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6
♣해회성현
고찰 내불사는 하남성 사기현 요량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수당隋唐 연간에 상책진羊冊鎭에 사는 곡물상 주인 왕王거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소달구지를 몰고서 원담진源潭鎭에 곡물을 팔러 가는 도중에 노인 세 분을 만나 그 노인들을 수레에 태우고 함께 갔습니다. 가다가 보니 깊은 밤이 되어 길 옆에 소달구지를 세워놓고는 쉬었습니다. 그 다음 날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이 되었을 때, 뜻밖에도 이 세 분의 노인이 이미 세 분의 돌부처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들이 즉시 그 자리에 도량을 세운 후, 이름을 “내불사來佛寺”라고 지었으며, 바로 “불타의 화신이 이곳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 진 鎭 : 중국 縣 아래의 행정구획 단위
여러 차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천을 거치고, 또 여러 차례 강산의 주인이 바뀜으로 인해, 그 당시에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전각은 지금은 모두 태허太虛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공문空門은 영락하였지만, 다행히 기쁘게도 정법正法은 오히려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옛날 말에 “산은 높은 곳에 있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성이 있게 되고, 물은 깊은 곳에 있지 않아도 용이 살면 신령스런 기운이 있게 된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시골 들판 황량한 이 암자에서 오히려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신통력을 지니신 두 분의 승려, 바로 육신보살肉身菩薩이신 해경海慶법사와 112세에 자재하게 왕생하신 해현海賢노화상을 성취하였습니다.
(주) 공문 : 불교를 말함
♣ 부록: 육신보살 해경법사의 간략한 전기
해경화상
스승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부귀富貴이십니다. 스승의 선조는 예동(豫東: 하남성 동부)의 남쪽 필양현泌陽縣에 사셨습니다. 청나라 말기 선통 원년(1909년)에 태어나셨으며, 집안이 빈천하여 글자를 익히거나 《주역》, 《서경》, 《시경》, 《춘추》, 예禮, 악樂 등 시서육예詩書六藝를 배운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후덕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럽고 예의를 알았습니다. 11살 때에 삼보에 귀의하여 완동宛東 나한산羅漢山 청량사清涼寺 전동傳東법사에게 예를 올리니, 전동법사가 그를 위해 머리를 깎아주고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해경海慶”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스승은 42세 때에 래불사에 들어가 상주常住하셨습니다. 오로지 정토법문만을 닦으셨으며, 성실하게 염불하셨습니다. 1989년에는 백마사에 가서 구족계를 증수增受하셨습니다. 1991년 음력 12월 11일에 스승은 담소하시면서 원적하셨으며, 서방 극락세계에 자재하게 왕생하셨습니다. 세수는 82세이고, 승랍은 71세이셨습니다.
스승이 수항壽缸에 앉아 계신 지 6년 9개월이 지난 후, 그의 사형인 해현노화상은 스승을 위해 다비를 하여 탑에 봉안하고자 발심하였습니다. 스승이 앉아 계시던 항아리를 열자, 대중들은 모두 다 놀라며 찬탄하였습니다! 오로지 경공께서 가부좌를 한 채 똑바로 앉아 계시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며, 얼굴과 모습은 마치 살아 계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입고 계셨던 옷가지 역시 전혀 손상된 곳이 없었습니다. 사부대중이 금강법체金剛法體이며, 전신사리全身舍利인 것을 알고서 곧 스승의 법체를 모셔다 절 안에서 공양하고, 조석으로 예배하였습니다. 2005년에는 광주廣州 지역의 대덕인 이원첨李元添거사가 경공의 성스러운 사적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더욱 더 공경하고 앙모하여, 이에 스승을 위해 금박을 입혀서 공양할 것을 발심하였습니다.
(주) 금강법체 : 승려의 몸에 대한 경칭敬稱
경공의 생평을 처음 접하고서 읽을 때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한 마디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 이외에 이야기할 만한 특별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자세히 음미하면, “한 법문에만 깊이 들어가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배이도록 닦으셨으니”(一門深入, 長時薰修), 이것이 어찌 스승께서 암암리에 도道의 미묘한 곳에 계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깨달아야 “대도는 지극히 간단하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大道至簡, 生佛不二), “염불이 인이고, 성불이 과이다.”(念佛是因, 成佛是果)라는 것을 비로소 믿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러할 뿐입니다. 지금 정토법문을 공부하는 어떤 한 학인(淨業學人)이 스승을 위해 찬탄하며 지은 게송이 있습니다.
한 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는 법 중의 왕이나니, 70년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셨네. (一句彌陀法中王, 七十年來心中藏)
선종의 이치를 참구하지도 않고 교하의 이론을 연구하지도 않았으며, 경문과 주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해서 또한 무슨 상관이 있으랴! (不參禪理不研教, 不解經咒又何妨!)
믿음이 깊고 원이 간절하여 끊임없이 계속해서 염불하니, 극락국토에 자연히 꽃이 폈도다. (信深願切直念去, 自然花開極樂邦.)
이곳에 금강의 무너지지 않은 법체 남기시고, 증명의 법륜을 굴리어 미혹한 중생 제도하시네. (留此金剛不壞體, 證轉法輪度迷茫.)
부처님 머리 낮게 늘어뜨린 곳 자세히 관찰하니, 마치 육조대사가 자비의 배를 타신 것과 같네. (細觀佛首低垂處, 恰似六祖駕慈航)
(주) 부처님 : 해경화상을 가리킴.
지금 연화대 아래에서 스승께 저희를 인도하여 미몽의 땅에서 벗어나도록 구해주시기를 지성으로 기도하네. (今虔祈禱蓮台下, 求師引我出夢鄉.)
2013년 1월 23일, 음력 임신년 12월 오전, 사람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시골마을의 이 작은 절 래불사 앞에 산개傘蓋가 빽빽하게 늘어섰고, 당번幢幡이 하늘 높이 솟았으며, 남양과 전국 각지의 3천 명이 넘는 정종학인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였으며, 모두가 더없는 지극한 공경의 마음을 품고서 해현노화상의 사리탑봉안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주) 남양 : 하남성 남서부에 있는 도시
112세의 해현노화상은 2013년 1월 17일, 음력 임신년 12월 6일 새벽에 아무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적멸을 보이셨습니다(示寂). 노화상의 초탈하고 자재하신 왕생은 이를 보고 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지없이 찬탄하고 앙모하게 하였습니다.
(주) 示寂 : 바로 원적圓寂이며,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시적示寂”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장로長老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신 보살이며, 우리의 이 세간에서 시현示現하시고, “원적圓寂”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해현노화상의 제자이신 인지印志법사, 인함印涵법사, 인공印空법사, 인영印榮법사, 인보印寶법사 등은 노화상의 왕생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서 달려온 사부대중 제자들을 이끌고서 노화상을 위해 7일 동안 영전을 지켰으며, 염불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노화상이 원적하신 후 3일째 되는 날, 급히 막 도착한 한 제자가 왕생피往生被를 걷어 올리고서 노화상의 얼굴을 우러러보다가 놀랍게도 “노화상께서 얼굴은 미소를 띠고 계시고, 입술은 발그스름하고, 희었던 눈썹과 수염과 머리카락은 뜻밖에도 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수십 명의 정종학인들은 또 다시 한번 “아미타불”의 원력이 불가사의함을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전통적인 불교의 장례의식에 따라 사부대중 제자들이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장엄한 소리 속에서 해현노화상의 법체法體는 항아리 속에서 가부좌를 한 채 래불사의 탑원塔院에 봉안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종의 도사導師이시고 덕망이 높으신 정공淨空노법사는 해현노화상께서 자재하게 왕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크게 찬탄하시면서 정종의 사부대중 제자들에게 “해현노화상을 배울 것”을 호소하셨으며, 또한 노화상을 위해 친히 만련挽聯과 비명碑銘을 쓰셨습니다.
(주) 만련 :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기 위해 쓴 대련
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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