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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타고 서핑을
by 오디나무
앎은 배움으로부터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공부를 하는 동안 점점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는 역설이다. 숱한 스승들로부터 인류의 지혜라는 것들을 전해들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온갖 풍상을 겪은 노인들에게서 전해들은 생생한 경험담은 또 얼마인가. 마음이 방자하지 않은 날이면 우린 벽에 걸린 광고판에서도 지나는 아이의 천진한 웃음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운다. 어느 의미에서 인간이란 눈만 뜨면 배움의 공간에 서 있는 천성적인 학습자이다.
인문서당 강원은 학습자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보다 명료한 구조로 밝혀놓은 것에 다름 아닌 것, 다시 말해 나의 배움 구조의 병치물, 아바타와 같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곳을 통해 학습자로서의 나의 본성이 요구하는 배움의 갈망을 해결한다. 배움을 표방하는 서당 혹은 인문학 공동체들이 적어도 판에 박힌 교훈이나 국가관 같은 걸 배움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배움의 표상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오해가 없으시길! 여기서의 논제는 인문학 공동체의 위상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 있는 곳에서조차 앎은 제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으므로. 이와 같이 어떠한 의무감이나 장사속도 간여하지 않은 배움 공동체 속에서도 ‘배움이 곧 앎의 등가물’이라는 법칙은 쉽사리 성립하지 않는다. 배우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다. 우린 왜 배우는 대로 혹은 가르치는 대로 쑥쑥 변하지 않는 걸까?
대단한 감동 혹은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 가르침이 절벽처럼 다가왔을 때 우린 그에 따른 즉각적인 변화를 나로부터 기대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새롭게 보이거나 하는 경험들. 그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하고 전류는 흘렀지만 그것이 나의 어떤 부분을 바꾸어 냈는지 이후의 나의 대응들을 살피면서 아리송해질 때 우리는 앎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사고’라는 외부 제시물을 받아들이는 나의 변화가 그리 즉각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리 기민하게 변하지 않는 나의 기제들과 내가 이해한 인식은 왜 다른 것처럼 보이는가? 배우다 보면 앎이 생길 거라는 생각, 앎이란 배움의 구체물 혹은 축적된 정수일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 균열이 생긴다.
표상을 표상하다
소로우와 스콧 니어링을 읽었을 때 나의 마음은 이미 월든 호숫가와 버몬트 단풍나무 숲을 날았다.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난 그날로 생태주의자가 되었다. 배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난 무늬만 생태주의자인 나를 발견했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부채감 속에 허덕여야 했다. 배움이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기쁨으로 내게 오지만 나를 좌절하게 하는 슬픔으로 남곤 한다. 충분히 공감했으며 나의 신념으로 받아들인 어떤 가치가 나를 통해 순전하게 발현되지 않을 때 우린 흔히 나 자신의 용기 없음이나 게으름, 무능을 탓하곤 한다. 우리는 늘 우리가 배운 그 무엇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배움에 대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 자신과 만나게 된다. 또 하나의 나, 관찰자로서의 나는 어떤 감동이나 인식의 과정, 즉 배움을 하나의 입력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가치를 실현하는 나의 행위를 결과로 인식한다. 인간의 인지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개념은 사실 매우 보편적이며 광범위한 것이다. 외부의 사물이나 가치를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감각적인 인식과 처리과정을 통해 결과를 산출한다는 인지개념은 1943~1953년 인공지능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학문의 등장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어떤 체계에 포함되는 두 종류의 변량 중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조절하여 체계 자체를 가장 바람직스러운 상태에 도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이 개념은 이후 계산기와 자동공정, 데이터전송, 기계공학 같은 분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생체정보의 해명, 심리학, 인간공학, 학습에 관련된 이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두루 영향을 주었음에도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이 용어는 그러나 정신현상에 대한 연구를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손에서 과학자의 손으로 넘겨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 인지학 분야에서는 이에 영향을 받은 행동주의나 정보처리이론 등이 학습, 즉 앎의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는 거대 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에 대하여 입력되는 학습량만큼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지이론적 담론을 불현듯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비단 학습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행위, 교육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수업 역시 입력과 출력 관계를 의식하고 수업자와 학습자를 구분하며 교사의 가르친 총량과 학습자의 성취수준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광범위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칠레의 인지생물학자 움베르또 마뚜라나는 이러한 인과론적 인지개념이 가진 특성을 ‘표상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주요 특징들, 즉 표상들을 획득 또는 입수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먼저 표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린 하루 종일 깔고 앉아있는 많은 것들을 의자라고 자연스럽게 부른다. 두려움을 극복한 사례는 수도 없지만 이를 대략 용기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다. 우린 용기라는 것이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세상에 똑같은 의자는 한 개도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들 모두를 통칭하는 무언가를 상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표상表象이란 말 그대로 ‘겉모습’이다. 대표적인 것, 주요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언어는 대표적인 표상 덩어리다. 감각 역시 아주 쉽게 표상화 된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 느끼는 기괴함 역시 표상이다. 표상은 자연스럽다. 표상 없이 우린 말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 표상은 또한 그 겉모습 뒤에 가려진 수많은 작은 차이들을 소거하기도 한다. 표상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 표상이 대표하는 개체의 개별적인 속성들을 지워버린다. 일단 만들어진 표상은 개별 사물 또는 개별 행위라는 실재성을 상실하고 정신화 된다.
실재성을 상실한 개념으로서의 표상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단지 겉모습에 불과한 개념화된 표상만으로 나의 생각 뿐 아니라 행위 또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표상은 단지 나의 표상으로 전이될 뿐 나 전체를 바꿀 수는 없다. ‘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나의 배움과 앎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무엇인가를 조금 상상할 수 있겠다. 밝혀야 할 것은 흔히 정신+신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 안에 있다.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것은 배움이 갖는 실재성, 즉 개념의 잃어버린 짝, 신체성인 것이다. 인지과학은 생명체의 탄생과정과 생물학적 논거들을 통해 인간의 인지에 신체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다른지, 마뚜라나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움베르또 마뚜라나
잠수함 타기
신경생물학의 연구결과들을 인간의 인지과학으로 해석한 그의 색다른 접속을 통해 우리는 앎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실증적인 단서들을 얻는다. 그의 이론은 생물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개체발생의 역사 즉 신체의 영역과, 인간의 마음과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인식 즉 마음의 영역 사이에 철저한 구조적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올챙이의 눈을 간단한 수술을 통해 180° 돌려놓은 후 개구리로 자란 성체 앞에 먹잇감을 제시하면 그 개구리는 정확하게 180° 뒤에 있는 허공을 향해 혓바닥을 내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개구리는 먹잇감이라는 외부의 환경에 반응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의 생체적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보인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으로부터 그는 ‘인식’이라는 것이 외부의 대상을 전화선처럼 뇌로 연결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이후의 연구들을 통해 그는 생물과 환경이 서로 어울리면서 상호작용할 때 생물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다. 입력이 출력을 좌우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환경의 영향을 통해 생물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생물의 ‘구조’라고 한다. 우리에게 개체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존해야 하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런데 마치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는 듯 한 이 발칙한 상상은 무슨 의미인가?
그의 주장은 개체가 환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그 환경에 맞도록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적응’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개체는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개체 나름대로의 독특한 상황에 따라 그 영향을 ‘수용’한다는 사실을 그는 확인했다. 이제 그를 따라 잠수함을 타보자.
한 번도 잠수함 밖을 나가보지 않은 잠수함 조종수가 훌륭한 조종술로 잠수함을 몰아 정박지의 바다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훌륭한 조종수를 칭찬하며 그 복잡한 지형과 조류와 암초를 교묘하게 헤치고 목표지점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나 조종수는 다시 묻는다. “조류와 암초라니요? 난 그저 계기판이 보내는 다양한 신호들을 보면서 그에 맞도록 스위치를 켜거나 조종간을 당긴 것뿐인데요.” 계기판에 암초는 암초의 형태로 다가가지 않는다. 계기판에는 그저 수심, 저항, 크기, 압력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따로따로 감지될 뿐이다. 그림 같은 만과 기암괴석들은 창백한 초록색 레이더망에 비친 점멸하는 신호들일 뿐이다. 잠수함의 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외부와 관계할 때의 작동방식을 설명한다.
세포막은 하나의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이다. 경계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세포막을 통해 닫혀있는 세포처럼 모든 개체는 자신이 존재 가능한 방식을 좇아 닫힌 구조를 유지한다. 이때 개체에게 감지되는 외부란 세포막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개체의 직접적인 표상이 아니라 세포막을 통해 걸러진 혹은 수용된 ‘영향’에 불과하다. 개체는 외부와 늘 교류해야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조직 자체를 변경한 적은 없다. 자기 조직을 잃으면 역시 개체는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객체가 세포막을 통해 세포 안으로 수용될 경우 세포의 구조는 그로 인해 바뀌게 되지만 조직 자체를 변경하지는 않는다. 외부의 영향은 늘 개체의 생존과 관련되어있으며 철저하게 ‘토착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제 신체의 작동방식이 어떻게 정신화 되는 지를 보자.
개체는 자신의 조직을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을 담는 그물
신경계의 발달은 능동성을 갖춘 생명활동이 가능한 생명체의 탄생을 이끌었으며 인간의 인지활동은 그로부터 기인한다. 사람의 뇌에만 10¹¹(수천억)개의 뉴런이 있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뉴런을 전화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감각세포의 자극을 뇌로 전달하고 다시 뇌는 재빠른 연산능력으로 자극을 분석해서 적절한 명령을 운동근육에 부과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감각수용기로부터 뇌를 거쳐 운동근육에 도달하는 과정에는 수 천만 개의 감각세포와 수천억 개의 중간뉴런, 그리고 수백만 개의 운동뉴런들이 서로 얽혀있고 천문학적인 신호들을 교환한다. 거기에는 감각이 느끼는 고통과 운동근육의 수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극이 가해진 손가락 끝과 정반대에 있는 발가락 끝의 찌릿함, 머리털의 곤두섬, 순간적으로 맺힌 관자놀이의 식은 땀, “앗 따가워!”라고 내지르는 발성구조와 언어중추, 손가락을 뒤로 빼면서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유연한 대근육들의 몸놀림, 찔림과 유사한 기억들, 분노, 치료법 등 정말 셀 수 없는 연결기재들이 동시에 신호를 주고받으며 겉보기에는 참 단순한 ‘결과’를 산출한다. 인식이란 이러한 복잡하고 총체적인 온몸의 작용을 함축한다. 그럼에도 우린 ‘바늘에 찔렸다’는 사실만 받아들인다. 표상이 일어난 것이다.
표상주의적 해석은 생명체가 오랜 개체발생의 역사를 통해 축적해 온 미묘하고 복잡한 ‘생명’이라는 현상을 너무 단순화한다. 마치 대뇌에는 주조정실이 있고 다른 신경계들은 단순한 감각센서에 연결된 정밀한 선들로 단지 대뇌와 접속되어있을 뿐이라는 상상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뇌에는 명령을 내리는 ‘작은 인간’이 살지 않는다. 단지 접속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접속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그물구조로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이성을 통해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표상이란 실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환경에 대하여 우리의 뉴런들이 반응하는 익숙한 연결패턴들의 집합이다. 이 패턴들은 단순하게 연결된 한 가닥의 끈이 아니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의 다양한 상호 연결체계로 작동한다. 또한 이 패턴은 외부의 영향으로 통째로 이식될 수 없으며 오랜 시도를 통한 충분한 숙성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오류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하나의 표상이 포함하는 수많은 경험과 신체성을 잊은 채 표상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사물화 하는 것이다. 용기, 지혜, 검소함과 같은 표상들이 하나의 사물처럼 나에게로 전해지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우리 신체의 탄생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표상은 표상일뿐, 곧바로 신체화 되지 않는다
신체를 구성하는 네트워크를 바꾸어야..
몸으로 생각한다 - 지관수행止觀修行
인식이 뉴런의 연결패턴과 관계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제 앎이란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앎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새로이 구성해 내는 일이다. 용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용기를 구성하는 것, 나의 검소함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앎이다. 반 표상주의는 우리를 수동적인 학습자로부터 능동적인 관찰자 혹은 행위자로 변화시킨다. 받아들이는 것이 앎일 거라는 믿음은 역전된다. 앎이라는 거대 지류를 탐사하던 중 우리는 이 강이 본래는 거꾸로 흐를 수도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 탐험가가 된 것이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 질문은 바뀐다. 무엇이 앎을 만드는가, 혹은 구성하는가? 앎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물적 특징을 받아들이는 일과 거리가 멀다는 가정으로부터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신체화 된 인지’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이제껏 서양의 주류철학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몸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 곧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이인식, 《몸의 인지과학》 해제). 다시 말해 몸으로 생각하기. 몸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뚜라나의 제자이자 동료이기도 한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서양의 사상적 전통이 과학과 철학에 부여한 추상적 태도가 실제로는 ‘집중되지 않은 채’ 일상생활을 사는 우리의 태도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추상적 태도는 습관과 선입견으로 채워진 옷, 즉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습관적으로 거리를 두도록 만들어진 우주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마음을 일깨우고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뜻밖에도 불교의 지관수행이다. 그는 ‘집중의 명상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큰 발견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총괄적인 통찰이라기보다는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경험에 대해서도 인간은 한없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뼈에 사무치는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앎을 고쳐 쓰기 위해 우리가 처음 해야 할 일은 나의 산만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샤마타, 止는 마음을 고요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지관수행은 신비적인 고요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세속적인 실재로부터 벗어나려는 분열상태가 아니라 정신을 차리는 것, 마음이 하고 있는 바를 경험하는 것, 자신의 마음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비파샤나, 觀은 마음이 충분히 긴 시간동안 자신을 바라봄으로 해서 자신의 본성과 기능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 했다. 서양적 전통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이러한 방법이 주는 이점은 우리를 ‘경험’ 즉 몸이 하는 일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경험한다’는 무엇인가? 학교에서 많이 하는 현장학습, 체험학습, 실습, 자기주도적 학습인가? 일상적인 삶의 체험들로부터 앎이 쉽게 얻어지지 않는 이유는 ‘경험한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오류를 반증한다. 서양적 전통이 주로 착각하는 경험의 방식은 이를 이론화하고 과학화하려는 데 있다. 이렇게 될 때 경험은 실험이 되고 제도가 되며 삶은 나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된다. ‘이론적 반성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부분적인 반성만을 하고 있으며 질문은 신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클의 말을 빌리면 이 반성은 “입장이 없는 시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바렐라는 말한다. 그에 반해 반 표상주의적인 경험이란 ‘나의’ 경험을 말한다. 그래서 경험이 내 것이 되려면 습관적인 인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수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겪기 보다는 ‘새롭게 겪기’인 것이다.
경험은 다양한 체험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체화
앎이란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누구나가 자신의 앎을 구성하기 위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몸으로 겪는 일을 무조건 경험으로 볼 수는 없다. 뉴런의 작동방식을 파악하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앎이란 뉴런의 연결패턴을 바꾸는 것, 즉 기존의 습관적인 구성을 새로운 구성으로 바꾸어 내는 일이다. 표상적으로는 간단해 보이는 단순한 변화라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수많은 조연 기제들이 그물처럼 물고 물리며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단순한 경험, 반복적인 행동만으로 새로운 앎을 구성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어떻게 하면 앎을 구성할 수 있을까?
체화embodiment란 어떤 새로운 사고나 행동 방식이 오랜 훈련이나 경험을 통해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 행위에 있어 하나의 체화된 패턴은 체험 당사자의 고유한 또는 사적인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지각방식, 신체운동방식, 다른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등은 종으로서의 인간발달과정에 공유된 문화적 양상이며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온 본질적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생물체의 모든 운동은 항상 외적인 영향에 조건화되므로 모든 행위는 환경의 효과로 간주된다. 하지만 생물체가 환경의 영향을 향해 다가가려 하는 그 지점에는 생물체 나름의 이전 운동들이 있다. 오랜 개체발생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예민하게 준비되어있는 개체여야 비로소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이를 “생물체가 세계 내에서 적절한 환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생활환경’이란 생물체 의 존재 또는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로부터 창발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다가와 꽃이 된 것처럼 생물체 입장에서 환경이란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한다,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주변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나 의미를 나누는 일이다. 사진가는 아름다운 빛을 ‘본다’. 음악가는 좋은 소리를 ‘듣는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세계를 갖지 못할 때 주변 세계 역시 만날 수 없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나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움직인 범위 내에서 아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경험 없이 날 때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나의 경험, 시도, 행위들, 생각들은 처음엔 아무런 규칙도 없는 혼란스러운 활동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점차 그 스스로의 창발적 속성에 의해 내게 필요한 것의 목록을 만들어 내게 된다. 가보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모르는 여행, 그것이 체화이다.
정의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야 하므로 나의 생활 속에서 몇 가지 생활 속 명상이라는 것에 도전해 보았다.
잠수함 타고 서핑을!
이제 논의를 정리해 보자. 우리는 배우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 사이에 놓인 건너기 쉽지 않은 강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신체였다. 여기서의 신체란 경험을 통해 내가 부딪히고 만나는 소소한 삶의 편린들을 말한다. 정성을 갖고 살피는 것, 애정으로 보듬는 것, 떨리는 마음으로 시도하는 것,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 굼뜬 몸을 민활하게 움직이는 것.. 이러한 시도, 즉 삶이 곧 앎인 것이다.
배움은 표상으로 온다. 문제는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데 있다. 가령 누군가로부터 용기를 배웠다 치자. 그로부터 나도 그처럼 독재에 맞서거나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 말하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그러하지 못한 나로 인해 괴로워한다면 난 표상주의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용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우린 소소한 나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무언가에 대한 정성이나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나 나의 책무에 대한 성실함이 용기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표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있다는 자유로움, 또는 충분히 다른 길을 거쳐서도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연함. 마뚜라나는 이를 ‘표류한다’고 표현했다. 용기로부터 왜 용기만 생각해야 하는가? 용기를 배웠다는 생각, 내가 용기 있는 행위를 보이지 못했다는 판단은 표상적이다. 그건 인간의 인식이라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파생된 근거 없는 불신이자 투정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는 니체의 언명은 체험하고 반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직된 인간의식을 비판한다. 가치를 위해 우리는 얼마든지 나의 삶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가치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다양하고 넓게 주어져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한다. 내 앞엔 좁은 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광야처럼 넓거나 산맥처럼 수없는 골짜기가 패였거나 바다처럼 아무 근거도 없는 출렁임만이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앎이란 그 속에서 만나는 무수한 갈림길과 골짜기와 파도를 유영하며 각자의 루트를 개척해 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위한 자유, 사랑을 위한 사랑, 희생을 위한 희생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를 지닌다면 아쉽게도 니체로부터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보지 않은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세상은 표상으로 다가온다. 표상으로 온통 휘둘린 세계에서 객체가 실재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표상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에겐 탐구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탐구의 길은 쉬운 것이 아니어서 우린 공부를, 때론 수행을 통해 그 시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서당에 모여 배움을 나누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제 남은 일은 직접 그렇게 행위 하는 것, 살아가는 것이다. 단, 삶이 곧 앎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네비게이션을 꺼야 한다. 네비게이션은 우리가 어느 길로 가든 다시 진로를 수정해서 원래의 목표를 재탐색하고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대신 우린 지도를 펴 들어야 한다. 지도를 통해 우리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 지,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한 손에 지도를 들고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걷는 길과 지도를 계속 비교하여야 한다. 때론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해가 지면 묵어가거나 추운 겨울 동안 아예 집을 구해 살아볼 수도 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린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빠르게 도달했느냐 보다 어느 길을 걸어 어떤 사람들과 어느 골목의 풍경들을 보았는지에 감동하는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여행지로 다시 떠날 수 있다.
인간은 잠수함 밖을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잠수함 조종수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삶이라는 바다를 영원히 유영해야 하는 항해자이기도 하다. 미셸 세르는 말한다. “우리 삼류 작자들, 음유시인들, 과학탐구자들, 연가 작곡가들은 벌거벗고 바다로 나아가지. 서핑보드 말고는 아무 것도 없이..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빈약하게 찰랑거리는 물결만을 소유할 뿐이야. 액체에 새겨지는 작은 주름들을 발명하는 일을 창조행위라고들 말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발견자들은 그 주름들이 사라지기 전의 짧은 순간에 그것들을 보고, 그 다음 자신들의 눈과 몸 그리고 서핑보드의 물매를 정교하게 가다듬지. 오직 죽음과 함께 끝날 선 위로 그 주름들을 서핑하면서 앞으로 나는 듯이 미끄러지는 이 흔들리는 균형을 추구하는데 모든 생명력과 노력을 쏟아.”(미셜 세르, 천사들의 전설)
용기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닌가. 갑옷도 없이 어떠한 훈장이나 명예로운 제복도 없이 단지 맨몸으로 삶의 파도에 맞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 나의 삶의 길을 찾아내는 것. 단지 우리는 맨몸이 아니라 잠수함을 타고 있을 뿐이다.
첫댓글 마뚜라나의 '앎의 나무' 는 세미나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제가 정확히 이해를 못해서리.....하고 싶은 샘들 한번 모여서 공부하면 어떨까요? 신수동샘이 도와주시면 좋고.
난 신수동샘글이 그림을 보는 느낌(?)이들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