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강 : 2012년 6월 4일
유식학이란?
여러분은 종교(宗敎)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종교를 갖고 계신다면 그 종교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이 자신이 견디기 힘겨울 정도가 되면 한번쯤은 ‘절에나 가볼까 아님 성당이나 교회’라고 생각들 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극심해 도저히 헤어나기가 어렵다든지 사랑하는 내 주위의 인연들로 해서 말입니다. 사실 내 가까이에 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절에 갔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부처님, 내가 지금 괴로워 죽겠으니 제발 편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 내 아이가 대학에 가는데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여러분 절에서 법회를 마칠 때 외우거나 노래하는 보살들의 네 가지 큰 서원(誓願)으로 사홍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어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것을 보면 부처님께서 우리들이 바라는 것을 다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렇게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원하면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다 아는 사실이라고요?
글쎄요...
우리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 잘 살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불교에서는 어떻게, 무엇으로 행복해 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불교의 행복론에서는 지혜로써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아(無我)임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난 주 우리 약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갈게요.
요즈음 책을 쓰느라 아침에는 1시간 일찍, 밤에도 가능하면 늦게까지 약국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막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환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왜 약을 잘못 주었느냐구요...
전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하루 종일 약국이 무척이나 바빴던 날이었습니다.
낮에 양산의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가지고 ‘졸피신’이라는 수면제를 처방 받았었는데, 낮에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환자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인터넷 전산망 뿐 아니라 워낙 시스템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처방전으로 두 번 약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심사평가원 포털사이트를 거쳐 이 처방전으로 어느 약국에서 약을 언제 지어 갔다는 것이 바로 뜨니까요.
약국에는 환자로 붐비고 그 사실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라 조제한 약국과 병원에 차근차근 연락을 드린 후 처방전 내용을 수정하고 조제해 드렸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 워낙 대기 환자가 많았던 탓으로 제가 ‘졸피신’을 드린다는 것이 ‘졸피드’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약물은 향정신성 의약품이라 반 알만 틀려도 큰일 나는 약물이거든요...약 모양과 색깔이 똑같아요, 물론 대체는 가능하구요.
그래서 괜찮으니 그냥 잡수시라고 했더니 화를 내시며 ‘내가 양산에서 오직 동화 약국을 믿고 어~떤 병원에 가더라도 동화 약국에서 약을 타는데...’ 하시는 거예요.
과거 조제록을 보니 사실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지금 갖다드리겠습니다’ 했죠.
그래서 신불산 공원묘지 바로 아래 있는 그 분의 아파트까지 약을 갖다 드린 일이 있었더랬습니다.
여러분 웃기는 일처럼 생각되죠?
똑같은 처방을 가지고 똑같은 약을 타면 되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만약 한 가지만이라도 내가 마음속에 ‘뭐야? 저 사람’하고 담아두었더라면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 일은 흘러간 일이 되었으니까요.
우리들 마음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무아(無我)라고 하면 무척 어렵게들 생각합니다.
자신의 몸도 마음도 매순간 변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 무아입니다. 「무아(無我)」의 「我」는 실체를 뜻하는 말이니 무아란 곧 그 어느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 상호관련 속에서 변하면서 임시로 그렇게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은 매 순간 우리들이 먹는 음식과 생각과 운동에 의해 바뀌며 우리들의 마음 또한 언제나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매순간의 인연화합에 의해 몸도 마음도 순간순간 사멸(死滅)과 생성(生成)을 되풀이하고 있으니까요.
불교라고 하면 흔히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라고 하면 마음을 배우는 공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그럼 이제부터 유식학이 무엇인지 들어가 볼까요...
마음을 탐구하는 유식학(唯識學)은 마음으로 일체를 설명하고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밝혀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유가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근본정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시대에는 마음에 대한 중요성과 마음의 전환을 통한 열반과 해탈의 성취를 목표하여, 일체법을 육식(六識)을 중심으로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와 오온(五蘊)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번뇌의 유루심(有漏心)을 지혜의 무루심(無漏心)으로 전환하여 해탈과 열반을 얻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부파불교시대에는 업감연기설을 비롯한 윤회의 원인을 마음에서 규명하려고 하였고 마음의 섬세한 심소(心所)의 작용을 다양하게 설명하였으며 유식학의 기본이 되는 5위 75법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대승불교시대가 시작되면서 『반야경』의 공(空)에 대하여 중관사상(中觀思想)은 직관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설명하고자 하였으며 유식학에서는 분석적인 마음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이를 보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유식학이 성립되는 4C이후에는 유식논사들에 의하여 마음과 관련된 그동안의 이론들과 유가수행자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마음에 대한 자세한 분류와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과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제로 하여 일체는 오직 심식(心識)이며 대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구조를 기존의 육식(六識) 중심에서 제7 말나식(末羅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하여 팔식(八識)으로 확대하고 근본번뇌가 발생하는 원인과 윤회의 주체에 대한 심식의 작용 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식(心識)의 세부적인 작용을 담당하는 다양한 심소(心所)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심식의 구조와 작용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삼성설(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을 통하여 중관사상의 공(空)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였으며 심식의 변화가 가능한 것을 밝힘으로써 유가수행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유가수행을 오위(五位)의 수행체계로 정리하여 유식학의 심식에 대한 이론과 유가수행을 접목함으로써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의 종합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색법(色法)이 중심이 되는 5위(五位) 75법(法)을 개편하여 대승불교 유식학에서는 심법(心法)을 위주로 새롭게 조직화하였습니다.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를 비롯하여 색법(色法)과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을 더하고 무루법(無漏法)까지 포함하는 5위 100법을 일체에 대한 분류체계로 완성하였습니다.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은 깨달음을 목표로 합니다.
깨달음이란 일체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아는 마음이고, 번뇌에 덮인 마음을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마음을 떠나서 설명할 수 없으며 마음이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의 중심에 위치하기에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을 배우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진정시키는 것에 의해서 의식을 맑게 하고, 완성된 인격체로서 한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전환의 종교요, 초월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배우고 닦으면서 마음의 구조를 모르고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하거나 참선수행, 염불수행을 할 때도 구제의 심리학이요 심리구조를 밝혀놓은 심층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사상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유식사상은 과거의 문화적 유산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서 생생하게 살아서 활동하는 철학이고 종교이며 치료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유식의 교리에는 비과학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과학적인 것만이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의외로 비과학적인 것에 의하여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글이 마음의 구조를 바로 알아 번뇌를 지혜로 전환하여 완성된 인격을 형성하는 좋은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용어 자체가 조금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가능하면 쉬운 용어로 풀어갈 것이니까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오늘은 대략적인 개요이어서 좀 더 어렵게 생각될 수 있을것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아~주 쉬워요
좋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가끔 교회에 나가면서도 기독교 신자라 말은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열린 마음을 가져볼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올려주어서 넘 고마워. 복 많이 받길 바래.
복이 있기는 있는 것이제?
가랑비에 옷젖듯 일주일에 한번씩 좋아서 들으려 다닌 세월이 몇년되니 이렇게 되집어 핵심정리할 귀한 인연이오네.모쪼록 크맘 낸 님의 고귀함.알아차려지길 기원합니다,감사해요~
2번이나 읽었는데도 어렵습니다.
1) 본문에서 '유식학은 마음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고 했는데 탐구를 분석이라 해도 될지?
2) 불교에서 마음과 심리학에서의 마음은 같은 의미로 봐도 되는지?
3) 그렇다면 유식학=심리학이다. 너무 단편적인가?
불교가 마음을 배우는 종교라면 유식학은 불교의 기본 사상이군요....
부처님 생전에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겠지요
부파불교시대가 되면서 파헤쳐나가서...
그건 앞으로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 같구요
지금은 우선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그래서 불교심리학이라고 하는 유식학을 공부하게 된 것인데
제대로된 순서는 아니지요
불교에서의 마음과 심리학에서의 마음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문제는 이 강의를 해 나가면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심리학에서의 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가운데 7식까지만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더 깊이까지를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