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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하신 일은 완전하고 흠이 없음
(00 권사님 영결식 말씀)
지금부터 주님 안에서 00권사님과 우리들의 어머니 되시는 분의 영결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슬라이드를 먼저 보시면서 지나온 일생을 한번 보겠습니다. 끝난 다음에 막내 사위가 나와서 기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맨 처음 사진은 대동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고, 그 다음은 아버님께서 학창시절에 금강산에 놀러 가셨던 사진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중국에서 그때 당시 저런 새 차를 구입하여 너무너무 기뻐서 환희 속에 서 계신 사진이다. 만주 광야에서 진선미를 찾는 한 청춘이라고 써있는 사진이 한 장 있었습니다. 요업 회사에 다닐 때입니다. 아버님 사진인데, 오늘 부인의 영결식을 보러 내려오셨습니다. 다음 사진은 제주 피난 시절입니다. 다음은 어머니의 동문인 보성여고 동문 처녀를 만나서 충주에 있을 때 집에서 영접하는 모습입니다. 다음은 큰 이모님을 하와이에서 만난 사진입니다. 큰 이모님은 하와이에 계시다가 마지막에 버지니아 따님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저 때만 해도 아주 젊었을 때입니다. 세 자매님들이 우애가 굉장히 깊습니다. 그 다음은 막내 동생 사진입니다.
<00장로님 기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의 승리를 우리들의 생사를 주관하시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셔서 오직 저희들에게 복 주기만을 원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여! 만세전에 계획하셨다가 100년 전에 사랑하는 우리 00 권사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교회에서는 믿음의 권사로서, 가정에서는 인자한 어머니로서, 또한 귀한 주의 종의 가정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나라에 충성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우리 권사님!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동안의 험악한 환경과 열악한 환경, 그리고 혼란 속에서도 지켜주심으로 온전한 세상의 삶을 마감하여 주시고, 이 세상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 하나님의 가장 귀한 자리에서 쓰임 받으면서 사랑받는 영생, 누구나 가는 우리 권사님 되게 하여주셨사오니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저희들의 은혜로 저희들은 믿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올립니다. 아멘!
성경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1절 22절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 22절]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제 권사님은 육신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온 식구를 다 믿음의 가족을 만들고 돌아가셨다.
원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었는데, 장인어른을 감화시키셔서 장로가 되게 하시고, 자녀들을 모두다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서 믿음의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 하신 분이고, 늘 기도로 사셔서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어머니시다.
비록 이제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는 이분의 일생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또 아버지 앞으로 가는 이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해서 은혜를 받자고 모였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의 유명한 말이고, 그리고 대단히 놀라운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온 인류를 한 사람으로 보았는가? 이것이 탁월하고도 놀라운 계시이다. 우리는 50억 인구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여도 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은 50억이 되었든지 100억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아담 한 사람! 그리스도 한 사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탁월한 일이다. 모든 종교가 다 개인이 각자 자기대로 구원을 성취해야 되는 일이다.
그런데 바울의 신학은 아주 특이하게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도 온다는 논리이다. 범죄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의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아담을 알았는가? 우리가 언제 선악과를 먹었는가? 우리는 전혀 그것을 모른다. 모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고, 한 사람 안에서 다 죄인이다. 인류는 엄청나게 숫자가 많지만 사람은 하나다. 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다른데 사람은 하나다. 오직 사람은 하나다.
창세기에 보면 만물을 창조할 때 새들을 종류대로, 물고기를 종류대로, 식물을 종류대로 지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사람은 종류대로라는 말이 전혀 없다. 오직 한 사람을 지었다는 말밖에 없다. 이것이 바울에게 발견된 것이다. 아~ 사람은 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아주 쉽게 이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따라 가려면 또 개인적이어야 된다. 나는 나대로 되는 것이지 그분이 그랬다고 해서 내가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라는 진리 안에서 그분이 성취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이고, 그래서 복음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8장 47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했다.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이 큰 복이다. 계시록에도 보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 우리가 방송 청취를 못하는 것과 똑같다. 난리가 나는지 해방이 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방송을 듣지 못하니까 지금 연합군이 일본을 상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변절을 않겠다고 굳게 버티던 사람도 그 방송을 듣지 못해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 매국노가 되고 말았고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방송만 들었더라면 몇 일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땅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아주 축복이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계3:6)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귀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물질적인 음성을 듣는 귀만이 아니라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이 첫째 복이다. ‘우리 귀를 열어주소서! 주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렇게 간구할 일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 51절에 보면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이것은 간수하고 보존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을 듣는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은 “내 말을 지키면~”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과 자신의 말을 동일시해서 하나로 말씀하신 것이다.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또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 말씀이다. 유태인들이 이 말을 듣다가 선지자들도 다 죽었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다 죽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죽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했다. 우리가 생각하더라도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니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직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는 일이고, 이스라엘이 그렇게 존경하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네가 도대체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했다. “내가 있느니라”는 말은 ‘ego eimi(에고 에이미)’라는 말인데 ‘Ego’는 ‘나(I)’라는 말이고, ‘eimi(에이미)’라는 말은 영어로 하면 Be동사로 ‘I am’이다. 우리말로는 번역하기가 좀 어렵다. ‘I am’이니까 불완전 문구이다. ‘I am a boy.’를 하던지 ‘I am a teacher.’라고 하던지 뭐가 붙어야 되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우리말은 동사가 맨 나중에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없다. 그런데 영어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이 사람이다. ‘ego eimi(에고 에이미)’다.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를 만났을 때 네가 네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니까 그 암담한 현실, 전혀 불가능한 현실이다. 어떻게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200만이나 되는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말은 ‘당신이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하는 말이다. 여기서 유태인들이 ‘너는 누구냐?’하고 묻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신 말씀이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다.’ 영어로 ‘I am that I am.’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나다’라는 말은 좀 불완전한 말이다. ‘나는 ~이다.’라는 뜻은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I am the light.’하면 ‘나는 빛이다.’, ‘I am the life.’하면 ‘나는 생명이다.’, ‘I am the love.’하면 ‘나는 사랑이다.’가 되는 것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현실은 전혀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I am the freedom.’하면 ‘나는 해방이다.’가 된다. 네가 나를 누구라고 묻느냐? 나는 애굽에서 얼마든지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자라는 말이다. ‘I am’에 붙이기 나름이다. 네가 빛이라고 붙이면 빛이고, 생명이라고 붙이면 생명이고, 구원이라고 붙이면 구원이라는 것이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이것이 참 이상한 말이다. 네 믿음대로 붙이라는 말이다. 네가 구원자라고 붙이면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게 되는데, 여호와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모세는 이 이름을 가지고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앞에 섰던 것이다. 내 백성을 내놓아라. 바로가 참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바로가 굴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놓는다.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하는 그분에게 내놓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을 따서 ‘ego eimi(에고 에이미)’라는 말을 했다. 너무 놀라운 말이고, 너무 참담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네가 어떻게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생각해보면 ‘ego eimi(에고 에이미)’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두운데 가면 빛일 수 있다. 내가 저주인 곳에 가면 사랑일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우리 이름을 정해놓으면 안 된다. 나는 너를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정해놓으면 안 된다. 나는 너를 미워했을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내가 너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일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ego eimi(에고 에이미)’니까. 그 밑에 내 이름을 박아서 비석을 새겨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시면 그때 나는 빛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이 될 수도 있고, 그때 나는 사랑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이름을 정해버리면 안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정해버리면 안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 ‘ego eimi(에고 에이미)’는 너무나 복된 말씀이다. 이 사람 안에 우리가 포함된다면 나도 ‘ego eimi(에고 에이미)’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 혼자 그렇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ego eimi(에고 에이미)’를 전 세계화하려고 인류화하려고 온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하려고 왔다. 그분 안에서 나도 생각해보면 ‘ego eimi(에고 에이미)’가 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나는 내 이름을 정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와서는 나는 그것이 지워져버렸다. 옛날에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이름이 지워져버렸다. 나는 지금 내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붙이면 된다. 절대로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 절대로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나도 젊은 날에 처음으로 원수를 져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니까 순간적으로 없어져버리고, 내가 왜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편지를 써서 내가 잘못했고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생했다고 했다. 그때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줄 알았다. 우리 은혜가 7개월 되었을 때였는데, 은혜를 데리고 정처 없이 교회를 나왔을 때 내 앞길은 아무것도 없고 캄캄했다. 내 인생을 망친 사람들을 평생 잊겠는가? 못 잊는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 달 만에 싹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이름이라는 것은 없다. 만일 내 이름이 영원토록 비석에 박혔다면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이름을 뺏어가 버리고, 다른 이름을 주시니까 내가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도 ‘ego eimi(에고 에이미)’이신 이분 안에 포함되었을 때는 나도 ‘ego eimi(에고 에이미)’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사랑이라면 나도 사랑이 될 수 있고, 그분이 빛이라면 나도 빛이 될 수 있고, 그분이 부활이라면 나도 부활이 될 수 있다. 나는 나 혼자 부활할 수가 없다. 아무리 혼자 잘해도 성경 안에는 어디에도 개인이 자기 혼자 부활한다는 곳은 없다. 개인이 자기 혼자 살았다면 소생이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면 소생이지 부활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니고, 그 부활하신 자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 어떤 사람도 개별적으로 부활한 사람이 없다. 2천년이 지났지만 한 사람도 부활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만 부활이다. 애굽 사람들의 부활은 개별적인 부활이고,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바로들은 피라밋을 해놓고 자기가 영원히 보존되어 자기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에 와보니까 자기대로의 부활이라는 것은 없고,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서 부활이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면 내가 부활한 것이고, 그분이 부활하지 못하면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이다. 왜? 그분이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아담이 나를 대표하여 내가 멸망에 이른 것 같이 그리스도가 나를 대표할 때 나는 부활에 이른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바울의 모든 말 가운데서 ‘in Christ(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모든 것은 이 ‘그리스도 안에’를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개별적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만일 ‘ego eimi(에고 에이미)’인 이 사람 안에 포함되면 이분과 꼭 같은 사람이 된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이다. 우리를 보고 너희가 왕 같은 제사장이요라고 한다. 왜? 그분 안에서 하는 말이다.
로마서 6장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라고 되어있다.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산다고 한다. 그분과 하나면 어디를 가도 하나일 것 아닌가? 언젠가 어떤 장로님이 나에게 목사님은 죽으면 천당에 가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지금 예수 안에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고 대답했다. 예수님 계신 곳에 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됐다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 한 사람 안에서, 이 한 사람 때문에가 아주 중요하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런데 또 물었다. ‘어떤 형상으로 우리가 부활할 것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생겼다. 지금 이 모양으로 부활한 것인지, 또 다른 모양으로 부활한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고 말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육신에 속한 이 형상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야 된다. 어차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권사님이 육신을 버리고 가시지만 가지고 계신다고 해도 그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런 형상도 있고 저런 형상도 있는데,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나오게 되고, 벼를 심으면 벼의 형상이 나올 것 아닌가?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가 심는 대로 형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거둘 때 열매를 거두게 된다. 내가 지금 보리를 심었으면 보리를 거둘 것이고, 벼를 심었으면 벼를 거둘 것이라는 뜻이다. 네가 무슨 형상이 될 것인가? 네가 지금 무슨 형상이냐는 것이다. 네가 지금 보리이면 보리 형상을 거둘 것이고, 네가 지금 벼면 벼의 형상을 거둘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했더니 또 언제 그렇게 될 것이냐는 질문이 생긴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15:51), “이 때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54)고 대답했다. 어느 때냐고 묻는 사람에게 내가 비밀을 말하겠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라는 말이다. 그 마지막 나팔이 불 때가 언제인가?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바 될 때다. 사망이 이김에게 잡혀먹을 때다. 이것은 승리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승리하는 날,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세계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 그날이 마지막 나팔을 부는 날이다. 그래서 수판으로 계산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계산해왔다. 이래저래 성경을 맞추어보았지만 하나도 맞는 사람이 없다. 왜 맞는 사람이 없는가? 성경에는 절대로 맞는 날이 없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오늘 우리의 승리여야 된다. 그리스도가 오늘 교회를 통해서 승리할 때, 그때가 마지막 때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군대에서 나팔은 승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패배할 때는 나팔을 불 수가 없고, 승리할 때만 나팔을 불고 전진한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동업과 마찬가지다. 예수님 혼자는 이기셨지만 예수님 혼자 이긴 것만 갖고는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고, 우리와 함께 이겨야 된다는 말이다. 맥아더 한 사람이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 그 사람의 부하들과 군대가 합해서 동업을 했기 때문에 함께 전쟁을 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혼자서 이미 승리는 했지만, 그 안에 다 승리가 있지만 그 승리를 완전하게 효율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떠나보내면서도 그렇고, 그렇지 않아도 그렇고 우리의 승리가 절실히 필요하구나. 우리가 승리해야 마지막 나팔이 울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제 권사님은 자기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다 마치셨다. 어머니로서 너무나 완전하게 어머니 일을 하셨다. 자녀들을 다 잘 키워서 고생한 가운데 중국으로 제주로 피난 시절을 살면서, 지금 사람들은 그때 고생을 상상 못한다. 어느 정도의 고생인지를 모른다.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오죽하면 네 자녀를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죽자고 했겠는가? 요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요즘도 그런 일이 있지만 그런 역경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아니하시고 믿음을 지키면서 자녀들을 다 믿음 안으로 인도했다. 평생을 기도하시면서 사신 분이다. 나도 사실 결혼한 것이 그분과 집사람의 기도 때문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결혼이 준비된 사람도 못되고, 누구에게 결혼하자고 말할 만한 사람도 못된 사람인데, 중매한 사람이 연락을 했는데 소식이 안 오기 때문에 안 되는 줄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인가 두 달 만에 올라와서 하는 말이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보낸 사진을 놓고 한 달인가 두 달인가를 어머니와 기도를 했는데 딱 이 사람이라고 응답이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왔다고 하니 내가 어찌 하겠는가? 꼼짝없이 내가 잡혀들었다. 명색이 전도사인데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왔다는데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리 빼고 저리 빼 보았는데,
일이 되는 것마다 정말로 하나님이 예정해놓은 대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맞구나 하여 내가 굴복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도하신 분이다.
그리고 맨 처음 만난 것은 서울 조그마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저 뒤에 어떤 두 분이 와서 설교가 끝나고 와서 인사를 하니까 장모님 되실 분과 큰 아들 며느리 되는 처남댁과 두 분이 와서 나를 선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묶어지게 되어서 집사람이 어머니를 돕게 되고, 그러다가 하루는 장인어른께서 불러다가 지금 제천에서 김영수 장로님이라고 제주에서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장로님이 계신데 이분이 양장점 가게도 준비해 놓으시고 살 집도 마련해놓으시고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어떻게 가겠느냐? 너희가 간다고 하면 간다고 하고, 너희가 안 간다면 안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만일 안 가겠다고 하면 이 노인네들을 충주에 가두어놓는 셈이 되는 것이다. 큰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두문불출하신 분이었다. 캄캄한 방에서 길가에도 나가지 않으신 분이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때가 기회였다.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하여 제천을 가게 된 것이다. 김영수 장로님은 참 고마운 분이고, 잊을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제천에 가니까 더 끈끈하게 맺어지게 되었다. 한 집에서 4년 동안 같이 살았다. 내가 모신 것은 아니지만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대구에 있으면서 주말마다 왔다갔다 하고 집사람이 양장점을 하고 어머니께서 도와주시고 또 우리 아이들도 키워주셔서 4년을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서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교회 때문에 그분들을 놔두고 대구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노인 두 분만 객지에 두고 오니까 불안하다. 따님들이나 동서들이 다 불안하게 생각했다. 큰 동서가 오시라고 집까지 다 마련해놓고 내려오시라고 하는 데도 미적거리고 안 내려오시는 것이다. 이분이 이사를 못하기로 유명하신 분이다. 충주에서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떠나지 않았을 분이고, 또 이야기를 들으니 제주에서도 진즉 떠났으면 더 나았을 텐데 끝까지 미적거리시다가 맨 마지막 막차를 타고 나오셨다고 한다. 어디 움직이시기를 못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내가 편지를 보냈다. 대구에 오시면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큰 동서가 다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사실 내가 책임질 일이 별로 없다. 오시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때 나는 장례식을 염두에 두었다. 그 편지를 받고서 어떻게 마음이 동하셔서 이사를 내려오셨다. 사람을 보내서 이삿짐을 싣고 내려오게 되었다. 참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오늘 그때 책임을 다하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 책임을 다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내가 혹시 중간에라도 다른 일이 생겨서 약속을 못 지켰으면 노인들에게 얼마나 실망을 드렸겠는가? 그런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하고, 사실은 돌보기는 큰 따님과 큰 동서가 모든 면에서 다 돌보셨다. 마지막 2년 동안은 막내 동서가 서울에 모셔가서 살다가 오셨다. 나는 사실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만 가서 돌봐드리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노인들이 편히 사시다가 가셨고, 사랑을 받고 가셨고, 또 끝까지 사랑하셨고, 갈 때마다 사랑을 받고 왔다.
육신으로는 떠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한 사람 안에서, 영원한 한 사람 안에서, 우리는 옛날 영원한 한 사람인 아담, 저주 받은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각각이었지만 이제 그 축복의 사람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로 또 온 가족이 하나로 만나지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이분 밑에 이렇게 많은 가족이 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도 참 드문 일이다. 이런 축복 안으로 인도해주시고 가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아버지께서 그 품에 안아주실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렇게만 살다가 가면 누구라도 후회 없이 살지 않겠는가? 젊어서는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이 인생을 사시고 가셨다. 아버지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에 대해서 감사하고, 우리가 이 은혜 안에서 살았고 사랑 안에서 살았던 일을 다시 회상하고 오늘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 제일 슬픈 분들은 따님들이시고, 사위들은 백년손님이라고 하는데 막내 사위는 참 인정이 많다. 그리고 또 장모님을 굉장히 사랑하시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니까 참 부럽다.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친 아들처럼 사랑하고, 어머니처럼 모셨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남기고 가셨음에 대해서 깊이 감사를 드린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예정하셔서 하나하나 배열하시고 안배하셔서 한 치도 오차가 없고 틀림이 없도록 우리 인생을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마음의 생각이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뜻을 이루시는 일은 여호와시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오늘 보니까 우리의 생각은 다 소용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만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흠이 있지만 주님께서 하신 일은 완전하고 흠이 없고 오직 찬양받을 일밖에 없는 이렇게 완전하신 분을 우리가 만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권사님을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셔서 그 인생 여정을 통해서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어려울 때 주님을 붙잡을 수 있게 하셔서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게 하시고 자녀들에게 좋은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고 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고 마지막까지 어려움 없이 사랑 가운데서 떠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받으셔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홀연히 나팔 소리가 날 때 우리가 순식간에 변화하는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오늘 장례 모든 절차를 주님께서 주관하셔서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복이 되도록 축복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