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3권
변본사품 ③
3. 온ㆍ처ㆍ계의 3과(科)의 분별
3.1. 일체법과 3과의 상호 포섭 관계
온갖 온(蘊)과 취온(取蘊)과 처(處)와 계(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이제 여기서 그것들의 포섭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모두 포섭하고, 취온은 오로지 일체의 유루법을 포섭하며, ‘처’와 ‘계’는 일체법을 모두 다 포섭하니, 여기서 일체법이란 5온과 무위를 말한다.
개별적인 포섭 관계[別攝]는 이상과 같다.
이제 마땅히 전체적인 포섭 관계[總攝]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포섭함은
하나의 온과 처와 계에 의하는 것으로
자성만을 포섭하고 그 밖의 것은 포섭하지 않으니
타성(他性)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하나의 온’이란 색온(色蘊)을 말하고, ‘하나의 처’란 의처(意處)를 말하며, ‘하나의 계’란 법계(法界)를 말한다. 즉 이러한 세 가지가 5온과 무위를 전체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다.9) 여기서 ‘전체적[總]’이라 함은 바로 ‘모두[總集]’의 뜻으로, 이같이 ‘전체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세 가지 모두를 알게 하기 위함이지 각기 하나에 대해 알게 하고자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부파[有餘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포섭한다’고 함은 다른 존재[他性]를 포섭하는 것을 말하니, 다른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을 포섭한다고 [계경] 곳곳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3온은 8지성도(支聖道)를 포섭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10) 만약 자성만을 포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혜온(慧蘊)은 오로지 정견(正見)만을 포섭하고 정사유(正思惟)나 정정진(正精進)은 포섭하지 않아야 하며, 정온(定蘊)은 오로지 정정(正定)만을 포섭하고 정념(正念)은 포섭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미 계경에서 이와 같이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법은 오로지 다른 어떤 존재, 즉 타성(他性)을 포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으니,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존재를 포섭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이유에서 혜온은 오로지 정사유와 정정진만을 포섭하고 정념이나 정정 혹은 그 밖의 다른 법은 포섭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포섭 관계에도 역시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 이를테면 정사유와 정정진은 그 성질이 지극히 예리하기 때문에 특성상 반야(般若, 즉 혜)와 관계한다. 그러나 정념이나 정정 등의 법은 ‘혜’의 특성과 서로 모순되어 정념은 ‘정(定)’의 특성과 관계하지만 정사유 등은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오로지 자성(自性)만을 포섭한다는 말이니, 다른 특성[異相]의 법을 포섭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특성이 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 만약 그 특성이 부분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의] 상호 포섭 관계를 인정한다면 마땅히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을 포섭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찌 ‘다른 존재와 상응(相應)하기는 하지만 일체의 법이 일체의 법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경우와 같지 않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와 상호 포섭하기는 하지만 일체의 법이 일체의 법과 상호 포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유여부)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다. 대저 ‘상응’이라 함은, 오로지 소연(대상)을 갖는 법[有所緣法, 즉 심ㆍ심소법]으로서 다른 법과 서로 비교하여 볼 때 다 같이 소연과 일어나는 시간과 소의(所依)와 행상(行相)의 종류 등이 동일한 것, 이것을 상응이라고 한다.11) 따라서 일체의 법이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호 포섭의 경우 일체의 법과 통하니, 어떤 결정적 근거가 있어 이것은 오로지 그것을 포섭하고 그 밖의 다른 법은 포섭하지 않는 것인가? 따라서 마땅히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을 포섭해야 한다. 모든 색법이나 불상응행법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것의 조건[緣] 등 서로 유사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상호 포섭 관계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유여부)
만약 다른 존재를 포섭한다면 어째서 안(眼) 등은 이(耳) 등을 포섭하지 않는 것인가? 득(得) 등의 경우를 서로 비교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경(앞서 ‘3온은 8지성도를 포섭한다’고 설한 경)에서 그같이 말하였을 것인가?
여기서는 서로에 따르는 것을 일시 ‘포섭한다’는 말로 설하였다. 이를테면 정사유와 정정진을 다 같이 혜품(慧品, 즉 혜온)이라 한 것은 정견에 따르기 때문이며, 정념을 정품(定品, 즉 정온)이라 한 것 정정에 따르기 때문으로, 이를 일시 ‘포섭한다’는 말로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저러한 여러 계경에서 “신(信) 등의 5근(根)은 혜근(慧根)에 포섭된다”거나 “나는 4섭사(攝事)로써 온갖 무리들을 포섭한다”, “대관(臺觀)의 중심은 온갖 재료들을 포섭한다”고 설하고 있으며,12) 세간에서도 역시 ‘경첩은 문을 포섭하고, 수레바퀴는 살을 포섭하며, 실은 옷을 포섭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포섭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일체의 ‘포섭한다’는 말은 그 뜻을 일시 가설한 것이니, 말하자면 방편(이를테면 ‘혜’)에 근거하여 [다른 법을] 흡수하여 흩어지지 않게 임지(任持)한다는 뜻을 일시 설하여 ‘포섭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앞서 인용한 ‘그 밖의 다른 존재를 포섭한다’는 여러 경증의 말은 ‘잠시’ 그렇게 설한 것으로, 다른 존재에 근거[待]할 때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섭한다’는 말이 어떤 원인(즉 다른 존재)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서는] ‘포섭하지 않는다’는 말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
또한 만약 법이 결정코 다른 존재를 포섭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하나의 법이 생겨날 때 마땅히 일체의 법이 생겨나야 하고, 하나의 법이 소멸할 때 마땅히 일체의 법이 소멸해야 하니, 이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비애(非愛)의 허물을 더하는 것이 된다. 즉 1부(部)의 번뇌가 끊어질 때 5부의 번뇌도 마땅히 끊어져야 하며, 그럴 경우 뛰어난 대치도(對治道)를 더 이상 닦을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다.13)
[다른 존재를 포섭한다고 주장할 경우] 이와 같은 등의 많은 허물을 범하게 되므로 우리 부파(설일체유부)의 모든 논사들은 ‘자성(自性)만을 포섭한다’고 말한다. ‘자성만을 포섭한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로 궁극적인 설이니, 다른 존재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섭 관계로서 다른 어떤 원인에도 근거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포섭이니, 제법은 항상 자성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른 존재[他性]를 포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일체의 법은 다른 존재를 배제[離]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근의 존재는 이(耳) 등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다. 즉 그러한 법은 이러한 법을 떠난 것인데 ‘이것에 포섭된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법은 오로지 자성만을 포섭한다.
이와 같이 안근은 오로지 [그것과 동류의 성질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와 고(苦)ㆍ집제(集諦) 등에만 포섭될 뿐이니, 이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온이나 다른 처, 다른 계 등에는 포섭되지 않으니, 그러한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타의 다른 법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자성에 의해서만 포섭된다’는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男)ㆍ여(女)의 두 근은 어떠한 계(界)에 포섭되는 것인가?14)
어떠한 이유에서 여기서 갑자기 이같이 의심하게 된 것인가?
다른 부파에서는 ‘[남ㆍ여의 두 근은] 신근(身根)도 아니고 신계(身界)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이 의심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이러한 의심을 버려야 할 것이니, 결정코 신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몸과는 그 작용이 다른데, ‘계’가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계(즉 신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여기서 ‘종류가 동일하다’고 함은 남ㆍ여의 두 근은 다 같이 몸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계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들(몸과 남근ㆍ여근)의 종류가 동일함을 아니, 남근과 여근은 몸과 마찬가지로 촉(觸)을 경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눈과 코와 목구멍 중에서도 촉을 바로 감각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어찌 신근과 다르다 할 것인가?
이 세 가지(남근ㆍ여근과 신근)는 경계가 동일하고, 식(識)이 동일한 종류로서 일체는 모두 신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신계에 포섭되지만], 증상의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이 설정하게 되었다]. 즉 남근ㆍ여근과 신근은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에 [신계에 포섭된다]. 그러나 비록 동일한 처, 동일한 계에 포섭될지라도 증상력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근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니, 11근의 경우도 동일한 처, 동일한 계일지라도 증상력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의 근으로 설정한 것과 같다.15)
3.2. 18계의 조건-안ㆍ이ㆍ비처는 왜 각기 2계가 아닌가?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각각 의지처가 두 곳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계(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는 것인가?16)
두 곳을 합하여 하나로 삼았기 때문에 오로지 열여덟 가지가 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두 곳을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비록 두 개일지라도 계(界) 자체는 단일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비록 각기 두 곳이 있을지라도 종류 등이 동일하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종류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안근의 두 곳은] 다 같이 눈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경계(즉 대상)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색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인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근과 비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의 ‘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계’ 자체는 이미 하나라고 하였거니와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의 소의처(所依處)는 두 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안(眼) 등에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의 형상을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 계(界) 자체는 비록 하나이지만 두 곳의 소의처가 생겨나게 되었다. 만약 눈(안근)과 귀(이근)가 오직 하나만 있고, 코(비근)에 두 개의 구멍이 없다고 한다면 신체는 단정하지 않고 위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낙타나 고양이, 솔개 등도 [두 곳의 소의처를 갖추었지만] 이렇듯 누추하니, 그들에게 무슨 단정함과 위엄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온갖 근의 각기 다른 종류가 이같이 다르게 배열되어 생겨나게 된 것은 인연에 따른 것으로, 인연에 장애가 있었다면 혹 두 곳으로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신근인 머리와 목, 배, 등, 손발 등이 그렇게 다르게 배열된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 등의 두 곳에 대해서도] 마땅히 의심하여 힐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근] 역시 인연에 따라 이같이 차별된 것으로, 인연에 장애가 있었다면 혹 다르게 생겨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래서 뱀 등의 몸에는 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종류(뱀)를 보면 혀도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근이 다르게 배열된 것은 인연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지 몸을 장엄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본송에서] ‘안 등의 근은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설한 것인가?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으니, 신체를 장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는 말은 ‘뛰어나다[增上]’는 뜻을 나타낸다.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온갖 작용이 뛰어나고 원만한 것을 ‘단정하고 위엄 있다’고 설하고 있다. 만약 안 등의 근에 각기 한 곳이 결여되어 있다면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작용은 모두 명료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각기 두 곳을 갖추었으면 명료한 작용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본송)에서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작용을 뛰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3.3. 3과의 명의(名義)와 가실론(假實論)
모든 온과 처ㆍ계의 포섭 관계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뜻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알려지는 대상[所知境, 즉 일체법] 중에서 ‘온’은 유위법을 포섭하고, ‘처’와 ‘계’는 [유위법과 아울러] 모든 무위법을 포섭한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이와 같이 알려지는 대상을 ‘온’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처’, ‘계’라고 이름하게 되었던 것인가?
온ㆍ처ㆍ계의 뜻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ㆍ처ㆍ계의] 개별적인 뜻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적취와 생장문(生長門)과 종족
이것이 바로 온ㆍ처ㆍ계의 뜻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적취(積聚, rāśi)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고, 생장(生長)하는 문(āya-dvara)이라는 뜻이 바로 ‘처’의 뜻이며, 종족(gotra)의 뜻이 바로 ‘계’의 뜻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알게 된 것인가?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거나, 혹은 미래의 것이거나, 혹은 현재의 것이거나, 혹은 내적인 것이거나, 혹은 외적인 것이거나, 혹은 거친 것이거나, 혹은 미세한 것이거나, 혹은 저열한 것이거나, 혹은 수승한 것이거나, 혹은 멀리 있는 것이거나, 혹은 가까이 있는 것, 이와 같은 일체의 법을 한 무더기[一聚]로 묶어 색온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곧 이렇듯 경 중에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문(門)의 뜻이 바로 ‘처’임을 알게 된 것인가?
어원적 해석[訓詞]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즉 ‘처’란 생장하는 문을 말하는 것으로,17) 심과 심소법이 여기서 생장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처’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능히 그러한 심ㆍ심소법의 작용을 생장시킨다는 뜻으로, 계경에서 “범지(梵志)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으로 삼아서는 오로지 색만을 보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 경문은 다만 문에 여섯 가지(안 등의 6처)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지만, 심ㆍ심소법은 열 두 가지의 문(즉 12처)을 갖는다. 그래서 또 다른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나며,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受)ㆍ상(想)ㆍ사(思)를 함께 낳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의(意)와 법(法)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意識)이 생겨나며,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은 수(受)ㆍ상(想)ㆍ사(思)를 함께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 어떤 다른 논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근거[依]에 의해 이러한 심 등이 생장하기 때문에 ‘처’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어떠한 근거에서 종족의 뜻이 바로 ‘계’임을 알게 된 것인가?
세간에서의 종족의 뜻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산 속에 존재하는 웅황(雄黃)과 자황(雌黃, 유황과 비소의 혼합물)과 적토(赤土)와 안선나(安膳那, anjana, 흑색의 토석) 등 여러 가지 종족들을 다양한 [토양의 세계] 즉 다계(多界)라고 이름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의신 혹은 하나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열여덟 가지 종류의 제법의 종족을 18계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그러한 산 속에 존재하는 웅황 등이 생겨나는데 근본[生本]이 되는 온갖 광물을 ‘종족’이라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심ㆍ심소법이 생겨나는데 근본이 되는 제법을 ‘종족’이라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처’와 ‘계’의 뜻이 마땅히 서로 뒤섞이게 될 것이니, 다 같이 심과 심소가 생겨나는데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종족의 뜻을 별도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웅황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體類]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름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안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계(意界)를 6식계(識界)와 비교해 보면 양자는 별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다른 ‘계’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18)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로서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설정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6식은 바로 의근에 선행하는 것이지만, 의근은 6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비록 모든 ‘계’는 실체이며, 아울러 3세에 통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작용하는] 상태의 차별에 따라 다른 이름을 설정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같은 사실에 따라 6식은 선행하는 법이고, 의근은 후 찰나의 법이라고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미래의 의근과 6식의 경우 [작용하는] 시간과 상태가 아직 분별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6식은 선행하는 것이고, 의근은 후 찰나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적취라는 뜻으로 ‘온’을 해석할 것 같으면 온은 마땅히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적취는 바로 가설적 존재[假]이기 때문이다.19)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적취의 소의(所依)에 대해 ‘뜻’이라는 말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20) 다시 말해 적취가 바로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뜻’이란 실체[實物]인 명사적 단어[名]의 차별이지만 적취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경설(經說)에 크나큰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적취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적취의 소의를 떠나 별도로 실재하는 적취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我)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색 등 5온 이외 실유의 ‘아’를 마땅히 별도로 추구해서는 안되니, 5온의 상속을 일시 ‘아’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세간의 적취와 마찬가지로 ‘아’도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온’이 만약 실유라면 [앞서 인용한] 경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교화되어야 할 중생들은 색 등 제법의 3세의 품류(品類)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별이 각기 바로 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은 가이없는 것[無邊]이다’고 하면 바로 두려움을 낳아 ‘내가 어찌 이러한 가이없는 온을 능히 변지(遍知)하여 영원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곧 그들을 책려하기 위해 온이 비록 가이없는 것일지라도 그 특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로 설한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는 다수의 온에 대해 일합상(一合想, 다수의 개별적 존재를 하나의 전체로 간주하려는 생각)을 낳아 즉시 아집을 일으킨다. 즉 그로 하여금 일합상을 제거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온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고 설한 것일 뿐, 색 등의 5온은 다수의 법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 존재이지 실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일한 극미는 3세 등에 포섭되고 혜(慧)에 의해 분석되므로 그것을 묶어 하나의 적취[一聚]라고 하였다. 따라서 온이 비록 적취라고 할지라도 실유의 뜻은 성립할 수 있으며, 여타의 다른 법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온은 일시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21) 또한 각기 개별적으로 생기하는 법에 대해서도 역시 ‘온’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에 온은 결정코 일시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테면 [심법과] 동시생기[俱生]하는 수(受)를 수온이라 이름하고, 상(想)을 상온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설의 경우는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모든 때에 걸쳐 화합 생기하기 때문에 온이 비록 각기 개별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적취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나뉠[分段] 수 있다는 뜻이 바로 ‘온’의 뜻으로, 모든 유위법은 모두 과거ㆍ미래ㆍ현재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러한 해석은 경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판결하고 있지만,22)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처’와 ‘계’의 두 뜻도 어찌 경에 어긋나지 않을 것인가?
그럴지라도 그 중에 포섭시켜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어떤 이치가 있어 오로지 ‘온’에 대해서만 경증(經證)을 구하고, ‘처’와 ‘계’에 대해서는 오로지 이증(理證)에 의거하여 해석할 뿐 경증을 구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처ㆍ계)의 뜻을 관찰하여 말하자면, 여러 주장들[朋黨]이 유사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와 같이 이증에 근거하여 해석하여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3.4. 3과의 건립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알려지는 경계 대상[所知境, 즉 일체법]에 대해 ‘온’ 등의 갈래에 따라 세 종류로 설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의 세 가지 때문에
‘온’과 ‘처’와 ‘계’의 세 종류로 설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선서(善逝)께서 그렇게 설하신 뜻은 지극히 알기 어렵지만 이치에 따라 살펴보면 아마도 다음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모든 제자들 중에는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 각기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으로, 선서께서는 이에 따라 온ㆍ처ㆍ계라는 세 종류의 법문을 설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즐기는 것’이란 승해(勝解, 즉 이해)를 [즐기는 것을] 말하며, ‘세 가지’란 각기 세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즉 교화될 중생의 어리석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혹 어떤 이는 심소(心所)에 어리석어 그것을 모두 아(我)라고 집착하며,23) 혹 어떤 이는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어리석으며,24) 혹 어떤 이는 색과 심(心)에 어리석기도 한 것이다.25) 근기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예리함과 중간과 둔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유정이 즐기는 것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간략한 글[略文]과 중간의 글[中文]과 자세한 글[廣文]을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교화될 중생들의 이와 같은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선서께서는 그들을 위해 온ㆍ처ㆍ계의 세 가지를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가 이에 대해 논설한 바는 너무나 간소하다.26) [3과를 설하게 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니,] 이를테면 모든 제자들 중에는 이미 작의(作意)를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에 이른 단계[已過作意], 이미 완전하게 익힌 단계[已熟習行], 처음으로 정법의 사업을 닦는 단계[初修事業] 등 세 단계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아만을 품어 행하는 자[懷我慢行], 아소에 집착하여 따르는 자[執我所隨], 식(識)의 소의와 소연에 미혹한 자[迷識依緣] 등 허물의 세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에, 목숨이나 재물이나 친족을 믿고서 교만 방일함을 낳는 등의 세 가지 다른 병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등등의 연유로 말미암아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순서대로 온ㆍ처ㆍ계의 세 가지를 설하시게 된 것이다.
또한 저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온’을 설한 것은 [외도 범부가] 주장하는 ‘일합(一合, 하나의 전체성)’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이고, ‘처’를 설한 것은 경계[境, 즉 6경]와 경계를 갖는 것[有境, 즉 6근]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계’를 설한 것은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과 그것에 의해 생겨난 식(識)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처’의 갈래[를 설정한 이유]에 대해 설하면서 어찌하여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으로 두루 설정한 것인가?
여기서는 안 등의 5근과 의근이 경계가 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체법은 모두 의근의 경계가 된다.27)
이는 의근의 경계를 두루 설하여 ‘처’의 갈래로 설정한 것이 아니니, 다만 7법을 설하여 의근의 경계가 된다고 하였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법이란 외처(外處)로서, 바로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을 말한다.”
또한 [계경] 곳곳에서 ‘법은 의근의 경계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처’[의 설정 이유]에 대해 설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으로 두루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의(意)와 법(法)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이 낳아진다’고 설한 것은, 일체법은 모두 다 의근의 경계가 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만 말일 뿐이니, 이치도 경전상의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필시 그렇다고 한다면, ‘처’의 차별상에 대해 어떻게 결정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처’의 건립 이유에 대해 설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으로 두루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그 허물은 앞에서와 같다.
또한 상좌는 설하기를 “제법으로서 의(意)에 의해 조작[行]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 법처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법처 하나만을 설정해야 할 것이니, 일체법은 모두 의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도 다만 말일 뿐 어떠한 결정적인 논거도 없다. 또한 그가 말한 것처럼 진실로 1처만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차별상에 근거하여 1처 중에 그 밖의 다른 11처를 설정해야 한다. 이를테면 처음의 안처도 역시 법처라 이름해야 하고, 나아가 의처도 역시 법처라고 이름해야 하며, 최후의 법처도 오로지 법처라고만 이름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순별처경(順別處經)』을 어기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법이란 외처로서, 바로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을 말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 곳곳에서 ‘법은 의근의 경계가 된다’고 설하고 있을 뿐 ‘안 등의 11처를 일컬어 법처라 한다’고 설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따라서 비록 [일체법이] 모두 다 법처일지라도 그 경 중에서는 별도의 법처에 근거하여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을 일컬어 법처라고 설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計度]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그는 [‘처’의 건립 이유에 대해]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으로 설정하였지만, 이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말이다.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경계를 취하고 의근은 일체법을 근거로 하는데 여기에 무슨 혼란이 있을 것인가?
경계를 갖는 것(6근)이 경계가 되고, 경계가 경계를 갖는 것이 되는데, 어찌 혼란하지 않을 것인가? 이(12처) 중에 무엇이 경계를 갖는 것이고, 무엇이 경계가 되는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지극히 혼란스러운 것이다. 나는 이 경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관찰하였으니, ‘처’를 설한 것은 소의(所依)가 되는 경계(즉 외 6처)와 경계를 갖는 것(즉 내 6처)의 차이를 뒤섞임이 없이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집(我執, 자아관념)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니, 자아를 주장하는 이는 “자아는 보는 자이고 내지는 아는 자로서, 이러한 자아는 바로 즐거움 등을 향수하는 토대[所依]가 된다”고 그릇되게 말하고 있다. 즉 이 경에서는 다수의 법과 작용은 존재하지만 ‘능히 보는 자’ 내지는 [즐거움 등을 향수하는] 토대라고 이름할 만한 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치에서 볼 때 비록 일체법이 모두 다 의근의 경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공통되지 않은 경계[不共境]로서, 오로지 이러한 경계를 ‘의근의 경계’라고 설정하였을 따름이며, 오로지 이에 대해 의근을 ‘경계를 갖는 것’이라고 설정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자아를 주장하는 이)는 이같이 각기 다른 관념들을 자아라고 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곧 모든 법처는 그 자체 오로지 경계 대상이 되기도 하며, 또한 역시 경계를 갖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의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이것과 의근이 다 같이 경계를 갖는 것으로 설정되는 경우, 이는 바로 능의(能依)이기 때문으로, 이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
안(眼) 등과 의(意)가 비록 의근의 공통되지 않은 경계가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오로지 경계만 되는 것은 아니며, 색 등의 5처는 단지 경계만이 될 뿐 의근의 공통되지 않은 경계가 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안 등의 5근은 [의근의 경계 이외] 더 이상 또 다른 것의 경계가 되는 일이 없다. 즉 [여기서] 색 등의 경계를 일컬어 ‘공통되지 않는 경계[不共境]’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경계에 대하여 ‘경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아가 여기서 ‘처(處)’라고 하는 말은, ‘안’ 등의 여섯 가지를 설하여 소의처(所依處)라고 하였으며, 색 등의 여섯 가지를 설하여 소연처(所緣處)라고 하였다. 즉 이것이 조건이 되어 다른 법(즉 識)을 생장시키기 때문에 ‘처’라고 설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치에 의거하여 ‘처’라는 말에 대해 해석하였으니, 이를테면 능히 심과 심소법을 생장시키기 때문에 ‘처’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처’를 설하게 된 까닭은 경계와 경계를 갖는 것을 뒤섞임이 없이 설정하기 위해, 그리고 각기 뒤섞임이 없는 작용을 갖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경에서 이 같은 취지를 관찰하였으니, 법을 자세히 간택하려는 자는 마땅히 더욱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5. 심소법 중 수(受)ㆍ상(想)만을 별도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일체의 심소법 중 두 법만을 따로이 설정하여 수온(受蘊)과 상온(想蘊)으로 삼은 것인가?
협 존자(協尊者)는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법에 완전히 요달(了達)하여 그같이 설정한 것이기에 마땅히 힐난하여 묻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혹은 원인이 있다고 설하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쟁근(諍根)과 생사(生死)의 원인이고
아울러 순서상의 이유[次第因] 때문에
온갖 심소법 중에서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온이라 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간에서의 투쟁의 근원[諍根]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욕망[欲]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과 견해[見]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앞의 것은 ‘수’에 의해 일어나고, 뒤의 것은 ‘상’에 의해 생겨난다. 즉 미수(味受)의 힘에 의해 온갖 욕망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고, 도상(倒想, 전도된 생각이나 관념)의 힘에 따라 온갖 견해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의 법은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낙수(樂受)에 탐착하기 때문에, 도상(전도된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애(愛)와 견(見)의 행자(行者)는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인과 아울러 뒤에서 설하게 될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수’와 ‘상’을 별도로 설정하여 온으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순서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논설에 이어서 마땅히 분별하게 되리라.
또한 이러한 ‘수’와 ‘상’은 능히 ‘애’와 ‘견’이라는 두 가지 염오법이 되어 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하나의 식주(識住)의 명칭을 나타내기 때문에,29) 이 두 가지의 소멸에 근거하여 멸정(滅定)을 설정하기 때문에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니],30) [‘수’와 ‘상’을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등의 다양한 종류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3.6. 5온과 무위법
어떠한 까닭에서 처(處)와 계(界)에는 무위가 존재한다고 설하면서도 온(蘊)에는 포섭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에서는 무위를 설하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무위법을 온이라고 설할 경우, 5온 중에 존재한다고 하든지 혹은 여섯 번째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이 모두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뜻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무위법)은 바야흐로 색이 아니고, 내지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위법은, 그러한 색 따위처럼 과거 등의 품류의 차별이 있어 그것들을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간추려 ‘무위온(無爲蘊)’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온도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무위법은 전도의 근거[顚倒依]라는 뜻과도, 단멸의 방편[斷方便]이라는 뜻과도 상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도의 근거란 유루온을 나타내고, 단멸의 방편이란 무루온을 나타낸다. 그러나 무위는 이러한 두 가지 뜻 중의 어떠한 뜻도 갖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온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31)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위는 온이 종식된 것이기 때문에 온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테면 세간에서 병이 깨어지면 그것을 더 이상 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32)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그는 처(處)와 계(界)의 예(例)에 따라 마땅히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처’와 ‘계’도 종식되면 마땅히 ‘처’와 ‘계’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33)
그러나 이는 [유부] 종의에 위배되는 말이다. 온의 경우, 중생은 이를 전적으로 자아로 간주하기에 [번뇌를 남김없이 끊어] 무여(無餘)의 상태에 들게 되면 제온은 단박에 종식되지만, ‘처’, ‘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생은 아니기 때문으로, 오직 취온(取蘊)이 일어나는 것을 일시 가설하여 ‘생’이라 하였다. 그런데 만약 제온이 종식된 상태도 역시 ‘온’이라고 한다면 반열반(般涅槃,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도 마땅히 그 밖의 다른 온이 존재해야 한다. 그럴 경우 중생은 온에 많은 허물이 있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열반에 대해서도 안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처’와 ‘계’ 중에는 다수의 허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남음이 없는 무여(無餘)의 상태에서도 ‘처’, ‘계’는 여전히 수반된다. 그러므로 온의 경우 ‘그러한 예에 따라 마땅히 과실을 범하게 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종식’이라는 말의 뜻은 단멸(斷滅)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허공과 비택멸은 그 자체 단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만약 여기에 온의 특성(즉 적취)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을 일컬어 ‘온의 종식’이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세 가지 무위법상에는 어떠한 적취의 뜻도 없기 때문에 온이 종식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문(門, 즉 ‘처’)과 종족(種族, 즉 ‘계’)의 뜻은 그러한 무위법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온의] 예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본송의 뜻과도 서로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7. 5온의 순서
세존께서는 교법을 일으킴에 있어 각혜(覺慧)를 우선으로 하였다. 무엇에 근거하여 5온을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침[麤]과 염오함[染]과 그릇[器]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논하여 말하겠다.
5온은 거침에 따라, 염오함과 그릇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와 같은 순서로 설정되었다.
먼저 거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색온이니, 대애(對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기 때문에, 5식의 소의(즉, 안 등의 5근)가 되기 때문에, 6식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수온이니, 비록 형질(形質)을 갖지 않을지라도 행상(行相)의 작용(즉 苦ㆍ樂ㆍ不苦不樂)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상온이니, 남ㆍ여 등의 행상을 취하는 작용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보다 거친 것은 이른바 행온이니, 탐 등이 일어나는 행상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식온은 가장 미세하니,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염오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시작도 없는 생(生)과 사(死) 이래로 남녀가 그들의 소의신에 대해 서로 염애(染愛)하게 되는 것은 현색과 형색 따위로 말미암아서이니, 그래서 처음에 ‘색’을 설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색탐은 수미(受味)에 탐착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였다. 이와 같은 수미에 탐착하게 된 것은 생각[想]이 전도되었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였다. 이러한 전도된 생각은 번뇌의 힘에 의한 것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번뇌의 힘은 능히 후유(後有)를 낳는 식(識)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을 설하였다.
그릇 등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색’은 그릇과 같으니, ‘수’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수’는 음식과 유사하니, 유정의 소의신을 이익되게 하기도 하고 손상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은 조미료와 같으니,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평등하게 취하여 ‘수’가 낳아지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행’은 요리사와 같으니, 사(思)와 탐(貪) 등의 업과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아 좋아할 만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이숙과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은 먹는 자에 비유되니, 유정의 근본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이고 뛰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식’을 상수(上首)로 하여 ‘수’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이치에 따라 [계경에서는] 수ㆍ상 등의 수복행(隨福行)에 대해 ‘식’을 다만 수복행자(隨福行者)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치에 따라 ‘행(行)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있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다시 아난타(阿難陀)에게 말하기를, “식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태(母胎)에도 들지 못하니, 마음이 더러우므로 유정이 더러운 것이며, 마음이 청정하므로 유정이 청정한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와 같은 계경에서는 수ㆍ상 등의 동시 생기하는 법 가운데 다만 ‘식’을 위주로 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욕계 중에서는 색이 가장 수승하니, 온갖 근(根)과 경(境)의 색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색계에서는 ‘수’가 수승하니, 생사 중에서 온갖 수승하고 미묘한 ‘수’가 모두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34) 세 가지 무색계 중에서는 ‘상’이 가장 수승하니, 그러한 경지에서는 상(相)을 취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기 때문이다.35) 제일유(第一有, 즉 有頂處인 비상비비상처) 중에서는 ‘행’이 가장 수승하니, 그곳에서의 사(思)는 가장 큰 과보(8만 겁의 수명)를 능히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즉 색ㆍ수ㆍ상ㆍ사)은 바로 식주(識住)로서 거기에 ‘식’이 머무니, 이는 세간에서의 밭(앞의 4온)과 종자(식온)의 순서와 유사하다.36)
그래서 제온(諸蘊)의 순서를 이와 같이 설정하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5온에는 증가하고 감소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순서 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심소 중에서 수ㆍ상만을 별도로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심소 중에서 그 상이 거칠고, 염오함를 낳으며, 음식과 유사하고 조미료와 같으며, 2계(색계ㆍ무색계) 중에서 강력하다. 그래서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본송(本頌)에 따라 [5온의 순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바야흐로 유전문(流轉門)에 근거하여 순서상의 이유를 설할 경우에도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로 설할 수 있다. 이제 마땅히 환멸문(還滅門)에 근거하여 다시 한 가지 이유를 설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긴요한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지식념(止息念)이다.37) 곧 부정관은 소조색(所造色, 즉 몸)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고, 지식념은 대종(즉 숨)을 기억[念]하는 것으로, [환멸에 이르는] 긴요한 문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먼저 ‘색’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찰력에 의해 색의 특성을 분석하여 찰나찰나에 걸쳐 극미가 전전(展轉) 차별된다고 관찰할 때 몸이 가뿐[輕安]해지기 때문에 마음은 바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는 소의신과 결합하여 그것을 결정코 손상시키거나 이익되게 하지만 자아를 손상시킨다거나 이익되게 한다는 것은 이치상 필시 성립하지 않으니, 이러한 관찰과 이해에 의해 아상(我想)은 바로 멸하고 법상(法想)이 바로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에 의해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통달하면 번뇌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으니,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게 된 것이다.
번뇌가 이미 종식하였다면 마음은 조화되고 부드럽게 되어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되니, 그래서 다음으로 ‘식’을 설하게 된 것이다.
[환멸문에 따라 5온을] 차례대로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 반대로도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겠지만 번잡한 글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바야흐로 여기서 그만 두기로 한다.
3.8. 6근ㆍ6경ㆍ6식의 순서
이와 같이 제온(諸蘊)의 순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계(界)와 처(處) 중에서 먼저 6근(根)의 순서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에 따라 6경(境)과 6식(識)의 순서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다섯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현재하는 것이고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所造色)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것은 작용이 멀거나 신속하고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處]에 따른 순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근 가운데 안(眼) 등 앞의 5근은 오로지 현재의 경계만을 취한다. 그래서 먼저 설한 것이다. 그러나 의근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으니, 3세와 무위 중 혹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즉 현재)만을 취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를 취하기도 한다.38) 그래서 뒤에 설한 것이다. 즉 경계 대상이 결정적인 것이면 작용에 뒤섞임이 없어 그 특성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서 [앞의 5근을]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계 대상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작용에 뒤섞임이 있어 그 특성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서 [의근을] 뒤에 설하게 된 것이다.
[본송에서] 말한 ‘네 가지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이다’에서, [제1구의] ‘앞의’라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5근 가운데 앞의 4근의 경계는 오로지 소조색이다. 그래서 먼저 설한 것이다. 그러나 신근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으니, 대종과 소조색 두 가지 모두를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뒤에 설한 것이니, 혹 어떤 경우 신근은 오로지 대종만을 취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신근은 오로지 소조색만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어떤 경우 신근은 두 가지 모두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신식(身識)은 매우 다양하여 다섯 가지의 촉(觸)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4대종과 미끄러움 등 [일곱 가지 소조촉]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신식은 매우 다양하여 열한 가지의 촉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도 하였다.
‘그 밖의 것’이란 앞의 4근(안ㆍ이ㆍ비ㆍ설근)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상응하는 바대로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거나 신속하거나 분명하거나 하니, 그렇기 때문에 앞에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안근과 이근은 멀리 있는 경계를 취하기 때문에 [비ㆍ설의] 2근보다 먼저 설한 것이고, 2근(안근과 이근) 중에서도 안근의 작용이 더욱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으로, 멀리 있는 숲에 바람이 몰아치면 그것이 요동하는 것은 바로 볼 수 있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의 작용이 보다 신속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종이나 북을 치는 것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그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근과 설근의 작용은 다 같이 멀리 있는 경계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비근을 먼저 설한 것은 그 작용이 신속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향기롭고도 맛있는 온갖 음식을 마주할 때 비근이 먼저 향을 맡고 그 후에 설근이 맛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바야흐로 대상이 결정적인 것과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거나 신속하거나 분명함에 근거하여 근의 순서를 분별하였다.
혹은 신체 가운데 그것이 근거하는 처소의 상하 차별에 따라 근의 순서를 설하기도 한다. 전하는 설[傳說]에 따르면, 신체 중에서 안근은 가장 위에 위치하며, 또한 얼굴에 드러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설하였다. 이근과 비근과 설근이 근거하는 곳은 점차 그 아래로 내려가며, 신근은 대개 그 아래에 위치한다. 그러나 의근의 경우 일정한 처소가 없으며, 5근에 의지(依止)하여 생겨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였다.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비근의 극미는 콧마루[鼻頞]에 머무니, 어찌 안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설한 바와 같이 세 가지 근이 횡(橫)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화만(花鬘)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위치하는 곳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치상으로도 실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주(經主)의 뜻은 근이 근거하는 처소에 대해 일시 이와 같이 가설하려는 것이었으니, 경주가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다른 해석과도 통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송문을 달리 지어 보면 다음과 같다.39)
앞의 5근은 작용이 먼저 일어나는 것으로
5근의 작용 중 앞의 두 가지는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것이며
나머지 세 작용 중 앞의 두 가지는 분명함에 따라
혹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이다.
6근 가운데 안 등 앞의 5근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해 먼저 작용을 일으키며, 의근은 그 후에 비로소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안 등의 5근을] 먼저 설한 것이다. 본론(本論)에서 말하고 있듯이 색 등의 5경을 5식이 먼저 받아들이며, 의식은 그 후에 알게 된다. 즉 자신의 식에 소의(所依)가 되고, 아울러 자신의 경계를 취하는 것, 이 모두가 바로 안근 등의 작용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5근 중에서도 앞의 2근(안ㆍ이근)은 그 작용이 멀리까지 미치며, 대상과 [직접적으로]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2근 중에서 안근의 작용은 이근보다 더욱 멀리까지 미치니, 사례를 인용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40) 그래서 이근보다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비(鼻) 등의 3근의 작용 중 앞의 두 가지가 보다 분명하기 때문에 비근을 먼저 설하게 된 것이며, 설근을 다음에, 신근을 마지막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비근은 향에 대해 능히 그 미세함까지도 취할 수 있지만 설근은 달거나 쓴 것에 대해 이와 같지 않으며, 또한 설근은 맛에 대해 능히 그 미세함까지도 취할 수 있지만 신근은 차고 따뜻함에 대해 이와 같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위치하는 처소에 따른 순서의 해석은 앞서 논설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색 등의 경계를 5식이 먼저 받아들이고 의식이 그 후에 알게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꿈속에서도 능히 색 등을 취하는 것인가?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꿈속에서는 일찍이 경험[受]하였던 경계 대상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모든 이들도 꿈속에서 역시 마땅히 색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꿈속에서도 필시 일찍이 경험하였던 경계 대상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니, 경계 대상의 모습이 바로 나타나 그것을 분명하게 취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꿈속에서 색 등이 바로 나타나 분명하게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일찍이 경험하였던 경계 대상을 기억하여 요별(了別,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꿈꾸는 상태에서 옛날의 경계 대상을 기억할 때에는 깨어 있는 상태보다 뛰어난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찍이 경험하였던 경계 대상을 기억하여 명료하게 바로 드러내는 것이 깨어 있는 상태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속에서는 옛날에 경험하지 않았던 색 등도 능히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꿈꾸는 상태에서 어느 때 옛날의 경계 대상을 능히 기억하는 경우, 이는 진실의 꿈이 아니니, 경계대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어째서 꿈꾸는 상태에서는 능히 색을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누가 말하였던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꿈꾸는 상태에서 능히 색을 취하지 못한다고. 만약 꿈속에서는 필시 일찍이 경험하였던 경계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일찍이 경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도 꿈속에서 색을 취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이니, 옛날 다른 생 중에서 일찍이 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꿈속에서는 오로지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만을 꿈꾸거나 보는 것은 아니니, 다른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의 꿈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론(本論)에서 “색 등의 5경을 5식이 먼저 받아들이며, 의식은 그 후에 알게 된다”고 말한 것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반드시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 등의 경계에 대해 안근 등이 먼저 작용하고 의근의 작용은 그 후에 생겨난다”고 말한 것도 역시 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니, “안 등의 5식은 전전(展轉) 상속하며 서로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된다”고 본론(本論)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야흐로 꿈이 아닌 산심(散心)의 상태에서 색 등을 받아들여 요별하는 순서에 근거하여 [6근의 순서를] 논설하였으니, 이에 따라 선정의 상태에서 취하는 색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 즉 공한처(空閒處, 조용한 곳)에 머무는 자들은 다 같이 “선정 중에 푸른색 등을 본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로 유견색(有見色, 볼 수 있는 색)으로, 이러한 색은 결정코 안식이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색상(色相)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이러한 선정 중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선정의 경계가 된 색은 바로 선정에 의해 낳아진 대종소조로서, 청결(淸潔)하고도 분명하며 어떠한 장애성(공간적 점유성)도 갖지 않으니, 마치 공계(空界)의 색과도 같다.4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