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비시민운동가를 자청하며 10여년간 군산지역 서민들의 민원해결사로 나선 류용씨(57). 지역민의 어려운 문제를 위해서는 어디든 달려가는 류씨는 직장과 사회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주민들의 불편한 점이나 시정해야 될 일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계기관에 민원을 신청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주민들의 민원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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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시민운동가 류씨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달리고 있는 사랑스런 애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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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어린시절, 세상을 원망하다
1954년 3월 10일 군산에서 태어난 류용씨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익산 원불교재단에 맡겨지게 됐다. 한창 어머니의 사랑과 손길을 필요로 한 때였지만 류씨는 따뜻한 어머니 품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자랐다.
3학년이 될 때까지 익산북일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는 또래들과 같이 군산애육원으로 옮겨지면서 군산서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졸업을 했다. 이어 군산영명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류씨는 주위의 소개로 군산 죽성동 한 판유리집에서 기술을 연마하게 된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린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를 맞이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눈시울을 적셨다.
◇군 입대와 인생 역전, 세상을 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세상과 싸우던 류씨는 장미동 군산정판사 인쇄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했다. 그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생활하던 중 갑자기 군 입대 통지를 받게 된다.
군 입대는 그동안 세상만 원망하던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군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운전을 배운 그는 결국 면허증을 취득하게 됐고 1978년 육군 현역만기 병장으로 제대를 했다.
류씨는 “군 생활을 하면서 일년이면 수차례 휴가를 받아 고향 군산에 내려왔지만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결국 애육원에서 쉬었다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운전면허증이란 큰 선물을 얻었으니까요…”라며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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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민들의 크고 작은 민원과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류씨가 그동안 제출한 수천건의 민원서류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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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다
군대를 제대한 류씨는 군에서 취득한 운전면허증으로 국제건재에서 덤프운전을 하다가 1981년 대한통운 기능직에 입사를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화물차 운전을 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려던 그의 꿈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평소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동자편에서 바른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기능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근무지는 수시로 바뀌었다.
1983년 전주로 발령 난 후, 이어 1985년 강원도 원주지점으로 옮겨졌다. 또 2년 뒤 1987년에 전주지점으로 다시 발령이 났으며, 1994년에는 경남 울산지사로 발령 난 후 6년을 근무하면서도 군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소만은 옮기지 않았다.
류씨는 “숱한 고생 끝에 부푼 꿈을 안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꾸렸는데, 너무 자주 발령이 나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게 되고 다시 혼자가 됐습니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려던 인생이 무참히 깨어졌습니다”고 원망 섞인 말을 이었다.
대한통운 징계해고 후 홀로 법정싸움을 하던 그는 3년간 힘겨운 싸움을 벌였지만 대기업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이어 그는 2000년에 군산개정병원에 입사했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임금체불과 경영악화로 병원은 폐업을 하게 됐다.
그때 당시에도 그는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군산시민 1만7,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제출하는 등 예산확보를 통해 병원을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쏟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현대판 돈키호테 나홀로 비시민운동가
서민들의 손과 발이 돼 주기 위해 2002년부터 나홀로 비시민운동가를 자청하며 민원해결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는 공공기관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불릴 정도로 무서운(?) 존재가 돼 버렸다.
그는 바다지킴이 명예감시원을 비롯해 농·수산물 명예감시원, 환경청 명예감시원, 전북호남환경감시단 등 각종 감시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며 이를 개선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에 그동안 그가 제기한 민원만도 2,000여건에 이르며, 정부기관 등에 제출한 정책제안도 1,000여건을 훌쩍 넘는다. 이 가운데 해결된 크고 작은 민원은 500여건에 이를 정도이며, 현재 진행 중인 민원도 500여건이 될 정도다. 이러한 공로로 그동안 기관 표창과 감사장 등 수상실적도 상당하다.
그는 “지역민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시의원들은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민원청취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나는 사비를 들여가며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고,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많이 알려져서 그런지, 민원제보가 너무 많아 현재 하던 일도 휴직한 상태입니다”고 말했다.
◇희망을 쏘아 올리는 작은 공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은 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약자들을 도와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지속적인 희망을 나눠주고 싶습니다”며 류씨는 소박한 계획을 털어놨다.
서민들의 억울한 사연이나 불편한 사항이 있는 곳엔 항상 그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그가 가지 않는 곳은 없다. 시청, 경찰서, 우체국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대기업, 개인회사 등 민원해결을 위해서는 어디든 달려간다.
그는 “앞으로도 사회에 봉사하면서 환원하는 마음으로 서민과 저소득층, 소외계층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주위에서는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종종 묻는데,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 내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고 있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기현 기자 sisando@sjbnews.com
△류용씨는
1954년 3월 10일 군산태생으로 1965년 군산서초교를 졸업했으며, 이어 1971년 군산영명중학교를 졸업했다. 1978년 육군 현역만기 병장 제대 후 1981년 대한통운 기능직(운전)에 입사했다. 1985년 한국노총 간부 역임과 대한통운 대책추진위간부를 역임했으며, 1996년 군산개정병원 군무 중 민주노총 보건의료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2000년부터 나홀로 비시민운동가를 자청하며 본격적으로 환경 및 농수산물원산지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수상으로는 1977년 근복무중 대대장 표창을 비롯해 1989년 대한통운 근무중 동아그룹 회장 최우수 모범표창, 1988년 민주노총본부장 표창, 2008년 전북도지사 친환경대상 표창, 2010년 군산경찰서장과 군산시장 표창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