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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6章 嵋 山 面
연천군 2읍, 8개 면의 하나. 이 면은 본래 마전군(麻田郡)의 지역으로, 마전 읍내가 되므로 군내면(郡內面)이라 하여 월곡(月谷)·중부(中部)·동부(東部)·이동(梨洞)·삼화(三和)·아미(峨嵋)·장양(長楊)·냉정(冷井) 등 8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마전군 동면(東面) 지역이었던 백촌(栢村)·분석(盆石)·가정(柯亭)·유촌(柳村)·우정(牛井) 등 5개 리와 마전군 서면(西面)의 송현(松峴)·광동(廣洞)·석장(石墻)·월곶(月串) 등 4개 리(서면에 속해 있던 작동리는 1914년 왕징면으로 편입됨)를 병합하여 아미리에 있는 아미산의 이름을 따서 미산면이라 하여 마전(麻田)·동이(東梨)·아미(峨嵋)·백석(栢石)·유촌(柳村)·우정(牛井)·광동(廣洞)·석장(石墻)의 8개 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미산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1914년 연천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던 삼화리를 다시 편입하여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가,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에 의해 석장리가 백학면으로 편입되면서 다시 8개 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면의 동쪽은 군남면, 남쪽은 전곡읍과 파주군 적성면, 서쪽은 백학면, 북쪽은 왕징면과 경계가 된다.
□ 일반현황
· 면사무소 소재지 : 미산면 유촌리 385 - 2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면 적 | | 인 구 수 (명) | 인구밀도 | 리 수|
| |가구수 +-------+--------+-------+ +-----+----+--------+------+
|(Km ) | | 계 | 남 | 여 |(인/1Km ) |법정 |행정|자연마을| 반 |
+-------+-------+-------+--------+-------+----------+-----+----+--------+------+
| 45,45 | 611 | 2,207 | 1,147 | 1,060 | 48,6 | 8 | 8 | 12 | 30 |
| | | | | | | | | | |
+-------+-------+-------+--------+-------+----------+-----+----+--------+------+
1. 아미리(峨嵋里)
본래 마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조선조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世宗實錄地理志≫에는 '답동리(畓洞里)'라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 아미산이 있어 '아미리'라 개명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접해 있는 장양리(長楊里)와 냉정리(冷井里)를 병합하여 아미리라 해서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6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약대산(藥大山. 142m) : 숭의전 서남쪽, 백학면 구미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2 약대산약수(藥大山藥水) : 봉화봉 동쪽, 약대산 중턱에 있는 약수.
3 약대산고개 : 아미리 여씨동에서 백학면 구미리의 새둔지들로 넘어가는 고개.
4 여씨동(呂氏洞) : 고비동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여씨들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봉수지(烽隧址) : 여씨동 남쪽의 봉우리 정상에 있는 봉수지.(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6 망재(望峴) : 봉화봉 서쪽, 구미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망을 보았던 곳이라 한다.
7 점말(店村) : 망재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이 골짜기 안에서 옹기를 구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 낡은터골 : 해기고개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9 절골 : 능골 안에 절이 있던 골짜기. 현재 이 곳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0 능골(陵洞) : 점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 묘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현재 지표에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설에는 이 골짜기 안에 태봉(胎峰)이 있다 한다.
11 두미(斗尾) : 노른저리 남쪽에 있는 마을.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뜻의 우리 고어 '둠'이 '두미'로 연철되면서 쓰이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두미'를 그대로 음차한 엉뚱한 한자지명의 '두미'가 된 곳이다.
12 해기골 ; 닷구비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이름.
13 닷구비 : 백학저수지 동쪽, 해기골 안에 있던 마을. 처음에 5가구가 정착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오합동(五合洞)'으로도 불리운다. 6·25 전에는 해주 오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4 고르미 : 윗찬우물 남쪽에 있는 골짜기.
15 윗찬우물(上冷井洞) : 백학저수지 북쪽에 있는 마을. 찬우물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며, 현재 아미1리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16 뒷골 : 윗찬우물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백학면 두일리의 정문거리로 통한다.
17 어리미기 : 아미1리 산제당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광산 김씨, 경주최씨들이 집성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18 산제당산(山祭堂山. 130m) : 윗찬우물 북쪽, 아미리와 광동리, 백학면 석장리 경계에 있는 산. 6·25 전까지도 어리미기 주민들이 매년 10월 경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19 쟁이(長楊) : 심덕부 묘 앞에 있던 마을. 예전 마전군 때 장양리 지역이 된다.
20 청성백 심덕부 묘(靑城伯 沈德符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1 독산군 이효식 묘(竺山君 李孝植 墓) :
22 북두고개 : 고사리골에서 광동리의 응달말로 통하는 고개.
23 고사리골(薇洞) : 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고사리가 많았다 한다.
24 쟁이고개(長楊峴) : 노른저리에서 심덕부 묘 앞의 쟁이로 넘어가는 고개.
25 박석고개(薄石峴) : 쟁이에서 노른저리로 넘어 다니는 고개.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고개에 임진강의 호박돌을 깔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다.
26 영원부원군 윤 호 묘(鈴原府院君 尹壕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27 노른저리(老隱洞) : 윤 호 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초 숭의전이 건립된 후에 이 곳에 정착한 숭의전감(崇義殿監) 왕 훈(王勳)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8 새말(新村) : 고사리골 입구에 있는 마을. 6·25 이후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9 괴고불다리 : 새말과 괴고불 사이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30 성황당터 : 괴고불 서쪽, 모퉁이에 있었던 성황당 터.
31 괴고불(= 고비, 高飛洞) : 여씨동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
32 미나울 : 괴고불 북쪽에 있는 골짜기.
33 점터 : 미나울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옹기를 굽던 옹기점이 있었다 한다.
34 도갓집모퉁이(都家 -) : 괴고불 동쪽에 있는 산모퉁이. 옛날에 물품을 만들어 도매하는 집인 도가가 있었다 한다. 현재 그 터에는 상여막이 세워져 있다.
35 도당재(都堂山) : 숭의전 동쪽에 있는 산. 예전에 시골 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위하는 단(壇)인 도당이 있었다 한다. 일설에는 이 산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와 같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으로도 불리운다.
36 뒷거리개울 : 도당재 북쪽, 논골에서 내려오는 개울.
37 시위논 : 논골 중앙에 있는 고래실논. 항상 물에 잠겨 있어 많은 비로 인해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물에 잠긴 것을 가르키는 말인 '시위'에서 뜻을 따와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8 논골(畓洞) : 도당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고래실논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골짜기로 인하여 아미리의 원래 이름이 답동리(畓洞里)가 되었다.
39 응달말 : 6·25 전, 논골의 음지에 있었던 마을.
40 거친봉 : 논골 동북쪽, 아미리·마전리·백석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지형이 거칠고 험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1 의지기터골 : 장재울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의지기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여씨(呂氏)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42 용수지(龍水池) : 장재울 안에 있는 큰 못, 용이 등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논으로 변해 있다.
43 움펑자리논 : 장재울 중앙에 있는 움푹 들어간 논. 일제 강점기 때에는 저수지를 막았던 곳이다.
44 장재울(長者谷) : 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부자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오지만, 원래의 뜻은 '작은 산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잔자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왕징면 노동리 장재울 참고)
잔(小) + 자(山) + 울(谷) = 잔자울 > 장자울 > 장재울
45 아미고개(峨嵋峴) : 아미리 작은골에서 마전리로 넘어 가는 고개.
46 염창골큰골 : 조선시대 마전리 당개나루에 있던 소금창고의 옆에 있다 하여 붙여진 골짜기 이름이다.
47 아미산(峨嵋山) : 숭의전 동북쪽에 있는 산. 임진강 수면 위에 솟아 있는 잠두봉과 숭의전, 아미사가 어우러지는 이 곳의 선경(仙景)이 중국 사천성 아미현 서남쪽에 있는 아미산에 비견할 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된 아미사(阿彌寺)와 연계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또한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는 마전리에 있던 소금창고 때문인지 '염창산(鹽倉山)'으로도 기재되어 있다.
48 아미사지(阿彌寺址) : 아미산 절골에 있는 절터.(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49 작은골 : 어수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
50 어수정(御水井) : 숭의전 입구에 있는 우물.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었던 이 곳 앙암사(仰巖寺, 뒤에 숭의전이 건립 됨.
51 도동박 : 숭의전 서쪽에 있는 개울. 조선 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이 땀에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도 못 가고 이 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은 곳이라 한다.
이수광의 ≪芝峰類說≫에도 이 고사(古事)가 실려 있다.
52 아미나루 : 아미리에서 삼화리로 건너 다니던 임진강 나루.
53 숭의전(崇義殿) : 지정문화재편 참고.
54 숭의전느티나무 : 숭의전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수령은 약 450년, 높이 20m, 둘레 4.7m의 거목이다.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1)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 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 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 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현재 군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55 잠두봉(蠶頭峰) : 숭의전 동쪽, 임진강에 수직으로 솟은 바위봉우리. 그 형태가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 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한문홍(韓文洪, 1787∼1790년역임)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고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잠두봉 석각은 문화유적·유물편 "암각문" 참고)
56 종못(鐘淵) : 숭의전 앞,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沼).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 가는 깊이라 한다. 이 못은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仰巖寺)의 범종(梵鐘)이 이 곳에 빠졌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자세한 유래는 아래와 같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상징이었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 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 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동이리편 참고)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 이 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성의 중간 지점이며(각각 90리 거리)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 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원찰(願刹)로 고려 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이 곳에 머무르게 된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벼락이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도 알 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조선 태조 6년(1399) 앙암사가 있던 그 자리에 배에 실려 있던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숭의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 속에 잠겼는데 그 뒤, 이 못에서 국난(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리 예견했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 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 보면 그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참고문헌 : ≪東國輿地志≫, 다산 정약용 ≪大東水經≫, 신유한 ≪靑泉集≫
57 용못(龍淵) : 종못 위에 있는 못. ≪동국여지지≫ 마전군 산천조와 미수 허 목의 기행문에는 이 곳에 대하여 "전설에 의하면 이 곳 수면 위로 용이 나타나면 가뭄이 든다." - 龍淵俗云有龍見則早 - 라고 기록 되어 있다.
* 제 보 자 : 왕 영 창(75) 미산면 아미2리
한 일 균(75) 아미1리
정 길(68)
왕 영 록(60) 아미2리
신 동 천(54) 아미1리
2. 백석리(栢石里)
본래 마전군 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백촌리(栢村里)·분석리(盆石里)·가정리(柯亭里)를 병합하여 백촌리의 "栢"자와 분석리의 "石"자를 따서 백석리라 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4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
1 독벼루개울 : 백석리 독쟁이에서 발원하여 유촌리의 두개모듬으로 흐르는 개울.
2 솔터고개 : 백석리와 유촌리의 다락말 사이에 있는 고개.
3 소라터 : 잣나무골 입구에 있는 터. 모양이 소라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으나, 실제로는 소라와는 거리가 먼 '작다' 또는 '좁다'의 뜻으로 씌었던 말인 '솔'이 '터'와 합하면서 '작은 터'라는 의미의 '솔터'가 되었던 것이 아래와 같이 음이 변하면서 엉뚱하게도 소라에 연관시켜 풀이 되고 있는 곳이다.
솔터 > 솔 터 > 소 터 > 소라터
4 도독골(都督谷) : 소라터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풍수지리설로는 이 곳의 지형이 장군이 말을 타고 달리는 형세인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주위에는 마타리·중군노리·소죽골·군량논 등의 명당에 부합되는 지명이 있으며, 그 명혈(名穴)에는 정 발 장군의 묘가 위치한다 한다.
5 월촌 : 잣나무골 입구에 있던 마을.
6 한내 : 하오고개에서 발원하여 잣나무골의 중앙을 흐르면서 독벼루개울로 합쳐지는 작은 개울.
7 오리동(五里洞) : 소라터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함열 남궁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8 군량논(軍糧畓) : 잣나무골 중앙에 있는 12마지기가 되는 논으로, 장군대좌형에 딸린 지명이다.
9 새터(新村) : 군량논 동남쪽에 있던 마을.
10 하오고개(和友峴) : 백석리 남쪽, 마전리와 경계에 있는 고개. 현재 322번 지방도가 이 곳을 지나 간다. 예전에 이 고개를 넘어 가자면 산짐승과 도둑이 많아 여러명이 사이 좋게 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1 거친봉 : 백석리·마전리·아미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아미리편 참고)
12 봉화재(烽火峰, 179m) : 백석리와 광동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광동리편 참고)
13 잣나무골(栢村洞) : 하오고개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잣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정 발 장군의 후손인 경주 정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4 뱀골(蛇洞) : 잣나무골 안에 있는 큰 골짜기. 이 곳의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으나, 실제 이 골짜기의 모양을 뱀에 연관시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좀 더 깊이 어근을 분석해 보면 앞음절 '뱀'이 발음 그대로 해석되어 지면서 원뜻과는 전혀 다르게 땅이름이 되어 버린 곳이다.
우리 땅이름 가운데 산(山)을 뜻하는 고어로 '받'이 있는데 이'받'은 '백'으로 쉽게 변할 수 있고 '백'은 다시 아래와도 같은 변화를 거쳐 '뱀'으로도 음이 변해 '산골짜기' 라는 뜻의 '뱀골'이 아닌 '뱀'과 닮은 지형이라는 전혀 엉뚱한 풀이를 낳게 된 땅이름인 곳이다.
받(山) + 골(谷)= 받골 > 백골 > 뱃골 > 뱀골 > 뱀골(蛇洞)
15 삼백냥짜리논 : 뱀골 앞에 있는 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삼백냥을 주고 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 백토골(白土谷) : 뱀골 옆에 있는 골짜기. 백토가 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7 중군노리(中軍老吏) : 소라터 서쪽에 있는 산. 백석리 장군대좌형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군대의 진영에 해당하는 지형이라 한다.
18 소죽골 : 서산군 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의 지형이 말이나 소의 먹이통인 구유와 닮은 형태라 하며 '말죽골'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이 곳 역시 장군대좌형에 딸린 지명이다.
19 독쟁이 : 가정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에서 광동리의 너븐골로 넘어 가는 광동고개에 돌이 많은 곳이 되어 돌(石)의 옛말인 '독'과 고개의 다른 말인 '재'가 합치면서 '독재'로 불리워지던 것이 '독쟁이'로 음이 변했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獨亭洞'이라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한 곳이다. 6·25 전에는 경주 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0 정 발 장군 묘(鄭撥將軍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21 가정골(柯亭洞) : 독쟁이 북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 백석리에서 여러 마을 가운데 가장자리에 위치한 곳이 되어 '가쟁이' 또는 '가정골'로 불리워지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기면서 발음을 그대로 음차하여 엉뚱한 의미의 '柯亭洞'으로 쓰여 지고 있는 곳이다.
22 서산군 이 혜 묘(瑞山君 李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3 중군고개(中軍峴) : 분석골에서 왕징면 동중리로 넘어가는 고개.
24 분석골(盆石谷) : 서산군 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중군고개 옆에 안장과 같이 생긴 분석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5 강원도관찰사 우복룡 묘(江原道觀察使 禹伏龍 墓) : 문화유적편 "명묘" 참고.
26 치라재 : 분석골에서 왕징면 동중리의 피아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7 두리산(圓山, 分石山. 184m) : 안골 북쪽에 있는 산. 백석리·유촌리, 왕징면 노동리·동중리와 경계가 된다. 미산면이 예전 마전군에 속해 있었을 때 이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마전군 전지역이 두루 보인다 하여 두리산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마전의 옛 지리지에는 '分石山' 또는 '盆石山'으로도 기재되어 있다.
28 안골(內洞) : 두리산 남쪽에 딸려 있는 골짜기. 분석골과 대곡동의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9 평안도관찰사 이윤인 묘(平安道觀察使 李尹仁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30 대곡동(大谷洞) ; 서산군 묘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6·25 전에는 평안감사 이윤인의 후손인 경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31 열녀 남양홍씨 정문터(烈女 南陽洪氏 旌門址) : 대곡동 안에 있던 평안감사 이윤인의 처 남양 홍씨의 열녀 정문터,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 열녀조에는 남양 홍씨의 행적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열녀 홍씨는 관찰사 이윤인의 아내인데, 남편이 죽자 친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지내며, 복(服)을 벗어서도 7년 동안을 하루 같이 했다. 일찍이 두 차례나 화재를 만났는데 재산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급히 신주(神主)를 안고 나오니 조금 있다가 여막은 모두 타버렸다. 무슨 물건이던지 맛이 있는 것이면 아무리 변변치 못한 것이라도 반드시 천(薦)했으며, 죽을 때까지 향내나는 나물을 먹지 않고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으니 온 고을이 탄복했다. 그 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정려문이 세워지게 되었다."
홍씨의 정려문은 조선 성종 2년(1471)에 세워졌으며 진산군 강희맹(姜希孟)이 절부전(節婦傳)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이윤인의 7대 손인 동지중추부사 이언무(李彦茂)도 효행으로 이름 높아 숙종 29년(1703)에 정려를 받았으며, 홍씨 열녀문 안에 열녀와 효자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으나, 6·25로 아깝게 소실되어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32 마타리(= 메타리) : 대곡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의 지형이 백석리 장군대좌형 가운데 장군이 말을 타고 달리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3 요골 : 마타리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34 도장골(陶壯谷) : 요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 안의 골짜기라는 뜻의 '돋안골'이 변한 이름이다.(군남면 왕림리 '도장골' 참고)
35 금바위(錦岩洞) : 도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비단빛이 나는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경주 이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36 참나무쟁이(眞木亭) : 금바위 앞에 있는 산부리. 옛날 이 곳에 큰 참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7 능골 : 참나무쟁이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이 골짜기 안에 큰 묘가 있었다 하여 능골로 불리워진다 라는 유래로 전해 오고 있으나, 현재 지표에서는 릉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38 능모퉁이 : 능골에서 유촌리 두개모듬으로 가는 곳에 있는 산 모퉁이.
* 제 보 자 : 이 한 원(83) 미산면 백석리
이 상 훈(68)
3. 유촌리(柳村里)
본래 마전군 동면의 지역으로, 이 마을 중앙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하여 '유촌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5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양아네골 : 영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2 향교산(鄕校山) : 유촌리와 마전리 경계에 있는 산. 마전리에 있던 조선시대 마전향교의 뒷산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 향교골고개 : 남세미에서 마전리의 향교골로 넘어가는 고개.
4 월곡고개(月谷峴) : 남세미에서 마전리 달골로 넘어가는 고개.
5 쉰골 : 향교산 남쪽, 남세미에 있는 골짜기.
6 거물래봉(139m) : 남세미와 풀무골 사이에 있는 봉우리.
7 남세미(木三洞, 木森洞) : 거물래봉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정씨들이 몇 집 살았던 곳이다.
8 영산 : 남세미와 삼포동 사이로 뻗어 나온 긴 산부리.
9 삼포동(蔘圃洞) : 영산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인삼을 경작했던 삼포밭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삼밭골'이라고도 불리워지던 곳이다.
6·25 전에는 300년 전 이 곳에 정착한 여산 송씨들이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있다.
10 풀무골(冶洞) : 유촌리 태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부근의 지형이 도가니혈(穴)에 해당되는데, 이 골짜기는 옛날 대장간에서 불을 일으키는데 사용하는 풀무의 형상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청송 심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1 도광골(= 도가니골) : 유촌리 태실 뒤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의 지형이 대장간에 있는 도가니의 형태라 한다.
12 유촌리 태실(柳村里 胎室) : 문화유적·유물편 "태실" 참고.
13 두루갈이 : 유촌리 태실 아래에 있는 마을로 '태봉말'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14 가는골(細谷) : 태봉 북쪽에 있는 좁고 가는 골짜기. 6·25 전에는 광산 김씨가 몇 집 살았던 곳이다.
15 솔터고개 : 다락말에서 백석리의 소라터로 넘어가는 고개.
16 다락말(樓洞) : 마전초등학교 서쪽에 있던 마을. 지대가 다락처럼 높은 산비탈에 집들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함열 남궁씨들이 살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밭으로 변해 있다.
17 뫼물논 : 다락말 앞에 있는 논. 옛날에 물이 없는 한답(早畓)이 되어 벼농사는 짓지 못하고 모밀만 심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방아다리 : 두개모듬 아래에 있는 물레방앗간 터. 지금은 이 곳에 태봉말로 건너가는 콘크리트 다리가 있다.
19 다래기들 : 다락말 앞에 있는 들 이름.
20 두개모듬(二川洞) : 다락말 북쪽에 있는 마을. 백석리의 독벼루개울과 왕징면 노동리에서 내려 오는 개룽지개울이 이 마을 앞에서 합류되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최근까지도 이 두 개울이 합치면서 '가마웅뎅이'라는 깊고 큰 소(沼)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매몰되어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1 대추나무골 : 법흥동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대추나무가 많았던 곳이라한다.
22 법흥동(法興洞) : 신 호 묘 아래에 있는 마을. 평산 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곳이다.
23 전리판서 신 호 묘(典理判書 申浩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4 꽃밭체 : 법흥동 북쪽에 있는 산. 봄이면 진달래, 철쭉꽃이 만발하여 온 산이 장관을 이룬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5 두리산(圓山, 分石山. 184m) : 백석리편 참고.
26 칠곡부사 이 양 묘(漆谷府使 李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7 지내울 : 이 양 묘 아래에 있던 마을. 두리산에서 중들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의 형상이 지내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한자표기로는 '眞乃洞' 또는 '芝乃洞'으로도 되어 있고, 6·25 전에는 함평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28 작은장재울 : 꽃밭체 동쪽에 있던 마을. 노동리에 있는 큰장재울과 경계를 이룬다. 6·25 전에는 공주 이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왕징면 노동리 "큰장재울" 참고)
29 중들(中坪) : 법흥동 동쪽에 있는 들.
30 개건너등 : 중들 동쪽, 왕징면 무등리와 경계에 있는 긴 산등. 왕징면 노동리에서 내려오는 개룽지개울의 건너인 '개'의 건너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1 여우고개(狐峴) : 중들에서 왕징면 무등리로 넘어가는 고개. 큰여우고개, 작은여우고개로 나뉘어 진다. 이 고개 부근에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어 여우들이 항상 들끓었다 한다.(아래의 구네미고개 참고)
32 삼태봉(109m) : 미산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봉우리.
33 꽹과리논(= 꽹과리들) : 두개모듬 동쪽에 있던 천수답. 비가 많이 오면 유촌리주민들이 꽹과리를 두들기며 공동으로 모내기를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개룽지개울에 보를 막아 이 일대가 수리안전답으로 변해 있다.
34 구네미고개(軍踰峴) : 달걀골에서 중들로 넘어가는 고개. 예전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서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영토분쟁으로 치열한 전투를 할 때 우정리 장대봉 산성에서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적은 병졸수를 감추기 위해 우정리 여우고개에서 빈 곡식섬을 지게에 짊어 지고 유촌리로 넘어와 이 고개를 거쳐 중들에 있는 여우고개로 넘어 다니면서 군사와 군량이 많은 것 처럼 여우같은 허위전술을 펴 적을 물러가게 했는데, 그 후 이 고개를 군사들이 넘어다닌 고개라 하여 '군네미고개'라 했던 것이 지금의 '구네미고개'로 음이 변했다 한다.
35 낡은터골 : 달걀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도깨비가 자주 나타났던 곳이라 하며, 현재 마전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36 달걀골 : 낡은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달걀귀신이 많이 나타났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7 구리방골(丘吏房谷) : 미산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 마전군 때 구씨(丘氏) 성을 가진 이방(옛 지방관청의 아전)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이 곳에는 구씨의 묘가 많다 한다.
6·25 전에는 전주 최씨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38 방아다리 : 미산면사무소 동쪽, 6·25 전까지도 물레방아가 있던 곳. 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렸다.
39 사거리(四巨里) : 미산면사무소 주위에 있는 마을. 네 갈래의 큰 길이 나 있다.
40 구촌말(具村) : 미산면사무소 동쪽에 있던 마을.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능성 구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25 이후 수복되어 현 면사무소 주위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면서 구씨들 대부분이 이 곳에 거주하고 있다.
41 김촌말(金村) : 구촌말 옆에 있는 마을로, '도룻말'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며 안동 김씨가 24대 째 세거하는 곳이다.
42 버드나무연못 : 김촌말 앞에 있는 연못. 유촌리의 유래가 되는 큰 버드나무가 있던 곳이었으나, 이 나무는 6·25 직후에 베어 없어졌다 한다.
43 시루고개 : 유촌리에서 우정리의 넙쩍바위로 통하는 고개이며 유촌리의 진입로 역활을 한다. 일설에는 이 고개가 실처럼 가늘었다 하여 '실고개'로 불리웠던 것이 '시루'로 음이 변한 것이라 한다.
44 덕배미들 : 미산면사무소 남쪽에 있는 들. 1,200평 넓이에 긴 모양을 한 덕배미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둑배미들'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45 자강모루 : 양아내골 동쪽에 있는 산 모퉁이. 시루고개에서 내려온 산부리가 이곳에 와서 작은 모퉁이를 만들었다 하여 '작은모루'로 불리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작은'이 '자강'으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46 황공벌 : 마전리와 우정리를 연결하는 322번 지방도 주위에 있는 벌판.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을 지나가던 목마른 중이(혹은 함경도 상인이라고도 한다) 샘을 발견하고 물을 마시려고 하니, 샘물 바닥에 큰 황금덩어리가 있어 그후 이 벌판을 '황금벌'이라 했는데 차츰 '황공'으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라 한다.
* 제 보 자 : 이 한 원(83) 미산면 마전리
김 의 수(77) 유촌리 2반
이 재 순(69)
송 영 숙(62) 3반
임 종 순(59) 4반
구 본 준(50)
4. 우정리(牛井里)
본래 마전군 동면의 지역으로, 임진강 옆에 큰 우물인 '소우물'이 있어 우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금굴산(金窟山. 195,7m) : 우정리 남쪽, 동이리와 경계에 있는 산.(동이리편 참고)
2 불당골 : 안개들과 금굴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절(寺)과는 무관한 '산 안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붇안골'이 차츰 '불당골'로 음이 옮겨지며 굳어진 이름이다.
3 안개들 : 우정리 남쪽, 임진강변에 있는 들판. 임진강에 말여울, 기탄 등의 큰 여울과 인접해 있어 항상 안개가 끼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장개골 : 안개들과 서루니 사이에 있는 좁은 골짜기.
5 서루니(雪雲里) : 우정리 남쪽에 있던 마을. 금굴산 북쪽의 좁은 계곡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서루니의 어근은 '좁다','작다'의 뜻으로 씌었던 '솔'과 '안(內)'이 합쳐져 '좁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솔안'으로 씌어오다 '솔'이 '설'로, '안'은 앞 음절 말음의 영향으로 '란'이 되었다가 다시 모음변화를 일으켜 '른'으로 발음되고 아래와 같이 변화를 거치면서 엉뚱하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한자지명인 '雪雲里'가 된 곳이다.
솔안 > 설안 > 설운 > 서룬 > 서루니(또는 雪雲里)
6·25 전에는 청주 한씨와 전주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 불당골 : 서루니 남쪽, 동이리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골짜기. 동이리의 불당골과 통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배나무골 : 서루니 안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8 황공벌 : 넙쩍바위 서쪽에 있는 벌판.(유촌리편 참고)
9 넙쩍바위 : 우정리와 마전리를 연결하는 322번 지방도 위에 있던 바위. 약 20여명이 앉을 만한 넓이의 넙쩍한 모양이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 이 곳을 지나다니던 여행객들과 상인들의 휴식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0 뫼골 : 넙쩍바위 위에 있는 골짜기. 묘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소못개들 : 우정리 마을 남쪽, 임진강변으로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
12 보습논 : 소못개들에 있는 논. 밭을 가는 농기구인 보습의 날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길웃말(路上洞) : 322번 지방도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풍천 임씨와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14 매봉(鷹峰) : 길웃말과 독재 사이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꿩사냥을 할 때 이 봉우리 정상에서 매를 날렸다고도 하며, 항상 매가 많이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5 매봉재 : 매봉 밑에 있는 독재와 길웃말로 통하는 고개.
16 작은잣골(小城谷. 작은장골, 작은장학골) : 매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우정리마을 뒤에 있는 백제 초기에 축조된 장대봉 산성의 옆에 있는 골짜기가 되어 성(城)의 우리 고유어인 '잣'에 연유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잣'이 '장'으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17 여우고개(狐峴) : 큰잣골에서 유촌리와 왕징면 무등리의 용상수로 넘어 가는 두 고개의 같은 이름이다.(유촌리 "구네미고개" 참고)
18 큰잣골(大城洞, 큰장골) ; 우정리 장대봉 산성에 딸린 큰 골짜기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공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9 대자봉 : 큰잣골 북쪽, 왕징면 무등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이름.
20 우정리 산성(牛井里山城, 牛井里 百濟將臺峰山城,매봉,덜봉.89,5m) : 문화유적 ·유물편 "성지" 참고.
21 둥그렁배미 : 큰잣골 중앙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논.
22 우렁논 : 322번 지방도 옆에 있는 논. 6·25 전까지도 우렁이가 많이 서식하여 황새, 백로들이 떼를 지어 날아 들었던 곳이다.
23 독재(甕峴) : 우렁논 옆에 있는 마을. 예전에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평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4 소못개등성이 : 매봉 동쪽, 소우물 옆에 있는 등성이.
25 우정리 백제적석총 I·II(牛井里 百濟積石塚 I·II = 돌무데미)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26 장승백이 : 백제적석총 II호기 아래에 있는 임진강 옆의 길목.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라 한다.
27 개못 : 우정리 적석총 동쪽, 임진강변에 있는 못. 현재 많이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28 소우물(牛井, 버티우물,태우물,泰井) : 우정리 적석총 남쪽에 있는 큰 우물.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부근의 지형은 소가 누운형국(臥牛形)이고 이 우물은 소의 코에 비유되는 곳이라 한다. 실제로 소우물은 두군데에서 많은 양의 물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솟아나와 예전부터 이 우물 주변에는 취락지가 형성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깊은 소(沼) 형태의 이 우물 속에는 큰 이무기가 살고 있어 주변에 방목했던 소를 잡아 먹고 소의 고삐만 남겨 놓은 일도 있었다 한다.
29 장못 : 소우물 동쪽에 있는 큰 못.
30 도깨비여울 : 우정리 남쪽, 임진강에 있는 여울.
31 이시미소 : 안개들 서쪽, 임진강에 있는 소. 예전에 우정리에서 방목한 소를 이무기가 잡아 먹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제 보 자 : 조 귀 현(66) 미산면 우정리
김 완 기(62)
이 석 규(58)
5. 동이리(東梨里)
본래 마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중부리(中部里)·동부리(東部里)·이동리(梨洞里)를 병합하여 동부리의 "東"자와 이동리의 "梨"자를 따서 동이리라 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주점개 : 마전리 삼거리에서 동이리로 들어 오는 입구에 있는 예전에 주막(酒幕)이 있던 곳.
2 화장터(火葬 -) : 주점개 동쪽, 마전고개 입구에 있는 작은 골짜기. 6·25 당시 이 곳에 주둔하던 영국군들이 전사자들을 화장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3 마전고개(麻田峴) : 화장터에서 마전리의 외딴말로 넘어가는 고개.
4 배밑재산 : 마전고개 동쪽에 있는 산.
5 갈마(渴馬) : 배밑재산에서 동이리 벌판으로 뻗어나온 산부리. 풍수지리설로는 이 산의 형태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라 한다. 6·25 전에는 30여호가 모여 살던 마을이 있던 곳이다.
6 갈매울들(渴馬坪) : 갈마 앞에 있는 들판.
7 보겨울 : 배밑재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8 지중추부사 구수훈 묘(知中樞府事 具樹勳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9 큰배울 : 구수훈 묘 동쪽에 있는 동이리에서 가장 큰 마을.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의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이라 전해 오고 있으나, 원래의 뜻은 한자 지명인 '배(梨)' 나 '배(舟)'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산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배울은 그 뿌리를 '머리'나 '뫼(山)'의 뜻으로 씌었던 옛말 '받'에서 나온 것으로, '받'은 '박' 또는 '백', '배'로 쉽게 음이 변해 왔는데 실제 '받'이 변한 '배'를 앞음절로 하는 땅이름들이 산 밑이나 산 골짜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위와 같은 뜻의 '배'와 '골짜기'의 뜻인 '울'이 합하여 '배울' 즉, '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던 것이 소리나는 그대로를 한자로 옮겨 쓰면서 '梨洞'이 되어 '큰 돛단배의 형국이라서......' 또는 '배나무가 많았었다 하여 ......'라는 엉뚱한 풀이를 낳게 되었다.
6·25 전에는 개성 왕씨가 8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며, 옛 마전군 때에는 군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마을로 이 곳을 뽑았는데 그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배울(梨洞) 2. 아미(峨嵋) 3. 새릉(新陵) 4. 버들이(柳村)
10 논고래 : 금굴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고래실논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11 서루니고개(雪雲峴) : 논고래에서 우정리의 서루니로 넘어 다니던 고개.
12 절골 : 논고래 동쪽, 금굴산에 딸린 골짜기. 작은절골·큰절골로 나뉘어진다. 동이리 주민의 제보에 의하면 8·15 광복 전까지도 이 절터에는 약 30cm 높이의 석불좌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고 우물터만이 남아 있다 한다.
13 이조판서 김노진 묘(吏曹判書 金魯鎭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4 금굴산(金窟山, 金堀山, 尾頭山, 쇠파리산, 峰火山. 195,7m) : 동이리와 우정리 경계에 있는 산.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 강점기때에는 금광과 철광이 개발되었으며, 그 때 채굴로 인하여 산 내부가 텅 비어 있어'공굴산'으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에는 이 산이 "미두산(尾頭 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대홍수로 인하여 온천지가 물바다였는데 이 산 정상만이 소(牛) 등에 앉은 쇠파리만큼 남았다 하여 '쇠파리산'이라는 별칭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15 동부리(東部里) : 큰배울 동쪽에 있던 마을 이름.
16 함정고개 : 큰배울과 동부리 사이에 있는 고개. 예전에 산짐승을 잡기위해 이 곳 에 함정을 설치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7 함정들 : 큰배울 옆에 있는 들판.
18 마산고개 : 함정고개 남쪽에 있는 고개.
19 도장거리 : 동부리 남쪽, 임진강에 있던 포구.
20 밤여울(栗灘) : 도장거리와 군남면 남계리의 계림동 사이에 있는 임진강의 큰 여울.
21 말무덤 : 도장거리 남쪽, 임진강 절벽 위에 있던 무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말을 묻었다 하나, 최근에 동이리 지역 경지정리로 인하여 멸실되었다. 말무덤자리 동쪽, 임진강 절벽 아래에는 그 말의 발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한다.
22 부개골 : 구수훈 묘 남쪽, 큰배울에서 임진강으로 흐르는 시내에 있는 골짜기.
23 부개골등 : 부개골 서쪽에 있는 둥근 야산. 부씨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말여울(馬灘) : 부개골 앞에 있는 임진강 여울. 현재 전곡읍 마포리와 연결되는 마포교(馬浦橋)가 있다.
25 썩은소(朽淵, 朽斤渡, 腐淵江) : 동이리반도 남쪽, 미강서원지 앞에 있는 임진강의 큰 소(沼). 전설에 의하면 고려가 멸망한 뒤 고려 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 곳에 멈춘 것을 쇠밧줄로 묶어 배를 정박시켰는데, 다음날 와서보니 쇠밧줄은 모두 썩고 위패를 실은 이 배는 아미리 잠두봉 아래로 떠내려와 있어 그 전설에 따라 '쇠밧줄이 썩은 소'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아미리 "종못" 참고)
6·25 전에는 마포리로 건너다니던 나루가 있던 곳이다.
26 마전군수 나 선 선정비(麻田郡守 羅 善政碑) : 문화유적·유물편 "선정비" 참고.
27 미강서원지(嵋江書院址) : 썩은소 위에 있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미수 허 목을 제향하는 서원 터.(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 제 보 자 : 이 진 형(83) 미산면 동이리
김 태 완(76)
6. 마전리(麻田里)
본래 마전군 군내면의 월곡리(月谷里) 지역으로, 예전 마전군의 관아가 있어 '마전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월곡리를 마전리로 개명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의 1개의 행정리, 3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당개(堂浦, 당개나루, 장거리) : 마전리 서남쪽, 임진강에 있던 나루터. 부근 동남쪽에 위치한 당성(堂城) 내에 옛 마전군 사묘(祠廟)의 하나인 성황사(城隍祠) 당집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당개나루는 옛 마전군 때부터 서해안에서 올라온 새우젓·소금 등을 실은 배가 정박하며, 이 곳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과 교역하는 장이 형성되었던 명소이며 특히, 이 곳에는 마전군 선정비(善政碑) 5기(1기는 鐵碑)와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가 있었으나, 6·25 때 모두 없어졌다 한다.
2 염창골(鹽倉谷) : 당개나루 옆에 있는 골짜기. 옛 마전군에서 관리하던 소금창고가 있던 곳이라 한다.
3 하오고개(和友峴) : 마전리 서쪽, 백학으로 연결되는 큰 고개. (백석리편 참고)
4 가재골 : 마전 삼거리에서 하오고개까지 있는 큰 골짜기. 마전리에서 가장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연천읍 현가리의 "가재울" 참고)
5 삼거리 : 마전리 중앙에서 동이리·백학·미산으로 통하는 삼거리.
6 사직골(社稷洞) : 조선시대에 마전군 사묘의 하나인 사직단(社稷壇 : 고을 수령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土神 = 社]과 곡신[穀神 = 稷]에게 제사 올리던 제단)이 있던 곳. 현재 그 위치에는 어떤 사람의 묘와 민가가 위치해 있다.
7 달골(月谷洞) : 사직골 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우리 고어에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달'이 음차되면서 엉뚱하게도 하늘에 떠 있는 달에 연관시켜 한자의'月'로 옮겨진 땅이름이다.
오늘날의 땅이름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달'은 원래 '산(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어근은 고어의 '닫'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닫'이 그음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쓰이는 것은 극히 드믈고, 연결음절과 다른 낱말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개음절화(開音節化)하여
'닷','닥','닭','달' 등으로 옮겨가 뜻옮김을 하면서 '산'의 뜻이 엉 뚱하게 하늘의 '月'로 되었고 다시 '골'과 합하면서 '月谷'이 되어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원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아무 연관이 없는 한자식 지명이 된 곳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마전군이 있었을 때 무인(巫人)들이 신령을 모시고 받들던 부군당(府君堂)이 있었다 한다.
8 장승백이(= 비석거리) : 달골과 향교말 사이에 있는 모퉁이. 이 곳은 6·25 전까지도 목장승(木長丞)과 함께 8기의 마전군 선정비가 있었으나, 장승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선정비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땅 속에 묻어 버렸다 한다.
9 이조참의 서종섭 묘(吏曹參議 徐宗燮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0 남세미고개 : 마전리 향교말에서 유촌리의 남세미(木三)로 넘어 다니는 고개.
11 향교산(鄕校山) : 마전리와 유촌리 경계에 있는 산. 옛 마전향교의 뒤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2 마전향교터(麻田鄕校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13 향교말(校村) : 달골 동쪽에 있던 마을. 조선시대에 마전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 학교터 : 향교말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때 4년제 마전공립 보통학교가 있던 자리. 6·25 때 건물은 파괴되었고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있다.
15 무자당(無子堂) : 향교말 동쪽, 산 정상에 있었던 당집. 예전에 아들이 없던 부인들이 득남을 위해 기도하던 곳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마전군에만 있었다 한다.
16 덕고개 : 마전리에서 우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현재 322번 지방도가 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 마전군에 심한 전염병이 돌 적에 저항력이 약한 아이들을 이 고개 부근에 따로 모아 덕(널이나 막대기 같은 것을 나무가지나 기둥사이 또는 양쪽에 버티어 세운 나무위에 걸거나, 얹거나 사람이 올라 앉도록 만든 시렁이나 선반 같은 것)을 만들어 격리
보호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7 마전군청터(麻田郡廳址) : 삼국시대부터 마전군이 연천군으로 편입되던 1914년 까지 있었던 마전군 관아 터. 조선 영조 때 편찬된 ≪輿地圖書, 1765년≫ 마전군편 공해(公解)조에 실려 있는 마전관아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객관(客館) 12칸, ·외동헌(外東軒) 8칸, ·내아(內衙) 11칸, ·관청(官廳) 3칸, ·군기고(軍器庫) 3칸, ·화약고(火藥庫) 3칸 등 총 40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곳은 농경지로 변해 있다.
18 건지산(乾芝山, 芝山) : 향교말 남쪽에 있는 산. 옛 마전군 관아의 안산(案山)이 되며 6·25 전까지도 매년 10월이 되면 마전리 주민들이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 순조 때 마전군수를 역임한 신현록(申顯祿. 1814∼1817)의 문집인 ≪鶴沙集≫에는 마전군 내의 빼어난 풍광을 지산팔경(芝山八景)이라하여 시로 읊었는데 8경은 아래와 같다.
1. 숭의전의 푸른절벽(崇義殿蒼壁)
2. 미강서원의 쌍 잣나무(嵋江院雙栢)
3. 금굴산의 해돋이(金屈山朝旭)
4. 아미산의 가을달(峨嵋山秋月)
5. 스무스장거리의 주막(楡林市酒家)
6. 반륜정의 시객(半輪亭遠客)
7. 도감포 상선(獨岩浦商船)
8. 임진강 어부의 노래(赤壁江漁歌)
19 외딴말(獨村) : 장승백이 동쪽에 있던 마을. 외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
20 마전리 당성(麻田里 堂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 제 보 자 : 정 무 경(80) 미산면 마전리 2반
이 은 재(60) 1반
7. 삼화리(三和里)
본래 마전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적성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으며,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되었고,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편성되어 있다.
1 토막골(土幕谷) : 삼화리 남쪽, 임진강변에 있는 마을. 임진강 건너에 위치한 백학면 구미리 토막포(土幕浦)의 앞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새오개(= 새우개) : 삼화방죽에서 임진강으로 흐르는 개울. 민물새우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 제일배미 : 문내기 옆에 있는 논. 삼화리에서 수확이 가장 많이 나는 으뜸이 되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맹꽁논 : 문내기 마을에 있는 논으로, 예전에는 '맹꽁밭'으로 불리웠다 한다.
5 문내기(文岳洞) : 삼화방죽 서쪽, 임진강변에 있는 마을. 6·25 전에는 진천 송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 작은우물 : 문내기 북쪽, 임진강 석벽 아래에 있는 우물.
7 큰우물 : 작은우물 북쪽, 임진강가에 있는 우물.
8 농장논 : 삼화방죽 서쪽에 있는 논. 1970년 수리조합에서 경지정리를 한 뒤 지어진 이름이다.
9 독개장개울 : 농장논 서쪽에 있는 개울. '복개장개울'이라고도 한다.
10 닥채밭 : 독개장 북쪽에 있던 밭. 예전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했다 한다.
11 벌매밭 : 농장논 북쪽에 있는 밭.
12 형제바위 : 큰우물 북쪽, 임진강에 있는 바위. 이 바위는 가뭄이 들어 강물이 줄어야만 수면 위로 나온다 .
13 송장바위 : 형제바위 북쪽에 있는 바위. 예전에 송장이 떠내려와 이 바위에 걸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현재 미산면 아미리쪽에 가깝게 있다.
14 뒷벌 : 문내기 북쪽에 있는 삼화리에서 가장 큰 벌판. 경지정리 이 전에는 이 곳에 3기의 말무덤이 있었다 한다.
15 아미나루 : 삼화리에서 아미리로 건너다니던 뱃나루.
16 당개(堂浦) : 삼화리에서 마전리로 건너다니던 뱃나루.(마전리편 참고)
17 작은개치 : 당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18 사매 : 삼화방죽 안에 있는 마을. 정씨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19 삼화방죽 : 삼화리 중앙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축조된 저수지.
20 안골 : 사매 동쪽에 있는 골짜기.
21 밤나무골 : 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다 한다.
22 으슬기 : 사매 동쪽, 임진강변에 이어지는 현무암 석벽.
23 백고개 : 사매에서 전곡읍 마포리의 꽃답벌로 넘어 가는 임진강 옆에 있는 고개.
24 도둑골 : 오피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도둑이 살았다 한다.
25 오피산(111m) : 삼화 방죽 남쪽에 있는 삼화리에서 가장 높은 산.
6·25 이후 군부대 O·P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6 봉화촌고개(烽火村峴) : 삼화리에서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의 봉화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 제 보 자 : 송 인 영(69) 미산면 삼화리 1반
8. 광동리(廣洞里)
본래 마전군 서면의 송현리(松峴里)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너븐골을 광동리라 하여 2개의 법정리로 분할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현리를 병합, 광동리라 하여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는 1개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번개들 : 수리봉 남쪽에 있는 들.
2 절골 : 산제당산 동쪽, 예전에 절이 있던 골짜기. 산골(自然銅)이 나는 우물이 있다.
3 산제당산(130m) : 절골 위에 있는 산. 광동리·아미리, 백학면 석장리와 경계가 된다.(아미리편 참고)
4 뫼치골 : 번개들에서 왕징면 동중리로 통하는 탁고개 정상까지 있는 큰 골짜기.
5 소작고개 : 뫼치골에서 백학면 석장리로 통하는 고개.
6 쟁고개 : 뫼치골에서 석장리의 윗돌대미로 통하는 고개.
7 다람고개 : 뫼치골에서 석장리의 윗돌대미로 통하는 고개로, '돌대미고개'라고도 한다.
8 탁고개 : 뫼치골에서 왕징면 동중리의 장재물로 넘어 다니는 고개.
9 독쟁이고개 : 뫼치골에서 백석리의 가정골로 넘어 다니는 고개.
10 새능고개 : 뫼치골에서 백석리 독쟁이의 정 발 장군 묘 앞으로 넘어 가는 고개.
11 노래골 : 새능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12 광동고개 : 노래골과 너븐골 사이에 있는 고개.
13 귀릉골고개 : 뫼치골에서 윗솔개로 넘어 다니던 고개.
14 엄나무골 : 뫼치골 중앙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엄씨와 남씨가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5 수리봉 : 번개들 북쪽에 있는 봉우리.
16 솔개(松峴) : 수리봉 북쪽에 있던 마을. 이 곳 앞음절의 '솔'을 땅이름에서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이 아닌 '소나무'로 풀어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고 있는 곳이다.
원래 '솔'의 순 우리말 뜻은 소나무와는 관련이 적은 '작다(小)'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볼 때 '솔개'의 본래 뜻은 '작은고개'로 풀이가 가능하다.
솔개 마을은 지정학적으로 보더라도 너븐골과 뫼치골로 넘어 다니던 작은 고개가 많은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17 윗솔개(上松峴洞) : 솔개 북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고성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8 용골(龍洞) : 솔개 동쪽에 있던 마을.
19 너븐골(廣洞) : 용골 북쪽에 있던 마을. 골짜기 안이 넓다 하여 '넓음'의 옛말인 '너븐'으로 쓰여지고 있는 곳이다. 6·25 전에는 경주 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0 잣나무고개 : 너븐골에서 백석리의 잣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1 정 발 장군 정문자리(鄭撥將軍 旌門址) : 너븐골 앞에 있던 충열문. 임진왜란 개전 당시 부산진전투에서 정렬한 최후를 마친 부산진첨사 정 발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문이었으나, 6·25 때 소실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22 봉화재(烽火山, 179m) : 너븐골 남쪽, 백석리와 경계에 있는 산. 예전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23 숯무지(炭洞) : 봉화재 남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숯을 굽던 숯가마가 많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4 윗숯무지 : 숯무지 동쪽에 있던 마을.
25 자장골 : 봉화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잣'과 '안(內)'이 합쳐 '잣안골'로 불리워오던 것이 '자장'으로 음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26 응달말 : 숯무지 남쪽, 해가 잘 안드는 음지에 있던 마을.
27 북두고개 : 응달말에서 아미리의 고사리골로 넘어 가는 고개.
* 제 보 자 : 한 일 균(75) 미산면 아미1리
정 길(68)
신 동 천(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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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리미기,미나울,괴고불,장재울,등 들어봤던 지명들이 반갑기만 합니다.내가 태어난곳이 논골이란 곳인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제보자로 나오신 분들도 아는분들이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저 위의 한일균님은 우리 아버지 친구분이시고,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마 더 많은 제보를 해주셨을지도 모르겠군요.준용님의 노고로 고향을 더 자세히 알게되었어요.이 방대한 자료들을 얼마나 고생하며 실었을까요.머리숙여 고맙단말 하고 싶어요.너무 수고 많았어요.![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44.gif)
![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4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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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수산나누님이 알고 계신다는 한일균님은 저도 잘 압니다. 왕영록님 역시 우리 친구 형님이시고 지금은 연천로하스대학 저하고 10학번 동기랍니다. 위에 이재순씨는 저의 부친이시고요. 이번 고향방문때 찾아 볼수 있겠지요.
한일균님은 연세가 지금쯤 90도 넘으셨을거예요.아직 생존해계신다네요.고향 방문때 두루 두루 뵙고싶습니다.
옛날 내가 중학교 다닐때 한일균씨의 아들 한은종이라는 사람이 답십리에서 사고를 낸 적이 있지요. 소형 화물차로 사람(어린아이)을 치어 죽이고 뺑소니(사체는 차에 싣고)를 쳐서 아미리 짚낟가리에 감춰두었다가 한일균씨의 간곡한 권고로 자수를 했는데 당시 언론이 발칵 뒤집혔지요. 신문사 차가 수십대가 꼬리를 물고 지나갔고 결국 구속이 되었으나 자수를 했다는 점과 처벌을 원치 않는 다는 피해자 측의 협의와 진정이 있어 얼마 안가 풀려났지요.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한일균씨의 자수권유가 아들을 살려낸 것이지요. 죽은 사람은 어쩔 수가 없고요.
맞아요.나도 그사건 신문으로 봤어요.그 때의 쇼크 때문이신지 어머니도 얼마후 돌아가셨다네요.얼마나 마음이 아팠었는지![~](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