 나는 생각생각마다 사라지는 마음으로써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요 서로 이어가는 마음 때문에 때가 물든다고 말한다.
[답] 서로 이어가는 이 마음은 세속의 진리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진실한 이치에서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 세속의 진리에서도 이는 또한 허물이 많다.
마음이 생기면 이미 사라졌고,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아직 일어나지도 아니했거니 어떻게 서로 이어가겠는가?
그러므로 심성은 본래부터 깨끗한 것이요 객진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부처님은 중생이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객진에 물들면 마음은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했을 뿐이다.
또 부처님은 게으른 중생이 만일
“마음은 본래 깨끗하지 못하다”고 들으면
문득 생각하기를
“성품은 고칠 수 없구나” 하고
깨끗한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본래가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다.
4.13. 상응불상응품(相應不相應品)
[논자의 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번뇌[使]는 마음과 서로 응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 어떤 인연 때문에 마음과 서로 응한다고 말하고,
어떤 인연 때문에 서로 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마음과 서로 응한다는 것은 다음 사품(使品) 중에서 설명하겠다.
또 탐욕 등은 모든 번뇌의 업이다. 이 업은 모든 번뇌와 상응한다.
그대의 법 중에서는 비록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번뇌[使]는 마음과 서로 응하는 번뇌[結纏]의 원인(因)이 되어 준다고 하지마는 그 일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경전 중에서는
“무명과 삿된 기억[邪念]과 삿된 생각[邪思惟] 등으로부터 탐욕 등의 번뇌[結]를 일으킨다”고 말하였고,
경전에서 번뇌[使]로부터 생긴다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법 중에서는 비록 “오랫동안 익혀 온 번뇌[結纏]를 번뇌[使]라 한다”고 말하지마는 일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몸과 입의 업 따위도 역시 오랫동안 익힌 모습이 있으므로 그도 또한 번뇌[使]로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듯 함이 있어야 하는데도 실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법은 현재의 원인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과거의 원인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응당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지 않아야 하고 또한 뜻(意)으로부터 의식(意識)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또 이 모든 번뇌[使]는 생각생각마다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무엇을 인하여 생기는 것인가?
[문] 공통되는 모양[共相]의 인으로 생긴다.
[답] 그도 그렇지 않다. 원인과 결과는 일시에 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다음 등불 비유[燈喩] 중에서 설명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使]는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아니한다고 말하지 아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