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법계당에게 보이다(示法界堂)
동산洞山 화상이 「자계自誡」에서 일렀다.
명리를 구하지도 영화를 구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인연 따라서 평생을 살아가노라.
세 치 혀 기운 사라지면 누가 주인인고.
몸이 죽은 뒤에 부질없는 허명만 남는 것을.
옷이 해진 곳은 겹겹이 기워 입고
양식이 없으면 그때그때 마련할 뿐
이 덧없는 몸뚱이가 얼마나 오래 간다고
쓸데없는 일 때문에 무명을 기르리오.
이 몇 마디 말은 또한 출가한 사람들이 날마다 경각警覺하고 때때로 경책하는 도리라, 응당 익숙히 읽고 음미해 왔을 터이다. 무상無常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큼을 늘 생각하여 눈을 떴을 때도 급하고 절실히 공부하고, 눈을 감았을 때에도 급하고 절실히 공부하며, 행주좌와 모든 때 모든 곳에서 급하고 절실히 공부해야 하니, 이와 같이 공부한다면 어느 겨를에 허다한 잡념이 침범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덕이 “설령 열반보다 나은 어떤 법이 있더라도 나에게는 꿈과 허깨비 같다.” 하였거늘, 하물며 세간의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한 법 따위에 다시 무슨 마음으로 간여하리오. 쌍림雙林 부대사傅大士가 말하였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서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고 앉을 때 늘 따라다니며
말하고 침묵할 때 늘 함께 있어
터럭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마치 몸뚱이에 딸린 그림자 같아라.
만약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말하는 이 소리라 하리라.
이 몇 구절 또한 출가한 사람들이 날마다 조고照顧하고 때때로 참구하는 면목面目이니, 자세히 생각하고 환히 알아야 한다. ‘내 몸뚱이에 감춰져 있는 한량없는 값어치의 보배를 알지 못하여 이 때문에 오랜 겁을 지나도록 부질없이 신고를 겪어 왔는데, 금생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어느 생에 다시 견문이 맑아질 수 있으리오’라고 생각하여 불법을 만난 것이 다행스럽다는 마음과 용맹스럽게 정진하겠다는 뜻을 일으켜서 고인의 가르침을 따라 노력하여 수행해야 한다.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내지 육바라밀 법문에 대해서도 절대로 여러 가지 도리로 나누지 말고, 응당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보는 데 힘써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요함과 맑음(靜淨)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하니, 맑음이 보리이고 고요함이 열반이다. 그러나 투철히 요득한 뒤에는 어찌 이 두 가지 명칭으로 나누고 열반을 절목節目으로 삼으리오.
그러므로 “마음을 사무치게 비추어 보면 본체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온몸이 그대로 대도大道와 합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만행萬行은 비록 불자가 평상시 수행할 바이지만 지혜로 자기 본성을 비추어 보는 공부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른바 “만행을 다 수행하되 오직 무념無念을 으뜸으로 삼는다.”라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앞의 다섯 바라밀34) 수행은 지혜의 공력이 없으면, 비유컨대 눈을 잃은 사람이 험한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 근본은 이와 같은데 그 지말은 저와 같은 경우가 있으리오. 게다가 선과 악, 보리와 생사도 결코 둘이 아니며, 과거·미래·현재도 결코 둘이 아니며, 시방세계와 하나의 털끝도 결코 둘이 아니다. 그러나 제법諸法은 그렇다고 하여 하나도 아니니, 하나다 둘이다를 누가 이름 붙일 수 있으며, 이름 붙이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기는 도리어 천비산天庇山 중암中庵 아래다.천비산 중암은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 산내면山內面 묘각사妙覺寺에 있다.
대저 불법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무겁고 큰 돌과 나무를 운반하거나 글과 무술을 배우는 것처럼 실로 마음을 일으키고 힘을 써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경천동지할 특별한 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망상이 본래 없음을 비추어 요달了達하면, 성품의 본체가 밝고 맑으며 안락하고,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어 가볍고 무거움도 없고, 모자라고 남음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고, 살고 죽음도 없다. 대개 으레 이와 같을 뿐이니, 깨달은 이는 이와 같고, 미혹한 이는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응당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보임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란 것인들 어찌 있으리오.
대저 공부함에 있어 어찌 허다한 명상名相을 펼쳐 놓은 뒤에 착수한다 하리오. 단지 이것이다.
“감히 묻습니다. 단지 이것이란 무슨 뜻입니까?”
“산하대지와 명암明暗·색공色空이다.”
“이미 명상입니다.”
“네가 무엇을 가지고 명상이라 하느냐?”
“지금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져 삶과 죽음이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제거하겠습니까?”
“네가 무엇을 가지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느냐?”
“그렇다면 없습니다.”
“나에게 말을 돌려 다오.”
대저 출가한 사람은 먼저 그 안목을 바로잡아야 하니, 안목이 바르면 누가 감히 불법과 세제世諦의 부질없는 말을 가지고 도리라 하리오. 그렇다고 해서 그저 깎아지른 벼랑처럼 높기만 한 것은 아니니, 푸른 대나무와 노란 국화, 꾀꼬리 노래와 제비 지저귀는 소리이다. “감히 묻습니다. 현재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크게 웃으며 일어나리라.
이 편지는 내용이 얼마 안 되지만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니, 응당 세밀히 참구하여 기어코 분명히 요달了達해야 한다. 이미 부탁을 받은 터라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기에 이제 몇 마디 말을 써 주노니, 비록 수만 권의 글을 쓰더라도 기실 강령綱領은 이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사소한 글을 보냈다 꾸지람을 하지 말기 바란다. 사족蛇足을 달아 달라고 부탁했기에 사족을 달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