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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발심수행
경봉은 큰소리로 외던 <천수경>을 멈췄다. 달빛이 새어들지 못할 만큼 터널 같은 컴컴한 소나무 숲길을 뚫고 나오자, 천년 전 원효스님이 자신을 찾아온 천 명의 당나라 태화사(太和寺) 승려에게 <화엄경>을 가르친 화엄벌이라는 커다란 분지가 나왔다. 초저녁부터 내린 이슬로 화전한 밭들이 백사장처럼 반짝였다. 분지 끝에는 화전민이 사는 서너 채의 농막이 웅크리고 있었다. 산길은 그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경봉이 내원사로 가는 빠른 지름길을 길을 놔두고 장안 불광산(佛光山) 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천성산(千聖山)으로 들어온 것은 원효스님이 수행했다는 척판암(擲板庵)을 들러볼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척판암에는 오래 전부터 선방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지나가는 객승에게 우연히 듣고는 발길을 급히 내원사 쪽으로 돌려 천성산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척판암은 원효스님이 이적을 보인 곳이라 하여 유명한 암자였다. 원래는 원효스님이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창건하여 담운사(談雲寺)라 했는데, 스님이 당나라에 큰 판자를 던져(擲板) 천 명의 승려를 구한 후부터 절 이름이 척판암으로 바뀌게 된 암자였다. 원효스님이 보인 그 이적의 전설은 이러했다.
원효스님께서 당나라 태화사에서 정진하던 천 명의 승려가 장마철 산사태로 죽게 될 운명에 놓인 것을 천안통(天眼通)으로 보고는 ‘효적판이구중(曉擲板而救衆)’이라고 쓴 큰 판자를 던져 당나라 태화사의 허공에 뜨게 했는데, 놀란 대중이 일제히 법당과 요사에서 나와 판자를 쳐다보았고, 그 순간 태화사 뒷산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법당과 요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매몰되고 말았다.
이에 목숨을 건진 천 명의 승려들이 우리나라로 원효스님을 찾아와 <화엄경>의 강론을 듣고 모두 도를 깨쳤다는 전설이었다. 경봉이 지금 넘어가고 있는 천성산이란 산명(山名)이 바로 천 명의 당나라 출신 승려가 원효스님을 찾아와 오도하여 성인이 됐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었다.
농막은 비어 있는 듯 인기척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과연 첫 번째의 농막은 사립문이 열려진 채 신발 한 짝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의 용도로 걸쳐진 거적때기는 반쯤 찢어져 있었다. 우릿간으로 보이는 헛간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 화전민들도 농사철에만 들어와 살고 겨울철에는 식구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집을 비우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약초를 들고 떠돌이 악극단을 따라 나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전민을 만나 내원사로 가는 길을 물을 생각이었던 경봉은 난감했다.
산길을 잘못 들면 큰일이었다. 밤새 천성산 계곡을 헤매다 허기져 쓰러져질 수도 있었다. 산길이 헷갈리면 긴장하여 입안이 금세 타고,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고, 나중에는 체력이 떨어져 기진맥진하다가 쓰러지는 법이었다.
경봉은 잠시 빈 농막 앞에서 망설였다. 어느 산길을 타야 할지 도무지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경봉은 등골은 물론이고 온몸이 오싹해졌다. 살갗에 소름이 돋고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건너 편 농막에서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으음 음, 으음 음-.
잠시 후 경봉은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건너편 농막 앞으로 갔다. 토방에 짚신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 속에는 불기가 남은 숯덩이가 허옇게 꺼져가고 있었다. 경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심산골에서 사람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신음소리는 간헐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졌다. 고통을 참고 있는 여인의 신음소리였다. 그렇다고 경봉은 걸쳐놓은 거적때기를 들치고 방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야반삼경에 비구승이 여인의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문의 계율을 어기는 일이었다. 사미승이 될 때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미계는 물론 비구계를 어기는 일이었으므로 경봉은 그 자리를 모른 체하고 뜨기로 했다. 비록 산길을 헤매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문의 청정함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경봉은 농막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이 내닫는 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마음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프고 편치 못했다. 사문의 청정함을 지키기 위해 신음하는 여인을 모른 체한다는 것이 가시처럼 자꾸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다. 경봉은 산길을 걸으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미승이 될 때 청호스님 앞에서 사미계를 지키겠다고 맹세를 했다. 비구승이 될 때도 해담스님 앞에서 비구계를 목숨 바쳐 지키겠다고 맹세를 했다. 나의 계사(戒師)인 청호스님과 해담스님은 나에게 무어라 했던가. 나는 계사 앞에서 팔뚝에 기름 심지를 올려놓고 태우며 무엇을 맹세했던가. 청정한 사문(沙門)이 되어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겠다고(下化衆生) 발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은 청정한 사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중의 길이다. 몸과 마음이 청정한 사문이 되지 않고서는 상구보리의 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하화중생의 집도 위선의 집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저 여인의 신음소리가 나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나는 사문이 지켜야 할 청정함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러나 경봉은 산길을 걷다 말고 주저앉았다. 여인의 신음소리가 환청이 되어 점점 크게 귓가를 맴도는 것이었다. 경봉은 환청을 물리치고자 큰소리로 범어로 된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가리 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다바
나라간타 나막하리나야 마발다이사미 살바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마라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게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헤헤하레
마하모지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경봉이 <천수경> 중에서 핵심적인 주문(呪文)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운 것은 관세음보살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였다. 은사 성해스님이 ‘언제든지 앞이 막혀 막막할 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거라. 범어로 된 신묘장구대라니만은 관세음보살님이 증득하신 진리의 결정체이니라. 그러니 능히 우리말로 풀 수가 없다. 만약 우리말로 푼다하면 그 순간 다라니의 신묘한 힘은 사라지는 것이니 범어 그대로 외우거라. 그리하면 막혔던 앞길이 뚫어질 것이니라.’ 하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경봉은 내원사 선방으로 갈 생각도 잊은 채 산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수없이 외웠다. 그러자 문득 <화엄경> 십행품(十行品)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은 어느새 경봉의 마음을 돌려놓고 있었다.
보살은 중생들이 온갖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온 세상의 낱낱 중생들을 위해 그들과 같이 무량겁을 지내면서 그들의 덕을 더욱 충만케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을 버려두고 모른 체하지 않으리라.’
보살은 모든 것이 무아(無我)라고 생각하고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그 일에 물들지 않는다. 세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세상을 따르고 있다. 이것이 보살의 집착 없는 행이다.
경봉의 얼굴은 달빛에 번들거렸다.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신이 지금 고통스러웠던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대비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비심을 일으켜 분별심이 사라져야만 나의 존재가 사라져 저 여인이란 중생과 하나를 이루는 무아(無我)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
보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워하는 중생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경봉은 산길에서 일어나 다시 화엄벌의 그 농막으로 되돌아갔다. 여인의 신음소리는 여전히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있었다. 경봉은 먼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마침 나무 기둥에는 붉은 관솔이 몇 개 걸려 있었다. 경봉은 관솔에 불을 붙여 밖을 환하게 밝혔다. 그런 뒤 여인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뱉었다. 마침내 신음하던 여인이 밖의 인기척을 듣고는 거적때기를 들추며 물었다.
“남해장에서 벌써 돌아왔시유?”
“아닙니더. 산길을 지나가는 소승입니더.”
“아이고, 스님이시그먼유. 지 아들놈 데리고 약초 팔러 간 남편인 줄 알았그만유.”
아낙은 몸이 무거운 듯 상채만 일으키어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스님, 산기를 참기 힘듭니다요. 자리를 좀 마련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요.”
경봉은 거적때기를 들치고 들어가 방안을 관솔불로 밝혔다. 아낙은 아기를 곧 출산할 것처럼 배가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 고통이 심할 때는 불룩한 배를 움켜주고 뒹굴었다.
“보살님, 제 염불 소리를 들으면 고통이 가라앉을 낍니더. 그러니 조그만 참으시소.”
“스님, 고맙그만유.”
경봉은 눈물을 흘리는 아낙을 끌어안아 이부자리 위에 눕히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 빈 솥에 산모와 아기 몸을 씻을 물을 데우며 <천수경>을 외웠다. 내원사 선방 갈 생각은 아예 잊어버린 채 밤새 <천수경>을 외웠다.
마침내 새벽이 되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봉은 산모와 아기가 있는 방을 향해 합장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흐르는 동안 <천수경>의 긴 주문인 신묘장구대라니를 다시 외웠다. 이윽고 경봉은 큰 함지박에 따뜻한 물을 담아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산모는 조신한 여인으로 변해 머리를 단정히 한 채 아기를 안고 있었다. 자리도 수습하여 방안이 한결 깨끗했다.
“보살님, 이 물로 씻으시소. 소승은 이제 가겠십니더.”
그러자 아낙이 경봉에게 또 하나의 부탁을 했다.
“스님, 아기를 씻어 주시어유. 그러면 아기가 무병장수한다는 소리를 들었그만유.”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십니더.”
경봉은 아기를 함지박 물로 머리부터 씻었다. 놀랍게도 함지박에 들어간 아기가 울지 않고 방긋방긋 웃었다. 목욕물에서는 아기의 향기가 났다. 아낙이 합장하며 말했다.
“스님 손이 금빛으로 변했습니다요.”
관솔 불빛이 함지박 안의 목욕물에 반사되어 경봉의 손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욕물 묻은 경봉의 손뿐만 아니라 아기의 몸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경봉은 꿈에서 깨어난 듯 아낙에게 산길을 물었다.
“보살님, 내원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꺼?”
“아래 산길로 가시다 보면 계곡이 나오그만유. 큰 내를 건너 재를 넘으면 바로 내원사그만유.”
어느새 밖은 달이 기운 새벽으로 변해 있었고, 가깝고 먼 산들이 푸르게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보살님, 찬 바람 맞지 말고 산후조리 잘하시소.”
거적때기를 밀치고 나서려는데 아낙이 경봉을 불렀다.
“스님, 이거 가지고 가셔유. 화전 일굴 때 저기 절터 땅에서 나왔시유.”
손바닥만한 금동 관세음보살이었다. 녹이 슬긴 했지만 미소가 또렷한 관음상이었다. 그러나 경봉은 아낙의 고마워하는 마음만 받아들이고 보살상은 거절했다.
“보살님, 집안에 모시소. 그러면 좋은 일이 있을 낍니더. 집안에 모셔놓고 관세음보살님을 외우시소. 그러면 소원 다 들어 줄 낍니더.”
경봉은 농막을 나와 한걸음에 내달려 큰 내(川)에 이르렀다. 내라고 하지만 며칠 전에 내린 봄비로 강물처럼 물이 불어 징검다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한 지류임이 분명했다. 경봉은 물 건너 나루터를 향해 손나팔을 하고 소리쳤다.
“여보소오, 여보소오-.”
그러나 게으른 사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떠 천변의 논에 햇볕을 뿌릴 무렵에야 일어나 경봉을 보고 소리쳤다.
“갈낍니더. 쬐금만 기다리소-.”
나룻배는 대나무로 엮은 뗏목이었다. 노를 젓지 않고 삿대를 찔러가며 물살을 따라 건너오는 이른바 대나무배(竹船)였다. 배는 금세 냇가로 다가와 경봉을 실었다. 사공은 늦잠을 깨게 한 경봉이 야속한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이른 아침에 어디를 가능교.”
“내원사로 갑니더.”
“내원사라 카면 혜월 큰시님 계시는 절 아닙니꺼?”
“맞소.”
경봉은 뱃삯으로 엽전을 치르고 나루터를 벗어났다. 다랑이논밭에는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어미 소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논밭을 갈고, 봄빛이 무르익어가는 푸른 산에는 지난달 꽃샘추위 때 내렸다가 아직도 덜 녹은 잔설처럼 산벚나무꽃이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넘어 개울을 하나 건너자 바로 내원사가 보였다. 내원사는 영남 절 가운데 보기 드물게 한말부터 수선사(修禪社)가 설치되었을 만큼 선찰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절이었다. 원효스님이 척판암을 짓기 전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하였고, 훗날 절이 쇠락하자 1646년 의천(義天)이 중건했으며, 이후 용운(龍雲)과 해령(海嶺)이 중수했는데, 1898년 유성(有性)이 수선사를 결사한 뒤 근세에는 경허의 제자 혜월 혜명(慧月 慧明)이 주석하면서 많은 선승들을 배출하고 있는 선찰이었다. 따라서 선객이라면 누구라도 한 철 나보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내원사 선방이었다.
더구나 내원사 선방에는 만공(滿空), 용성(龍城)과 더불어 당대 3대 걸승으로 이름난 선승 혜월(1861-1937)이 대들보처럼 버티고 앉아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선풍이 영남에 두루 뻗쳤다.
충남 예산 출신의 혜월의 성은 신(申)씨로 1871년 10살에 덕숭산 정혜사로 출가하여 안수좌(安首座)의 제자가 되었다. 사미승으로 나무꾼 노릇이나 하다가 비로소 1884년 23살 때 한말의 대선승 경허를 만나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배우던 중 견처(見處)가 생겼으며 스승을 만난 지 11만인 1901년에 오도하여 경허의 법맥을 이었다.
혜월에게 견처를 준 <수심결>은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중국 대혜선사의 어록을 보고 난 뒤, 성불의 확신이 들어 마음 닦는 방법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 서문에 해당하는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 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닯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성품인 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하시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변화가 다 여래의 밝은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들이며,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다.’
아무튼.
혜월은 오도한 이후 도리사, 파계사, 성전암, 울산 미타암,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에 머무르면서 깨달은 도(道)를 보임하며 선객들을 지도하였다. 혜월의 가풍은 무소유와 천진(天眞)이었다. 파계사 성전암에 천진도인으로 주석하고 있을 때는 데리고 있던 동자승을 부처님처럼 존대하여 부를 때마다 ‘큰스님’이라고 호칭하여 찾아온 선후배 선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내원사 조실로 있을 때에는 대중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부에게 소를 한 마리 판 뒤, 주지가 난감해 하자 혜월은 입고 있던 장삼을 훌훌 벗어던지고 엎드리더니 소걸음을 걷다가 ‘음매 음매’ 소 울음을 흉내 내며 자신이 밤낮으로 일만 하는 소와 다름없으니 소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혜월은 어디에 주석하든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一日不作 一日不食) 중국 백장선사의 청규를 지켰다. 그러니 혜월이 주석하는 곳의 산자락마다 절 소유의 논밭이 불어났다. 그것은 탁발하거나 신도들의 보시를 받지 않고서도 대중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립의 방편이었다. 물욕에 집착하는 욕심의 소산은 결코 아니었다. 내원사에서 한번은 혜월이 대중들과 함께 울력하여 산자락 2천 평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는데, 그 가운데 세 마지기를 어떤 마을사람에게 팔게 되었다. 그런데 혜월은 논 두 마지기 값만 받고 내원사로 돌아왔다. 당연히 대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실스님, 스님께서는 마을 농부에게 속은 것입니다.”
“마을 농부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대중들은 지금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수행하는 자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어찌 논 세 마지기를 파시고 두 마지기 값만 받아왔단 말입니까?”
혜월은 자신을 힐난하는 대중들을 큰방으로 불러들인 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어 꾸짖었다.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 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가 아니겠느냐! 욕심 없는 승려의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
대중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논 판 값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 농부에게 한 마지기 값을 보시하고 돌아온 혜월의 욕심 없는 성품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혜월이기에 승려들 사이에 만공, 용성과 더불어 당대 3대 걸승으로 불렸던 것이다. 혜월은 만년에 부산 범일동 안양암에서 수법제자 운봉(雲峰)에게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圓寂)에 들었다.
경봉은 내원사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가다 쉬고 있는 초로의 승려를 만나 물었다. 그 승려는 힘에 겨운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 누굴 찾는다고?”
“혜월 큰스님을 뵙고자 통도사에서 왔십니더.”
“혜월이란 중은 밤에나 만날 수 있을 걸세.”
“어디 출타하셨십니꺼?”
그 승려는 똥장군이 얹힌 지게를 다시 지고 일어나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안거 중인데 어디로 출타한단 말인가? 혜월의 선방은 저 논밭이이라네.”
“큰스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곳이 어딥니꺼?”
“큰스님 작은 스님 할 것 없이 다들 울력하고 있으니 객사에 가서 기다리게.”
똥장군이 뒤뚱거리자 똥물이 출렁 튀어나와 경봉은 그 지게꾼 승려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섰다가는 똥물 벼락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똥장군을 진 그 승려 말대로 대중들이 모두 논밭으로 나갔는지 절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방 댓돌에도 짚신 한 켤레 놓여 있지 않았다. 불목하니가 절 후원에서 저고리를 벗은 채 장작을 패고 있을 뿐이었다.
“선방 스님들은 어디 있십니꺼?”
“선방 시님을 찾십니꺼? 여기 시님들은 모두 소나 말보다 더 일만 합니데이.”
“공부는 언제 합니꺼?”
“밤에 한다카는데 선방 문구멍을 보면 가관이데이. 꾸벅꾸벅 조는 스님이 태반인기라. 안 그라겠십니꺼? 낮에 죽도록 일만 하니까 그렇지예.”
“혜월스님은 어디 계십니꺼?”
“방금 똥장군 지고 밭으로 갔십니더. 맨날 똥냄새나 묻히고 댕기는 시님입니더.”
똥냄새에 질렸다는 듯이 코를 틀어쥐며 말했다.
“혜월스님도 그렇게 일만 하십니꺼?”
“소나 마찬가집니데이. 실제로 소 흉내도 잘내는기라. 하하하.”
경봉은 조금은 실망이 들어 맥이 풀렸다. 이류중행(異類中行)이라 하여 중생 속으로 들어가 소나 말처럼 일하는 전통이 중국 남전(南泉)선사 때부터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지금 머리에 붙은 불을 당장 끄려고 왔는데, 내원사 선방의 가풍은 왠지 자신이 찾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밤이 되어서야 경봉은 조실채로 불려갔다. 낮에 보았던 똥장군을 진 그 스님이 바로 혜월이었다. 삼배를 올리고 나자 농사꾼처럼 순박하게 생긴 혜월이 물었다.
“어찌 왔는가?”
“참선공부를 하러 왔십니더.”
“우리 절 대중들은 낮에는 행선(行禪), 밤에는 좌선(坐禪)을 한다. 할 수 있겠는가?”
경봉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고 합장만 했다.
“당나라 남전스님은 선객들에게 소나 말이 되라고 가르쳤지만 고려 때 우리 일연스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소나 말들의 먹이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것을 경초선(莖草禪)이라 하지. 경초선을 한번 해볼 텐가.”
혜월이 부드럽게 다그쳤지만 경봉은 대답을 안 했다. 그러자 혜월은 경봉의 뜻이 다른 데 있다고 짐작했다. 선객보다는 강백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책상에 놓인 서책을 방바닥에 내려놓더니 물었다.
“우리 은사 경허스님께서 엮으신 <선문촬요(禪門撮要)>다. 이 서책을 본 적이 있느냐?”
“처음입니더.”
혜월은 마음속으로 내원사에 영민한 강사가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었다. 풋중들이 오면 강사가 어느 정도 선(禪)에 대해서 지도한 뒤 선방에 입실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경허스님을 만나 보조국사가 지은 <수심결> 강론을 듣다가 비로소 바른 지견이 생겨 대발심했던 것이다. 혜월은 <선문촬요>의 첫 장에 나온 달마의 <혈맥론(血脈論)>을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한 자한 짚어가면서 읊조리더니 경봉더러 해석을 해보라고 했다.
三界興起同歸一心 前佛後佛以心傳心 不立文字
問曰 若不立文字 以何爲心 答曰 汝問吾卽是汝
吾答汝 卽是汝心 吾若無心 因何解答汝若無心 因何解問吾
問吾卽是汝心 從無始曠大劫以來 乃至施爲運動一切時中
一切處所 皆是汝本心 皆是汝本佛
卽心是佛亦復如是
경봉은 당황하여 처음에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곧 혜월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혜월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경봉은 한 자도 막힘없이 달마의 <혈맥론>을 읽어나갔다.
삼계가 어지럽게 일어났으나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가나니 앞서 깨달은 분과 뒤에 깨달은 분이 이심전심하야 문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누가 물었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내가 답했다.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 시작 없는 예부터 지금까지 전하는 모든 말과 행동과 장소와 시간이 다 그대의 근본 마음이며 모두가 그대의 근본 부처이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 함은 바로 이와 같으니라."
경봉의 읊조림을 눈을 감고 듣고 있던 혜월은 매우 만족하여 소리쳤다.
“옳거니 옳도다. 하나도 틀림이 없구나. 이제야 대들보로 쓸 만한 중을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어서 더 읽어보아라.”
이 마음을 버리고서는 부처를 구할 수 없나니
이 마음을 떠나서 보리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성은 진실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법 그대로가 마음이니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자기 마음이 보리요 열반이다.
만약 마음 밖에 따로 부처나 보리가 있다면 옳지 않으니
부처와 보리가 어디 있다고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이란 이름뿐이요, 형상도 부피도 없나니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느니라.
이렇게 허공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도 역시 끝내 찾지 못하리라.
깨달음은 자기 마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늘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으리오.
먼저 깨달은 분과 뒤에 깨달은 분이 다만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곧 부처로 부처가 곧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가 어디 있겠는가.
혜월은 경봉이 읽고 있는 <선문촬요>을 빼앗아 덮으며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 듯이 벌떡 일어섰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자식 만난 듯 혜월은 경봉을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한 문장도 어긋남이 없구나. 네 한문 실력이 출중한 줄 이제 알았으니 그만 읽거라. 오늘 밤 이 <선문촬요>를 빌려 줄 터이니 마저 읽어 보거라.”
혜월은 재빨리 한문 실력이 뛰어난 경봉을 내원사 강백으로 키워볼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빌려주지 않던 <선문촬요>를 기꺼이 경봉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의 은사 경허스님이 후학들을 위해 여러 조사들의 어록 중에서 핵심만 뽑아 엮은 책인 데다 은사가 직접 하사한 신표나 다름없는 책이었으므로 함부로 빌려주지 않았던 것인데, 달마의 <혈맥론> 첫 장을 거침없이 읽어버린 경봉에게는 조금도 아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혜월의 소박한 단견이었다. <선문촬요>는 경봉의 머리에 불을 더 지르는 책이 되고 말았다. 경봉은 밤을 새워가며 <선문촬요>를 정독한 후, 날만 새면 지체 없이 내원사를 떠나 해인사 선방으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해인사 선방은 경허 선사가 선풍을 중흥시킨 이래 지금은 제산(霽山) 선사가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달마의 <혈맥론>은 <선문촬요>의 골수 같은 부분이었다. <혈맥론>의 구절구절은 밤새 경봉의 가슴을 쳤다. 경봉은 <혈맥론>의 이 구절에서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경봉 자신이 걸어야 길을 명명백백하게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경봉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견성을 해야 한다.
만일 견성하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계를 지킨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
염불하면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얻기는 하지만 부처는 끝내 될 수 없느니라.
참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달마의 가르침에 경봉은 입술에 피가 맺힐 만큼 깨물었다. 염불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이 경봉의 꿈인 것이었다.
다음 날, 동이 터오는 시각에 경봉은 조실채로 나아가 <선문촬요>를 댓돌 위에 놓고는 해인사 선방으로 가기 위해 내원사 산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버렸다. 이로써 혜월과 경봉의 인연은 지나가는 구름처럼 하룻밤 만에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경봉은 혜월과의 짧은 인연을 가슴에 담고 있다가 훗날 스님을 꿈속에서 만나 해후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1927년 36세 때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일로 경봉이 44세가 되어 통도사 주지를 맡고 있을 때의 꿈이었다.
새벽꿈에 어느 절에서 경허 선사가 열반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경봉은 통도사 주지였으므로 통도사 대표로서 그 절로 조문을 하러 갔다. 그때 마침 영단에는 제물이 많이 차려져 있었는데, 경허의 큰 제자 혜월이 나타나 제사상을 주장자로 세 번을 치고는 재가 끝났다는 듯 제물을 모두 거두어 가버렸다. 할 수 없이 경봉은 가지고 간 제물을 다시 영단에 차려놓고 대나무로 만든 채찍을 쥐고 일어나 말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떠한 것이 화상의 법신입니까?”
그 순간 제물 속에 있던 대추 하나가 날아와 경봉의 입을 때리고 땅에 떨어졌다. 이에 경봉이 다시 말했다.
“화상이 그렇게 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다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한번 이르십시오.”
영가는 말을 할 수 없는 법, 그래서 대추를 한 알을 던졌을 터인데 이번에는 무엇이 날아올지 자못 궁금했다. 제물을 거두어 간 혜월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염불승은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을 하겠지만 선승은 주장자로 마음을 전하는 법, 혜월은 영단에 주장자를 세 번 쳤으니 이미 경허 영가와 이심전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봉은 더 이상 영가와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미진한 채 눈을 떴다. 마침 새벽 예불을 시작하려는 듯 법당에서 소종 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은 경봉의 꿈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혜월이 주장자를 세 번이나 내리쳤던, 경허 영가가 자신에게 대추 한 알을 던졌던 꿈을 경봉은 단꿈으로 여겼다. 그래서 경봉은 자신의 일지에 적어둔 게송에 감몽(甘夢; 단꿈)이라 하였던 것이다.
법신의 한 길을 영가에게 물었더니
붉은 대추 날아와 눈앞에 떨어지네
최후의 활구를 오히려 끝내지 못했는데
종소리 단꿈 깨니 달은 하늘에 둥실 떴네.
法身一路問靈駕
紅棗飛來落眼前
最後活句猶未了
鐘惺甘夢月圓天
다음 날 경봉은 사형 구하와 차를 마시던 중 꿈 얘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20년 연상의 사형(師兄) 구하는 덤덤하게 말했다.
“도인이 아니면 모두 허망이며 도인이면 모두 참됨이니 비록 천 길이나 되는 비로자나불이 사자좌에 앉아 위없는 대법(大法)을 설함도 역시 별다른 생각이 아니거늘 하물며 일개 경허, 혜월스님을 꾼 꿈 가운데의 일이랴.”
구하는 꿈은 집착 때문에 생겨난 헛것이라는 일반적인 얘기를 마친 후, 대수롭지 않은 듯 허허 웃으며 게송을 읊조렸다.
꿈에 본 모든 스님 오히려 환몽인데
게다가 붉은 대추 눈앞에 떨어졌다네
참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야 모두 참 삶이니
집착하지 않으면 원래 뜻밖의 하늘이리.
夢見諸師猶幻夢
然中紅棗落眸前
非眞飛夢皆眞活
不着元來意外天
그러나 경봉은 혜월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 구하와는 입장이 달랐다. 깨달음을 이룬 이후에도 경봉은 젊은 날 혜월의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런 탓에 혜월의 법제자 운봉을 초대해 안거 때 결제법문을 듣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법을 나누는 도우(道友)로 지냈던 것이다.
경봉이 통도사 주지로 일할 때는 백련암에 선방을 개설해 놓고 운봉을 조실로 주석케 하고, 선객들이 울력에 휘둘리지 않고 종일 참선공부만 전념하라고 매년 선방양식으로 쌀 200가마씩을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는 보리쌀도 보기 힘든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쌀을 200가마씩 대준다는 것은 전국 어느 대찰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일을 경봉은 두고두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제자 명담에게 그때를 술회하곤 했다.
“내가 운봉선사를 백선원에 조실로 초빙해 놓고 쌀을 200가마씩 보내주며 떡을 해먹던지 밥을 해먹던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운봉의 법제자이자 성철의 도우인 향곡(香谷)도 백련암 선방에서 운봉을 시봉하며 정진했는데, 명담에게 그때의 선방 호시절을 말하며 너털웃음을 크게 터뜨리곤 했다.
“자네 은사스님은 자장 이래 큰스님일세. 산내암자인 백련암에 선방을 차리고 큰절 주지로 계시는 동안 1년에 쌀 200가마씩을 선방양식으로 주셨네. 요중(鬧中)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일세. 하하하.”
향곡이 경봉선사를 가리켜 자장 이래 큰스님이라고 했던 것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 이후 선방을 개설해 놓고 매년 선방양식을 풍족하게 보내준 스님은 경봉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해인사 선방은 퇴설당이었다. 조실은 제산 정원(霽山 淨圓) 스님으로 속성은 김씨, 합천 출신이었다. 14세 때 해인사로 출가하여 우신(佑信)스님에게 득도하고 수월(水月), 만공(滿空) 등과 퇴설당에서 경허의 지도를 받아 종지(宗旨)를 얻은 스님이었다. 1913년 해인사를 떠나서는 줄곧 직지사에서 주석하였다. 그러니까 경봉과의 인연은 제산이 퇴설당 조실로 있을 때 잠깐이었다. 그래도 경봉은 훗날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제산에게 점검을 받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제산으로부터 이런 답장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서 쓰는 인사는 생략하오.
보내준 고향에 돌아간 게송(깨달음의 노래)을 받고 보니 서면에 맑은 향기가 넘치오.
말운(末運; 말세)에 어찌 이와 같음을 얻었는지 한 편의 대의(大意)가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니 실로 바른 지견(知見)이오. 그러나 고인(古人)들도 이러한 경계를 당하여 오해하는 이가 많았거늘 하물며 지금 사람들이랴.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시되 ‘식심(識心)이 적멸하여 한 생각도 동함이 없는 것을 정각(正覺)이라 이름한다’ 하였으며, 대혜스님이 이르시되 ‘마음길이 다하여 끊어지지 않았다면 비록 항하수 강변의 모래알 같이 많은 이치를 말하더라도 나의 자성(自性) 일에는 아무런 간섭이 없는 것이라’ 하였고, 고봉스님이 이르시기를 ‘오묘한 깨달음의 가장 요긴한 것은 마음길이 다하여 끊어지는 데 있다’ 하였으니 여기에 계합이 됩니까.
이 일이 결코 소홀한 일이 아니니 자세히 점검하고 진중히 하시오.
<서장(書欌)>의 장제형장(張提刑章)에 이 일을 두루 밝혀놓았으니 꼭 한번 보시오.
나에게 적어 보내기를 고향에 도착하였다(悟道) 하고 보임(補任)의 한 길을 지도하라 하니 처음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어느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고향에 도착하였는지 온 곳을 분명히 적어서 보내면 보임일로(補任一路)를 지시하리다.
- 무진년 3월 20일 제산 근사(謹謝)
경봉은 해인사 입구인 홍류동에 도착하여 잠시 쉴 겸 계곡으로 내려가 지친 다리를 물에 담갔다. 이른 새벽에 내원사를 나와 쉬지 않고 걸었던 터라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공양시간을 넘기면 굶어야 하므로 서둘러 걸었던 것이다. 다행히 합천장터로 오는 장돌뱅이와 동행하여 낙동강을 건너서 지름길을 가로질러 왔으므로 저녁공양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봄물이라고는 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웠다. 발끝에서부터 전해오는 냉기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홍류동(紅流洞)은 가을이 되면 가야산의 낙엽이 떨어져내려 계곡물마저 불게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바위에는 고운(孤雲) 최치원의 시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그가 세속을 버리고 은둔한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렵구나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경봉이 고운 최치원을 흠모한 것은 그의 선사 같은 기품 때문이었다. 고운의 시는 고고한 신선의 선풍(仙風)이 흘러넘쳤고 깨달음을 이룬 도인의 향기가 배어 있는 것이었다. 그가 홍류동을 들어서면서 하산하는 한 스님에게 지어주었다는 시도 경봉은 아주 좋아했다.
스님,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산이 좋은데 왜 산을 다시 나가오
먼 훗날 내 발자취 두고 보시지요
한번 산에 들면 다시 안 돌아가리.
僧乎莫道靑山好
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
一入靑山更不還
고운의 아버지는 6두품 견일(肩逸). 고운은 신라 헌안왕 1년(857) 경주 시랑부에서 태어나 12살에 당나라로 건너가 6년 만인 17살에 과거에 급제한다. 20살에 표수현위에 임관되지만 1년 만에 ‘덩굴 풀처럼 누구에게 붙어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없이 생각해 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며 현위를 사임한다. 그러나 녹봉은 곧 바닥이 났고, 설상가상으로 황소의 반란이 밀어닥쳐 생계가 아닌 생사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때 문사 고병(高騈)이 회남 절도사로 부임하자, 지인의 도움으로 관역(館驛) 순관에 기용된다. 이후 고운은 고병의 신임을 얻어 중요 직책을 맡는다. 서거정이 우리나라 시문집의 비조라고 찬양했던 <계원필경> 20권의 글도 이 무렵에 써둔 것이었다.
고운은 당의 혼란과 부모의 병환 때문에 28살(884년) 때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하여 헌강왕의 환대를 받았지만 벼슬은 중요 직책이 아닌 경서를 강의하는 시독(侍讀), 문필기관의 부책임자인 지서서감(知書書監), 유학한 학자에게 명예로 주어지는 한림학사, 병부에 자문하는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을 지냈다. 그런데 헌강왕에 이어 왕의 동생 정강왕마저 1년 만에 죽자, 고운은 진골들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아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 태수로 전전한다.
이때 진성여왕은 미소년을 불러들여 요직에 앉히는 등 난정을 일삼으므로 호족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 신라는 급격히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궁예와 견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에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구국책의 일환으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직언하지만 여왕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진골 귀족들에게 묵살당하고, 마침내 고운은 42살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입산하고 말았다. 고운이 가야산을 첫 운둔지로 삼은 것은 해인사에 그의 친형인 현준(賢俊)과 친교가 두터웠던 화엄 종장 희랑(希朗)이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