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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07:24 정운현
- ‘천재 시인’ 이상(李箱)에 빠지다
1954년 3학년을 마치고 경제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특히 고시공부를 해서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됐다. 흔히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안식처로 찾는 곳이 문학이다. 하기야 중학시절의 꿈이 문학가이기도 했었다. 사실 그가 판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피난길에 목격한 젊은 죽음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즉 그의 성정 본바탕에서 판검사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정 자체가 그런 인물이 못된다. 생전에 그가 그런 점을 글로 고백한 바도 있다.
“한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 판검사의 꿈은 민․형법 총론․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자마자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나는 시집과 소설책을 들었고,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친해졌다. 중학시절의 꿈이 하기야 문학자였으니까, 오랜 방황 끝에 ‘탕자(蕩子) 돌아오다’가 된 셈이었다”
-- (‘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문예중앙>, 1987년 봄호)
이상(李箱)과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대중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홀로형’에 가까운 점이 그렇고, 예술가적 기질 또한 그렇다. 건축기사 출신으로 선전(鮮展)에도 여러 번 입상한 적이 있는 이상은 미술학도였고, 종국은 방송사 주최 기타연주대회에서 2등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에 출중한 소질이 있었다.
경성고공 시절의 이상
또 두 사람의 천재적 기질, 비 인문계 출신(이상은 경성고공(高工) 건축과, 종국은 경성농고 수의축산과)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의 ‘사랑 역정’도 비슷했다면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암울했던 시대상황까지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상에 쉽게 빠져들었고, 또 이상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무엇인가에 빠져서, 그 대상이 사람이든 아니면 연구가 됐든, 나름의 성과를 냈다면 그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높이 평가돼야할 것이다. 이상에 빠져든 과정을 그의 기록으로 직접 보자.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위적 거리고 있을 때 눈에 띈 것이 ‘이상 선집(李箱選集)’이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게 어쩌면 그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작품 ‘날개’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민법총칙 5백 페이지를 한 달 이내에 외어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나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의 사후 20년이 되어 가던 그 때까지 그에 대해서는 본격 연구가 없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날개’를 달아준다? 스스로 천재라고 믿었던 나 자신 하나도 살리지 못해 고시를 포기한 녀석이 남의 천재를 살려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 (‘술과 바꾼 법률책’ 중에서)
그가 ‘이상 연구’에서 남긴 족적은 뒤에 다시 거론키로 하고 당시 그의 집안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이상 전집(李箱全集)>(전 3권)을 만들 당시 그는 도봉리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상황에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돈이 없어 대학등록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일종의 ‘도피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그로선 심적, 물적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농고를 다닐 때는 그만두거나 아니면 대학갈 때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경성사범을 그만둘 때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대안이 있었다. 또 경찰관 생활은 본가와 큰집 모두에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일시적 피난처로는 그만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20대 후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직장도, 사랑도, 결혼도 해야될 나이에 그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늘어난 건 짜증과 괴팍한 성격의 폭발이었다. 그 못지않게 가족들도 그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리고 만만한 건 여동생들이었다.
“천재는 광인(狂人)에 가깝다는 말처럼 오빠는 광인에 가까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도봉동 집으로 내려와 ‘이상전집’을 쓸 무렵에 그랬다. 오빠의 글 쓰는 스타일은 참으로 그때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식구들이 잠을 자는 밤이면 글을 썼는데 시끄럽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잠자다가 화장실에 가려면 그 문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남들이 깨어나 생활하는 낮 시간이면 잠을 잤다. 밥먹을 때 나는 숟가락 소리조차 시끄럽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시 군대에서 만들어준 집이 넓기는 했으나 칸막이가 따로 없는 한 공간에서 살다보니 우리 자매들과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식구들은 밭에 나가 일을 했는데 오빠는 코앞에 있는 재떨이나 성냥도 순화야! 순화야! 소리를 지르며 갖다 달라고 해서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 때 우리 땅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이 부르는 오빠의 별명은 ‘네로’, ‘왕초’였다. 어쩌다 오빠가 출판사에 볼일이 있어 서울을 가는 날이면 우리들에겐 해방의 날이었다” (순화 증언)
둘째여동생 순화
막내 경화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오빠는 다른 오빠들에 비해 불규칙적인 생활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공부하라면 되레 만화를 보면서 어머니 속을 썪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만화 보는 것도 공부라고 둘러댔다. 그 때 어머니는 오빠 별명을 ‘털팩이’라고 했는데 불만투성이의 거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빠는 물그릇이란 물그릇은 전부 걷어차고 다녔다. 젊은 시절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불만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이상 연구의 금자탑이랄 수 있는 <이상전집> 세 권을 내놓았다. “원고를 탈고했다는 것은 쓴 것이 아니라 낳은 것이며, 그것도 임신중독증이 극심한 난산이었다”는 순화의 표현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정식으로 평단(評壇)에 등단한 신분도 아닌, 27세의 대학생이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분야를 개척한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평가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 무렵부터 그와 교류가 있었던 시인 고은(1933년생, 73세)은 <이상전집> 발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당시 ‘이상전집’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상을 생각하는 거 하고 전혀 다릅니다. 이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죠. 자료를 다 뒤져서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36년 동안 그 작가가 어느 작가였든 간에 그것은(자료 등) 망실돼 있는 상태였는데 그걸 임 선생님께서 만들어서 이상전집으로 내신 것입니다” (<민족사랑>, 민족문제연구소, 2006 3월호)
-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이상전집>
그에 이어 <이상연구> <이상소설연구> 등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년생, 70세,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교수는 더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초 전화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임 선생의 문학분야 업적을 들라면 <친일문학론>을 펴낸 것도 중요하지만 <이상전집> 세 권을 묶어낸 것도 절대 과소평가돼선 안 된다. 그 당시 그런 작업을 할 여건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임 선생께서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심지어 이상이 일본서 보낸 편지까지 유가족들에게 입수해 전집으로 묶어낸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 선생은 이상 연구의 기초를 다진 분으로, 이상 연구의 첫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분이다” 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언론인 출신으로 생전에 종국과 친교가 두터웠던 인태성(1933년생, <문예중앙> 주간 역임, 경기도 수원 거주)은 “이상은 요절했다. (*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만 27세로 사망했으니 요절이라면 요절이다) 짧은 생애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사후 이를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어 작품들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작품 수나 장르별로 어떤 것이 있었는지도 전혀 집계돼 있지 않았다. 물론 그 때까지 이상 개인문집이 나온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해방 후 김기림이 펴낸, 200쪽 분량의 <이상 선집(李箱選集)>(백양당, 1949)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을 임 선생이 도시락 싸서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이상 작품을 발굴해 엮어낸 것이 <이상전집(李箱全集)> 세 권이다. 임 선생이 청춘을 바친 역작이다” (* 참고로 <이상선집>에는 이상의 문학작품 가운데 소설 3편, 시 22편, 수필 6편이 실려 있다)
이미 그 당시만 해도 김기림의 <이상‘선’집>은 절판이 돼 입수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국에게 이 책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인태성이었다. 인태성은 그가 <이상전집>을 엮을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시인 박희진은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인태성은 “도서관에 따라가서 이상의 시 몇 편을 베껴준 게 전부”라고 겸손해 했다.
<이상전집> 편찬 과정이 어땠는지 당사자인 종국 본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학시절에 나는 <이상전집>을 3권으로 엮어서 펴낸 일이 있다. ‘이상론’을 쓰려고 작품을 모으다 보니 웬만큼 수집이 된 것 같아서 전집으로 엮었던 것인데, 그건 좀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이었다. 작품연보 하나가 안 갖춰진 상태에서의 수집은 별 수 없이 신문, 잡지를 하나하나 뒤지는 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20년 전의 간행물들을 뽑아내면, 책 위에는 먼지가 석 자는 몰라도 1밀리미터는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런 출판물을 한 장 한 장 뒤지는 지어(紙魚, 좀벌레) 생활 1년에 <이상전집>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시했던 날의 시시한 이야기’, <출판과 교육에 바친 열정>, 우촌이종익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1992)고 회상했다.
종국이 펴낸 <이상전집>(전3권) 초판본
그럼 여기서 그동안 ‘이상 연구’의 성과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넘어 가자. 아래 내용은 지난 1995년 문학사상사에서 네 권으로 펴낸 <이상문학전집> 가운데 제4권 ‘연구논문 모음집’의 서문에서 김윤식 교수가 ‘<이상논집>을 엮으면서’라는 제목으로 쓴 것을 요약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상 문학만큼 난해한 것은 별로 없다. 1930년대의 김기림의 작품평에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2백여 편의 연구논문이 씌어졌고, 앞으로 씌어질 것임에 틀림없거니와, 그렇다고 이상 문학의 해석이 끝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상 문학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그가 이국땅에서 숨져간 1937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 이상추도회(1937. 5. 15)에서 행한 평론가 최재서의 <고 이상의 예술>은 그의 유명한 <날개와 천변 풍경에 관하여>와 더불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후 나온 논문들을 연대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엔 추도문을 포함해 13편이 나왔다. 1940년대, 이른 바 해방공간에서는 단 3편만 보인다. 6.25 이후 한동안 씌어진 논문은 모두 24편이었다. 앞 세대에 비해 놀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젊은 평론가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이상 문학이었다. 서울대에서는 이어령이 <문리대학보>에 ‘이상론’을, 고려대에서는 임종국이 <고대문화>에 ‘이상 연구’를 선보였다. 또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고석규가 역설로서의 이상론을 펼쳤다. 절망을 체험한 세대에게 이상은 친형과 흡사한 존재였다.
1960년대엔 55편이 나왔다. 전 대에 비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김구용의 <레몽에 도달한 길>과 김현의 <이상 문학에서의 만남의 문제>로 대표시킬 수 있다. 1950년대와는 달리 1960년대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이상 문학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겠다. 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두 배에 육박하는 10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오생근의 <동물의 이미지를 통한 이상의 상상적 세계>, 김용운의 <이상 문학에 있어서의 수학>, 오광수의 <화가로서의 이상> 등으로 대표된다. 이는 이상의 문학이 미시적 분석을 통해 수학, 미술, 건축, 그리고 정신분석 등으로 확산되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나온 이상 문학 연구물 전체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다. 즉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기 보다는 그동안 논의된 영역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조두영의 <이상의 인간사와 정신 분석>, 김윤식의 <수심을 몰랐던 나비>, 이승훈의 <오감도 시 제1호 분석>, 한상규의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미적 자의식> 등으로, 이는 각 분야별의 심화연구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의 글에는 1990년대는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95년에 나온 것이고 보면 아직 마무리할 때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를 잘 정리한 논문을 한 편 발견했다. 필자는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 김주현은 <안동어문학> 제6집(안동어문학회, 2001. 11)에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와 그 한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는데 빈 공간을 메우기에는 안성맞춤의 논문인 셈이다. 이 글은 앞서 김윤식의 글과는 또 조금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의 글이 연대별 특징에 주안점을 뒀다면 김주현의 논문에는 시기별 대표적 연구자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나로선 고마운 점이다. 아래 내용은 김주현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요약,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이상에 대한 연구물은 한국의 근대 문인 그 누구보다도 많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이상 연구는 짧은 단평에서부터 학위논문까지 포함해 1,000편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서 3분의 1이 넘는 340여 편이 1990년대에 나왔다. 학위논문 만으로만 보면 1990년대까지 전체 220여 편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00편이 1990년대에 나온 셈이다.
1990년대에 나온 논문 중 이상 단독 논문은 석사논문이 48편, 박사논문이 9편이다. 김주현은 1990년대 들어 이상 연구가 넘쳐난 원인을 두고 ‘연구자 양산’을 들고 있다. 1980년대 초 대학입학 증원이 늘자 이것이 대학원 증원으로 이어졌고, 뒤이어 80년대 중반부터 석사학위 논문으로, 다시 90년대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단 외적 상황이 좋아졌다는 얘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